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2023)은 '왜 자서전을 쓰지 않느냐'는 사적인 질문으로 시작한다. 감독 '폴 프레시아도'는 나레이션으로 "망할 버지니아 울프"(fucking Virginia Woolf)가 1928년에 그의 자서전을 써서 쓰지 않겠다며 빈정거린다. 그는 이윽고 거친 언행을 사과하며 버지니아 울프에게 존경을 드러낸다.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은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1928)에 대한 애증이 가득 담긴 영화다. 식민주의 시대의 영국 여성 귀족 버지니아 울프가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데에는 불만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처음 알린 소설이기도 하다는 감정에서 비롯한다.
1992년 샐리 포터가 영화화하기도 한 『올랜도』는 남성으로 태어난 귀족 올랜도의 이야기를 담은 환상소설이다. 이 소설은 엘리자베스 1세 집권기부터 버지니아 울프가 이 글을 출간한 1928년까지 약 400년을 아우른다. 젊은 귀족 올랜도는 러시아의 공주와의 사랑에 좌절한다. 오스만 제국으로 떠난 그는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진다. 혼수에서 깬 올랜도는 여성으로 되살아난다. 소설에서는 올랜도를 '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그 어느 인간도 그보다 더 매혹적일 수는 없었다. 그의 모습은 남자의 힘과 여자의 우아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로만 묘사한다.
한편으로 『올랜도』는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애인 비타 섹빌 웨스트에게 보내는 연서이기도 하다. 물론 이 소설은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를 주인공으로 앞세운 몇 안 되는 고전이다. 거기다가 젠더와 인종, 이데올로기, 성소수자 재현 등 동시대의 여러 논쟁점을 담고 있어서 연극과 미술 등 담론의 최전선에 있는 여러 아티스트가 앞다투어서 재해석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도 이러한 흐름에 속해 있다.
폴 프레시아도는 에세이 영화의 문법으로 『올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딜도는 페니스에 선행한다"라는 파격적인 명제를 담은 『대항성 선언』(countersexual manifesto)으로 화제가 된 스타 철학자다. 그는 남성·여성 등의 규범으로 인간의 신체를 이분법으로 구분하려고 하는 '근대적인 서구 담론이 규정한 신체가 이미 최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흔적을 읽는' 개념인 '대항성(countersex)'을 제안한다. 그는 성차와 젠더도 이에 속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 남성·여성, 동성애·이성애, 트렌스·시스젠더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 성 정체성에 대한 규범까지도 해체하려 한다. 그가 딜도가 성기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서 온다. 성기는 '갖고 있다'와 '갖고 있지 않다'라는 기준으로 인간 신체를 한 정체성으로 고정해서다. 폴 프레시아도는 딜도를 통해서 인간이 기존 성기와는 다른 다양한 모양의 성기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는 이분법적 성을 탈주하는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폴 프레시아도는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도 성전환을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주로 계속 언급하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폴 프레시아도가 아니다. 보이스오버로 종종 오히려 그가 만나는 26명의 트랜스젠더 혹은 논바이너리다. 7살부터 80살까지 각자의 성 정체성을 지닌 26명은 자신을 올랜도로 호명한다. 울프의 원작에 대한 저마다의 의견을 이야기하며, 고전에 대한 전복적인 독해를 다룬다. 폴 프레시아도는 이를 다큐멘터리나 픽션이 아닌 그 중간에 있는 에세이 영화로 찍는다.
이는 작가의 야심과도 이어져 있다. 모든 연령과 국적을 불문하고 다양한 트랜스젠더를 올랜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모으려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나'의 정치적 자서전의 주인공은 이러한 설정으로 인해서 폴 프레시아도 개인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정체성을 통해서 그·그녀로 불리지 않아야 하는 수많은 사람이 모두 일반 명사 '나', '올랜도' 안에 포함되는 것이다. 26명의 제각기 다른 사람이 올랜도라는 기표 아래에 이어지는 영화적인 우주를 구성한다.
만일 같은 설정을 다큐멘터리의 문법으로 그려낸다면, 이러한 영화는 수많은 개인의 서사를 한 데에 모아둔 아카이브에 불과해진다. 이때 26명은 개인으로만 존재하게 되고, 그들 간의 느슨한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된다. 이는 26명의 이야기가 다른 목소리에 담겨 있어서 자서전이라기보다 자서전(들)에 더 가까워진다. 또 같은 설정을 픽션으로만 그려낼 때도 문제가 생긴다. 한 개인의 경험이 26명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은 나의 이야기로만 국한이 된다.
폴 프레시아도는 이 중간에서 에세이적인 방법을 택한다. 배우 26명이 저마다의 올랜도를 연기한다. 감독은 26명에 달하는 올랜도의 이야기를 오가며 『올랜도』를 재해석하는 자아를 거기에 반영한다. 감독의 유년기와 자서전적인 배경이 드러나나, 비슷한 '나'들이 함께 경험하는 고통을 반영하기도 한 것이다.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은 여럿 묵직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올랜도』는 환상적으로만, 혹은 관념으로만 묘사된 트랜스젠더의 현실적 문제를 드러낸다. 앞서 이야기했듯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는 트랜스젠더를 너무도 매혹적으로 그린다. 영화는 이것이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상화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진다. 매 순간 트랜스젠더는 혐오로 인해서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올랜도』가 열흘간 혼절해 있다가 깬다고 해서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도 여기에 더해져 있다. 트랜스젠더가 되려면 죽음을 무릅쓴 수술을 해야 해서다.
폴 프레시아도는 트랜스젠더의 고통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육체를 두드러지게 찍는다. 영화에서 가장 크게 던지는 화두 중 하나는 『대항성 선언』에서 나오기도 한 여러 물질적인 문제다. 성적 규범이 근대의 발명품이라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을 깨는 물질로의 호르몬이 어떻게 트랜스젠더를 세상에 드러나게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가 『대항성 선언』에서 대항성이 성적 규범을 테크놀로지로 재정의하는 일이라 했던 것의 연장선이다. 또한 한편으로 트랜스젠더가 신분증에 기재된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노력까지 담으려 한다. 이 영화는 『올랜도』를 빌미로 트랜스젠더의 현대사를 한 데에 아우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는 다소 보기 힘든 영화다. 대사의 밀도가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높고, 올랜도가 26명이나 있어 혼란스럽다.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 등을 한 데에 압축하려 했기에 영화의 정보량은 상당하다. 심지어 라캉과 프로이트, 주디스 버틀러 등의 이론이 가감 없이 드러나기에, 젠더 이론에 평소 관심이 있거나 폴 프레시아도의 『대항성 선언』에 대한 선행 지식이 없이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조롱하는 이 영화의 유머도 그 둘에 대한 선행 지식 없이 보기는 힘들다.) 또 『올랜도』를 읽지 않은 이에게는 더없이 불친절한 영화이기까지 하다. 특히, 이 영화가 근대적 가부장제와 트랜스젠더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순간도 가끔 드러난다.
그렇지만, 영화의 회화와 같은 프레이밍은 그의 영화적 상상력이 데릭 저먼같은 선배 퀴어 예술가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인물을 소개하고, 그의 연극적 몸짓을 담아서 미학화하는 화면은 보깅는 더없이 아름답다. 한편으로는 철학자 폴 프레시아도의 개성을 알게는 해주지만 감독으로의 개성을 느끼기는 힘들다는 인상도 지우기가 힘들다. 이 과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은 이미 트랜스젠더를 옹호하고 거기를 더 연구하고 싶은 관객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 이상의 관객을 설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의 자서전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올랜도에게 바치는 애증의 연가라기에는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은 턱없이 부족하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올란도, 나의 정치적 자서전
Orlando, My Political Biography
감독
폴 B. 프레시아도Paul B. Preciado
출연
Paul B.
PRECIADO
Oscar-Roza MILLER
Janis SAHRAOUI
Liz CHRISTIN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99분
공개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