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BI] '홀드 미 타이트' 소실되고 분산되고 결합되는 기억
[MUBI] '홀드 미 타이트' 소실되고 분산되고 결합되는 기억
  • 이현동
  • 승인 2023.04.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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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으로 볼 것인가 주관으로 볼 것인가"

<007 퀀텀오브솔러스>(2008), <잠수종과 나비>(2008)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등으로 국내에 비교적 배우로 잘 알려진 '마티외 아밀릭'(Mathieu Amalric)은 감독으로도 꽤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칸의 지목을 받은 몇몇 작품인 <온 투어>(2010), <바르바라>(2017), 그리고 제74회 칸 프리미어 초청작인 <홀드 미 타이트>(2021)는 그가 연출가로서 뛰어난 아티스트임을 증명한다.

그런데 <홀드 미 타이트>는 조금 이례적인 작품이다. 미티외 아밀릭은 이 작품에서 그가 주연배우로 등장해왔던 작품들에서 벗어나 거리두기를 행한다. 메타버스가 주요한 코드로 대두되는 시기에 이 영화는 기술의 권능을 의지하지 않는다. 오로지 몽타주에 모든 힘을 집약함으로 불가해한 각각의 시간과 장소를 지시함으로 특권적인 영화가 된다.

 

ⓒ Charles Paulicevich

<홀드 미 타이트>는 주인공 '클라리스'(비키 크립스)가 폴라로이드로 현상된 사진을 정리하다 분에 못 참고 사진을 던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클라리스는 이곳저곳에 흐트러져 있는 사진들을 단번에 엎어버린다. 이 행위는 영화의 제목처럼 한국어로 직역할 때 '나를 꽉 잡아줘'라는 표현은 혼재된 기억들이 얼마나 일관성이 배제된 채 망각되어 있거나 환각 속에 거하는 지를 보여준다. 이는 사진의 배열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클라리스 본인에게 해당하는 말인 동시에 관객인 우리에게 '그녀가 잡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클라리스는 계속해서 분노한 목소리로 "다시"를 외친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구호가 되는 이 말은 자기 성찰과 반성을 서술하는 노력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다시"는 서사의 모호한 행방이 반복하여 구술되어 있다는 형식과 표면적인 일상과 관객이 연대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이 첫 장면에서 보는 이를 자극하는 의구심은 '파편적으로 분산된 기억들이 얼마나 오해와 의혹을 매개로 하는지'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한 원인과 결과(인과관계)라는 틀 안에서 구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몽상하는 것에 가깝다. 영화의 서사는 두 명의 아이와 남편을 떠나는 클라리스로부터 현재와 과거, 혹은 미래인지 모를 장소와 시간을 배회한다. 가정을 떠난 그녀는 번역 일을 하고, 여행 가이드를 하며, 거침없이 다른 남자와 어울리기까지 한다. 이는 생활력이 강한 한 여성이 가부장적인 가정으로부터 자유를 찾는다는 전형적인 로드 무비로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그녀가 집에 있는 아이와 남편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보이스오버로 말을 건네는 장면은 영화가 소환하는 (클라리스의) 가족과의 기억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게 한다.

자아실현을 위해 도피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홀드 미 타이트>가 균일하게 교차시키는 가족 이미지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관객의 입장에서 이러한 교차편집과 그들을 관음하는 몇몇 쇼트는 가족의 관계에 대해 의혹을 품게 한다. 영화 내내 클라리스와 가족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상호작용도 없다.

 

ⓒ Charles Paulicevich

중반부에서 영화의 흐름을 변주하는 사건이 나타난다. 클라리스가 술집에서 우연히 보게 된 스키장 사고에 대한 보도는 계속해서 보였던 그녀의 환영 이미지를 다시금 재고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남편 마크와 아이들은 눈사태로 사망했고, 시신은 얼음과 눈 속 깊이 파묻혀 해빙기가 되었을 때 비로소 수습할 수 있게 된다.

스키장 사고는 클라리스가 경험하는 실제 사건이기도 하면서 영화 안에서 유일하게 가족이란 환영이 '허구'라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시간성을 지목하는 사건이다. 이 사고는 결국 클라리스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형상화하고 있음을 규명한다. 이때부터 사건의 시점과는 관계없이 성장한 아이들의 모습은 오로지 클라리스의 상상 속에 있는 것임을 눈치챌 수 있다.

영화는 클라리스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의도적으로 상정함으로 끝까지 현실과 비현실을 분간하기가 어렵게 배경을 조성한다. 가령 어느새 성숙해진 첫째 딸이 피아노 경연에 나와 클라리스와 만날 때, 딸 주변에 맴도는 여러 가족의 모습은 온전히 가정된 것이다. 이는 실제가 아닌 환영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그녀의 트라우마를 통해 증폭되고 있는 감정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사망했지만, 생존하고 있다는 희망을 의지한 채 분절된 쇼트는 하나의 의미로 접합한다.

다만, 후반부 해빙기가 끝나고 오열하는 클라리스를 보여주는 시퀀스에 이어 다시 돌아온 현실은 비극으로만 점철되지 않는다. 사진을 정리하며 감정을 조절하고, 가족과 함께했던 공간을 떠나는 차 안에서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영화가 끝이 난다. 그들이 함께 거주했던 '집'은 더 이상 가족의 온기는 묻어있지 않지만, 해빙기가 끝나 봄이 된 현실을 통해 희망을 전망한다.

 

기억의 비결정

관객인 우린 <홀드 미 타이트>의 파편화된 기억을 보며 망각하거나 희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그건 관찰자가 연상하는 특정한 장소를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고, 저장된 개인의 기억을 교접하려는 영화적 특성에 관한 반응이기도 하다. 와이드 샷, 롱 테이크 등의 몽타주가 다양하게 변주하는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감독의 의도에 대해 한 번쯤은 사유해보게 된다.

 

ⓒ Charles Paulicevich

<홀드 미 타이트>는 현실재현의 요소인 롱 테이크가 자주 드러나지만 클라리스의 공상은 결국 재현의 요소라기보단 재구성되는 쪽에 가깝다. 이것은 영화가 환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의 전술임을 알 수 있다. 아밀릭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상상과 실제의 미학에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혼란이 가중되는 건 바로 이러한 의도와 결합하여 있다.

러시아 학자 '미하엘 얌폴스키'는 "몽타주는 물질성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이자, 부정의 공백이자, 간격의 공간이며 20세기가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말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빈 공간이 된 집의 창문 틈 사이로 차를 타고 떠나는 클라리스를 잡는 미디엄 숏에는 어떠한 결정도 의미도 없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바로 어떠한 물질성도 없이 자연스럽게 찍힌 숏이다.

물론, 마지막 장면의 제스처가 클라리스의 미소 짓는 표정일지라도 그 공백의 시선에는 여전히 영화적 환영이 맴돈다. 이 환영은 물질적이라기보다 조금 전에도 언급했듯이 '무'에 상응하는 것이다. 관객들에게 결정권을 허가하는 숏은 불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숏은 감독마저도 '모른다'고 말할 듯한 불순하다면 불순한 속성의 것이다.

여기서 몇몇 영화가 떠오른다. 고전으로 거슬러 가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영화인 요아킴 트리에의 <오슬로, 8월 31일>(2011)와 안드레아 아놀드의 <붉은 거리>(2006)의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공허한 시선처럼 느껴지는 이 프레임은 아무 결말도 결정도 없는 잉여 된 공간으로 거주한다. 그것이 누군가의 죽음, 고통 이후 펼쳐진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내부적으로 공명하는 서늘하게 풍광에 의해 흩날리는 풀이나 냉기로 가득해 보이는 공기의 질감에서 주체라 할 건 없다. 이때 보는 자가 주체가 된다.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는 과거보다 미래를 전망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보다 현재를 주목할 따름이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의 목적이 반드시 등가교환규칙으로 관객이 전망하는 무언의 일치되는 이미지가 있지 않다는 것이 주요하다. 내러티브의 통념이 삭제되는 순간 영화는 관객에게 새로운 관계로 인도한다.

 

ⓒ Charles Paulicevich

<홀드 미 타이트>는 사진을 도구로 인간의 경험이 어떤 물리적인 방식을 통해 저장되거나 기록될 수 있는지를 직접 진술하지 않는다.

기억을 복기할 수 있는 '사진'은 과거의 산물이라는 것에서 조작될 수 있다. 그리고 완벽하게 증언되기 위해선 해설자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해설자가 없다. 더군다나 감독이 어느 특정 프레임에 대한 해설을 요청했을 때, '모른다'고 답한다면 이는 관찰자인 관객이 오로지 유추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홀드 미 타이트>는 그러한 프레임의 분산을 전략으로 기억을 비결정인 상태로 둔다. 아말릭 감독은 이와 관련하여 "편집자인 프랑수아 제디지에와 스크린에 무엇이 나오는지는 알지만, 그것을 실제라 믿는 느낌을 염두에 두고 조합했다"고 말했다. 즉, 스크린 뒤엔 아무것도 없으며, 우리가 탐지할 수 있는 것은 유령과 그림자, 사랑과 기억일 뿐이라고 말이다.

기억의 속성이 재현이 아닌 어쩌면 변형에 있다면, 영화는 이를 계속해서 굴절시키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최근 <애프터썬>(2022)이 형식적으로 활용된 캠코더가 기억을 복권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동원된 느낌이 없지 않고, 더 나아가 무용하기까지 보이지만 조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가 있다. 캠코더 화면의 질감만으로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부활하는 기억의 위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몽타주의 결합은 부진하지만, 단순히 캠코더 하나만으로 <애프터썬>은 비평가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과거라기보다 현재형인 <홀드 미 타이트>는 끝으로 보면 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 트라우마적 현존을 응시하게 만든다. 몽타주의 틈 사이로 시간과 장소의 공백을 적절히 조합하고, 영화란 환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아말릭은 어쩌면 가장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Charles Paulicevich

홀드 미 타이트
Hold Me Tight
감독
마티유 아말릭
Mathieu Amalric

 

출연
빅키 크리엡스
Vicky Krieps
뱅상 라코스테Vincent Lacoste
아리 보르탈테르Arieh Worthalter
레티시아 곤잘레즈Laetitia Gonzalez
야엘 포기엘Yael Fogiel

 

제공 MUBI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97분
공개 제74회 칸영화제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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