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 TV+] '더 브릿지' 연결되는 몸짓에 대하여
[Apple TV+] '더 브릿지' 연결되는 몸짓에 대하여
  • 변해빈
  • 승인 2023.05.1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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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고 방황하는 몸이 내면의 언어가 될 때"

<더 브릿지>는 오래전 터전을 떠났던 이가 다시 그 터전에서 떠남을 예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제폭탄 폭파 사고 후 집으로 돌아가는 군인 '린지'(제니퍼 로렌스)의 여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그녀의 뒷모습, 어디론가 이동하기 직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의 앞 시야는 초점이 빗나가있고 고개는 뒤편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거동이 어려워진 린지는 현재 재활을 위해 불가피하게 군부대를 떠나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과 정신은 가야 하는 앞이 아닌 '뒤'에 남아 있다. 그녀는 언제가 될지 모를 군부대로의 복귀를 예정한, 자기 미래를 앞서서 이곳에 남겨둔 자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린지는 '되돌아가지 못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이 살았던 집, 터전으로 온전히 되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필사적으로 터전에 남기를 거부하는 존재이다. 그녀가 머물러야 할 그 집은 '과거', 엄마 '글로리아'(린다 에먼드)만이 남은 곳이기 때문이다.

<더 브릿지>의 전반부는 이러한 '떠남'과 '남음'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그려낸다. 재활치료사 '샤론'(제인 하우디쉘)의 집에 거처하는 동안 린지의 생활은 굳은 근육과 신경의 움직임처럼 느리고 고요하지만, 비교적 원만하게 흐르는 시간의 경과를 받아들인 샷들의 연결로 구성된다. 한편, 그녀가 샤론의 집을 떠나 자기 집으로 향하는 장면은 앞의 과정에 견줄 만큼 길고 세세하게 묘사된다.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이동하는 과정, 심지어 집에 도착한 뒤에도 그녀는 문 앞에서 가로막히거나 방과 방 사이를 오가고, 한참을 서성이며 몸을 한 장소에 정착시키기를 보류한다. 이는 몸의 작동이 더뎌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무언가를 거부하고 불안해하는 문제다. 

 

ⓒ Apple TV+

이쯤에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영화가 이때까지 린지의 이동에 얽힌 어떠한 내막을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관리되지 않은 집의 광경으로 엄마 역시 누군가와 함께할 준비가 멀었음을 보여주는 식이다.

린지가 군인이며 폭파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러한 이야기를 필수적으로 나눌 누군가, 예컨대 고용인이나 의사가 등장한 뒤에야 알려진다. 해당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전해 들은 엄마와는 이에 관해 대화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이 외에 어떠한 이야기조차 나누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회한 린지와 엄마는 밤과 실내의 어둠 속에서 섣부른 변명과 다음을 기약하는 대화로 같은 장소에 공존하는 시간을 감축하려 애쓴다. 모녀의 현재는 물리적인 공간, 공유하지 못하는 시간성 내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서만 유지된다. 이 불화를 풀려면 마약 복용과 유통으로 수감된 오빠의 이야기를 경유해야 하지만, 둘은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사실상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 공백이 이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가망인 양 어떤 사실은 묵시적으로 남는다.

 

'강한 연결'이 말하는 것

누군가와의 연결을 거부하는 린지와 달리 영화에는 필연적으로, 특히 강력하게 연결되는 무언가 있다. 바로 몸과 마음, 트라우마와 후천적인 심리 반응,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의 상관성'이다. 린지는 군 복귀이자 더 분명하게는 과거의 흔적을 지닌 누군가와의 연을 끊어내기 위해 몸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중요한 건 무언가의 '연결'이다. <더 브릿지>는 물리적인 몸의 반응과 연관된 내재적이고 가상적인 심신(心神)의 발현 간 끊어낼 수 없는 연결성,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 연결의 필요성과 연결되기의 어려움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다.

 

ⓒ Apple TV+

다치고 무너진 자아의 몸은 투명하고 진실한 내면의 언어이다. 그런데 린지가 군 복귀를 위한 면제서 발급을 요청하던 장면에서 의사는 준비되어야 하는 건 "우리 모두 다"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 다'에 해당하는 범주는 개인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타인과의 관계성에 해당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녀의 과거로까지 펼쳐진다. 즉, 현재의 그녀가 겪는 각종 심신의 문제는 군부대에서의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그녀의 떠남의 이유, 곧 가족이라는 터전이 와해된 이후의 상실감과 도의적 죄책감에 연결된 문제다.

여기서 연결을 자세히 논하기 위해선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몇 개의 대화를 말해야 한다. 오랜 기간 방치된 트럭을 몰던 린지는 자동차 정비사 '제임스'(브라이언 타이리 헨리)의 도움을 받은 뒤 그와 친교를 쌓아간다. 두 사람에겐 두 번의 긴 대화가 있는데, 먼저 야간 벤치에서 제임스의 집으로 이어지는 시퀀스로, 둘의 과거사 중 가족과의 이별과 상실에 관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제임스는 여동생과 조카를 태운 자동차를 운전하던 중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으며 그 여파로 파혼했다. 린지는 약품을 제조해 마신 뒤 폐가 타들어 간 오빠에 관한 사고와 군대에서의 폭파 사고를 연달아 고백한다. 술과 약의 기운을 빌어 오가는 둘의 말과 말 사이 발생한 '적막'은 애도와 제의의 행위로서의 침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위 대화에는 (비)의도적인 어긋남이 개입되어 있다. 린지와 제임스의 '침묵'은 죽은 자들을 기리는 숭고함의 차원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해결해야 하는 지난한 공백으로 변주된다. 모녀 사이의 공백이 시간의 자장 안에서 쌓아온 앎에 의한 묵언으로 생기는 문제라면, 접점이 거의 없던 두 사람은 '무언가'를 말해서 오히려 공백이 발생한 경우다.

영화 후반부, 수영장 장면에서 린지의 오빠는 죽은 것이 아닌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며, 제임스의 조카는 그의 음주운전으로 죽은 사실이 정정된다. 이 같은 중요한 사실이 보류된 까닭은 각 인물이 자신의 문제에 극도로 침잠된 터, 내면에 고립된 상태로 말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우선, 제임스는 죽음의 흔적이 몸의 일부가 된 상태다. 절단된 그의 다리는 그것 자체로 상실의 상흔이면서 죄의식의 징표다. 그의 과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무 많이 드러나 있다. 그는 다리가 불편하단 이유로 받는 연민보다 죄의 대가로 받은 형벌로써 제 육신의 결함이 괴로우며, 이런 사실을 두려워한다.

제임스는 린지가 오빠를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듯 과거형'으로 말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죽음은 당면한 현재이자 걸음걸음마다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린지는 눈앞에 없는 존재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은) 그런 느낌일 수 있다"고 반박한다. 이 또한 그녀가 자신의 과거에 극도로 침잠해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반면에 린지는 제임스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부터 상대의 느슨한 말 사이의 관계성까지 요목조목 따져가며 타인이 정확히 말하지 않은 사실들을 미리 짐작한다. 린지는 타인이 하기 힘든 말을 멈추게 함으로써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고 믿는 쪽이다.

 

ⓒ Apple TV+

반면에 제임스가 린지의 오빠의 죽음을 상정한 데에는, 이것이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순간에 반영이 됐기 때문이다. 벤치 장면에서 그녀는 오빠의 사고와 군대에서의 사고를 너무 밀접하게 맞붙여 전달한 탓에, 두 사건을 분리할 필요한 틈을 외려 제거해 버린다. 물론 극 중 간간이 드러났다시피, 뇌 손상에 의해 매끄럽지 않은 인식의 작용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기억력이 감퇴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으로 넘겨 보내야 할 기억에 골몰하여 발생하는 쪽이다. 바깥의 타인을 향한 말하기가 아닌 흡사 자기 내면과 나누는 독백에 가까운 탓에 이야기에 틈이 벌어진 것이다.

밤과 낮을 알리는 샷이 바로 잇따라 배치되고 린지가 몽롱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곤 하는 샷들은 그녀의 시간감이 오직 제 감각에 따른 반응으로 진행됨을 보여준다. 특정 사건이 있었던 과거의 시간계 안에 붙잡힌다는 것은 삶이 허구적으로 느껴지는 문제와 같다. 영화에는 어떠한 가상적 장치도 개연적 흐름을 뒤섞는 구성도 없지만, 사건 전과 후의 자아를 절합하는 과정에서의 침잠의 몸짓으로 다른 질서의 리듬을 만들어 낸다. 그녀의 언행이 '느낌'에 기울어 있고, 현실감으로부터 도피한다는 인상이 짙은 이유다.

이와 연관해 의사가 의료용 기록 외, 린지가 직접 폭탄 사고 당시를 말하길 요구하던 장면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그녀가 당시를 회상해 구술하는 전체를 끊어내지 않고 롱테이크 촬영해 보여준다. 그동안 화면은 그녀를 향해 서서히 줌인한다. 우리가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린 속도이지만, 해당 샷의 처음과 끝을 나란히 두고 보면 그 변화는 확연하다. 주어진 말을 하는 동안 린지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에 올라타고, 그것으로 말이 가리키는 내용물은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비범한 불행은 털어놓는 순간 우리가 아는 사실 중 일부가 된다.

<더 브릿지>는 과거를 현재로 소환한다기보단 과거를 과거의 자리로 매개하여 과거형으로 만들려는 영화다.

 

ⓒ Apple TV+

이후를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남음'

<더 브릿지>는 장소를 이탈하려는 몸(린지)이 역설적으로 특정한 시공에 속박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린지는 타인의 집이자 일련의 장소로서의 몸에 드러난 살아온 시간과 살아가는 생활의 흔적을 예민하게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떠남을 가정한 린지는 '남아 있는' 삶을 택한 제임스와 엄마의 집에서 느껴지는 종적에 가장 취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이들의 집을 담은 화면에서 가장자리에 걸려있거나 공간을 가로질러 지나가려 하지만 빈번히 상대에 의해 붙잡힌다.

여러 번의 불발을 거친 끝에 린지와 엄마가 좁은 간이 풀장에 몸을 집어넣고 대화하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해당 장면의 끝에 배치된 린지의 단독 샷의 쓸모가 인상적이다. 그녀는 풀장 안에서 그 뒤편의 문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통화 소리를 듣는다. 집 '밖'에 남은 것이 그녀일 수도 있고 집 '안'에 남은 것이 엄마일 수도 있으나, 화면을 기준으로 남은 것은 사실상 그녀이다.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외화면의 목소리로 존재하던 엄마의 연인은 이 샷에선 아예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파편화된 엄마의 말과 이에 담긴 정황을 파악해 듣는 린지로 구성될 따름이다. 이때 린지의 롱테이크 샷은 얼마간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린지가 유지하는 적막과 부동의 몸짓은 그녀를 향해 미세하게 다가가는 카메라의 작동(줌인)에 주의를 기울이게 요청하며, 그녀의 온 신경이 이면의 목소리에 가닿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떠남과 남음 사이를 겉돌던 몸은 타인의 세계에 유입되기 위해 맴도는 몸으로 변모한다.

그다음으로 이어진 컷은 소용돌이를 그리는 물의 표면이다. 고급 주택의 수영장을 관리하게 된 린지가 정작 제집의 오염된 수영장은 방치하고, 끝내 이를 깨끗하게 치우는 것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회복의 가능성을 은유하는 다소 노골적인 접근이다. 그보단 영화 속에서 물의 요소가 작동하는 다음의 방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물의 소용돌이는 무한하게 흐르면서 상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고여서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일어난 파동에 의한 것이다. 몸을 수용하고 장애물에 부딪히면서 그 여파를 주변으로 퍼트린다는 게 관건이다. 엄마와 린지의 대화는 미묘하게 어긋나지만, 이 어긋남이 관계를 악화하지 않고 무언가를 수용하는 쪽이라는 인상이 정점에 달하는 때는 이들이 간이 풀장에서 같은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던 순간이다.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틀(수영장)을 제거하면, 애초에 '같은 물'이란 건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에서 물은 분리된 몸들을 감싸는 데 쓰인다. 이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신체의 접촉, 살의 맞닿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린지와 엄마 사이의 긴 침묵과 거리감은 상대의 작은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파동으로 메워진다. 서로의 몸이 만들어 낸 물결과 그 타격을 느끼는 다른 몸의 뒤섞임으로 연결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접촉과 수용의 물질로서의 물은 다른 질서의 삶을 은유하는 장치기도 하다. 린지와 제임스가 다투던 장면의 장소 역시 수영장, 정확히는 물속이다. 여기서 제임스는 의족과 분리됨으로써 한 다리로 바닥을 딛거나 헤엄을 치는가 하면 린지는 길게 잠수하며 지상에서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무언가를 행한다. 이는 죽음 또는 상실의 기운이 지배한 삶 '그 이후'를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태도의 필요성을 뜻한다. 특히, <더 브릿지>에서 세 번 반복되는 린지의 잠수에 담긴 변화는 단지 신체의 회복을 알리는 단계만이 아니다. 영화는 카메라가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누군가의 시선과 함께 물 표면에서 기다린다는 점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성을 강조한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잠수에선 린지가 인파로 뒤덮인 수영장으로 들어간 뒤, 물 위로 다시 올라오는 모습이 제거되어 있다. 다른 질서가 요구되는 물속에서의 호흡에 능숙해졌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녀는 사건에 침잠되고 고립된 그의 삶에서 빠져나와 '이후'의 세상에 섞여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 Apple TV+

앞의 대화들이 '이전'에 관한 것이었다면, <더 브릿지>의 마지막에 위치한 오빠와의 대화는 사건 '이후'이자 '현재'의 축 위에 있다. 교도소라는 장소와 시간적인 제약, 그리고 상흔으로서의 오빠의 신체와 린지의 감정 기복은 오히려 '이전'을 벗어나는 요소로 작동한다. 큰 여백을 뛰어넘고 함축한 말하기가 요구되는 환경 덕분에 그들은 상대의 삶을 염려하고 '슬픔'을 비로소 '유감'으로 남기게 된다. 이러한 만남 이후에는 또 다른 '남음'의 기운이 있다. 그러나 이때의 남음은 기다림이라는 미래적 징후가 된다. 오프닝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타인이 개입된 상황으로 그것이 상대방으로 넘겨진 후의 무언가라는 것이다. 오빠가 자신을 믿을 수 없어 교도소가 안전하다고 말한 뒤, 그 불신의 정서가 남긴 응어리는, 린지가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을 가져보는 행위로 옮겨간다. 제임스에게 그런 일상을 제안하는 린지 또한 '지금은' 떠나지 않을 뿐이다. 린지는 여전히 '떠남'을 예정한 이다. 하지만 "친구를 사귀기로 했어요"라는 마지막 대사 이후 제임스의 반응이 오기를 기다리는 무한한 시간 동안 그녀는 '남아 있는' 존재이다.

<더 브릿지>는 이후를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서 인물들에게 주어진 '남음'을 응시한다. 영화는 그것이 자기 삶의 고통이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 그렇게 생겨난 여백의 자리를 타인에게 내어주고 연결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한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Apple TV+

더 브릿지 
Causeway
감독
라일라 노이게바우어
Lila Neugebauer

 

출연
제니퍼 로렌스
Jennifer Lawrence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Brian Tyree Henry
린다 에몬드Linda Emond
제인 하우디쉘Jayne Houdyshell
스티븐 헨더슨Stephen Henderson
러셀 하바드Russell Harvard

 

제작 A24
제공 Apple TV+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4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022년 11월 4일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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