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BI] '레일라의 형제들' 가부장제의 민낯을 까발려라
[MUBI] '레일라의 형제들' 가부장제의 민낯을 까발려라
  • 박정수
  • 승인 2023.04.2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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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는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가"

최근 국제적으로 '이란영화'가 꾸준히 주목받으면서 국내에 적지 않은 이란영화가 소개됐다. 국내 관객들은 물리적으론 멀지만, 영화로서는 비교적 가까운 '이란의 잔상'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게 됐는데, 이때 이 잔상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로, 이란영화는 두 개의 차원을 어지럽게 오간다. 가령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파르 파나히'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을 교란하고 넘나든다. 둘째로, 이란영화가 사회에 갖는 '진지함'이다. 이를테면 '자파르 파나히', '모함마드 라술로프', '아쉬가르 파라디' 모두 이란의 신권정치, 가부장제의 해악을 소리 높여 비판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란영화를 본다는 것'은 마냥 쉽지 않다. 여러 차원을 오가는 동안 길을 잃지 않으려면 골똘히 머리를 싸매야 하고, 또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요구하기에 가볍게 접근하기엔 묵직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존 이란영화와 다른 경향을 보여주는 영화감독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바로 '사에드 루스타이'다.

 

사에드 루스타이 감독 ⓒ Iris Film

1989년생 '사에드 루스타이'는 이란의 신예 시네아스트다. 그 역시 대다수의 선배들처럼 '이란 사회'에 관심이 있다. 그의 대표작 <저스트 6.5>(2019)는 이란에서 창궐한 마약 문제를 다루고, 그 원인이 가부장제에 있었음을 분석하였으며, 이 여파가 사법 체계를 위협함을 경고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선배들과 차별화한다. 편집이 짧고 탄력적인 동시에 카메라 워킹이 급박하다. 특히, <저스트 6.5>의 도입부 추격전은 <벤허>(1959)를 연상케 하며, 그간 이란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박진감으로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한다.

사에드 루스타이가 이란사회에 대한 진지함은 앞서 언급한 선배들과 유사하지만, 그는 좀더 대중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관객이 사유하도록 접근하기보다는 '체감'하게 만드는 연출로 루스타이는 새로운 이란영화를 개척한다. 그는 <저스트 6.5>에서 남성적 세계의 폭력성을 하드보일드한 연출로 주목하였다면, 작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라 FIPRESCI 상을 수상한 신작 <레일라의 형제들>(2022)에서는 남성에 의해 짓밟힌 현실을 다시 가꾸어가는 여성에게로 카메라를 돌린다.

<레일라의 형제들>의 화두는 '가부장제'다. 수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목되었던 여성학자 베티 리어든은 '가부장제가 안보 위기에 대한 공포 선전으로 지탱되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견해는 대략 이러하다. 남성들은 건강하고 튼튼하다는 이유로 치안이 흉흉한 사회에 진출하여 맞섰고, 그 대가로 사회적 비용을 받았다. 반면 취약하게 규정된 여성들은 위험한 사회에 나설 수 없었고, 남성에게 보호받는 존재로 규정되어, 집 안에만 머문 채 제 몫을 직접 벌 수 없었다. 

가부장제는 '식구들을 건사하고 보호하라'는 명목으로 가장에게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급했다. 하지만 남성에게 건넨 아내나 식구의 몫은 그들에게 응당 지급되지 않았다. 이렇듯 남성이 사회적 비용을 독식하기 위해선 가부장제의 명분인 안보 위기와 약한 존재들을 필요로 한다는 게 리어든의 설명이다. 

 

레일라의 가족들

<레일라의 형제들> 속 가부장제도 마찬가지다.

노동으로 사회적 비용을 챙길 수 없는 백발의 노인 '이스마일'(사이드 포사미미)은 이제 가장의 지위에서 내려와 보호받아야 할 나이다. 반면 중년으로서 가정을 꾸리고, 어엿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어야 하는 그의 네 아들들은 여전히 이스마일에게 의존한다. 이스마일은 아들들을 유약하게 키웠다. 그의 딸 '레일라'(타라네흐 알리두스티)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교육'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교육의 부재로 중년이 되어서까지 사리 분별할 수 없는 네 아들 모두 실업자 상태고, 결혼 또한 실패하여 가정을 유지하는 이는 파르비즈가 유일하다. 그마저도 돈이 없어서 레일라의 조력으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간다.

특히, 레일라는 수년간 이스마일의 '체벌'에 의해서 자식들이 그의 눈에 보기 좋게끔 자녀들이 훈련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가장은 자신이 챙긴 식구들의 사회적 비용을 거저 주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체벌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어야지만 사회적 비용을 내어준다. 유약한 아들들은 가장 아래서 생존하기 위해 그가 요구하는 조건에 자신을 맞춘다. 가령 파르비즈는 아내가 딸 다섯을 내리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일의 요구에 따라서 어떻게든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아내를 임신시킨다. 겨우 아들이 태어나자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아기의 하반신을 들추어 적나라하게 남근을 보여준다. 그 아기는 할아버지가 원하는 '골람'이라는 선조의 이름을 강요받는다.

레일라 또한 이스마일에 의한 피해자다.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과 결혼을 염원했다. 그러나 이스마일은 딸이 병에 걸렸다는 거짓을 퍼뜨려 파혼시켰다. 그 이유는 이스마일이 원하는 가문에 딸을 시집보내어 가장이 이익을 챙기기 위함이다. 하지만 레일라는 아버지의 제안을 거부하여 지금까지도 미혼이고, 부모와의 관계는 냉랭하고 적대적이다. 그녀는 이스마일에게 있어서 자신의 목적을 제외하면 쓸모가 없다.

 

ⓒ Iris Film

영화에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레일라와 형제들은 사업을 꾸리기 위해서 이스마일의 금화를 빼돌린다. 하지만 곧장 이스마일에게 들킨다. 이때 그는 자식들이 훔친 금화를 돌려받고자 거짓말을 한다. 그 금화는 주택담보대출로 빌린 것이며, 그것은 분명한 '가장의 몫'이고, 돌려주지 않으면 우리 모두 길바닥에 나앉을 것이라고 자식들을 협박한다. 가장이자 아버지인 그의 지배 속에서 살아온 자식들은 협박에 벌벌 떨며 금화로 계약한 사업을 파기하고 아버지에게 몫을 돌려주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레일라는 '아버지에게 돌려주려는 금화가 과연 가장의 정당한 몫'인지 의심한다. 만약 아버지가 가정을 보살피라는 명목으로 지급된 비용을 식구들에게 정당하게 분배했다면, 자녀들이 그의 돈을 갈취한 것은 범죄이리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간 자녀들에게 어떤 것도 베풀지 않았다.

레일라는 파르비즈와 그의 아내에게 먹을 것을 챙겨준다. 딸린 아이는 많은데 파르비즈가 실업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마일은 그 조금의 음식조차도 아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파르비즈가 번듯한 가정을 꾸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노예로서 복속되길 바라는 듯 말이다. 이스마일은 식구들을 더 가난하고 유약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향해야 할 몫을 자신에게 집중하여 가장보다 더 높은 자리인 가문의 '수장'직에 계속 유지하려 한다. 

이스마일은 '가장'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는 '문맹'이라서 '골람'이라는 글자를 읽지 못할 정도로 무능력한데도 불구하고 '식구를 건사한다는 명분과 통념에 의거한 남성'이라는 이유로 고도의 사회적 비용을 누린다. 그는 가장으로서 최악이란 사실을 은폐하고 완벽한 가장, 많은 사람을 아우르는 수장으로 '보이길' 원한다. 가장의 자격이 없는 남자들이 허위로 포장된다. 유약한 식구를 구제하라는 명분으로 지불한 사회적 비용을 모자란 남성이 자신의 이미지를 꾸미는데 사용한다.

 

가부장제에 맞서는 존재

자격이 있는 가장이라면 사회에 나가서 식구를 건사할 몫을 챙기고, 경제나 안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영화 속 가장들은 무능하다. 그들은 어떠한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영화에는 세계 경찰을 운운하는 '국가로서의 가장'인 '미국'이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트럼프가 집권하던 시기로, 그의 말 한마디에 금값과 물가가 휘청거린다. 강인한 가장이라면 이를 극복해야 하지만, 이스마일과 그의 아들들, 더 나아가 그들과 같은 남성들로 이뤄진 '이란'은 위기 속에서 식구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런데 인류는 분명 그런 위기를 거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가짜 가부장제, 가짜 가장들에 의해서 발발한 위기를 실제로 극복한 대상은 여성이었다고 루스타이는 레일라를 통해서 말한다. 이후 이스마일로 인하여 가족은 위기 내몰린다. 레일라는 이스마일의 거짓말과 만행을 모조리 폭로하며 자신이 지켜야 할 현실을 사수한다. 이스마일의 따귀를 때리며 그에게 대적한다. 실제로 유약하고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사악할 뿐인 가장을.

 

ⓒ Iris Film

루스타이는 <레일라의 형제들>을 서사로 말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연출로 가시화하며 이미지로 보여준다.

포스터에도 사용된 결혼식장 시퀀스는 위압감 넘치는 하이앵글로, 흡사 고풍스럽고 신성한 천상에서 축복을 내려주는 듯한 구도로 남성들을 포착한다. 그들은 절대자가 내려다보는 듯한 초월적인 구도에서, 안정적이고도 아름다운 트레블링 숏으로 포착된다. 그 결혼식장에서 이스마일이 수장이 된 것에 기뻐하며 춤을 추는 아들들은 발리우드 영화처럼 참으로 흥겹게 보인다. 그러나 이 숏들은 그들의 허울뿐인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만을 담을 뿐이다. 라일라로 인한 몰락을 예기치 못한 채.

장남 알리레자가 파업에 참여하던 도입부 시퀀스의 급박한 카메라 워킹과 자극적인 크래쉬 줌 또한 노동자가 권리를 호소하는 급박함과 처절함이 아니라, 이기적인 그가 전우를 배신하고 도망치는 열등함과 비겁함을 쾌로 포장한다. '보기 좋은 남성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은 보기 좋은가?' 루스타이는 가부장제의 신화로 포장된 남성들의 이미지를 의심한다. 반면 밖에서도 일하고, 집에서도 조카와 부모를 돌보느라 허리가 뻐근한 레일라는 남성들을 포착한 연출과 상반된, 아름답기보단 거칠게 흔들려서 멀미가 날듯 불안정한 핸드 헬드에 담긴다. 구도 또한 아이 레벨 숏으로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가장들에게 힘겨운 일을 하라고 사회적 비용을 집중했고, 또 온 나라가 나서서 그들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포장했다. 그러나 루스타이는 그 이미지의 이면과 실체를 들춰내어, 실제로 가정을 건사하는 현실적인 흔들림이 누구의 몫인지 밝힌다. 남성이 보기 좋은 허위의 이미지를 누리는 동안 실제로 현실을 재건한 여성의 몫임을.

 

루스타이는 '물'이라는 상징을 빌려서 가부장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스마일의 집에선 항상 물이 부족하다. 물이 부족하다면 꼭 필요한 곳에, 생계를 위해서 써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남성들은 과시하기 좋은 결혼식에 가기 위해, 거기서 양복을 입은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 물을 쓴다. 보기 좋고 번듯한 가장의 이미지만을 위해서. 반면 레일라는 그 물로 조카들과 놀아주거나 설거지, 청소 등 꼭 써야 할 곳(현실)에 쓴다. 그녀가 채워놓은 대야의 물을 길고양이(생명)가 허겁지겁 마시며 목을 축인다.

가부장제에 종언을 고할 때 비로소 그 물은 여성의 소유가 된다. 결말, 파르비즈의 딸을 축하하기 위해서 새하얀 가짜 눈, 곧 물을 펑펑 뿌린다. 그 와중에 이스마일은 사망한다. 남근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서 딸들을 등한시하고 원망하던 가장이 비로소 사라진다. 이제 무수한 손녀들은 가부장제에 의해서 축복받지 못했던 삶을 비로소 축복받는다. 드디어 영화도 축복받을 만한 대상을 아름답게 포착한다. 이를 두고 알리레자는 눈물을 흘리지만, 레일라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알리레자의 씁쓸한 표정처럼 가부장제의 종말로 남성들은 위기에 봉착하는가? 루스타이는 가장 밑에서 유약하던 알리레자가 지배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떳떳해지는 모습을 비추며, 남녀 구분할 것 없는 만인의 자유를 향한 첫 번째 발걸음이 가부장제의 철폐("가부장제는 죽어야 한다")라 말한다. 만인의 주체적 권리를 위해서. <레일라의 형제들>이 끝에 이르러 보여주는 이미지는 족쇄로부터 해방된 여성(레일라)의 해방이다.

[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 Iris Film

레일라의 형제들 
Leila's Brothers
감독
사에드 루스타이
Saeed Roustayi

 

출연
타라네흐 알리두스티
Taraneh Alidoosti
사이드 포사미미Saeed Poursamimi
나비드 모하마드자데Navid Mohammadzadeh
페이만 모아디Peyman Moaadi
파르하드 아슬라니Farhad Aslani

 

제공 MUBI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60분
공개 제75회 칸 영화제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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