'토리와 로키타' 다르덴 형제가 보여준 암담한 현실
'토리와 로키타' 다르덴 형제가 보여준 암담한 현실
  • 박정수
  • 승인 2023.05.15 11: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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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가 잘라낸 삶을 사랑으로 이어붙이기"

지난해 칸 영화제가 영광스러운 75주년을 맞아 신설한 '75주년 특별상'은 <토리와 로키타>를 연출한 다르덴 형제가 수상했다. 칸 영화제는 <토리와 로키타>에 75주년 특별상을 수여함으로써 서구의 '반성'을 택했다. 이는 서구 백인의 여전한 만행인 식민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로 진입을 희망한 수상이었다. 칸 영화제가 다르덴 형제에게 부여한 75주년에 환기한 가치는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1951년 엔지스 태생의 장 피에르 다르덴과 1954년 플레말 아위어스 출생의 뤽 다르덴은 형제가 팀을 이뤄 공동 연출하는 벨기에의 영화감독이다. 이들은 온 일생을 바쳐 자신들이 속한 서구 사회를 비판해왔다. 초기 다큐멘터리에는 서구 사회의 약자인 노동자, 난민, 유색인종이 겪는 현실을 기록하였고, 이를 자양분삼아 1996년 <약속>으로 시작해 픽션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한 이후에도 약자의 삶을 증언하였다. 다르덴 형제는 '자본과 서류로 인간을 대체하는 현대 사회'를 우려하였고, 그럼에도 대체되어선 안 되는 인간성, 다름 아닌 사랑과 우애, 양심의 회복을 촉구하였다.

 

ⓒ 영화사 진진

<토리와 로키타>는 고정된 카메라가 이민국 공무원과 면담하는 '로키타'(졸리 음분두)의 얼굴을 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메룬 출신의 로키타는 베냉 태생이라고 말을 꾸민다. 심지어 유럽행 배에서 만난 '토리'(파블로 실스)는 어렸을 때 헤어져서 보육원에서 재회한 동생으로 둔갑되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어머니는 토리를 낳자마자 사망한 것으로 왜곡된다. 로키타는 분명 카메룬에서의 삶을 기억하고, 심지어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서류가 통과되기 위해서 카메룬에서의 진짜 삶은 기억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은 그녀의 서류를 검사하는 공무원뿐만 아니라 관객에게까지도 '보고 들리지' 않아야 한다. 다르덴 형제는 아이들의 밀항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고, 아프리카를 직접 비추지도 않는다. 백인들과 감상자의 난민 인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비춘다. 이 순간 우리가 아는 것은 백인이 요구하는 서류(메뉴얼)에 의한, 서류 발급의 자격을 갖춘 '토리와 로키타'이다. 가짜 난민의 서사가 그들의 진실를 꿰찬다. 이후 경찰에게 검문당하거나, 토리가 보육원 직원에게 둘러대는 말 모두 진실과 무관하다. 오직 내지인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보고 듣기 좋은 꾸며진 거짓뿐이다.

이렇듯 '흑인'인 토리와 로키타는 '백인'에 의해서, '아이'인 이들은 브로커나 부모 등 '어른'에 의해서 허위로 꾸며진다. 백인·어른이 만들어 낸 토리와 로키타를 다르덴 형제는 '롱테이크'로 길게 포착한다. 롱테이크는 컷이 잦은 숏과 달리, '잘림이 없는 실제의 시간'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기에, '리얼리즘'에 충실한 연출의 전형이다. 현실을 담아낸 것이라 믿는 연출에 '허위로 만들어진 남매'를 담는다. 이들에게 혈연관계를 증명하는 서류 증빙, 브로커에게 진 빚을 갚기, 듣기 좋은 노래를 불러주기, 신분증을 내놓기, 대마 거래 및 재배, 성 착취를 고분고분 이행하는 난민이라는 사실만이 '현실'이다.

백인·어른들이 요구하는 거짓말을 충실히 이행하는 남매는 그들의 시선 아래서 클로즈업으로 붙잡힌다. 토리와 로키타는 살아남기 위해 위해 백인·어른들이 특정한 모습으로 가두는 카메라에서 멀어지고 프레임 바깥으로 달아난다. 이들이 달아나기 위해 헐레벌떡 질주할 때, 이들을 담는 카메라도 핸드 헬드로 함께 흔들린다. 백인·어른들은 로키타의 감정을 외면한다. 토리는 영화 내내 카시트, 로키타의 침대 밑, 풀숲에서 '숨길 수 없는 숨결'을 숨긴다. 비로소 백인과 어른들의 시선에서 달아날 때, 은닉된 숨결과 감격스러운 헐떡거림이 되돌아오고, 이를 시각적으로 가시화한 핸드 헬드를 동원한다. 물론, 롱테이크에 담긴 남매의 모습이 전부 허위는 아니다. 백인·어른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남매'가 달아나지 못하게 롱테이크로 붙잡기에 '컷'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토리와 로키타도 컷하고 싶지 않은 것, 영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것을 롱테이크한다.

토리를 걱정하는 로키타의 마음과 노래를 부를 때 두 사람이 애틋한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에서 비춘 서로가 곁에서 '길게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롱테이크는 이중적이다.

 

ⓒ 영화사 진진

반면 영화의 컷은 연속하고 싶은 마음을 '자르고' 단절한다. 보육원에서 토리를 호출한다. 백인이 부르는 공간으로 그가 진입할 때마다 컷이 발생한다. 이때, 누나와 자유롭게 머물던 '토리 자신'이 아니라 '백인의 호출에 의한 토리'가 된다. 홀에서 노래를 부르고, 이후 베팀에게 가는 장면에서도 컷이 발생한다. 손님들에 의한 '가수 남매'는 잘리고, 베팀에 의한 '마약밀매상'이 새롭게 덧붙여진다. 대마초 재배지로 옮겨진 로키타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고 말해선 안 되는 공간, 인간의 '식수'보다 대마초 재배를 위한 '농업용수'가 우선인 공간에서, 로키타가 각 방으로 진입할 때마다 영화는 컷을 한다. 이전 공간에서의 기존 삶과 단절된다는 듯이, 새로운 공간의 규칙만을 충실히 따르는 로키타를 담는다. 영화가 컷을 함으로써 로키타가 영속하고 싶은 토리와의 삶이 단절된다. 또 로키타는 돈을 주겠다는 베팀의 제안으로 두 차례 성 착취를 당한다. 베팀의 더러운 제안은 당연히 로키타가 원치 않지만, 가족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서 억지로 해야만 한다.

다르덴 형제는 로키타가 성 착취를 당하는 암시만 남기고 재빨리 컷하여, 과정을 적나라하게 비추지 않는다. 윤리적인 배려일 수도 있겠지만, 이와 동시에 베팀의 권력형 성범죄, 가족을 위해서 주체적인 로키타 자신이 '잘리고 단절'됨을 암시한다. 컷은 영화 속 핸드폰이나 유심칩을 빼앗기는 상황과도 연관한다. 핸드폰은 토리와 로키타를 연결하고, 벨기에의 로키타가 카메룬의 가족과 끈을 잇는, 즉 난민들의 진실을 매개하고 이어내는 수단이다. 그런데 휴대폰이나 유심칩을 빼앗김으로써 진실을 이어낼 수 있는 상대와 '컷'된다. 서로를 남매로서 소중하게 연결하는 로키타와 토리, 그러나 각자 출신도, 피도 다르다. 벨기에에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모의로 남매가 되었다. 하지만 토리와 로키타가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만은 진실이다.

왜 토리와 로키타는 그토록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까. 두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이, 자신에게 상대가 있는 관계이다. 토리는 공황 발작을 앓는 로키타에게 약을 챙겨주며 성심성의껏 살핀다. '특정 모습의 로키타'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로키타'를 그림으로 보존한다. 대마초 재배지에 갇힌 로키타를 대신해서 카메룬에 돈을 송금한다. 베팀에 의해 로키타의 발목이 꺾여서 함께 도망치기 어려워져도 상대의 목숨이 나와 같은 듯 썰매를 타며 연대한다. 로키타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희생해서 토리가 브로커에게 빚을 갚지 않도록 하고,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만든다. 또 토리가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혼자 히치하이크하며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서로를 그저 맹목적으로 소중히 품는 사랑이 남매의 삶을 보존하며, 이로써 순수한 롱테이크, 생동감 넘치는 핸드 헬드도 유지된다.

 

ⓒ 영화사 진진

하지만 남매는 분단되며 진실 또한 항구적으로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을 갈라놓는 건 바로 '돈'이다.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를 통해서, 경건한 시네아스트로 불리며 일평생 자본주의를 비판해 온 로베르 브레송에게 경의를 표하는 듯하다. 로키타가 끝없이 착취당하는 작품의 내용이 브레송의 <무쉐뜨>(1967)나 <당나귀 발타자르>(1966)를 연상케 하고,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디렉팅에서 브레송의 색채가 느껴진다. <토리와 로키타>는 다르덴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디렉팅이 매우 딱딱하다. 백인에게서 서류를 발급받고 돈을 벌기 위해서, 로키타와 토리의 입은 백인 자본이 원하는 대사를 무미건조하게 읊기만 할 뿐이다. 그들이 지시한 행동을 기계처럼 뻣뻣하게 몸에 옮긴다. 인간이 자본주의의 기계로 전락한 야만적인 현실을, 삭막하고 무감한 디렉팅으로 표현한 감독이 바로 브레송이었다. 다르덴 형제는 브레송의 디렉팅을 빌려오며 2020년대에도 여전히 인간을 쥐어짜는 자본주의의 야만을 경고한다. 또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나 <돈>(1983)에서 얼굴이 아닌 '손과 손', '손에 쥔 돈이나 사물'로 연결되는 '편집'도 자본주의를 반영한 그의 기념비적 연출 중 하나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발걸음을 결정하는 '역전된 운동'을 가시화하는데, <토리와 로키타>에서도 마약과 돈을 주고받는 손들에 의해서 이동과 공간이 결정된다.

다르덴 형제는 브레송의 유산을 빌려오며 난민들의 얼굴, 손, 다리 등 모든 것을 '자본'이 규정하는 오늘날을 비춘다. 카메룬의 어머니는 돈이 덜 입금되자 로키타의 횡령을 의심한다. 빚을 갚지 못한 로키타는 목숨을 위협당한다. 돈의 정량이 딱 맞아야지만 로키타는 존재할 수 있다. 돈이 토리와 로키타가 부르는 노래 또한 결정한다. 영화에서 남매는 총 세 가지 노래를 부른다. 두 곡은 손님들이 모인 식당에서, 다른 한 곡은 남매만 있는 사적 공간에서 부른다. 전자는 백인 손님들이 듣길 원하는 노래로, 남매는 시칠리아에서 벨기에로 넘어올 당시 '파올라'라는 주민이 가르쳐준 노래를 부른다. 백인들은 난민의 감동적인 수난사를 원했다는 듯이, 또 그들을 구원해 준 백인 이야기에 감격했다는 듯 남매의 노래에 만족한다. 시칠리아에서 배운 노래는 로키타를 '호출'하는 전화벨이기도 한다. 영화 속 호출은 남매에게 교회 방문 및 빚 갚기, 대마초 재배, 서류 요구 등 특정한 모습을 주문하고, 이들은 그렇게 보여야만 한다.

 

ⓒ 영화사 진진

하지만 다르덴 형제는 오늘날까지 반복되는 브레송의 형식을 조금이나마 파기한다.

토리와 로키타는 백인·어른 앞에서는 조금의 감정도 노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끼리 있을 때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역동적인 디렉팅이 허용된다. 서로를 통해 망각된 감정을 회복하며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 또한 마찬가지다. 백인 손님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는 영화에서 '번역'이 된다. 그러나 남매만 아는 고향 노래는 번역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 위한 노래가 아니라는 듯, 오직 남매의 감정만을 표현하기 위한 노래라는 듯.

백인은 난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착취하는 '공장'과도 같은 장소를 구축하고, 백인에 의해 공장으로 '옮겨진' 난민은 '기계'처럼 전락한다. 난민은 백인의 지시를 묵묵히 이행해야하는 반면, 기계로 전락한 난민이 백인·어른에게 울부짖는 호소는 항상 무기력하다. 밀실에 격리될 로키타가 토리를 만나게 해달라고, 정 안 되면 통화라도 허용해달라고 부르짖는 호소는 대부분 거절당한다. 토리가 공무원에게 왜 누나에게 허가증을 내어주지 않느냐고, 자신은 누나 없이 살 수 없다고 간청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백인에 의한 난민은 잘 보이는 반면, 난민의 요구를 듣는 백인은 프레임 밖으로 교활하게 빠져나가며 보이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가 <토리와 로키타>에서 보여준 시도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작품보다 더 암담하다. 난민들은 백인의 공간을 탈출하고 역으로 규정하더라도, 결국에는 생존을 위해서 더러운 돈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백인의 세계로 되돌아가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백인이 원하지 않는 '반항하는 로키타'는 살해당한다. 로키타의 장례식에서 토리는 누나와의 고향 노래를 부르지만, 정작 그 이후 크레딧에서는 시칠리아에서 배운 노래가 흘러나온다. 소년은 자신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멈추고, 백인·어른에 의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듯.

서류 없는 난민은 사라지고, 서류가 있는 난민이라 할지라도 백인과 자본이 미래가 규정한다. 어째서 이토록 비정하고 부질없을까. 다르덴 형제의 그간 작품에서 인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선 백인 성인이 주인공이거나, 유색인종이나 아이들 곁엔 우호적인 백인이 있어야 했다. 이 영화에서도 토리와 로키타의 곁에 보호소의 친절한 백인 나디아가 있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돈이나 허가증까진 수여할 수 없다. 힘 있는 백인은 착취하는 반면, 연대하는 백인은 힘이 없다.

결국, 영화는 난민의 고립된 몸부림, 착취 그리고 허망한 죽음으로 끝난다. 그들에게 상을 건넨 힘 있는 백인들, 그러나 그 수상이 비단 자신들의 도덕성을 빛내기 위한 선택으로 그쳐선 안 된다. 그것은 분명 그들과 연대하기 위해 건넨 손이어야 할 것이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 영화사 진진

토리와 로키타
Tori and Lokita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
Jean Pierre Dardenne
뤽 다르덴Luc Dardenne

 

출연
파블로 실스
Pablo Schils
졸리 음분두Joely Mbundu
샤를로테 데 브뤼네Charlotte De Bruyne
타이멘 고바에트Tijmen Govaerts
마크 진가Marc Zinga
알반 우카이Alban Ukaj

 

배급|수입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8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5.10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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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과송 2023-05-19 10:44:23
잘리고 나누는 컷을 지적한 부분과 해석되지 않는 고향노랫말을 언급하신 부분에서 통찰을 봤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