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JIFF] '로데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 자유
[24th JIFF] '로데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 자유
  • 박정수
  • 승인 2023.05.0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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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은 주행을 계속한다"

지난해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심사위원 인기상(Coup de cœur) 수상작은 프랑스 영화감독 롤라 퀴보롱의 장편 데뷔작 <로데오>였다. 1989년 파리 태생의 그녀는 지금까지 다수의 단편을 내놓았는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동물은 특정한 목적에 유용한 존재가 되고자 훈련을 받는다. 자신의 감정, 판단을 따르던 이 존재들은 자유를 잃고, 타인의 지시·명령을 고분고분 이행하는 수동적인 '사물'로 전락한다. 단편 <볼티모어의 꿈>(Dreaming of Baltimore, 2016)에는 아버지의 지시로 바이크를 금지당한 소년이 가고 싶은 곳에 자유로이 향할 수 없는, 아버지를 위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나 퀴보롱은 작품 속 존재들을 지배당하는 상태에 놔두지 않고, 이들이 자신들의 주체성과 자유를 되찾도록 나아가 연대하도록 이끈다. 가장 최근작인 <로데오>에서 또한 바이클의 남성 중심성을 깨부수며, 여성이 자유를 거머쥐게 만든다.

그간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다뤘던 퀴보롱은 이제 여성을 포착한다. 퀴보롱은 여성의 족쇄를 거칠게 끊어내며 해방을 선언한다. 그녀가 끊어내는 족쇄는 바로 남성으로부터의 지배다. 영화의 도입부, 주인공 줄리아(Julie Ledru)는 집 밖으로 다급하게 뛰쳐나간다. 그러나 그녀의 형제들이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그녀가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집안의 남성들은 그녀의 오토바이를 처분해 버렸고, 이로써 여성이 자유롭게 어딘가로 향하지 못하게, 그저 집 안에 '얌전하게' 있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당찬 줄리아는 기어코 그들의 손아귀를 뿌리쳐 밖으로 나간다. 이후 그녀는 트럭이 있는 남성들에게 '원하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만, 남성은 여성이 간청하는 자유를 쉽게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은 남성이 고분고분한 여성을 바란다는 것, 이에 또 다른 하나는 그녀들의 발을 봉쇄하여 집에서 잠자코 남성들을 기다리라고 강제한다는 것, 그렇게 운송기구와 발·다리를 박탈당한 여성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없다. 남성은 여성이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여성은 부조리한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압적인 남성한테서 벗어나는 여성은 영화가 핸드 헬드로 거세게 흔들리게 만든다. 영화에서 그야말로 폭풍이 휘몰아치듯 세차게 흔들릴 때는 남성이 여성을 붙잡아 두려고 포박할 때, 거기서 벗어나고자 줄리아가 처절하게 몸부림칠 때다. 줄리아는 그들의 알력에 절대 순응하지 않는다. 저항하고 반항하며 뛰쳐나올 때 핸드 헬드는 더더욱 거세진다. 핸드 헬드는 자유를 향한 여성의 완고한 의지와 힘을 표현한다. 

여성은 남성의 속박에 의해서 흔들린다. 반면, 여성이 자유를 되찾았을 때는 아무리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한 오토바이를 탄다 한들, 카메라는 흔들리지 않는다. 무너지기는커녕 올곧게 유지한다. 설령 붕괴하고 불타더라도 자유로운 여성은 자신의 선택을 기꺼이 짊어질 준비가 되어있기에, 생의 최후에서도 카메라는 결연하게 안정감을 유지한다.

 

영화의 제목 '로데오'는 줄리아가 오토바이를 능숙하게 조종하여 하반신을 대신하는 과정을 말이나 소를 길들이는 해당 단어에 빗댄 것이기도 하나, 줄리아가 속한 불법적 오토바이 경주를 즐기는 남성적인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로데오에서는 '도미노'(Sébastien Schroeder)라는 남성이 도시 전체의 권력자이다. 줄리아가 로데오에 머물기 위해서는 그의 승인이 필요하다. 더욱이 남성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도시에서 그들에게 협조해야 돈을 벌 수 있다. 그래서 다혈질인 줄리아는 용모를 쑥 훑어보는 도미노 앞에서는 몸을 숙인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래야만 도시에 머물고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도미노는 줄리아에게 불법적인 오토바이 거래를 시킨다. 또 도미노의 집과 마트를 오가며 잔심부름도 한다. 줄리아뿐만 아니라 도미노의 아내 오필리아 등 영화 속 여성은 온갖 굳은 일과 잡일, 심지어 더러운 일을 도맡는다. 안타깝게도 그녀들은 정당한 몫을 지급받지 못한 채 끝없이 일을 하지만, 남성은 노동자 여성을 착취하여 꽤 많은 돈을 만지고, 이를 사용하여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다닌다. 여성은 바이크를 타고 자유롭게 다니기를 포기한 채 남성이 지시한 일터만 오가며 지리멸렬하게 노동한다.

모든 것은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 그것이 로데오란 도시의 암묵적인 규칙이기에, 사실상 남성의 자본과 자유 독점을 법이 보장한다. 이에 궁핍한 여성은 밖에 나가봤자 줄리아처럼 떠돌이,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거나, 또 다른 남성의 손아귀에 붙잡힐 뿐이다. 목숨이 저당 잡힌 여성은 연명하고자 집에서 하기 싫은 일을 꾸역꾸역 반복한다. 그래서 여성은 제 삶을 결정하는 남성의 시선에서 잘 보여야 하고, 혹 그 품에서 벗어나고자 '핸드 헬드'를 자처하면 잘 보이지 않게 된다.

다시 영화 초반, 카메라는 핸드 헬드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줄리아 또한 형제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몸을 이리저리 비틂에, 프레임과 프레임에 담긴 이미지 모두 뒤숭숭하게 흔들려 그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육체는 '아웃포커싱'으로 처리되어 흐리다. 겨우 도망쳐 나온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전환되지 않는다. 줄리아는 영화에서 두 번 사기를 치는데, 그녀가 오토바이를 갖기 위해 벌이는 사기와 도미노가 시킨 사기는 다르다. 남성은 돈을 벌기 위해서 불법적인 일을 한다면, 여성은 합법적으론 자본과 탈 것을 거머쥘 수 없으니 불법적으로 오토바이를 탈취한다.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여성에게 돈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수긍한다면 영영 자립할 수 없으니, 여성은 자유를 되찾고자 사기를 쳤다. 그러나 그 대가로 줄리아는 남성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발각되어선 안 된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이후 다시 나타난 그녀의 모습도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자유를 되찾아서 나타난 줄리아가 운전하는 모습으로, 프레임엔 그녀의 육체, 얼굴이 오롯이 담긴다. 이를 긴 시간을 할애하여 생생히 보존한다. 반면 그녀가 원치 않는데 드러날 때가 있다. 돈이 없는 그녀는 연료를 살 수 없거니와, 남성들은 그녀의 주행을 무시하며 연료를 빌려주지도 않는다. 그런 그녀가 연료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남성이 그녀에게 요구하는, 그들이 보고 싶어 하고 그들에게만 보기 좋은 '미소'를 방긋 지을 때다. 이 세계에서 그녀의 자유는 간헐적이고 대체로 흩날리며 투쟁함에 잘 보이지 않고, 오직 잘 보이는 것은 남성에 의한 얼굴이다. 남성 바이커들의 허리를 붙잡고 뒤에서 수동적으로 매달리는 ‘탑승자’ 여성, 그들을 위해서 응원하고 춤을 추는 ‘치어리더’ 여성만 허용될 뿐이다. 혹 여성이 드라이버가 된다면 이는 남성의 심부름을 하는 여성, 남성의 아이를 옮기는 여성만 허용된다.

 

영화 속 남성에 의한 여성은 롱테이크에 담긴다. 여러 숏으로 구성된 시퀀스는 각기 다른 시공간을 담아낸 숏을 이어붙이고 넘나들며,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하고 무궁무진한 운동을 자유롭게 생성할 수 있다. 반면 롱테이크로 구성된 시퀀스에서는 ‘시공간이 현실처럼 제한적인 하나의 숏’ 내에서 운동이 발생함에 제약이 있다. 영화에선 롱테이크에 아버지와 형제들이 줄리아를 붙잡아 두려고 하는 실내를 담는다. 줄리아의 운동은 가장이 지배하는 집 내부에서 살림만이 유효하다는 듯이, 줄리아가 집 밖으로 연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나 문을 박차고 나간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공간을 이동할 때 '컷'이 발생하여 롱테이크가 비로소 다른 숏으로 연결된다. 그 다른 숏에는 남성들이 바라지 않는, 그러나 여성 자신이 바라는 운동의 결과가 이어진다.

집을 넘어 다른 곳에서, 하나의 숏을 뛰어넘은 다른 숏에서 여성은 경제적 주체이자 바이커가 된다. 그래서 줄리아는 다른 공간, 다른 숏으로 향하게 해주는 오토바이를 거의 사랑하다시피 한다. 바이크를 타는 줄리아는 자신이 닿고 싶은 사람인 오필리어나 킬리안에게 향한다. 그들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긴다. 줄리아가 드라이브를 가서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육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보트', 바다나 거대한 강으로 단절된 두 땅을 연결시켜주는 '다리'다. 이렇게 줄리아는 한계가 있는 발과 다리를 대체하는 수단인 바이크를 사랑한다, 이로써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자신을 사랑한다. 물론, 그 자유는 아주 혹독한 대가를 짊어져야 한다. 로데오의 자유로운 바이커들은 단 하나의 바퀴로만 운전하는 아주 위태로운 곡예운전을 선보인다. 자신의 육체가 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해방, 관념으로만 상상한 것을 모조리 실현한다. 바이커들은 무절제한 자유를 즐기다가 기어코 사고를 낸다. 중상을 입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치료받기보다는 죽음을 선택한다. 사망한 바이커 아브라는 줄리아의 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과 키스하는 것이 불꽃과 오토바이, 질주와 별다르지 않다" 죽을 수도 있지만 필사의 자유를 멈출 수 없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퀴보롱은 자유를 향한 척박하고 처절한 여정을 35mm 필름의 거친 질감과 까끌거리는 그레인을 극한으로 강조하며 가시화한다. 이에 따른 미장센은 뾰족뾰족하고 오돌토돌 요철이 튀어나온 아스팔트의 표면이 영상화된 것만 같다. 그 아스팔트 위를 불태우리만큼 내달리는 것이, 그렇게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해방하고 기쁜 행위가 바로 고된 자유다. 나아가 퀴보롱은 여성 또한 한계가 없는 존재임을, 여성 역시 거친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며 자유를 짊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줄리아는 스마트폰으로만 감상하던 자신의 꿈을 서서히 현실에서 실현한다. 이때 항상 줄리아의 자유를 방해하던 남성 벤이 이번에도 훼방을 친다. 벤 따위를 가뿐히 무시한 줄리아는 다시 속도를 내며 미친 듯이 질주한다. 그런 그녀의 몸에 불이 붙지만,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랐다는 듯이 내달린다. 화마에 의해서 줄리아의 육체는 소멸된다. 그러나 육체로부터 순수한 줄리아의 영혼이 해방된다. 줄리아는 정신적 자유를 가로막던 육체라는 제약 또한 벗어던진다. 완전무결하게 자유로운 영혼은 주행을 계속한다.

퀴보롱은 육체의 한계를 무시하고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절대적인 자유를 예찬한다. 그 자유의 책임은 선택한 본인이 짊어지는 것이지만, 다만 자유에 이르기까진 결코 혼자서 가능하진 않다고 말한다. 영화 내내 자유는 '불'을 상징으로 삼는다. 태양에 의해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 모닥불 앞에서 춤추는 것, 불타는 것 등 자유란 스스로를 떳떳하게 밝히는 것, 끓어오르는 제 육체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 불은 혼자 붙을 수 없다. 그래서 불이 붙게끔 자유를 서로 응원해야 한다. 오필리아 덕분에 자기 자신을 피울 수 있던 줄리아의 불꽃, 이에 줄리아는 죽기 직전 오필리아-킬리안 모자에게 돈을 남긴다. 가장 남성이 허용하지 않았던 돈, 곧 여성의 자유, 그러나 연대로 서로의 자유를 지지하고 이로써 모두 이로워진다. 영화는 자유를 존중하는 세계의 첫걸음으로 연대를 말한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로데오
Rodeo
감독
롤라 퀴보롱
Lola QUIVORON

 

출연
줄리 레드루
Julie Ledru
모하메드 베타하르Mohamed Bettahar
루이 소통Louis Sotton
데이브 은사만Dave Nsaman
아흐메드 함디Ahmed Hamdi
주니어 코레이아Junior Correia
세바스티앙 슈뢰더Sébastien Schroeder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6분
공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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