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우리는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까
[Interview] 우리는 얼마나 기다릴 수 있을까
  • 홍상현
  • 승인 2023.05.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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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수상작 <천야, 일야> 구보타 나오 감독 인터뷰
「천야, 일야」는 구보타 나오 감독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주목 받고 한국에서도 공개되었던 「집으로 간다」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천야, 일야」는 구보타 나오 감독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주목 받고 한국에서도 공개되었던 「집으로 간다」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데이비드는 열한 살입니다. 이 아이의 몸무게는 60파운드입니다. 이 아이의 키는 4피트 6인치입니다. 이 아이의 머리카락은 갈색입니다. 이 아이의 사랑은 진짜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진짜가 아닙니다."

북미 포스터에 팔자의 가슴을 파고드는 위의 문구를 적어놓았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1년 작, <A.I.>를 떠올린다. 스탠리 큐브릭이 원안을 제공했으나 작품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던 작품.

장르문학 자체가 폄훼되기 일쑤인 데다, (몇몇 작가들이 분투를 이어가고 있음에도) 애초에 저변부터 취약하기 그지없는 한국에서는 간간이 이름이 회자될 정도지만 영국에서는 현대 장르문학을 상징하는 인물의 하나이며 대표작 『온실』에서 이상기온으로 자라난 식물이 천지를 뒤덮은 디스토피아를 적나라하게 그림으로써 필자를 잠시 식물원 기피증에 시달리게 만들기도 했던 브라이언 올디스 원작이라는 점도 관심을 유발하긴 했지만 그것이 <A.I.>를 뇌리에 각인시킨 결정적 이유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KBS 탤런트로 데뷔, 대학 재학 당시 많은 드라마에 출연하며 인기 몰이를 하던 동기가 '아역연기의 신기원'이라는 극찬과 함께 극장까지 덜미를 잡아끌다시피 해서 보여준 할리 조엘 오스먼트(주인공 데이비드 역)의 열연이 필자를 오열하게 했기 때문이다.

 

원래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방송영상제작사에 입사했다는 구보타 나오 감독. 40년 넘는 관록을 가진 TV 다큐멘터리의 거장이기도 하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원래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 방송영상제작사에 입사했다는 구보타 나오 감독. 40년 넘는 관록을 가진 TV 다큐멘터리의 거장이기도 하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사이버트로닉스사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감정형 로봇 데이비드는 스윈턴 부부에게 입양되어 명령어를 주입한 모니카(프란시스 오코너 분)를 엄마로 인식하고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얼마 후 불치병에 걸려 동면상태에 들어갔던 친아들 마틴이 돌아오자 파양돼 버러지고 유일한 친구인 테디 베어와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2천 년의 세월이 지난 영화의 결말부에서 데이비드에게 주어진 최후의 보상은 자신의 기억을 통해 복원된 엄마, 모니카와의 하루였다.

데이비드의 이와 같은 행보를 설명할 만한 수많은 단어가 있겠지만 필자가 꼽는 키워드는 단연'기다림'이다. 영화의의 결말부에 등장하는 외계로봇들이 데이비드를 인간 연구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원인. 영원히 열한 살에 멈춰 있는 안드로이드는 기계적 메커니즘으로는 태어날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 '기다림'으로 인해 휴머니티를 획득하며 세계영화사에 기록되었다.

홍보비까지 합쳐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80만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들었을 리 만무한,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인 예순세 살 신인감독 구보타 나오부산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수상작 <천야, 일야>는 영겁의 세월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기다림'을 통절하게 그려내어 1억 달러라는 제작비가 투입된 첨단 영상기술만 보더라도 태평양만큼의 거리가 있는 스필버그의 대표작을 필자의 의식한 구석에서 인양하는 '기적적인 연상(miraculous association)'을 이뤄냈다.

내용은 이렇다. 쇠락하는 어촌 마을에 살고 있는 중년 여성 도미코(다나카 유코 분)는 30년 전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며 혼자 살아간다. 그런 도미코 앞에 마찬가지로 2년 전 남편이 실종되었다는 여자 나미(오노 마치코 분)가 찾아와 실종된 남편을 '특별 실종자' 명단에 올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다. 도미코는 나미의 남편을 찾는 일에 발 벗고 나서지만 정작 서류 준비가 끝나갈 무렵 나미는 실종된 남편을 잊고 새 출발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도미코는 30년 전 실종된 남편을 여전히 찾아 헤매며 살아간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도미코는 30년 전 실종된 남편을 여전히 찾아 헤매며 살아간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홍상현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수많은 국내영화제에서 주목받고, 한국에서도 공개되었던 걸작 <집으로 간다>(2014) 이후, 8년 만의 신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습니다. 코로나19 이후 3년 만의 정상개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감회가 특별하실 것 같은데요.

구보타 나오

<천야, 일야>는 코로나 확산으로 무려 1년 반이라는 세월 동안 촬영이 중단되는 과정을 거쳐 태어난 작품입니다. 그런 작품이 국제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았으니 실로 기쁘기 한량없지요.

화려하고 멋진 개막식에 참석하고, 상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게스트 뷰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시는 관객분들을 보면서 정말 감개무량했어요. 우리에게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임과 더불어 '필수불가결한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경험이었습니다.

 

홍상현

게다가 이번 초청작인 <천야, 일야>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이라는 값진 상까지 수상하셨는데요.

구보타 나오

처음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냥 실감이 되지 않았어요. (웃음) 정말 제 작품을 선택해 주신 게 맞나 싶어서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나게 감사한 상을 받았다는 기쁨과 더불어 무게감이 밀려오더라고요.

지금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신, 값진 상에 부끄럽지 않도록 날마다 정진해 나가자고 스스로를 다잡고 있습니다.

 

어느 날 도미코를 찾아오는 나미. 2년 전에 헤어진 남편을 ‘특별 실종자’ 명단에 올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그 목적이 좀 다르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어느 날 도미코를 찾아오는 나미. 2년 전에 헤어진 남편을 '특별 실종자' 명단에 올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그 목적이 좀 다르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홍상현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에서 뵙는 분들에게 항상 드리는 질문입니다.

한국영화,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시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가 있으시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구보타 나오

실제로 즐겨보기도 하거나와 좋아하는 작품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 말씀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최대한 소개해 보면요.

우선 고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2012), <활>(2005), <시간>(2006), <그물>(2016), <수취인 불명>(2001) 등이 있고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박쥐>(2009), <복수는 나의 것>(2002)도 좋아합니다. 봉준호 감독 작품의 경우 <기생충>(2019)이나 <옥자>(2017) 같은 최근작들도 좋지만 <플란다스의 개>(2000)나 <살인의 추억>(2003), <마더>(2009) 같은 초기 작품들은 볼 때마다 새롭더라고요. 그 밖에 다들 좋아하시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2002), <밀양>(2007), <시>(2010)도 빼놓을 수 없겠죠? 아, <똥파리>(2009)의 양익준 감독은 배우로서도 좋아합니다.

또, 한국영화계에는 정말 훌륭한 배우들이 많이 계시는데요. 송강호, 최민식, 이병헌, 김혜자 배우의 출연작은 반드시 챙겨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홍상현

영화감독으로서는 신인이시지만 실은 40년 이상 TV 다큐멘터리에서 쌓아 올린 빛나는 커리어를 가지고 계시기도 합니다. 이미 거장이라는 칭호가 붙어도 어색하지 않을 위치에서 굳이 극영화 감독 데뷔를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한데요.

구보타 나오

이건 한동안 의식 속에서 희미해져 가다 <집으로 간다>가 개봉했을 당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대담을 하면서 떠올린 사실인데요. 실은, 드라마를 만들고 싶어서 방송영상제작사에 취직했었습니다. 그런데 입사 후에 배속된 부서가 공교롭게도 다큐멘터리 제작팀이었던 거지요. 거기서 인간을 바라보는 다큐멘터리 장르의 재미를 알게 되면서 쭉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던 거예요.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몇 개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는데요. 다큐멘터리로는 찍을 수 없는 사건, 취재 대상, 타이밍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무척 흥미로운 기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때 연극계의 지인분이 '그런 기획을 픽션인 극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의 기억이 풍화되지 않게 하려고 제작한 작품이 제 장편극영화 데뷔작인 <집으로 간다>였죠.

 

이미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남편의 실종은 도미코에게 늘 ‘현재진행형.’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구에게든 곁을 내주지 않는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이미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남편의 실종은 도미코에게 늘 '현재진행형.'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구에게든 곁을 내주지 않는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홍상현

방금 말씀하신 <집으로 간다>도 그렇습니다만 구보타 감독께서는 특히 고향과 가족과 그리운 사람들, 바로 '그리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표현하는데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시더라고요.

구보타 나오

다큐멘터리의 세계에서 제가 존경했던 디렉터들은 하나같이 강한 작가주의(Auteurism) 성향을 가진 분들이셨어요. 그런 동경의 마음 때문에 저 또한 부단히 작가주의를 추구해왔습니다. 그렇게 제작한 작품의 대부분이 '가족'을 주제로 하는 것들이었고, 전 세계의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언행이나 사고 등을 의식의 서랍 속에 쟁여놓을 수 있었죠.

극영화를 만들 때는 바로 이 서랍에서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꺼내어 각본가와 캐치볼을 합니다. 볼을 받은 각본가는 이야기를 더욱 훌륭하게 만들어 주지요. 답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드라마를 반드시 가지고 있고, 거기서 보이는 감정은 아직 뭔가로 빚어지지 않은 진흙 같은 형태일망정 무척 아름답지요. 바로 이것이 제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재료들입니다.

 

홍상현

그야말로 크리에이터다운 말씀이시군요.

이제 작품의 타이틀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는데요. 부산에서 만난 한 동남아시아 영화인은 <천야, 일야>를 가리켜 "근년의 아시아영화들 중 가장 시적이고 강렬한 타이틀"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궁금한데요.

구보타 나오

<천야, 일야>란 '천일 밤을 기다린 여인에게 찾아온 하룻밤'이라는 의미인데요. 시나리오를 쓰신 아오키 켄지 씨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홍상현

작품 전반에서 시간에 대한 놀랄 정도로 생생하고도 중량감 있는 통찰이 드러나고 있어 감동했는데, 제작에 8년이 걸렸다는 감독의 말씀을 듣고 납득했습니다. 그 8년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자세하게 말씀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구보타 나오

<집으로 간다>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소설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20여 년 전 일본에서 화제가 되었던 어떤 포스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실종자에 관한 것이었는데요. 바로 이 포스터를 계기로 <천야, 일야>의 기획이 시작되었어요. 각본가와 시나리오 집필을 위한 사도가섬 취재를 순식간에 마치고 초고 집필에 들어갔지요. 그렇게 석 달 정도를 들여 완성한 시나리오를 주연배우인 다나카 유코 씨가 읽고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무척 수월했어요. 그런데 출자를 하겠다는 분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리지널 작품에 출자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상을 탄 소설이나 만화의 실사화, 혹은 인기 TV 드라마의 극장판이 영화제작의 주류를 이루는 실정이거든요. 이런 환경 때문에 시간이 걸린 겁니다. 메이저 제작사의 출자를 받아보려고 각본을 수정하거나 출자해 줄 만한 사람을 만나 필사적으로 설득을 시도하다 보니 5년 가까이가 훌쩍 지나가 버리더라고요. 그렇게 가까스로 제작비를 모아 크랭크인을 하려던 찰나 코로나19가 확산되더니 급기야 긴급사태선언이 발령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일단 크랭크인을 했지만 역시 무리더라고요. 닷새 만에 촬영을 접어야했으니까요.

 

오노 마치코 배우는 후미코와 실제의 자신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가며 나미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오노 마치코 배우는 후미코와 실제의 자신 사이를 불규칙하게 오가며 나미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홍상현

역시 세계의 수많은 영화인들이 겪어야 했던 좌절에서 예외는 없었네요.

구보타 나오

아직 긴급사태선언이 발령되기 전이었지만 주연인 다나카 유코 씨와 상의한 결과 '(당시) 확진자 제로인 사도가 섬 분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 때문에 확진자가 발생한다면, 다시는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내려졌어요. 그렇다손 치더라도 촬영이 재개될 전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고, 예산도 거의 다 써버린 상황에서 촬영이 중단된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라 스태프, 캐스트 전원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만, 저는 저대로 촬영이 중단되고 나서도 앞일을 생각하면서 허겁지겁 투자자를 찾으러 다녀야 했는데요.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국가경제의 침체일로가 이어지던 와중에 기적적으로 또 다른 투자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홍상현

그렇지만 아직 코로나19 사태가 진정국면에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지요?

구보타 나오

네. 그렇다 보니 촬영 재개의 타이밍이 또 다른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코로나19 사태가 전개되면서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두 번째 촬영 중단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지역 분들이 로케를 허락해주실지도 미지수였고.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불행 중 다행이랄까 상정하지 못했던 시간적 여유가 좀 더 주어지다 보니 시나리오도 재검토하고 작품의 이곳저곳을 손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 깊이가 더해진 거죠. 무엇보다 제작비 조달에 5년 제작까지 도합 8년에 달하는 제작기간에 저 자신 '기다림'의 의미를 좀 더 알게 되었고요.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싸 안아 주는 상대를 만난 나미. 하지만 이내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맞닥뜨린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상처를 감싸 안아 주는 상대를 만난 나미. 하지만 이내 예상치 못했던 난관에 맞닥뜨린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홍상현

<천야, 일야>에서 연출뿐만 아니라 편집까지 담당하고 계신데요.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차분하게 이어지는 누군가의 내레이션을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구보타 나오

연출한 다큐멘터리는 항상 직접 편집하는 까닭에 <천야, 일야>의 편집도 자연스럽게 제가 하는 걸로 정해뒀습니다. 방대한 촬영분량을 편집해야 하는 다큐멘터리에 비교해서 극영화 편집은 딱히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이번 촬영의 경우 시나리오 내용에 따라 각 신 별로 모든 컷을 하나하나 찍어나가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더 편하기도 했고요.

매번 서사를 가장 효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컷을 골라내서 납득이 갈 때까지 편집을 반복했어요. 아울러 어떤 타이밍에 어떤 곡을 넣으면 좋을지에 대해서도 엄청나게 고민했고요. 그리고 또 하나, 캐스트의 연기가 워낙 훌륭해서 잘라내기 쉽지 않았다는 점도 꼭 언급해두고 싶습니다. (웃음)

 

홍상현

관록의 명배우, 다나카 유코 씨의 연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애초부터 주인공으로 다나카 씨를 생각하고 계셨는지요.

구보타 나오

물론이죠. 전작인 <집으로 간다>에서 다나카 유코 배우의 뛰어난 연기력과 인품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런 까닭에 차기작을 기획하면서 진즉부터 차기작의 주연으로 낙점해 놓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시나리오도 다나카 배우에 맞춰 준비했고요. 그렇게 시나리오가 완성하자마자 다나카 배우에게 보내드렸는데 흔쾌히 촬영을 결정해 주셔서 기뻤습니다.

 

구보타 나오 감독은 「천야, 일야」를 만들고 보니 ‘나 자신 얼마나 소중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전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더라고 했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구보타 나오 감독은 「천야, 일야」를 만들고 보니 '나 자신 얼마나 소중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전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더라고 했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홍상현

현장에서 다나카 배우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구보타 나오

시나리오와 관련해서 제 의도 보다는 배우들의 해석을 중시하는 편입니다. 그들이 가진 다양한 시각으로 인해 작품이 보다 풍성해질 수도 있거든요. 색다른 자극이 되기도 하고요. 해서, <천야, 일야>의 도미코와 관련해서도 대충 머리에 그려둔 이미지가 있었지만 다나카 배우가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해서 표현하려하는지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역시나 다나카 배우도 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각본의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행간의 공기까지 흡수해서 그야말로 '도미코, 그 자체가 되어 계시더라고요. 저로서는 별다른 요구를 할 게 없었습니다.

 

홍상현

나미 역을 맡은 오노 마치코 배우와의 케미스트리가 대단히 훌륭하던데요.

구보타 나오

다나카 배우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면서 도미코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 반면, 오노 배우는 후미코와 실제의 자신 사이의 간격을 불규칙하게 오가면서 나미라는 배역을 연기해갔습니다. 말씀하시는 '케미스트리'는 아마도 이 두 인물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발생했던 거 아닌가 싶어요.

그밖에 오노 배우와 관련해서 언급해 두고 싶은 건,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남편(다무라 요지 분)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단순히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더 오래전에 사라진 배우자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도미코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스스로에 대해 어떤 좌절감과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이었는데요. 실로 압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나카 배우의 극중 캐릭터와 완벽한 대척점에 서게 되면서 <천야, 일야>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이는데 크게 기여해주셨다고 봅니다.

 

“「천야, 일야」는 사람들이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겼을 때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은 그, 혹은 그녀를 얼마나, 어떤 생각을 기지고 기다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작품입니다.” 구보타 나오 감독의 말이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천야, 일야」는 사람들이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겼을 때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은 그, 혹은 그녀를 얼마나, 어떤 생각을 기지고 기다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작품입니다." 구보타 나오 감독의 말이다.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홍상현

작품 전반에서 여러 가지 메타포가 등장합니다만, 제 경우, 도미코와 나미가 해변에서 주워온 푸른 돌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보타 나오

푸른 돌은 '바라유리(sea glass)'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모래사장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바다에 떨어진 유리조각이 깨지고 풍화되면서 만들어졌지요. 저는 이 돌이 주인공 도미코와 닮았다고 느꼈어요. 다만, 그저 '세월에 풍화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해변을 떠돌던 바다유리가 주인공들의 손에 들어오는 것처럼 사라진 이들도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투사하는 대상으로 사용했습니다.

 

홍상현

영화를 보는 내내 화면의 색감이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지막에 엔딩크레디트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장 야마자키 유타카 씨가 촬영을 담당하셨는데요.

구보타 나오

야마자키 씨와는 40년 이상의 교류해 오고 있는 까닭에 서로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고 있는 건 물론 매사에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런 그의 촬영에서 제가 특히 멋지다고 생각하는 게 핸드헬드 쇼트(handheld shot)인데요. 이번 작품에서도 한 번의 긴 핸드핼드 쇼트를 부탁했어요. 그밖에 다른 장면에서의 컷의 설정은 모두 저와 야마자키 씨의 의견이 같았기 때문에 무척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차기작 계획을 묻자 대뜸 ‘찍고 싶은 몇 가지 이야기가 있고 벌써 완성해 놓은 시나리오도 있다’고 답하는 구보타 나오 감독. 세 번째 작품은 부디 「천야, 일야」보다 빨리 만날 수 있기를.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차기작 계획을 묻자 대뜸 '찍고 싶은 몇 가지 이야기가 있고 벌써 완성해 놓은 시나리오도 있다'고 답하는 구보타 나오 감독. 세 번째 작품은 부디 「천야, 일야」보다 빨리 만날 수 있기를. (C)2022 Thousand and One Nights Film Partners

"<천야, 일야>는 사람들이 왜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겼을 때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은 그, 혹은 그녀를 얼마나, 어떤 생각을 가지고 기다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작품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어떤 답을 드리지는 않아요. 그저 결론을 한 분 한 분의 해석에 맡길 따름이죠. 제 경우, 작품을 만들고 나니 '나 자신 얼마나 소중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을 전하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남더라고요.

부산을 방문해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한국 관객 여러분의 영화에 대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뜨거움'을 느꼈는데요. 아무쪼록 작품이 일반에도 공개되어 그런 열의를 가진 분들과 다시 한번 영화를 함께 보고 감상을 들어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차기작 계획은 없으시냐고 물었더니 8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두 번째 장편극영화를 완성한 '백발의 신인감독'으로부터 대뜸 '찍고 싶은 몇 가지 이야기가 있고 벌써 완성해 놓은 시나리오도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으로 간다>나 <천야, 일야>와 마찬가지로 오리지널 작품이라 제작비를 모으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걱정과 함께.

마음속으로 '얼마가 되었든 기다릴 테니 힘을 내시라'는 격려를 건네 본다.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테니까. 암, 그렇고말고. 게다가 역병의 세월이 지나갔으니 세 번째 작품을 선보이기까지의 간격도 전보다 훨씬 짧아지지 않겠는가.

[글 홍상현,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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