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고고학' 계속해서 파 내려가다 보면 만나는 풍경들
'사랑의 고고학' 계속해서 파 내려가다 보면 만나는 풍경들
  • 이현동
  • 승인 2023.04.1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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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발굴하기까지 소모되는 시간의 간극을 바라보며"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이들은 영화 제목('사랑의 고고학')을 보고, 단번에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떠올릴 것이다. (물론, 이완민 감독이 이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관념적이든 물리적이든 '고고학'이란 표현을 푸코식으로 표현하자면 지역과 시대, 행동의 가능 조건에 다양한 지층에 대한 연구라는 뜻으로, 흥미롭게도 이는 영화와 유사하다. 조금 다르다고 한다면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공동체의 인증을 받았느냐' 정도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1988~1998)을 기반으로 쓰인 『영화의 고고학』에서 규명하는 건 이 영화가 고다르 개인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으로, 결국 영화는 감독에게 종속된 예술이라 말한다.

이미지를 분산하는 감독이나 그 이미지에서 무언가를 발굴하려는 비평가나 대중들에게 도전적인 제목을 가진 <사랑의 고고학>은 이와 별개로 특수한 이야기를 다루진 않는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진 한 남녀가 성향 차이로 갈등을 겪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레파토리 중 하나다. 감독은 이러한 주변부의 이야기를 끌어와 각각의 시제 별로 변화되는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 사실상 '사랑'이란 단어가 가진 보편의 양식은 공동체적이라기보다 개인에 가깝다는 것에서 사랑의 본질은 고고학적인 탐구가 어렵다. 왜냐하면 고고학이란 개인의 현재라기보다 집단의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고고학>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구현하려는 것일까. 혹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전언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 맑은 시네마

많은 이들은 <사랑의 고고학>을 보고 나서 두 남녀의 관계에서 '가스라이팅'에 대한 사회와 심리 과학적인 논의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특정한 주제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남자주인공인 인식(기윤)이 영실의 남자 문제(문란하다고 여겨지는)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근거가 명료하게 서술되지도 않을뿐더러 너무나도 표면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영화는 처음부터 어떤 답과 방향성을 갖지 않을뿐더러 주제를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으려고 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젠더갈등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랑의 고고학>이야말로 '현재의 사랑을 발굴하기 위해 과거를 망각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영화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제목에서 '사랑'이란―불가해적인 속성, 본질이 될 수도 없고, 학문이 될 수도 없는―단어는 굉장히 시적인 선택을 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남녀의 관계에서 '과거'를 소멸한 역사로 두지는 않는다. 되려 과거를 잘 간직한 채 현재에 또 다른 사랑을 발굴하려 하는 건 실상 어딘가 있을지 모를 땅속 깊은 곳에 유물들을 파헤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식이'가 인식하는 '영실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영실(옥자연)이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첫 장면에서 느릿한 말투, 무표정의 제스처는 그녀가 내향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특강 강사로 중학교에 출강하는 영실은 그저 하루하루를 큰 돈벌이나 야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고고학을 연구하고 작업하는 현장에 나갈 때 흥분하고, 적극성을 띠는 건 그만큼 자기 일에는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어서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고고학을 설명할 때 "과거의 유물을 통해 사람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본질인가? 집단에서 서술되는 사랑의 본질은 제각각 다르지만, 개인에게는 경험에 의해 사랑은 본질일 수 있다. <사랑의 고고학>은 고고학을 설명하기 위해 개인의 역사로 회귀하며 이를 서술하기로 작정한다. 영화는 현재 시점에서 8년 전인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 형태로 서사를 배치한다. 8년 전이라는 자막이 명시되고 곧바로 마주하는 장면은 한 남자의 뒷모습이다. 그는 영실로부터 "헤어지자"는 이별의 통보를 받은 상태다. 그를 통해 영화는 두 남녀 사이의 기록이라는 점을 예고한다.

 

ⓒ 맑은 시네마

영화는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굴 작업을 하는 영실에게 인식이 걸음을 멈춘다. 이 남자는 특이하게도 영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작업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말한다. 영실은 그와 이렇게 인연이 되어 조금씩 그를 알아간다. 그녀는 그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박물관에서 그가 작업한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호감을 느끼게 된다. 인식은 영실의 사무실에 찾아가거나 지방 출장에 나가 있는 영실에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표시한다.

다만, 영실에게는 애정은 없으나 동거를 유지하는 남자가 있다. 인식에게 있어 그는 매우 불편한 존재다. 이 지점에서 처음으로 '영실이 인식에게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직면한다. 영실은 동거인이 있을 때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인식과 채팅으로 영상 통화를 한다. 점차 시간이 지나 인식은 동거인과 영실의 관계가 불편하다며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주고 있다며 단호하게 나올 것을 촉구한다. 그렇게 동거인과 헤어지고 나서 영화는 어느샌가 반말을 주고받는 연인관계인 둘을 비춘다.

영화가 소거하고 있는 시간만큼이나 이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건 과거에 집착하고 있는 인식의 모습이다. 영실이 항상 남자관계에 대해 주저하거나 여지를 주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인식은 사귀고 나서 그녀를 더욱 의심한다. 그는 그녀와 섹스를 하는 도중 사귀지 않는 사람과 어디까지 갔냐고 추궁하거나 한 남자와 8시간 만에 사귀었다는 과거를 듣고는 그녀에게 자유로운 영혼 아니냐고 비난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이별은 특별한 묘사없이 이뤄진다. 만남도 그렇듯이 이런 생략이 초래하는 효과는 우발적이기도 하지만, 기억이란 건 그만큼 듬성듬성 있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하다.

 

ⓒ 맑은 시네마
ⓒ 맑은 시네마

언제부턴가 영실은 인식을 형이라 부르며 그와 거의 매일 안부 전화를 하는 관계로 이어 나간다. 제삼자인 우린 이 관계를 이상하게 볼 수 있겠지만, 현재 아무런 남자관계가 없는 영실은 그저 말동무가 되어주는 인식에게 오히려 다시 호감을 느낀다.

교수와 지인들과의 만남에서 영실에게 이상형을 묻는다.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영실에게 전 남자친구인 인식에 관해서 묻자 '사귀지 않는 상태로는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교수는 당장 정리하라 말하며, 자아실현을 위해 이용을 당하는 것이라며 애처롭게 여긴다. 이때 영실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러한 의심을 불식시키기엔 조금 조심스러워 보인다.

영실은 샤워하러 오라는 인식의 전화를 받고, 그에게 향한다. 영실을 침대로 데려간 인식은 "규정하지 않고 지내면 안 돼?"고 묻는다. 심지어 마음에 드는 여자가 생겼지만, 영실에게 지금과 같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듣고는 영실은 "내가 결정할게"라고 말한다. 영실이 그와의 관계를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다. 인식을 통해 영실이 점차 변모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학생들 앞에 특강 강사로 선 영실은 이번에는 고고학의 좋은 점을 설명한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1년 후의 시점으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이번에는 영실이 작업 현장에서 호감을 느꼈던 상대를 찾아가 애정을 표시한다. 고고학자의 임무가 결국 과거의 사랑을 통해 현재의 사랑을 찾는다는 은유적 표현임을 영화 말미에 깨닫게 된다.

 

ⓒ 맑은 시네마

우린 고고학 현장을 보며 경계를 설정하고, 삽으로 땅을 들춰내고, 유물에 묻어 있는 흙을 털어내는 과정을 지켜본다. 몇 장면 되지 않지만, 이 과정은 인간과 관계 맺고 있는 주변부를 관측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마찬가지로 영화 전체가 갖고 하는 움직임은 주변의 환경 속에서 변화되는 영실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는 관찰에 가깝다.

<사랑의 고고학>은 창작자가 주도적으로 이끌지 않는다. 몇몇 시점 숏과 주로 등장하는 미디엄 숏은 관찰자 시점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대본도 대사도 없이 주어진 장면으로 알려진 이장님과의 대화는 오로지 배우와 비전문 배우와의 우발적인 합을 통해 일구어낸 장면이다. 또한 발굴을 마치고 저녁노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의 풍광은 장소가 얼마나 감정의 질감을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영실의 성격과 함께 미장센이 얼마나 일치될 수 있을까를 드러내는 영화 전체는 사랑의 고고학이기도 하지만, '영실의 고고학'이란 말도 제법 잘 어울린다.

<사랑의 고고학>에서 사랑을 마주하는 두 번의 장면에서 영실은 모두 현장에 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이자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록되고 있는 영실의 현장은 허름하고 별 볼 일 없는 작업 복장에 기인하지 않는다. 연애하는 순간보다 더욱 활기가 넘치는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자기 일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분명한 애정이며, 그것은 영실에게 있어 사랑의 본질이 된다. 호감인 상대와 헤어진 후 영화가 마지막에 어떻게 이어지는 지는 묘사되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영실의 주체적인 행동을 바라보며 그녀의 낙관적인 미래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맑은 시네마

사랑의 고고학
Archaeology of love
감독
이완민

 

출연
옥자연
기윤

 

제작|배급 맑은 시네마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6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4.12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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