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더 글로리' 복수 이후 영광은 되찾았는가
[NETFLIX] '더 글로리' 복수 이후 영광은 되찾았는가
  • 배명현
  • 승인 2023.04.19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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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장면(들)과 보아야 하는 장면(들)의 거리

2023년의 영광은 역시 <더 글로리>가 아닐까.

올해 절반도 채 보내지 않은 지금, 이 같은 판단을 내리기엔 섣부른 감이 없진 않지만, 과감하게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청소년 관람 불가, 심지어 OTT 스트리밍작에도 불구하고) <더 글로리>처럼 많은 지지를 얻는 드라마는 드물다는 사실 때문이다. 조금 우습게 말하자면 여기를 봐도 '더 글로리' 저리를 봐도 '더 글로리'라고나 할까.

그렇기에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지금 가장 필요한 고민은 '어째서 <더 글로리>인가'라는 생각이지 않을까. 이 작품이 등장할 수 있었던 맥락은 무엇일까. 이 작품을 두고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그리고 이 질문들은 '어째서 오늘의 우리가 학폭이라는 일에 분노하게 되었는지'와 '복수를 갈망하는지', 이 맥락에서 <더 글로리>의 서사가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맨 앞에 세워야 할 단어는 단연 '복수'다. 복수라는 단어가 대개 그러하듯 이 드라마의 서사 또한 형법제도 바깥에서 구축되고 진행된다. 작품의 카타르시스는 '사회적 약자'인 문동은이 오랫동안 벼린 칼을 법의 저촉을 피해 휘두르는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더 글로리>는 학폭으로 고통받는 인물이 오랜 시간이 지나 법의 도움 없이, 아니 법의 테두리 바깥에서 가해자(들)를 단죄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는 오늘의 우리가 꿈꿔온 욕망의 가시화 그 자체이다. 우리가 이룰 수 없다고 믿기에 가장 보고 싶은 그 장면(들)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은 왜 하필 복수극의 소재가 '학교 폭력'이냐는 점이다.

정말 새삼스러운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요즘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훨씬 그 이전에도 학교 폭력은 문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예전보다 지금 사람들이 학폭에 더더욱 예민해지고 기민하게 반응하는 점이다. 이는 긍정적인 일이지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가령 이런 것. 사건이 일어난 학교는 쉬쉬하고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피해자만 피해자인 상황. 우리는 이미 이런 예시에 익숙하다. 그야말로 클리셰적인 현실이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일에 무기력했다. 아니,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노하는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건 자체에 분노하고 응당한 처벌을 할 수 없음, 그 자체에 분노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반복은 사회를 바꾸었다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법과 학교의 시스템의 보수성은 여전히 여전하고 우리는 반복되는 분노만을 목격했다. 그래서일까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차원의 해결법이 등장했다. 바로 폭로를 하는 것이다. 이 폭로는 즉각적 분노를 해소 시켜 준다는 점과 정의를 구현한다는 점에서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더 글로리>는 폭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사실을 감춘 뒤 그것을 아주 조금씩 드러낸다. '복수서사'의 카타르시스는 한 번에 드러내는 순간 시시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관객인 우리에게도 주인공인 문동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문동은의 복수에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열아홉부터 현재까지의 긴 시간 동안 자신이 살았던 세계가 어떤 곳이었는지, 지옥이란 어떤 곳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가해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피해자의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 카타르시스는 이 과정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을 통해 부풀어 오른다. 여기에 시간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넷플릭스

결국, 중요한 점은 방식이다. 동은은 두 가지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더도 말고 정확하게 당한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가해자와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된다. 복수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가해하되 피해자의 신분을 유지해야 한다. 동은이 선생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기꺼이 선생이 되어 자신의 과거를 박연진과 그녀의 무리에게 이해시키려 한다. 가해자와 같은 방식으로 가해하지도 않는다. 이 교육과정에서 교과서는 하예솔이고 매는 하도영이다.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도 물론 필요하다. 드라마에서 박연진 무리가 어른이 되어도 일진 티를 벗지 못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의 교육(복수)은 성공했는가. 드라마를 통해 알 수 있듯 대답은 "아니오"이다. 박연진은 마지막까지 억울해한다. 여기에 이해가 끼어들 공간은 없다. 박연진과 그녀의 무리 중 그 누구도 문동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들은 무너졌을 뿐이다. 이해하며 무너진 것이 아닌 분노하며 무너졌고, 거부하며 무너졌다. 오히려 <더 글로리> 안에서 문동은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주여정뿐이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정작 이해해야 하는 사람은 영원히 멀어지고 '전략적 동료'가 온전한 이해를 해 버리다니. (오해를 막기 위해 하는 말이지만, 여기서 두 사람의 이해와 연대를 문제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늘과 같이 학폭이 '진짜' 문제가 된 지금 '낭만적 연대의 복수'보다 더 필요한 서사가 있지 않을까. 피해자들이 실현해 보지 못한 복수, 상상보다 현실 가능한 이야기 말이다.

특히, 복수에 돈이 많이 든다는 문동은의 말을 이어받아 도움을 주는 주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전작(들)이 떠오르는 건 어색하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김은숙 작가의 "이 세상의 동은이들은 돈 있는 부모, 그런 가정환경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었다"라는 말보다 "나한테는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있다. 그래서 차라리 (딸이)맞고 왔으면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는 말에 더 신뢰가 가는 편이다. 설사 둘 다 동일한 무게의 진정성을 두었다 치더라도 진정성은 말 그대로 진정성일 뿐이다.

더욱이 복수를 끝낸 문동은이 학교의 옥상에서 뛰어내리려 하는 선택은 작가 자신도 이 서사가 '19살의 시작'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다른 복수를 통해 삶을 이어간다는 엔딩은 연대를 통해 여전히 피해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상한 마무리가 아닐까. 문동은의 복수가 살기 위한 복수였다면, 현실의 문동은들이 드라마를 보며 정말 응원을 받길 원했다면, <더 글로리>의 엔딩은 분명 달리 적혀야 했을 것이다.

 

ⓒ 넷플릭스

흥미롭게도 작가가 의도했던 응원은 드라마의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수많은 응원이 있었고 의식이 변화했다. 때문에 여기서 이 변화의 근원에 <더 글로리>가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근래 일어난 반향에는 이 드라마의 결과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긍정적인 변화에 '이야기로만 가능한 이야기'는 분명 석연치 않다. 특히 '천벌'이라는 단어로 드러나는 '하늘'의 도움은 주여정과 더불어 현실의 복수란 정말 불가능에 가깝다는 믿음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 같아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더 글로리>는 현실의 복수와 해결은 이야기로 상상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현실의 해결법을 상상해 내라고 강제하는 건 폭력이다. 잘살고 있는 가해자에 대한, 바꾸지 못한 과거에 대한, 그리고 학폭에 대한 시청자의 분노를 해소 시켜 주는 드라마 대신 피해자의 드라마가 쓰이기를 바란다. 아직 탄생하지 않은 이 드라마에 대해 피해의 강도와 가해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 치중하기보단 피해 과정과 피해자 이후의 삶에 대한 윤리적 고민이 느껴지는 드라마이기를 바란다.

[글 배명현 영화전문기자, rhfemdnjf@ccoart.com]

 

ⓒ 넷플릭스

더 글로리
The Glory
연출
안길호
각본
김은숙

 

출연
송혜교
이도현
임지연
염혜란
박성훈
정성일
김히어라
차주영
김건우

 

제작 화앤담픽쳐스|스튜디오드래곤
제공 넷풀릭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6부작(819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공개
2022.12.30(파트1)
2023 12.03.10 (파트2)

배명현
배명현
 영화를 보며 밥을 먹었고 영화를 보다 잠에 들었다. 영화로 심정의 크기를 키웠고 살을 불렸다. 그렇기에 내 몸의 일부에는 영화가 속해있다. 이것은 체감되는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다 문득 '아.' 하고 내뱉게 되는 영화. 나는 그런 영화를 사랑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영화를 온몸으로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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