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라이프' 불온한 순환
'하이 라이프' 불온한 순환
  • 변해빈
  • 승인 2023.05.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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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해체한 과학의 순수"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범죄자 무리를 실은 우주선이 있다. 이곳에선 블랙홀의 에너지 추출과 인공수정을 통한 건강한 태아의 출산을 도모하는 생체 실험이 실행된다. 인물들은 사형수와 무기징역수로서의 수명을 고려해 우주선 탑승에 동의했지만, 실상은 지구와의 통신은 두절됐고 이들이 최후의 생존자일지도 모르는 상태다.

그보다 애초에 이 우주선에서 실행되는 두 가지 임무에는 오류가 있다. 각 장면 곳곳에 삽입된 수축 궤도를 그리는 블랙홀은 역으로 수명을 단축시키는 죽음의 통로가 된다. 에너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이 태아가 형성되기까지의 정자와 난자의 움직임에 관한 연상-이미지로 그려지는 게 전부다. 범우주적인 질서에서, 이러한 새로운 하나의 탄생을 다른 하나의 소멸과 짝을 짓는 이해는 흔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때로 그것은 생사관의 한 축을 차지하며 경이롭게 느껴질 문제다.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하지만 <하이 라이프>엔 비정상적으로 죽음'만' 많다. 강제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겪고 겪어야 하는 이들은 자살하거나 살해된다.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이 제한된 채, 도구를 이용해 이루어지는 인공수정은 존재하지 않던 생명체를 '만들어서 죽이는' 형국으로 기운다. 게다가 몇 번의 실패 끝에 탄생한 아이의 유전자와 이를 매개하는 역할에 놓인 의사(딥스)는 사람을 죽인 전과를 지녔으므로 태아의 유전자는 죽음의 기억을 품는다.

그렇게 해서, 전멸한 우주선에는 '몬테'(로버트 패틴슨)와 그의 유전자로 태어난 딸 '윌로'(제시 로스)가 남는다. 생존한 (어쩌면) 최후의 인류가 부녀라는 점은 요상하다. 대개 최후의 둘은 이후의 다른 세기의 최초의 창시자라는 관계성이 내포되기 때문이다. 몬테와 윌로는 친밀도나 애정의 면에서 '모범적인' 부녀 관계와는 다른 층위에 있는데, 주로 그것은 자기 유전자가 배합된 줄 몰랐던 몬테로부터 기인한다. 가벼운 욕설을 서슴지 않는다거나 '진작에 그녀를 죽일걸' 하고 한탄하기도 한다. 물론, 어떠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미래와 외로운 생활이 사고의 회로의 작동을 방해한 쪽이다.

부녀가 우주선 내부의 한정된 에너지의 고갈에 시달린다고 봤을 때, 윌로는 사전에 계산된 탑승객이 아니므로 죽은 범죄자들의 몫으로 성장한다. 딥스는 아무래도 윌로로 인해 버티기보다 죽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것 같다. 과거 범죄 이력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 그는 무언가를 더 이상 죽일 수 없어서 자신도 죽지 못한다.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부녀 관계를 풀기 위해선 우선 영화의 서술 구조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하이 라이프>는 크게 세 덩어리로 나뉜다. '전반부(현재)-중반부(과거)-후반부(현재)' 순이며, 두 현재 사이에는 많은 시간의 경과가 개입되어 있다. 윌로가 유아기 시절인 전반부에서 대규모의 플래시백을 그리며 윌로의 탄생 배경을 보여준 뒤, 청소년기 윌로의 현재로 복귀하는 구조다.

그런데 두 개의 '현재'는 몬테가 중심인 데 반해 이 구간들의 바탕인 '과거' 속에선 그는 한동안 소외된 위치다. 의사 딥스(쥘리에트 비노슈)가 무의식 상태의 몬테와 '보이스'(미아 고스)를 엄연하게는 강간하여 윌로를 탄생시킨 다음에도 몬테는 그 사실을 모른다. 스스로 정자를 배출해야 하는 남성들에 비해 딥스의 편의를 누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예감한 딥스로부터 유언대신 윌로의 사실을 전해 듣는다. 때는 윌로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절멸한 뒤이며 그로부터 부녀의 현재가 있다. 이 구조의 핵심은 몬테가 이 과정만으로 일련의 '부성'을 느끼기란, 그 논리가 터무니없다는 것이다.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그렇다면 딥스는 몬테에게서 무엇을 보았으며, 왜 하필 그였을까? <하이 라이프>에는 금기, 욕망 같은 단어가 뒤따르는데 '주술사'로 불리는 딥스에게는 자극적으로 부풀려지는 표현 이면에 좀 더 명확한 명분이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전반부, 몬테는 우주선을 정비하던 중 스패너를 손에서 놓친다. 뒤이어 맞붙은 샷은 그가 자기 개를 죽인 친구에게 죽음을 되갚아 준 날의 피 묻은 손의 이미지다. 그리고 에너지의 고갈이 두려운 그는 냉동 보관하던 범죄자들의 시신을 우주선 바깥으로 추락시켜 이미 죽은 것을 다시 죽인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 앞에서 딥스는 '터부'를 알아두어야 한다고 윌로에게 가르친 적 있다. '터부'란 재활용되었다고 해서 똥오줌을 먹으면 안 되듯, '자연의 법칙에 따라 변하지 않는 본성'을 경계하라는 의미로 요약된다. 따라서 딥스는 몬테에게서 그가 죽여지지 않는 자기 본성에 대한 두려움을 지녔다는 걸 알아봤을지 모른다.

몬테는 무언가를 지키는 쪽이기도 하고, 그러기 위해 해하는 쪽이기도 하다. 죽일 수 있지만 또 죽이지 못하는 자, 욕망을 통제하면서도 금기를 깨트리는 이 성격을 고스란히 후반부의 '현재' 위로 올려보자. 영화가 신체적 성장을 겪은 윌로를 통해 보여준 것은 월경, 임신과 출산의 가능성이다. 두 사람은 겉으로는 부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머니(딥스와 보이스)의 존재가 부정됨으로써 이 관계를 부정한다. 우주선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이들은 엔딩에서 블랙홀로 향한다. 짧게 드러난 윌로의 모습은 직전보다 성인에 가까워 보인다. 이 마지막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도, 새로운 에너지의 작용을 발견했다는 해석도 불가능하진 않다.

그런데 이들 직전의 우주에 떠도는 다른 선체에서 본 개의 무리를 떠올려 본다면, 죽음과 탄생이 진행 중인 그곳은 인간의 상황을 은유한다. 따라서 이 결말은 근친에 대한 금기적 상상을 추동한다. 신체적(정확히는 성적인) 접촉이 극도로 제한되던 규율은 부녀의 관계에선 파괴된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 남매의 구분이 사라진 옛 신화적 상상력과도 이어진다(각 인물들은 창조주, 이브와 아담의 관계성으로 해석되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의 죽음, 종말과 문명의 (재)시작이다. 몬테는 자신의 '터부', 불온한 자연의 섭리에 대한 심판 앞에 놓인 것이다.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마지막으로, 각 장면에는 기억의 구실을 하는 쇼트가 틈입되는데, 대부분 실제 과거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타인과 맞잡은 손이거나 비존재 하는 구원의 장치들이다. 특히 전반부의 딥스와 보이스의 쇼트는 흡사 몬테가 그리워하는 연인을 회상한다는 착각을 유발하는 장치다. 여기에 몬테의 의지가 개입되었는지 불분명하나 왜곡된 기억은 파괴된 과거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SF 장르 문법을 파괴한 '클레르 드니'가 도달한 미래는 결국, 가장 난폭하게 찢어발긴 과거이다.

드니는 과거를 용서받지 못하는 '타자화된' 이들이 그 과거로 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 묻는 것 같다. 한편에선 장르의 문법을 파괴하려는 시도 또한 기존 문법에 대한 이해를 요청하는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그녀의 영화가 관객을 매혹하던 중심 바깥의 날 것의 감각은 원형 도상, 신화적인 개념에 얽매이며 반복성 안에서 순수성을 잃는다. 이 순수를 위해선 신화로의 순회를 파괴하는 불온함을 감행해야 할 일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올스타엔터테인먼트

하이 라이프 
High Life
감독
클레르 드니
Claire Denis

 

출연
로버트 패틴슨
Robert Pattinson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
미아 고스Mia Goth
안드레 3000Andre 3000

 

제작 A24
배급|수입 올스타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112분
개봉 2019.10.30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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