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th JIFF] '당신으로부터' 써내린 기억, 상실, 그리고 희망
[24th JIFF] '당신으로부터' 써내린 기억, 상실, 그리고 희망
  • 김민세
  • 승인 2023.04.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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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잃어버린 몸과 풍경을 찾아서"

여기 세 편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이상한 반복이지만, 동시에 선형적인 진행이다.

신동민 감독은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2020)가 '어머니에 대한 영화'였다면, <당신으로부터>(2023)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가 되리라고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Interview] 수집가로서 영화를 만든다) 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가는 이야기. 그는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 배우의 몸을 빌려 아버지를 프레임 안으로 불러왔고, <당신에 대하여>(2020)에서는 어머니의 말과 글을 빌려 (신동민 본인이 스스로 발화하며) 아버지가 죽기 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아버지의 묘를 찾아간다. 죽은 자의 몸, 죽은 자의 존재를 찾아서.

 

영화 <당신으로부터> ⓒ 전주국제영화제

그런데 <당신으로부터>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정체를 단정 지을 수 없는 '젊은 여자 둘'이다. 한 여자는 옷을 만들고, 다른 여자는 무대에 선다. 각각 1부와 2부의 주인공을 차지하고 있는 두 여자는 서로 겹쳐 보이면서도 영화 외부의 또 다른 존재를 소환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이야기(1부와 2부) 위로 익히 알고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쌓여가고 3부에서 구체적으로 이어진다.

신동민의 영화에서 '어머니'로 대표되는 '배우의 몸'이라는 영화적 요소는 실재의 재현을 넘어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장소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으로부터>의 두 여자의 몸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이미 죽은 아버지의 몸은 어떻게 영화적으로 형상화될 것인가.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라는 의문투성이인 영화를 만든 뒤, 그는 우리에게 또다시 난감한 질문을 던진다. 아니, 사실 그는 자신도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영화를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신동민에게 필름 메이킹(film making)이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탐구하기 위한 장소로서의 '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를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박한 이미지들로 채워졌음에도 '사실적'이라고 말하기 망설여지는 이유 중 하나는, 신동민이 어머니라는 존재를 영화 프레임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 세우는 법칙이자 가정이 하나의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변경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1부 '군산행'과 3부 '희망을 찾아서'에서 그의 실제 어머니가 직접 비전문 배우로서 등장하는 반면, 2부 '태평 산부인과'에서는 별도의 전문 배우가 어머니를 연기한다. 그리고 2부의 배우는 어머니의 친구 역으로 3부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야기와 캐릭터라는 굳건한 틀을 따라가다가도 우리의 사고는 배우의 변경, 몸의 변경 앞에서 흠칫하게 된다. 어머니를 연기한 여자와 어머니 그 자체(또는 어머니를 연기하고 있는 어머니)의 만남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동민은 '그중 진실에 닿을 수 있는 몸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사유하게 한다. 존재와 카메라 사이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음을, 카메라 앞에 선 존재는 그 존재가 어떤 특질과 형상을 지니고 있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제 인물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리고 영화를 찍으며 깨닫는다. 그렇기에 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어머니를 연기한 배우가 어머니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스스로를 연기한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당신에 대하여>에서 신동민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프레임 안에 불러오기를 시도한다. 사진 속 과거의 얼굴들. 예전과 많이 달라진 마을 풍경들. 신동민이 태어난 곳과 살던 곳. 어머니가 악몽을 꾸고 귀신을 보았던 곳. 아버지가 낚시하던 곳과 그의 뼈가 묻힌 곳. 낡은 캠코더로 찍힌 이미지들과 그 위로 쌓이는 말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작동하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시간과 공간을 지목한다.

어머니의 언어로부터 비롯한 신동민의 나지막한 발화는 그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의 심정을 이미지에 새겨넣는 작업이다. 그의 말들은 얼음 벌판이 돠어버린 한탄강 안에, 그리고 그 옆 작은 숲에 있는 나무 밑에 각인된다. 신동민은 무너지고 스러지는 기억과 풍경을 어머니가 가장 원망하고 사랑했던 아버지의 몸과 뼈에 묻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두 번의 긴 디졸브로 무너져내린다. 인파가 섞인 거리에서 폐가 된 골목으로. 잠든 어머니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어머니의 몸과 얼굴로. 간신히 남아있는 모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살기 위해 먹으며 삶을 재정비하는 것뿐이다.

   

신동민은 <바람아 안개를 걷아가다오>와 <당신에 대하여>에 걸쳐 '지금 여기에 있는 몸과 풍경은 어떠한 시공간을 불러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안에서 진실이 나올 수 있는 순간의 이미지를 골똘히 응시한다. 그 이미지는 기록이라는 맥락 아래에서 물질적인 특질을 가지면서도 기억이라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감흥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환각적이고, 시간의 흐름 안에서 존재의 끊임없는 변화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 위에 놓인다.

그래서일까. 신동민의 영화에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관습, 그중에서도 '가족'이라는 합의적인 틀은 이미지로부터 한 발짝 물러선 것처럼 보인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와 <당신에 대하여>는 궁극적으로 어머니에 관한 영화다. 넓게 보면 가족에 관한 영화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가족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그들이 가족으로서 교감하고 공유하는 시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동민은 그 모호한 경계 위에서 가족이라는 틀을 지워낸다.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니게 되고, 아들은 아들이 아니게 된다. 어머니는 온종일 누워 TV를 보거나 잠이 들거나 옛적 이야기를 꺼내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정훈희의 '안개'를 부른다. 그리고 아들은 가만히 앉아서 듣는다. 그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투숏, 그리고 어머니의 단독숏과 아들의 단독숏-대체로 반응숏이다-으로 진행되는 쇼트의 연결은 가족이라는 맥락을 지워낸 채 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서 앙상하게 남아있다.

 

'아버지'라는 역사의 유령

<당신으로부터>는 1부, 2부, 그리고 3부의 세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를 골격으로 가진다. 1부는 전시회를 앞둔 의류 관련 학과 학생 민주의 이야기이고, 2부는 시 낭독 스터디에 다니면서 영화오디션을 보는 젊은 배우 승주의 이야기, 3부는 신동민과 그의 어머니가 영화 GV 차로 방문한 장소에서 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가는 이야기이다. 다른 측면으로 보자면, 1부에서는 재봉틀이 망가져 어머니 홀로 사는 본가를 찾고, 2부에서는 오디션을 앞두고 어머니 대신 삼촌의 집에 방문하며, 3부에서는 앞선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되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돌아보는 과정이다.

전작인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와 마찬가지로 <당신으로부터>는 세 챕터에 걸쳐 배우의 몸을 변경시키지만, 보다 선형적인 플롯 아래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각 주인공은 이야기를 넘겨받듯 챕터를 이어가고 앞선 챕터에서 언급되었던 것들은 다음 챕터의 구체적 이야기로 풀어진다. 이를테면 1부에서 생전 아버지가 삼촌에게 돈을 빌리고 아직까지 갚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말은 2부에서 승주가 외숙모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는 식으로 해결된다. 또는 1부에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민주의 말은 2부에서 승주의 오디션과 연기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1부와 2부를 보는 내내 관람의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형상으로 외면화되는 배우의 몸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캐릭터를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각 챕터의 주인공 간의 유사성을 지워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 단편은-특히 1부와 2가 해당할 것이다-한 사람에게서 나온 기억의 파편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상상으로부터 비롯된 가능 세계의 이야기, 또는 같은 주제로 느슨하게 연결된 서로 다른 평행세계의 이야기로서의 인상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세 가지 이야기를 강하게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것은 세 명의 인물(두 여자와 한 남자)이 지닌 '동일한 역사'이다. 세 사람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어머니와 불편한 관계 안에 있고, 창작자로서 자신의 창작에 난관을 겪고 있다. 이런 단서를 갖고 우리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몸 안에서 아들이자 감독으로서의 신동민을 볼 수 있고,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반복적인 테마인 어머니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 모자(모녀)의 관계가 변증법적으로 작용하여 발생시키는 하나의 무의식은 결국 아버지이다. <당신에 대하여>에서 모든 말과 이미지를 묻어두었던 아버지의 묘. 그것은 그들의 삶에 거대한 무의식이 되어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또는 어느 순간에 다다라 스스로 떠오르고야 마는 공동의 기억이 된다. 즉 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세계는 동일한 역사라는 맥락, 다시 말해 현재의 상태와 구체적 형상보다는 과거라는 은밀한 기억 아래에서 함께 작동한다. 이를 통해 <당신으로부터>, 나아가 신동민의 영화는 가장 사적인 동시에 공동체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거시적 담론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앞서 말했듯이 <당신으로부터>는 아버지의 성묘를 하러 가는 영화이다. 다만, 이 수식어는 실질적인 내용과 합치하는 3부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성묘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찌 보면 생뚱맞을 수도 있는 1부와 2부를 포함한 영화 전체를 '아버지의 성묘'리는 여정의 메타포로 읽어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 여정의 서사를 단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이유는 여정의 목적지가 정체를 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한 형태로 비밀스럽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부의 끝에서 민주는 상상을 멈추고 공간 한편 구석진 곳을 무심코 응시한다. 그곳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원형의 검은 물체가 있다. 2부의 끝에서 승주는 집에 들어오지 않는 어머니를 찾다가 한밤중의 길 한복판에서 무언가를 발견한다. 그곳에는 사람의 형태를 한 검은 유령의 형상이 있다. 3부의 끝에서 어머니는 (자막으로 처리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몸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1부와 2부가 '발견'이라면, 3부는 '도착'이다. 1부와 2부가 의문이었다면, 3부는 응답이다. 두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어머니는 이 검은 물체의 정체를 찾기 위한 여정을 한 셈이다. 신동민의 첫 영화인 <당신에 대하여>에서 사라지는 시간과 공간, 몸과 기억은 무의식적인 유령의 형상으로 <당신으로부터>에 도착한다.

<당신으로부터>의 인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은 사적인 과거와 공동체적 무의식, 몸의 역사, 그리고 아버지 그 자체이다.

 

영화로 켜켜이 쌓아 올린 화해의 손짓

<당신으로부터>의 세계는 현실의 신동민과 그의 어머니가 존재하는 세계(신동민은 이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인 3부, 그리고 3부의 상상적 양태인 1부와 2부로 구성된다.

그런데 1부에서 2부로 넘어가는 과정의 한 이미지가 우리를 멈춰 세운다. 1부의 민주와 2부의 승주가 침대 위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다. 민주는 학창시절 어머니와의 충격적인 과거에 관해 이야기하고 승주는 적당하게 호응한다. (물론 이 시점에서 우리는 아직 2부를 보지 못했기에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자의 정체를 알 수 없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두 여자가 서로 연인 관계라는 것뿐이다) 이후 이 영문 모를 장면은 2부의 중반부에서 승주가 본 오디션의 시나리오 대사 중 한 대목이었음이 드러난다.

1부에서 2부로 넘어갈 때 등장하는 이미지는 앞서 말한 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위치에 놓인 세계이다. 말하자면 3부의 양태인 2부에 존재하는 허구적 영화의 상상적인 재현이다. 신동민이 영화(<당신으로부터>) 속의 영화(3부) 속의 영화(2부) 속의 영화(2부의 시나리오이자 문제가 되는 장면)라는 어지러운 구조를 세우면서까지 이토록 이 세계를 창조한 이유는, 그들의 몸과 포옹을 무언가로부터 철저히 방어하기 위해서이다. 이 독립적이고 막다른 세계가 담아내고 있는 몸. 그 세계와 몸이 불러올 수 있는 또 다른 존재에 대해 쉬이 단정 지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 형상을 더 들여다보아야 한다.

 

우선 일차적으로 두 여자의 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3부의 신동민', 즉 감독 자신이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창작자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선형적인 이야기의 틀에 하나의 동일한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다. 또한, 각 챕터(2부에서는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다)의 어머니로서 프레임에 존재하는 어머니의 몸은 그들을 결국 아들로서의 신동민이라는 하나의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두 여자의 몸에서 어머니를 볼 수도 있다.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시다로 일하며 미싱기를 돌리던 어머니처럼 민주는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승주가 연인과의 대화 중에 언급하는 태몽은 신동민을 임신했을 때의 어머니와 비교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승주가 산 복권은 3부의 어머니의 손에서 다시 등장한다. 즉 두 여자는 스스로 독립적인 서사를 만드는 자체적인 인물이면서도, 신동민인 동시에 어머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신동민의 영화에서 하나의 이미지에 여러 가지 존재가 떠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존재가 신동민과 어머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 보았듯이 신동민과 어머니의 관계에는 가족이라는 형식적인 틀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타자이면서 타자가 아닌 복잡한 변수들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바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고, 어머니의 암 투병으로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그 둘 사이에는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적막한 거리가 존재한다.

<당신으로부터>의 3부에서 두 사람의 구도는 차 안에서, 영화관 안에서, 나란히 거리를 걸으면서 평행한 채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는 구도 내에서 진행된다. 그들의 시선은 교환되지 않는다. 그리고 GV 장면에서 신동민을 옆에 두고 하는 어머니의 결정적인 한 마디는 이 관계의 상태를 정확히 지목한다. "딸이 있었으면 더 행복했겠죠. 딸을 원했었어요. 참 즐거웠을 것 같아요." 이 말을 하는 사람(어머니)과 말을 듣는 사람(아들), 두 사람에게 모두 처절해지는 고백이다.

신동민은 그 말 뒤에 자신의 반응숏을 붙일 법도 싶은데 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의 세계에서는 이 관계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안 신동민의 제스처였을까. 이 말은 아들이 딸로 대체된 1부와 2부의 세계를 호명한다. 그 평행세계에서 어머니는 행복했을까.

<당신으로부터>에서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실패할 운명 아래 놓인다. 카메라는 동민과 어머니의 만남을 쇼트의 문법과 몸의 각도로 분절시키고, 길게 늘어진 시간은 숲속에서 한참을 떠도는 모자와 아버지 간의 만남을 지연시키며, 대화의 주체는 전혀 보이지 않는 황량한 숲의 이미지는 카메라―를 경유한 우리의 시점―와 대상 간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그런 어머니와 아들이 현실(3부)과 현실의 반복(1부와 2부)에서 벗어난 곳에 놓인다.

그 이상한 세계에서 두 여자는 어머니이면서 아들이고 아들이면서 어머니이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는다. 한 사람은 이야기하고 한 사람은 듣는다. 익숙지 않은 풍경과 익히 봐온 풍경. 두 여자의 몸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상상적으로 화해한다. 이 쇼트 하나로 신동민은 현실과 영화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어떤 굉장한 순간을 보여주고 만 것이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세 단편은 결국 같은 영화이다. <당신으로부터>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당신으로부터>라는 영화 안의 영화로 다시 반복된다. 신동민은 마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처럼 현실의 재현을 반복적으로 수정한다. 이 반복은 누구의 욕망일까. 그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이 중에 '진짜'는 무엇인가. '태평 산부인과'에서 전문 배우였던 어머니가 '군산행'과 '희망을 찾아서'에서 어머니 스스로가 되었기에 후자는 진짜인가.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에서 신정웅이었던 아들이, <당신으로부터>에서는 신동민 스스로가 되었기에 후자는 진짜인가.

<당신으로부터>가 사려 깊은 이유는 진실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이전의 작품들을 회한과 반성에 가까운 의미 없는 마음으로 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GV의 장면에서 보았듯, 도리어 그것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 관객과 배우와 감독, 즉 영화관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이 시선의 주체는 스크린이자 영화 그 자체가 된다.

많은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많은 영화인이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그러나 신동민의 영화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영화(스크린)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돌려 자신을 돌아보고 세계를 돌아본다. 이런 영화는 단순히 멋지다는 이유로 카메라를 가만히 세워두고 사람들 간의 시답잖은 대화들을 담거나, 영화에 대한 영화라며 '영화이기 때문에'라는 무책임한 말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영화들, '사실적'이라는 말에 담긴 치열한 고민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안일하게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척하는 영화들과 비교될 수 없다.

<당신으로부터>의 유럽 고전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한 흑백의 정적인 풍경들은 말들과 유기적으로 교차라며 시간과 공간 나아가 정서를 율동하게 하고, 그가 돌아보고 있는 영화는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억을 넘어선 공동체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아버지가 나온 꿈을 꾼 뒤 복권 방송을 보며 숫자를 하나하나 내려 적는 어머니의 무심하면서도 간절한 움직임이, 우리가 모두 겪은 상실과 그럼에도 붙잡는 희망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 나는 신동민의 단편 하나와 장편 하나를 보고 "마치 캠코더로 녹화된 사적이고 애정이 어린 홈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당신으로부터>를 보고, 그 말을 수정했다. 그는 이제 모두를 위한 시네마를 만들고 있다.  

[글 김민세 영화전문기자,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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