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JIFF] '도깨비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불꽃
[24th JIFF] '도깨비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불꽃
  • 박정수
  • 승인 2023.05.0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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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태울 수 없을 때, 불태우는 욕망"

현대 포르투갈 영화를 대표하는 '주앙 페드로 로드리게스'의 작품에는 '변신'과 '동물적 성애', '유령'이 가득하다. 그의 영화에는 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 이분법적인 젠더에 얽매인 사람, 특정 직업의 사명에 충실한 사람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국가권력의 힘에 의해서 방황하거나 모종의 사건에 휘말려 불현듯 자연으로 향하곤 한다. 이들은 자연에서 자유와 진정한 자아를 찾은 듯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전 삶을 그러워하며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거나 다시금 어디론가 떠난다. 이러한 로드리게스의 작품들 속 인물들은 저 자신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고,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토록 불확정적이고 가변적인 인간이 그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유령'과도 같다. 그 유령들은 신작 <도깨비불>에서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깜빡거린다.

<도깨비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왕족들의 식사를 포착하는 시퀀스에서 현실 속 감상자의 시선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의식하는 '소격효과'다. 영화 속 문이 닫힌 상태에서 '감상자의 현실'과 '영화 속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 상대편 차원에서 발생하는 일이 내 차원에 미치지 않으니, 남 일이라는 듯 무관심하게 관조할 수 있다. 그러나 문이 열려 제4의 벽이 허물어지고 소격효과가 발생하니, 상대 차원에서 비롯한 시선이 내가 속한 차원에 미치기 시작한다. 감상자는 더는 태평하게 감상할 수 없다. 그렇게 양측의 시선에 참여하며 영화 속 등장인물과 현실의 감상자가 새롭게 '변신'하기 시작한다. 왕족들은 감상자가 자신들에게 기품이나 우아함을 기대한다고 말하니, 감상자는 그들에 의해서 '기대에 찬 시선'으로 눈동자를 갈아 끼우게 될 것이다. 왕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닐 거란 기대에 찬 시선을 흠뻑 받으며, 철두철미하고 깐깐하게 품행을 정돈한다. 무대 위의 왕족들은 내면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불꽃을 모조리 꺼트리며, 초연한 이성의 경지에 오른 인간을 전시한다. 

 

그래서 영화의 타이틀은 주인공 '알프레도'(마우루 코스타)가 소방관이 되겠다고 선언하며 왕가를 뛰쳐나가는 순간인 영화의 러닝타임 약 20분가량이 지나서야 떠오른다. 타이틀이 올라오기 전까지 왕가는 비이성적이고 정열적인 불(인간의 필연적인 도깨비불)보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정함과 이성으로, 13세기부터 보존되어 온 왕가의 소나무 숲을 수호한다. 소나무 숲과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유지해 온 왕가는 대중들이 기대하는 '변치 않는 고상한 이미지'를 고정한다. 이에 따른 제한을 고정된 카메라, 널따랗게 펼쳐져 있지만 너무나도 얕은 수평적 구도로 가시화한다. 그 수평적 구도는 흡사 연극 무대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선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인간, 연극 무대에서 실체와 유리된 배역을 연기하는 인간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왕자 알프레도는 왕족의 의무와 역할에 봉사하고 싶지 않다. 왕족의 이미지와 알프레도의 자아가 불일치하기 때문에, 전자를 지향하면 후자가 실존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왕족을 기대하는 시선에 의해서 알프레도는 왕족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야만' 한다. 소나무 숲에서 순간 흥분하며 남근에 불꽃이 인 인간 알프레도는 타인의 시선이 이를 볼 수 없게끔 황급히 숨겨내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알프레도는 시선을 뒤바꾼다. '테레사'(마르가리다 빌라-노바)가 연 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시선은 그들을 왕가로 만드는 시선이다. 알프레도는 왕족을 기대하는 시선을 뿌리치고, 대신 기후위기의 여파가 가득한 현실에 책임을 요구하는 시선을 들어오게 한다. 감상자가 왕족을 숭배하게 만들던 시선을 본래의 시선으로 되돌린다. 이후, 그 시선에 따라 왕족들의 위선과 가식을 폭로한다. 이에 당황한 테레사는 문을 닫아서 시선을 차단한다. 왕족임을 반성하는 알프레도는 존재한다, 그러나 문이 닫힘에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1년 뒤, 다시 문이 열리고 알프레도는 소방관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식구들과 왕족을 기대하는 시선은 이를 반대하고, 이번에는 알프레도가 문을 닫는다.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자 시선의 통로인 문을 차단한 그는 보이지 않게 만드는 연기 속으로 사라지며 소방관이 된다. 이로써 알프레도는 시선에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시선 때문에 인간은 '유령'과 같다. 시선에 의해서 허위의 존재가 만들어지고, 진정 존재하는 것은 시선에 의해서 등한시된다.

 

로드리게스는 소방서에서 방화범이지만 소방관이어야 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도깨비불'에 빗댄다. 소방서는 화재를 진압하는 공간이다. 그 불은 문자 그대로의 불이기도 하고, 동시에 성적인 상징으로서 불이기도 하다. 영화 속 소방관들은 분명 불을 끄는 사람이지만, 이와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불을 피우는 존재다. 로드리게스는 훈련이 한창인 소방서를 포착한다. 가까이서 포착한 건장하고 활력 넘치는 육체엔 정열이, 곧 불꽃이 들끓는다. 매우 뜨겁다. 하지만 소방관이기에 뜨거운 육체는 냉각되어야 한다. 그래서 뜨거운 육체에 지시된 동작들은 냉정하게 정돈되어 있다. 그러나 왕족과 달리 건장한 신체를 부각할 수밖에 없는 소방관의 행동은 어쩔 수 없이 에로틱하다.

이후 소방관들은 소방용 사다리를 건물의 상층부에 연결하여, 화재 현장으로 진입하는 훈련을 한다. 그들은 화재 현장 위로 올라가 제 육체의 유혹을 냉정하게 만들어 다른 인간을 구하고 희생한다. 그러나 위로 올라선 이후에는 다시 아래로 내려가 뜨겁게 춤추고 노래하며 동물적인 육체를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가 하강해서 비추는 것은 쾌락, 곧 화마다. 그래서 인간은 도깨비불이다. 상승하면 추락하고 추락하면 다시 상승하며, 불을 꺼트림과 동시에 다시 불을 피우는 존재.

뜨거운 인류를 고결하게 이상화하고 냉각한 명화에선 추잡한 정욕이나 육욕이 불꽃을 터트리기에 너무나도 차갑다. 그러나 동료들은 탈의실에서 속옷만 입거나 그마저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알프레도 바로 옆에서 장난스레 명화의 포즈를 취한다. 심지어 포즈를 취하는 모델의 남근이나 하반신이 상대의 얼굴에 밀착한다. 알프레도는 평온하고 냉정한 관조가 아니라, 두 남성들이 일으키는 불꽃과 그로 인한 흥분에 델 것만 같다. 이윽고 느껴지는 것은 그들과 밀착한 알프레도 자신의 달아오름, 바라보는 것은 하반신의 불꽃이다.

이렇게 냉정한 정신에 더해, 장작과도 같은 육체와 함께 참여하는 현실에선 오롯이 객관적이거나 공적일 수 없다. 정신에 골똘히 몰입하려해도 육체가, 타인에게 집중하려 해도 그 육체가 맞닿은 내 살갗이 단번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폰소'(안드레 카브랄)와 함께하는 화재 진화 시뮬레이션, CPR 연습도 그렇다. 화재 진화 시뮬레이션에서 알프레도는 피해자를 연기한다. 그런데 두 살이 엉겨 붙고 부대낌에 자신이 맡은 배역과 무관한, 정신의 통제를 벗어난 감정이 육체에서 피어오른다. 이후 CPR 연습을 할 때도 알프레도를 피해자라고 생각해야 하지만, 연약한 육체가 아니라 건장한 상태에서 상대방의 입술이 제 입술에 닿음에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 에로티즘이 엄습한다.

 

그래서 영화 내내 알프레도의 삶은 반쪽짜리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율의 시선에 의해서, 또 정신적이어야 할 때는 육체적이고, 반면 육체적이어야 할 때는 정신적이기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도깨비불과 같다. 이에 눈이 맞은 알프레도와 아폰소의 사랑도 불꽃을 피우자마자 다시금 꺼트리는 도깨비불로 전락한다.

로드리게스는 본 작품에서 산불을 성애에 비유하며 고대적인 상징을 빌려온다. 일단 숲을 남근에 비유한다.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나무는 발기되는 남근의 속성, 수풀은 수북한 털의 시각적 유사성을 공유한다. 또 나무가 건조하게 헐벗은 상태에서 산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인간 또한 하반신의 모든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들을 벗어던지고 매끈한 상태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성관계를 갖는다. 숲이 촉촉한 수분을 머금은 나뭇잎으로 장식이 되어 있을 때는 아주 질서정연하고 생산적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인류도 하반신에 마찰이 발생하지 않게끔 차단하는 장치로 덮어놓을 땐 온건하다. 산불이 막대한 소실을 불러오는 것처럼, 인류사에서 섹스도 막대한 에너지의 낭비, 곧 위험을 동반하는 불법적인 것이었다.

알프레도와 아폰소는 소방관으로서 산불을 방지하기 위해서 숲에 간다. 나무들은 죄다 쩍쩍 갈라지고 앙상하게 말라서 숲 전체가 거대한 장작더미와도 같아, 산불에 일촉즉발이다. 거기서 두 소방관은 되레 달아올라 섹스를 나눈다. 이 둘의 성애는 불법이자 산불 방조다. 그들은 다시 천연덕스럽게 소방서로 복귀하여 남근을 옷으로 가리고, 불을 끄러 가야한다. 소방관으로서 인류에게 불장난은 항구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소방관이 아니라면 방화범으로 욕망을 만끽할 수 있을까. 로드리게스는 여전히 그들의 사랑이 도깨비불일 수밖에 없는 장애물을 분석한다. 이 둘의 사랑은 사회에서 보편적인 이성애가 아니라, 많은 시간 금기시됐고 지금까지도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동성애다. 그래서 이들의 불꽃은 명화, 화재 진화 시뮬레이션 등을 빌려서 간접적으로, 도깨비불로서만 반짝인다. 불은 가까이서 마찰하며 발생한다. 알프레도와 아폰소는 소방관으로서 함께 있다. 소방관이지 않을 때 가까이 있을 수 있다면 불꽃이 필 수 있겠지만, 소방서를 벗어나면 이들은 왕족·노동자, 백인·흑인, 즉 인종·계급적 차이로 벌어지고 멀어진다.

알프레도와 아폰소는 흥분을 배가하기 위해 서로를 모욕한다. 여기서 서로 모욕하는 유형이 다르다. 아폰소는 백인의 제국주의를 폭로한다면, 알프레도는 흑인을 하대한다. 흑인은 여전히 아래서 위로 백인 왕족을 올려다보는 반면, 백인은 위에서 아래로 흑인을 깔본다. 각 인종·계급에게 기대하는 시선에 따라서 각자는 왕이자 노동자인 소방관이 되며, 점점 더 멀어진다.

한편 흑인 아폰소가 대통령이 되어 인종·계급 간 사랑이 용이해진 2069년에는 정작 알프레도가 사망한다. 즉 가능한 시대에는 불가능하고, 불가능할 때는 어렴풋이 가능한 것이 인간이자 욕망이다. 불태울 수 있을 땐 불태우지 않고, 불태울 수 없을 때 불태우는 욕망. 에로티즘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를 빌려 말하자면, 에로티즘의 본질이란 짜릿한 위반에서 발생하는 쾌감이므로, 섹스는 쾌감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도 불법으로 규정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소방관일 땐 산불을 내고 싶은 반면, 익히 산불을 낼 수 있을 땐 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욕망은, 항상 불법으로서 황급히 진화하고 보이지 않게 된 도깨비불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을까.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도깨비불
Will-o'-the-Wisp
감독
주앙 페드로 호드리게스
Joao Pedro Rodrigues

 

출연
마우루 코스타
Mauro Costa
안드레 카브랄Andre Cabral
마르가리다 빌라-노바Margarida Vila-Nova
미구엘 루레이로Miguel Loureiro
조엘 브랑쿠Joel Branco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67분
공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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