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유운성, 모험적 혹은 모범적 비평
[Interview] 유운성, 모험적 혹은 모범적 비평
  • 이현동
  • 승인 2023.04.29 14: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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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유운성 평론가

유운성은 '평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견고하게 관철시키는 평론가다. 그를 수식하는 '정통파 평론가'라는 명칭에서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글을 써왔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실제로 필자는 영화평론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분처럼만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시각 매체를 넘나들며 축적한 아카이브들을 통해 힘 있게 글을 쓴다. 그의 글에는 어느 영화평 같지 않은 특별함이 있다. 시네필들에게 주목을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장르를 제한하지 않고, 모든 영화에 깃든 동시대 맥락을 파악하면서도 평론을 영화의 종속물로 보지 않고 작품처럼 여기는 작가이자 아티스트다.

2021년 유운성 평론가의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교양 일반 독자를 위한 입문서다. 영화비평에서 빈번히 시사되는 앙드레 바쟁, 에이젠슈타인, 고다르 등의 논의를 다른 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함으로써 색다른 지평을 심어준다. 영화 평론, 비평이 편의적으로 소비되는 요즘 같은 시기에 필요한 책이며,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감 없이 공유할 수 있는 건 유운성 평론가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4월 6일, 사무실에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던 유운성 평론가를 만나 책과 비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지준영 사진작가

이현동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유운성

최근의 일이라면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새로 책 하나를 쓰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국내에 『24/7 잠의 종말』(2014, 문학동네)로 잘 알려진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 주의, 스펙터클, 근대문화』를 번역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책이라면 『유령과 파수꾼들: 영화의 가장자리에서 본 풍경』을 2018년에 냈었고, 2021년에는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세기의 아이들을 위한 반영화입문』을 냈었죠. 신작은 올해 상반기 여름쯤 나올 것 같아요. 사진과 영화에 대한 책이고 '식물성의 유혹'이라는 제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대략 2년에 한 권 정도는 꾸준히 책을 내려고 합니다.

이현동

2021년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가 나왔습니다. 코로나19 시기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아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큽니다. 책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쓰게 되셨나요.

유운성

격월간 사진잡지 『보스토크VOSTOK』를 내고 있는 보스토크프레스의 의뢰를 받고 쓰게 되었어요. 김현호 발행인이 '영화에 대한 어떤 입문적 성격의 책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입문적이라면 교과서를 말하는 것이냐'고 했더니 그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영화에 관심이 있지만, 전문적인 경험은 갖고 있지 않은 이들을 상정하고 집필했습니다.

기술적으로 영화는 초당 24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진다는 설명으로 출발하는 것이 과연 이들에게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될까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거든요. 대부분은 이걸 전혀 모르거나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영화를 보고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잖아요. 그냥 영화관에 들어가서 보게 되는데 그렇게 다른 세계 안으로 쑥 들어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잖아요. 지루하게 기술적인 설명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던져볼 수 있는 근본적인 물음인 '영화란 무엇인가?'가 있고, 그렇다면 좀 더 잘 볼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면서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식의 순서를 떠올려 본 거죠. 각각의 챕터에서는 몇 개의 절들로 나뉘어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문제들에 대해 잠정적인 답변을 이어 나가는 방식으로 글을 쓰려고 했죠.

이현동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을 읽고, "우리는 해석되지 않은 채 하나의 표지로 있다"(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휠덜린')라는 문장이 단번에 떠올랐습니다. 이 책은 '영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도 아닐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잠재적인 가능성의 형태로 있으면서 말이죠.

유운성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는 어떤 대안적인 영화를 주창하는 책도 아니고, 대안적 경험을 추천하는 것도 아니고, 대안적 영화 관람 문화를 말하는 책도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영화를 이렇게 봐 왔는데 여기서 벗어나서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는 거죠.

영화에는 분명 어떤 지배적인 요소들이 있어요. 그리고 120년이 넘는 영화사(史)를 들여다보면 제도적 영화 실천에 반하는 실험들도 많았어요. 영화가 탄생하고 대략 20년 정도가 지나서 성립됐다고 할 수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익숙한 영화 체제는 사실 그것이 수익성이 있기에 지배적으로 된 것이었죠. 이건 너무나 자명하죠. 반제도적 실천이 더 수익성이 있었다면 반제도적으로 남지 않고 그것이 제도가 되었겠죠. 상업적이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마이너한 채로 남아 있거나 드러나지 않은 채로 있지만, 한때 반제도적이었던 요소들의 상당수는 사실 제도적인 것 안에 이미 흡수가 되어 있기도 해요. 제도적 영화라고 하는 것조차도 꼼꼼히 따져보면 엄청나게 비균질적이어서 통합되지 않는 부분들이 정말 많아요.

여하간 사람들은 제도적인 영화에 익숙하고 또 그걸 좋아하는데 그런 영화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건 심술 이상이 될 수 없죠. 저는 이 책에서 이를테면 쇼트-역쇼트 구조와 같은 관습적이고 제도적이라 간주되는 영화 기법의 의미와 가능성을 계속 따져묻고 있습니다. 비평은 쾌락을 뺏으려 들지 말고 보다 다양한 쾌락으로 이끄는 동기를 제공해야죠. 비평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반제도적인 것을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삼는 근본주의에 빠지는 건데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한편으론, 저는 이 책을 통해서 어떤 주제에 대한 논의에 방점을 찍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요. 이건 모든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쓴 게 아니라 한번 이렇게도 접근을 해보자는 태도로 쓴 글이에요. 그런데 읽는 사람이 너무 심하게 혼란을 느껴선 안 되기 때문에 내가 깨닫게 된 것들을 앞부분에 얼마간 미리 밝혀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VOSTOK PRESS

이현동

본격적으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책 서두에서 주요 논의 대상이 되는 건 '앙드레 바쟁'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인데요. 영화학자 '더들리 앤드류'도 이미 이야기했지만, 1970년대 비평가들이 이 두 명을 놓고 차별성에 대해 논의했다면, 이후에는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바쟁보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에 대한 논의가 더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어떤 취지로 이들을 함께 끌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유운성

의뢰를 받고 책을 써야겠다 마음먹으면서 이 책이 교과서는 아니지만 우선 '입문적'인 성격의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아주 특이하거나 최근의 문헌보다는 영화의 비평적 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접하게 되는 문헌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그걸 하나하나 요약 정리하기보다는 어떤 쟁점을 놓고 주요 인물들을 대결시키는 방식으로 쓰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특히, 동시대의 영화 이론이나 비평의 여러 가지 논의들, 영화의 죽음, 포스트 시네마, 디지털의 미래 등등 한때 이름을 바꿔가며 전개되었던 논의들이 있어요. 쟁점은 '동시대적'인데, 그 쟁점과 관련된 고전적 문헌들을 각각의 챕터에서 재독하는 방식으로 검토해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바쟁이나 에이젠슈테인은 영화 이론이나 비평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들이죠. 그리고 이 책은 비평서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소설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하며 쓰기도 했어요. 챕터마다 주요 등장인물이 바뀌는 방식이고, 한 챕터에서 조연이었던 사람이 다른 챕터에선 더 부각되기도 하는 구성을 시도한 거죠.

흥미롭게도 책에는 '변증법적 사물로서의 시네마'를 논하는 부분에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개념을 설명하면서 '진화'라는 용어가 쓰이기도 합니다. 이 책 자체가 어떤 점진적 진화의 과정을 따르는 것으로도 보이는데요.

유운성

오히려 이 책 자체가 어느 정도 변증법적 사물 같은 것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요. 그 말은 이 책을 처음 쓸 때부터 완결되는 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뜻이에요. 글 안에서 줄곧 질문하고 답변하고 반론하는 긴장을 만들어내는 거죠. 각각의 장에서 주어지는 질문이 어떤 결론으로 향하는 식이 아니죠. 그런 식이 아니다 보니까 실제로 책을 읽으시면서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보통 책에는 각각의 챕터가 끝날 때마다 얼마간 마무리가 있는데, 이 책의 경우에는 각각의 챕터 마지막까지도 요약이나 답변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건 제가 어느 정도 의도한 게 맞아요. 저는 설령 잠정적이라 해도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비평적으로 쓰지 않는 게 좋다고 보거든요. 무엇보다 비평은 모험이니까요.

 

ⓒ 지준영 사진작가

이현동

고다르와 스트로브와 위예를 인용하시면서 말한 '쇼트-역쇼트의 고전적 데쿠파주'는 마치 영화 연출에 있어서 규범처럼 여겨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운성

일단 그걸 사람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인 것도 있겠고, 기술적이거나 실용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죠. 영화를 보고 평론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제 스스로가 생각을 해봤어요. 이 구조는 역사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던 구조이기도 하잖아요. 좀 안 좋게 말하면 '악마화'되기도 했고요, 이데올로기적 영화 기법을 대표하는 것처럼 치부되었으니까요. 이 기법이 관습적인 구조라는 건 부인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이게 많이 쓰이는 이유도 있는 것이거든요. 이 책에서도 예시를 들었지만, 고다르나 스트로브와 위예도 쓰고 있어요. 우리가 흔히 모더니스트로 분류하고 비관습적인 영화 작가들이라고 하는 이들도 사실 꽤 쓰고 있어요. 오히려 작정하고 쓰지 않는 이들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요. 우리가 흔히 이처럼 손쉬운 해법을 거부하는 작가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실제로 그만큼 쓰고 있는 것은 이 구조를 통해서 해내려 했던 것들이 아직 해명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이죠.

제 책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지구의 끝까지>(2019)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잖아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 영어 제목을 번역해 붙인 한국어 제목은 좀 심심한데 일본어 원제는 '타비노 오와리, 세카이노 하지마리'라고 운을 딱 맞춘 '여행의 끝, 세계의 시작'이죠. 저는 이걸 제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았어요. 이 영화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 있어요. 여자 주인공이 아나운서인데요.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굉장히 명랑한데 정작 사람하고는 눈도 못 마주치고 잘 대면하지도 못해요. 이 영화에는 쇼트-역쇼트 구조가 거의 안 나오는데 영화 중간에 두 번인가 나올 때는 둘의 대화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색한 느낌을 줘요. 그러다 영화 맨 마지막에 가서 촬영 현장에서 눈길을 주고받는 부분이 아주 잠깐 나오는데 잠깐이지만 드디어 무언가 이루어졌다는 느낌을 주죠. 이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조가 생각만큼 영화에서 쓰는 것이 쉽지 않다, 그리고 그냥 이것만으로 뭔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작동하려면 굉장히 많은 요소가 작동해야 성립될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이현동

그래서 고다르의 <이미지 북>(2018)에서 인용된 니콜라스 레이의 <자니 기타>(1954)의 쇼트-역쇼트에 대해서도 동일한 의문을 품게 되는 것 같아요.

유운성

맞아요. 궁금하죠. 역시 굉장히 심플한 장면인데, 특히 <자니 기타>에서 그 장면은 엄청 힘이 있는 장면인데, 우린 왜 그 장면이 그런 힘을 지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죠. 그저 쇼트-역쇼트를 썼기 때문인가 혹은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인가. 단 하나가 아니라 이 둘이, 그리고 무언가가 더 결합되서 힘이 있게 된 걸 거란 말이죠. 이걸 폭넓게 생각해 보면 모더니스트들이 쇼트-역쇼트 구조를 파괴했다고 볼 것만은 아니라는 거죠. 그건 상당수 감독들한테 그 미스터리를 해명해야 하는 것이었지 무엇인가 이미 해명된 것을 사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이렇게 비평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 쉽게 비아냥거리곤 하는 쇼트-역쇼트 구조를 관습적이라든지 할리우드적이라고 탄핵만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제도적이고 관습적이라고만 말하기엔 불안정하기도 한 이 구조를 염두를 두고 영화를 볼 때 더 재밌을 수 있고, 그저 재미만 느끼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걸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죠. 그걸 무너뜨리자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다른 가능성을 보자는 것이죠. 그러고 나면, 가령 우리는 오즈 야스지로의 쇼트-역쇼트 구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현동

고다르 이야기를 좀 더 해볼까 하는데요. 영화 혁명가로 잘 알려진 그가 특권적인 건 바쟁과 에이젠슈테인의 논의를 확장시킨 것뿐만이 아니라 영화에서 '그저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의 중요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였습니다. 또한, 이 책이 유의미하게 느껴지는 건 그 또한 초기에 대중을 의식한 어떤 전형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고다르의 영화를 꼭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쉽지 않겠지만, '우리가 고다르의 영화를 어떻게 보면 좋겠는가'라는 물음에는 대답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유운성

고다르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러 가지가 있겠죠. 하지만 이 책에서 모든 걸 다 다루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일단 저는 고다르를 혁명가로 간주하는 비평적 스테레오 타입에서 일단 벗어나고 싶었어요. 제가 처음 고다르 영화를 접할 때도 그랬고, 오늘날 나와 있는 책이나 영화 전공을 한 학생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스테레오 타입은 그가 '혁명가'라는 거죠. 저는 오히려 그게 고다르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이미 보기 전부터 재미없게 만드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봐요. 이미 감상해야 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거든요. 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재미없을 것 같은 생각을 하고 보게 되니까 실제로 재미가 없게 보이고 선관념을 갖고 보니 실제 영화는 그렇지 않은데 많은 부분을 놓치게 돼죠.

ⓒ 영화 <네 멋대로 해라>(1960), 장 뤽 고다르

고다르에게는 물론 혁신적인 측면도 많지만, 굉장히 클래시컬한 측면도 많아요. 제 책에서 <네 멋대로 해라>(1960)를 먼저 다룬 건 그게 제일 신화화된 영화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런 신화에 오류가 너무 많아요. 계약상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90분을 넘지 않아야 했죠. 자동차를 타고 가는 진 세버그의 얼굴 쇼트들로 이어지는 그 유명한 점프 컷 장면은 애초부터 계획했던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쇼트-역쇼트 구조로 찍어놨는데 러닝타임을 맞추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장면의 길이를 줄일 게 아니라 일괄적으로 남자나 여자 둘 중에 한쪽의 쇼트만 이어서 보여주자고 해서 나온 것이에요. 물론 이 결정이 파격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촬영 단계부터 기획된 것은 아니라는 거죠. 분명 이 영화에서는 고전적인 화면구성의 흔적이 곳곳에서 감지되는데 이것을 혁신적인 영화라고 하면 다른 부분을 빼놓고 '점프 컷' 같은 것만 보려고 하게 되잖아요. 그럴게 아니라 점프 컷은 이미 알고 있으니 실제로 영화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맨눈으로 다시 보자고 촉구하고 싶었어요.

고다르는 절대 '마르셀 뒤샹'이 아니에요. 현대 예술에서 모던하다고 일컬어지는 소설, 음악, 미술의 예를 떠올려 보죠. 현대문학이라면 '제임스 조이스', 현대음악이라면 '아르놀트 쇤베르크', 현대미술이면 '뒤샹'을 떠올릴 수 있어요. 영화에서 모던하다고 하면 고다르나 알랭 레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감독들을 떠올리는데, 영화적 모더니즘의 전성기라는 1960년대에 그들이 내놓은 영화는 다른 예술 영역의 기준으로 보면 꽤 클래식한 범주에 속하거든요. 위에 언급했던 다른 예술 영역의 혁명가들처럼 어떤 제도 자체를 뒤흔드는 측면이 있느냐면 그렇지도 않죠. 영화에서 모던 시네마라고 부르는 건 다른 예술 영역에서는 모던하지 않게 여겨질 법한 것들이에요. 저는 영화가 다른 예술에 비해 뒤처졌다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게 영화의 특이성이라고 보고, 이거야말로 영화의 정말 흥미로운 점이라고 생각해요.

 

ⓒ 지준영 사진작가

이현동

책에서 '쿨레쇼프 효과'에 대해서도 논의하셨는데요. 쿨레쇼프가 제정 시대의 러시아영화에서 발췌한 이반 모주킨의 얼굴은 '무(無)'에 상응하는 이미지처럼 추정된다는 거죠. 이와 관련해서, 조르조 아감벤의 이야기를 빌려서 말씀하신, 새로운 이미지가 아닌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반복과 중단을 통해서 새로운 사용으로 열어놓는 탈창조(decreation)의 방법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유운성

책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얼굴에 대해 논의한 부분은 오늘날 디지털 시대 얼굴성(faciality)에 대한 논의와도 관련될 수 있어요. 제가 2장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인용구로 시작했잖아요.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얼굴에서 알아내는 기술이란 없다네(There's no art to find the mind's construction in the face.)”라는 말이요. 얼굴 표정을 보면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식의 이상한 믿음이 있죠. 웃는 걸 보니 즐거운 모양이다, 찌푸린 걸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다, 뭐 이런 거요. 표정과 감정이나 생각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여기는 거죠.

전통적으로 영화의 얼굴들은 이런 편견에 가까운 믿음과 종종 관련되어 있었죠. 그래서 영화의 얼굴성이라고 하는 건 오늘날 인공지능 장치들을 통해서 더 강화되고 있는 편견으로 가득한 강화 학습의 전 단계이기도 합니다. 쿨레쇼프 효과는 이런 것들에 저항하는 수단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는 거죠. 제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새뮤얼 풀러의 <진홍색 기모노>(1959)를 예로 든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고요. 편견을 가지고 '네 얼굴을 보니 알겠다'는 식으로 사람을 대했던 주인공은 그런 가정이 사실 터무니없다는 걸 깨닫게 되죠. 얼굴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띠지도 않고 '종족성'을 띠지도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근사한 영화들이 있죠.

이현동

영화는 쇼트라는 단위를 통해 작동하는 일종의 언어라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타르코프스키가 에이젠슈테인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상찬하는 들뢰즈의 입장을 평론가님은 받아들이지 않죠. 결국 '본질주의'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 같기도 해요. 이러한 비평적 관점을 갖게끔 안내한 것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유운성

꼭 영화 비평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드니 디드로'예요. 당연히 디드로가 활동하던 18세기에는 영화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평론가로나 작가로서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한국에도 책이 많이 나와 있는데요. 현대적인 의미에서 비평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을 통해 출발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아요. 디드로 말고도 그 시기에는 루소나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사상가들, 그리고 사드도 있었죠. 물론 독일에는 괴테가 있었고요. 조선이라면 연암 박지원이나 혜환 이용휴 같은 이들이 있죠. 본격적으로 우리의 시대와 맞닿아 있는 근대로 이행하기 직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활동했던 사람들의 글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당연히 영화에 대해서 논의하려면 인터뷰, 영화 이론, 영화 비평, 그리고 동시대 영화에 대한 논문을 당연히 읽어야 하겠지만, 한편으로 비평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수시로 검토해 보기 위해서라면 디드로의 책이 굉장히 좋아요. 

평론가들에게 항상 주어지는 질문일 텐데 '평론이 학술적 논문하고 다른 게 뭐냐'고 하거나 혹은 '수필하고 다른 게 뭐냐'고 했을 때 저는 디드로의 글을 읽어보라고 권해요. 디드로는 당대에 나왔던 온갖 학문 분야를 섭렵한 사람이지만, 학술적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약이 심하기도 하고, 순전히 하나의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이론적이고 비평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요. 그런데 글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요.『라모의 조카』처럼 압도적으로 비평적인 책도 좋지만, 『달랑베르의 꿈』이나 『맹인에 관한 서한』처럼 약간 과학적 소품 같은 책도 좋습니다.

이현동

에이젠슈테인하면 몽타주를 다루는 방식을 '변증법'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에이젠슈테인의 영화와 글 사이에 일종의 불일치가 있다는 의견을 내셨는데요.

유운성

에이젠슈테인에게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어요. 에이젠슈테인이 글로 풀어낸 논의만 놓고 보면 에이젠슈테인은 어떤 쇼트가 자체적으로 가치나 의미를 지닌다는 걸 그다지 확신하지 않거나 심지어 불신하는 사람이거든요. 왜냐하면 그에게 어떤 드러내야 할 모종의 변증법적 사물이 있다고 했을 때 그건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이게 바로 그 사물이라고 보여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정작 감독으로서의 에이젠슈테인은 어떤 감독보다도 정교하게 쇼트를 구성하는 바람에 쇼트들의 자기 완결성이 굉장히 커요. 모순적이죠. 그는 자기가 이론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주장한 것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었어요. 가령 <이반 대제> 연작은 그가 쓴 일련의 몽타주 관련 논문들에서 제안한 개념들이나 주장들과 많은 부분에서 충돌하는 영화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의 논의와 무관하게 걸작입니다. 그의 이른바 '수직적 몽타주' 이론이 분명 얼마간 도식적으로 적용된 <알렉산더 네프스키>보다 훨씬 더 강렬하죠.

사람들이 흔히 실수하게 되는 게 에이젠슈테인의 글과 영화를 연속선상에 두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가 글에서 이러저러한 주장을 펼쳤는데 그의 영화를 보면 이러한 주장의 실현을 볼 수 있다는 식이죠. 저는 이런 태도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봐요. 제가 볼 때는 에이젠슈테인이 쓴 몽타주 이론에 대한 글과 자신이 몽타주를 적용했다고 말하는 영화 사이에는 대단한 불화가 있어요. 그렇다면 차라리 불화를 봐야지 영화랑 글을 나란히 놓고 작품이 이론의 실현이라고 말하는 건 터무니없거든요. 쇼트의 자족성을 비판하면서 쇼트들의 연계를 통해서만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 변증법적 사물에 관심을 가졌던 이가 정작 본인 영화에선 자족적인 쇼트들을 한껏 구사해요. 이건 데뷔작인 <파업>만 봐도 한눈에 감지할 수 있을 정도죠. 한편으로는, 그가 길게 찍은 쇼트 안에는 이미 하나의 쇼트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변화가 많으니까 그 정도면 이 쇼트는 이미 내재적으로 몽타주를 함유한 쇼트라고도 할 수 있겠죠.

 

ⓒ 영화 <The Deserted: VR>(2017)

이현동

3장에서는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벗어나 있는 퍼포먼스적 영상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차이밍량의 <The Deserted: VR>(2017)와 서현석의 <X(무심한 연극)>, 두 VR 작품을 예로 들고 있죠. 여기에는 쇼트도 없고 몽타주를 조합하는 과정도 필요 없잖아요. 이걸 영화적 체험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무의식 속에 망각하고 있었던 어떤 다른 영화를 끄집어내는 데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또 기술의 영향에 따라 영화라는 매체가 재정의될 수 있는 계기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제 이러한 시도가 누구나 집에서 경험할 수 있을 만큼 대중화된다면 영화적 장소의 의미는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유운성

일단 지금 언급하신 문제 같은 경우는 이 책에서 답변을 내리려 하지 않았어요. 그저 일단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자고 제안을 한 거죠. VR에 대해서 뭔가 단정을 내리려 하지는 않았어요. VR나 3D 기술 자체를 비(非)영화적이라고 손쉽게 치부하지 말자는 것이죠. 이런 기술들이 어떻게 쓰일지는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이런 상태에서 VR과 3D가 이미 영화의 경계를 넘어갔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무용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VR 기기를 착용하면 내가 영화관 안에 앉아 있는 상황이 구현되고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보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는 VR 환경도 있어요. 이런 걸 탐내는 곳 중 하나는 항공업계 기내 영화 서비스죠.

저는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지만 이곳의 극장에는 걸리지 않는 영화가 너무 많아요. 서울에서 개봉해도 집에서 두 시간을 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 금방 영화관에서 내리기도 해서 못 보는 영화도 꽤 있어요. 그렇다면, 영화관 환경을 제공하는 VR 기술이 감상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가 된다면, 어떤 면에서 VR은 특정 영화들에 대한 접근성이 제한된 지방 소도시 관객들에게 그나마 나은 환경에서 예술 영화를 보게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거든요. 코로나 때문에 이제 영화제도 온라인으로 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다 알게 됐잖아요. 예를 들어 칸영화제에서 어떤 영화가 프리미어될 때 전 세계 어디서나 VR 가상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하고, 자막도 여러 언어로 서비스하고, 입장료도 유료로 받아 그 수익을 영화의 제작자에게 준다고 하면 중소규모 제작자들 가운데 이걸 거부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영화에 있어서는 무엇이 되느냐 안되느냐는 건 미학적인 이유도 아니고 문화적인 이유도 아니고 항상 경제적인 이유와 관련이 있어요. 다만 우리는 영화가 그런 환경에서 보이게 될 때 어떤 영화들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야 할지를 여전히 알지 못하죠. 지금 나와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앞으로 나올 기술을 미리 탄핵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해요.

이현동

영화에서 리얼리즘이라는 것은 복제와는 달리 원본이 되는 것과 결코 온전하게 상응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능한 이상을 추구하는 신화적 양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는 미학적이든 다른 장르적 측면에서든 어떤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유운성

앞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떠올려보죠.

익숙한 영화를 파괴하려 들거나 익숙한 영화가 주는 쾌락을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바로 그 익숙한 영화가 얼마나 낯선 것들로 가득한지를 보게 하는 것이 더 큰 쾌락으로 이끈다는 거요.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에 모종의 관습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는 건 사실이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걸 극으로 받아들이느냐 다큐로 받아들이느냐는 초기 설정, 즉 셋업에 달려 있기도 해요. 만약 내가 어떤 극영화를 작정하고 완전히 다큐멘터리처럼 보겠다고 지각적으로 셋업하면 그렇게 보는 것도 가능해요. 예를 들어 보죠. <탑건: 매버릭>은 누구나 극영화라고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봐야겠다고 마음먹는 거죠. 이 영화는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이 취한 모종의 동작과 표정 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고 있으면 그 영화를 다큐로 보게 되는 거죠.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나 그냥 쇼트의 성격만 놓고 보면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해요. 극영화의 쇼트는 조명도 많이 쓰고 세트에서 찍기도 하지만 사실 다큐도 이렇게 찍을 수 있고 요즘에 그렇게 찍은 다큐도 적지 않아요. 그런가 하면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이걸 철저하게 극영화로 보겠다고 지각적으로 셋업하는 것도 가능해요. 특히 편집이라고 하는 기법이 활용되는 순간 우린 그걸 극영화적으로 사고할 수 있죠. 왜 이 부분을 생략했을까 혹은 이로 인해 생기는 픽션적 효과는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죠.

ⓒ 영화 <탑건: 매버릭>(2021)

옛날 영화를 봐도 그렇죠. 1960년대에 서울역 앞에서 찍은 장면이 있는 극영화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영화를 찍던 사람들이 염두에 둔 것은 시골에서 올라온 주인공이 서울역에서 내려 서울역 광장으로 나온다는 설정이었는데, 요즘 관객들한테 보여주면 1960년대의 서울역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적 쇼트가 되잖아요. 말투와 제스처도 마찬가지고요. 1960년대에 서울의 거리에서 인터뷰하는 장면을 찍은 다큐멘터리가 있다고 합시다. 지금의 우리가 보면 상당히 연출된 극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영화는 쇼트만 놓고 보면 다큐인지 극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존재하지 않아요. <탑건: 매버릭>(2021)에서 톰 크루즈가 나오는 쇼트 하나를 스틸 사진으로 뽑아서 이 배우를 아예 모르는 어떤 부족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 이 사진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그냥 어떤 백인 남자의 얼굴을 찍은 사진이라고 생각하겠죠. 우린 이미 톰 크루즈라는 배우를 알고 있고, 화면의 색감 따위를 보면서 대략 이것이 극인지 다큐인지 구분할 수 있는 관습적 단서들도 있기 때문에 극영화의 스틸이라고 보는 것이죠.

사운드도 마찬가지예요. 그 자체로 극적인 대사나 다큐적인 대사라는 건 없어요. 극영화 같은 경우에 대사의 성격에 따라 앰비언스를 조절하는데 그런 조절에 어떤 원칙이 있다기보다는 통상적으로 극영화들이 맞춰놓은 선이 있으니까 그걸 벗어나면 사람들이 불편을 느끼는 것일 뿐이죠. 어떤 소리 자체가 근본적으로 고유하게 극영화적인 것은 아니거든요. 엄밀히 말하자면 픽셔널 사운드라는 건 없죠. 극영화의 오토바이 소리와 다큐의 오토바이 소리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리 없죠. 다만 오토바이 소리와 사람 목소리가 함께 들리는 가운데 어디에서 라디오 소리가 나온다고 할 때, 극영화 같은 인상을 주거나 다큐멘터리 같은 인상을 주게끔 특정 소리를 강조하거나 조절할 수는 있죠. 그렇다면 이 소리들을 구성하는 컨벤션이 있는 것이지, 소리들만을 놓고 볼 때 극적이거나 다큐적인 오토바이 소리, 라디오 소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죠.

저는 이미지와 사운드 모두 다 그 자체로는 극적이지도 않고, 다큐적이지도 않다고 봐요. 다만 극영화에 가깝게 느껴지도록 만들게 하거나 반대로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느껴지도록 만들기도 하는 특정한 조합 방식이 있는 거죠.

이현동

책에서 논의하신, 아방가르드에 대한 앙드레 바쟁의 정의는 저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생각하는 개념과 조금은 다른 것 같아요. 미래의 영화들 속에서 보편화될 무엇으로 아방가르드를 정의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현재를 보면 바쟁의 말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쟁의 이 주장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유운성

말씀하신 것처럼 아방가르드 개념에 대한 바쟁의 정의는 좀 독특한데, 보통 아방가르드라고 하면 기존에 있었던 관습적인 예술 작품 형식이나 스타일을 부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걸 말하잖아요. 보통 아방가르드를 염두에 두는 사람은 그것이 보편적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메인스트림이 된다면 이미 그건 아방가르드가 아닌 거라고 보죠. 바쟁 역시 형식이나 스타일에 있어서 기존의 것과 다르거나 그것에서 일탈하는 걸 아방가르드라고 제안해요. 하지만 그게 진짜 전위라는 의미에 걸맞은 게 되려면 뒤따르는 것들이 거듭 나와 결국 메인스트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죠. 궁극적으로 메인스트림이 되어야 전위적이고 선구적인 것이지 메인스트림이 되지 않으면 전위도 선구도 아니고 주변이고 이방인 거잖아요. 그래서 바쟁 식으로 보면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나 초현실주의 영화들이 아방가르드가 아니고 그리피스야말로 아방가르드죠. 그리피스 이후에 그의 영화적 양식은 할리우드라든지 폭넓게는 세계 영화 안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양식이 되었잖아요.

흥미롭기는 한데 이런 주장엔 분명 문제점도 있어요. 산업적으로 승인된 양식만 인정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미술 같은 경우를 예로 들면 문제가 덜할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미술은 실제로 한때의 아방가르드가 현재 메인스트림이 되었거든요. 비엔날레나 이런 곳에 가 보면 120년 전에 사람들이 미술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을 작업들로 가득하잖아요. 모두가 이미 다 포스트 뒤샹이죠. 뒤샹 같은 작업을 19세기 사람들이 미술로 수용하기는 굉장히 어려웠을 거예요. 즉 뒤샹은 바쟁적으로도 아방가르드에요. 왜냐하면 그는 이미 미술 제도의 주류가 됐으니까요. 다만 주류라고는 해도 아트마켓을 벗어나 있는 비엔날레 영역의 미술 작품들은 거의 산업하고 관련되어 있지 않죠. 아트마켓도 시장이긴 하지만 산업이라기엔 좀 그렇고요. 그러니까 미술, 음악, 공연, 문학 등의 분야에서 아방가르드는 단지 산업적인 메인스트림을 의미하진 않아요. 그런데 영화에는 비산업적 메인스트림이라는 건 아예 존재하지 않죠.

보편적으로 된다는 것 자체가 곧 산업의 핵심에 놓인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니 이걸 아방가르드라고 부르기는 좀 망설여지죠. 그런데 이게 영화에 내린 저주이면서 축복이기도 하다는 것, 영화 비평은 이러한 딜레마를 끌어안고 움직일 수밖에 없죠.

[인터뷰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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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2023-04-29 14:56:57
영화를 깊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어려운 용어도 많은데 책을 읽어 봐야겠다 싶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