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JIFF] '정오의 별' 식민주의의 알레고리
[24th JIFF] '정오의 별' 식민주의의 알레고리
  • 박정수
  • 승인 2023.05.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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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새로운 얼굴을 갈아 끼운다"

흔히 식민제국-식민지의 관계를 연상할 때, 백인-원주민의 이분법적 구도, 전자가 후자를 착취하는 관계를 떠올린다.

일반적으로 맞는 관점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 둘 사이에 한 명이 더 있다. 바로 식민지에서 태어나 '식민지 국적이거나 식민지에서 자라온 백인'(이하 식민지의 백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제국의 백인은 식민지의 백인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한편 원주민들에게 식민제국 백인과 식민지의 백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의 백인은 식민제국 백인의 특권을 덜 누림에도 원주민보다는 분명 우월적인 입지에서 일련의 특권을 누리는 복잡한 존재다.

식민지의 백인은 기득권인 식민제국의 백인과 수탈당하는 원주민, 양자 모두의 관점(시선)에서 식민주의를 증언한다. '클레르 드니'는 앞서 <초콜렛>(1988)과 <백인의 것>(2009)을 통해 보여주었다. 드니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령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온전한 본토 백인도, 그렇다고 원주민도 아니었던 '끼인 시선'을 영화에 투영하였다. 드니는 원주민과 부대끼며 보낸 유년기를 반추하며 식민지를 관리하는 백인 시선에서 볼 수 없던 '반성'을 보여준다.

당연하듯 식민지 백인과 원주민의 지위는 같지 않다. 아프리카에서 나고 자랐어도 백인들은 주로 농장주, 고용주다. 악랄한 식민주의자와 달리 정당한 봉급을 지불한다고 해도, 독립을 꿈꾸는 원주민 시선에서 자신들을 붙잡아두려는 백인은 악랄하게 비친다. 그래서 식민지의 백인은 원주민과 연대하려고 악의 없이 행동해도 어쩔 수 없이 '하얀 악마'로 전락한다. 이처럼 식민지의 백인은 식민제국-식민지 그 어디서도 반기지 않는데, 니카라과를 누비는 국적 잃은 백인들이 등장하는 드니의 신작 <정오의 별>에서도 유사한 존재들이 나풀거린다.

 

ⓒ 전주국제영화제

<정오의 별>의 주인공 '트리시'(마가렛 퀄리)는 미국에서 니카라과로 취재를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기자처럼 행동하지 않기에 정체에 의구심이 들지만, 자격이 있든 없든 여권과 PRESS CARD가 기자임을 일단 보장한다. 그런데 니카라과의 군인에 의해서 여권을 빼앗기고, PRESS CARD도 하필 만료된다. 그녀는 니카라과에서 미국 국적의 기자로서 머물 수 없는 존재, 이와 동시에 여권을 빼앗기고 빈털터리라서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녀는 분명 하얗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니카라과의 풍경은 칙칙하고 어둡기에, 하얗고 빨간 원색으로 통통 튀는 트리시는 눈에 띈다. 그러나 그 하얀 특권을 좌우하는 국적, 직업, 자본이 그녀에게는 없다.

또 다른 주인공 '다니엘'(조 알윈)도 마찬가지다. 다니엘은 트리시보다 더 하얀색에 집착한다. 단정하고도 멀끔한 하얀 양복이 다니엘의 트레이드마크다. 영국인인 그는 왓츠 오일이라는 다국적 기업 소속이다. 그는 사업차 니카라과에 방문했다. 미국이 중남미를 경제적 식민지, 속국으로 삼아가는 와중, 영국 기업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 경쟁에서 다니엘은 미국 국적의 '히스패닉' 정보원, '유대인' 요원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다. 이후 버림당한 다니엘은 기업이 힘을 보장하는 법인카드를 사용할 수 없게 되고, 미국인들이 범죄자로 누명을 씌워서 도주하게 된다.

영화에서 트리시와 다니엘은 기자 및 컨설턴트로서 각자의 능력이 묘사되지 않는다. 겉만 하얗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이다. 그 빈곤한 하양을 외적인 국적이나 자본이 숭배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하얀색은 국적이나 자본을 잃어버렸을 땐 아무것도 아니다. 즉, 후천적인 특권이 역으로 피부색을 규정한다. 영화 결말에서 미국인들에게 체포된 다니엘은 항상 고수하던 하얀 양복 대신, 엷은 갈색 죄수복이 입혀진다. 여전히 피부색은 하양일지 몰라도, 하얀 특권을 말소당한 다니엘에겐 원주민의 색채인 '갈색'이라는 계급적, 인종적 색깔이 새롭게 입혀진다.

백인의 특권이 마냥 당연하진 않았던 드니는 하얀색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힘을 지적한다. 특히, 절대적이지 않음을 강조한다.

 

ⓒ 전주국제영화제

<정오의 별>은 미국의 소설가인 데니스 존슨이 1986년 발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다만, 소설은 니카라과 혁명 말기인 1984년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는―2020년대임을 명시하는 마스크, 방역 수칙 알림판, 발열체크기, PCR 검사소 등 코로나19 시대를 비추며―오늘날을 포착한다.

1986년을 2020년대로 옮겨오는 드니는 1986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무엇'을 비춘다. 그 무엇은 '니카라과 혁명'에서 찾을 수 있다. 니카라과 혁명은 냉전으로 간접 대치 중이던 소련과 미국의 직접적인 대리전으로, 열강이 거대 이념을 선교하려는 식민지화가 중남미에서 자행되고 있었음을 증언하는 사건이다. 즉, 열강의 개입과 중남미의 식민화가 오늘날에 반복되는 역사의 무엇이다.

그 열강은 오늘날 새로운 얼굴을 갈아 끼운다. 트리시는 미국인이다. 그렇지만 미국 국적임을 증명할 수 없다. 자본이 있어야만 미국 국적의 여권을 돌려받거나, 미국으로 돌아갈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다니엘은 영국인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영국 국적은 항상 식민지에서 관리자, 대지주로 숭상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 국적 자체만으론 더는 가치가 없다. 거대한 자본력을 동원하는 미국과의 싸움에서 효력을 잃는다. 그래서 오늘날 새로운 열강은 하얀색이나 서구 국적이 아니라 자본이라고, 그 자본주의에 의한 식민화가 오늘날의 식민주의라고 드니는 진단한다.

자본은 빈곤한 사람들을 식민화한다. 국적도 돈도 없는 트리시와 다니엘은 식민제국 미국의 법, 식민지 니카라과의 법 양자 모두에 지배된다. 반면 부유한 미국인인 요원들은 PCR 검사를 무시하거나 니카라과의 법을 교란하는 등, 과거 식민지의 법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던 백인의 모습을 다시 소환한다. 그런데 이들은 과거에 식민지를 관리하던 폭군들보단 덜 폭력적이다. 요원들은 트리시와 다니엘을 숨 막히게 조여 오지만, 그 방법은 피상적으론 온건하고 부드럽다. 그들은 '경찰'이자 '컨설턴트'이기에 법을 집행하고 정당하게 조언하며 식민주의의 마수를 뻗쳐온다. 식민 지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지만, 큰 차이라면 '비폭력적'이고 '합법적'이라는 점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드니는 식민주의의 메커니즘을 가부장적인 젠더를 빌려서 분석한다. 이로써 시대와 무관하게 항상 남성에 의해서 식민지화된 여성의 몸을 함께 환기한다. 트리시는 다니엘에게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니카라과의 주민들에겐 자신의 기원과 소속을 알리는 '존슨'이라는 성으로 불린다. 피부색과 더불어 백인 가문의 권위를 빌리고 부각한다. 외부에서 권위를 빌려와야 하는 이유는 여성은 권위를 좌우하는 자본을 주체적으로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입부에서 트리시는 니카라과 군인과 강제로 성관계를 맺는다. 군인은 섹스 중에는 "날 쳐다봐"라고, 섹스가 끝난 뒤에는 "살을 더 빼지 말라고" 말하며 그녀의 눈과 몸을 강제로 규정한다. 그가 그녀에게 강압적일 수 있는 이유는 트리시의 PRESS CARD를 관리하고 여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식민제국-남성은 식민지-여성의 몸을 규정하고, 목숨을 쥐고 흔든다. 식민지-여성은 국적이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식민제국-남성에게 의존한다.

물론, 트리시는 매춘으로 남성에게서 돈을 뜯어낸다. 그러나 뜯어낸 돈을 향해 다시 남성의 손아귀가 뻗쳐온다. 식민제국은 식민지에 지불한 돈을 다시 징수할 제도 또한 갖추고 있다. 니카라과 군인이 트리시의 여권을 관리하고 있음에 그녀는 행동이나 거주가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니카라과에 머물고자 남성 공무원에게 번 돈의 적지 않은 일부를 뇌물로 준다. 또 여권 없이는 자신이 번 '코르도바'를 외화로 환전할 수 없는데, 그 여권을 남성이 쥐고 있다. 여성이 가진 돈은 남성이 좌우한다.

식민제국-남성은 식민지-여성에게 나름 합당한 돈을 쥐여주지만, 그 돈을 다시 수탈하는 제도를 음흉하게 이중적으로 작동시킨다. 식민제국-남성은 식민지-여성을 이용하여 성적 쾌락도 누리고 지불한 돈까지 돌려받으며, 심지어 돈을 더 번다. 미국인이었던, 식민지가 아니라 식민제국의 위치였던 트리시는 남성에 의해서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후 니카라과에서 트리시는 자신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늙다리 정치인과 교제하지만, 그는 선거 때문에 바쁘다며 그녀의 부탁을 계속 미룬다. 국적, 기자로서의 지위, 자본 등 약속한 모든 것을 남성들이 앗아가 그녀들은 오직 몸만 남는다. 모든 것이 수탈당해 황량한 땅으로 전락한 식민지처럼. 식민제국-남성은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게끔 빈곤하고 의존적인 매춘부 내지는 식민지 외의 여성을 바라지 않는다.

 

ⓒ 전주국제영화제

그 식민지가 여성, 유색인종을 뛰어넘어서 '빈곤함'을 조건으로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 점이 오늘날 자본주의에 의한 식민화의 특징이다.

영국 백인 남성 다니엘은 고객이자 매수자로서 식민제국의 위치였다. 그러나 더 막대한 자본을 갖춘 미국과의 대결에서 다니엘이 패배한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 그러나 그 영국의 후광을 보증하던 자본력을 상실하자 해가 지는 나라로 전락하고, 다니엘은 백인 남성 식민지로 전락한다. 이제 다니엘은 말할 수 없다. 트리시가 대신 말한다. 다니엘은 트리시에게 의존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매춘부 상태의 트리시가 식민주의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던 것처럼, 다니엘은 미국의 자본이 만들어놓은 덫에 걸린다.

유약해진 다니엘을 트리시가 보호하며 함께 도망친다. 그들은 정글의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잠에서 깼다. 트리시가 먼저 일어나 식당에 간 사이, 혼자 잠에서 깬 다니엘은 트리시의 소지품이 든 가방을 부여잡는다, 그녀의 몸이 아니라 사물을. 이제 다니엘은 자신이 즐겁기 위해서 그녀의 몸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트리시에게 보호받기 위해서, 트리시가 가진 일말의 힘을 보장하는 사물에 기댄다.

한편 미국의 덫을 피해서 달아나는 트리시는 모든 것을 다 잃은 다니엘보다 조금 강할 뿐, 마찬가지로 식민제국의 마수에서 도망치는 식민지-여성이라는 점에선 별 다를 바 없다. 그런 그녀가 식민제국에 대적할 힘이 생긴다. 바로 트리시가 다니엘을 순수하게 연모하는 마음, 식민주의에 지배당하지 않는 순일한 감정의 주권을 되찾으며 말이다. 트리시는 다니엘이 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부 조건을 신경 쓰지 않고 제 마음만을 따라 연인과 동행한다. 빈자를 더 유약하게 식민화하지 않고, 대신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간 남성들에 의해서 인도되던 그녀가 역으로 그를 인도한다. 하지만 식민제국-남성처럼 파멸로 인도하지 않는다. 상대를 지키기 위해서 은신처로 인도한다.

안타깝게도 그 시도는 부질없다. 힘이 없는 트리시는 결국 붙잡혀 다니엘을 넘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식민주의의 모든 착취와 수탈과 위계를 무너뜨리는 바로 그 균열을 순수한 사랑이 일으킨다. 영화의 제목인 '정오의 별'은 앞서 언급한 존슨의 동명 소설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틴더스틱스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해당 노래 가사에서 정오의 별은 서로의 꿈을 공유하는 특별한 연인들이 함께 있을 때 볼 수 있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으로, 그것이 식민주의로 묶이지 않은, 순수하게 결합한 두 연인의 사랑이다. 제 마음이 가리키는 순수한 사랑을 식민제국이 만든 길 대신 따라감에 식민지는 자신의 마음을 주권으로 삼아 독립한다. 또 착취되는 식민지를 사랑으로 보듬어 구원으로 이끈다.

식민지의 백인으로서 누구나 다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는 조건을 연구하는 드니는 더 치밀해지고 교활해진 오늘날 자본에 의한 식민화를 분석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이를 극복할 '정오의 별'이 아득하고 희미하지만 그럼에도 내면에 남아 있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정오의 별
Stars at Noon
감독
클레르 드니
Claire Denis

 

출연
마가렛 퀄리
Margaret Qualley
조 알윈Joe Alwyn
존 C. 라일리John C. Reilly
베니 샤프디Benny Safdie
대니 라미레스Danny Ramirez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2분
공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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