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에게' 여성이 빼앗긴 공간과 언어
'나의 연인에게' 여성이 빼앗긴 공간과 언어
  • 박정수
  • 승인 2023.03.3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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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은 '자기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을 대표하던 상징적인 건축물 쌍둥이 빌딩이 검은 불길에 휩싸여 붕괴했다. 원인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조종하던 비행기 충돌로, 본 사건은 전 세계에 경악을 안겨다 준 9.11 테러다. 미국의 중동 정책에 반감을 품은 원리주의 무슬림들은 역으로 그들이 미국을 지배하고자 테러를 감행했다. 그런데 9.11 테러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일까, 과연 전조 증상은 없었을까. 

여성학자 베티 리어든은 가부장제에서 여성이나 아이들, 약자를 지배하는 남성 가장의 입김이 스멀스멀 사회로, 국제적으로 불어온 결과가 테러나 전쟁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녀의 논리로 보자면 9.11 테러가 발생하기 전부터 끔찍한 비극의 주도자들은 타인을 지배하는 예행연습을 해 오지 않았을까. <나의 연인에게>는 9.11 테러리스트가 연인에게 가했을 예행연습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 까멜리아이엔티

<투 머더즈>(2013)와 <24주>(2016)로 국내에 알려진 독일 영화감독 '앤 조라 베라치드'는 여성의 몸에서 발생하는 진실에 주목해왔다. 특히나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임신과 출산, 임신 중단을 진지하게 고찰하였다. 그런데 영화 속 여성의 몸에서만 발생하는 일은 결코 순수하게 여성의 몫이 아니었다. 여성에게 개입하며 훼방을 놓는 가부장제가 그녀들의 몸과 일을 불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라치드 작품 속 여성의 몸은 전쟁터다. 여성의 의지와 남성의 월권이 충돌하고, 후자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감독은 남성의 개입 없는 순수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곧 자유를 긍정한다. 

감독은 자신의 여성주의 색채를 신작 <나의 연인에게>(2023)에서도 이어간다. 9.11 테러 주동자에 의해서 제 인생에 테러를 당하는 한 여성의 수모를 묘사하면서 말이다. 주인공 '아슬리'(카난 키르)는 영화 내내 아주 거대하게 보인다. 그녀의 얼굴은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광활한 화면비인 2.35:1에 클로즈업(또는 익스트림 클로즈업) 되어 빼곡하게 스크린에 담긴다. 이러한 감독의 연출은 아슬리의 삶을 프레임을 가득 채우며 오직 그녀만을 반영한다. 그러나 왜인지 그녀가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프레임 내에 물질인 아슬리의 얼굴은 가득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항상 빈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가진 것은 오직 육체뿐이다.

영화에서 이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아슬리가 '사이드'(로저 아자르)에 의해서 베이루트의 시댁에 가게 되었을 때, 침실에서 쉬고 있는 그녀의 육체에서 영혼이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이후 아슬리의 육체가 영혼을 뒤따라가서 한 옷장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사이드의 옷만이 가득하다. 아슬라가 사이드가 입는 껍데기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 까멜리아이엔티

부조종사의 공간과 언어

아슬라가 자기 삶에서 까마득하게 먼 이유, 여성이 영혼을 박탈당하는 원인을 감독은 영화의 원제인 항공기의 '부조종사'를 의미하는 'copilot'을 인용하며 고찰한다.

아슬라는 조종사의 능력을 타고났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조종사가 되길 꿈꾸지만 겁이 많은 사이드는 하늘을 나는 놀이기구에서 하차한다. 반면 아슬리는 용감하게 비행기 놀이기구를 즐긴다. 또 아슬리가 사이드와 사귀는 다섯 번째 해에 사이드는 아슬리에게 실제 비행기를 태워준다. 이윽고 사이드가 비행을 하다가 슬그머니 제 손을 떼고, 아슬리가 조종대를 잡고 운전하게 한다. 아슬리는 불안해하지만, 그녀는 사이드에게 기대지 않더라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비행한다.

그러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조종사가 되는 일, 조종사 여성이 승객 남성을 사랑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기 위해선 스스로를 부조종사로 낮춰야 한다. 이는 충분히 조종사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에도 여성이 남성과의 사랑을 선택한 대가이다.

사이드는 편지에서 아슬리를 '나의 부조종사'라고 호칭한다. 조종사인 사이드는 부조종사인 아슬리에게 날개, 곧 '양팔'을 펴라고 지시한다. 조종사는 부조종사의 몸을 좌우한다. 또 부조종사 아슬리는 조종사 사이드의 '목마'를 탄다. 목마를 태우는 사이드는 아슬리가 착륙해야 할 곳을 결정한다. 

더욱이 사이드는 아슬리와 상의도 않고 베이루트행 '항공권'을 건네고, 아슬리는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사이드에 의해서 베이루트에 가게 된다. 이처럼 영화에서 남성은 여성을 부조종사로 전락시킨다.

 

ⓒ 까멜리아이엔티

<나의 연인에게>는 남성이 여성의 공간과 언어를 좌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이드와 그의 친구 파레스는 독일 유학을 원치 않았다. 사이드는 치의학과 대신 항공학과 진학을, 파레스도 대학을 때려치우고 식당을 차리고 싶다. 지금껏 모두 부모에 의해서 좌우된 삶을 살았지만, 이제 그들은 성인이기에 사이드는 조종사가 되기로, 파레스는 식당을 차리기로 결정한다. 아슬리도 이들처럼 성인이다. 하지만 사이드의 부조종사로 전락한 아슬리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자립할 수 없다. 사이드를 사랑한 아슬리는 자신이 원치 않은 공간인 모스크, 함부르크, 베이루트, 플로리다, 경찰서로 향한다. 남성에 의해 그녀가 있어야 하는 공간이 좌우된다.

조종사 남성이 여성을 착륙시킨 공간에서 여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사이드는 파레스와 함께 폐가에서 창문을 봉해놓은 판자를 떼어내어 '새하얀 빛'이 가득 들어오게 만든다. 이후에도 조종사로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비행하는 남성들은 자연광이 풍부한 창문 부근에 위치한다. 그들은 언제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며, 그들의 자유를 '밝힌다.' 그러나 사이드와 함께 있더라도 아슬리는 항상 어두침침한 그늘에 위치한다. 아슬리는 외부로 향하는 사이드와 달리 어두컴컴한 실내에 주로 머문다.

사이드와 파레스와 같이 영화 속 남성들은 외부로 향해서 식당을 차리기도 하고 조종사가 되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위신을 드높인다. 그러나 아슬리가 밖으로 향하는 일은 시댁에 가거나 사이드를 찾으러 다니는 일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보통의 아슬리는 집에 찾아온 사이드가 언제든지 볼 수 있게끔, 흡사 그가 소유한 사물처럼 집에서 그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만 한다.

프레임을 꽉 채웠던 아슬리의 얼굴이 텅 비어 보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물질뿐이다. 원하지 않은 공간에 가득 찬 그녀의 얼굴에서 영혼은 빠져나가 있다. 그 얼굴은 '자기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 까멜리아이엔티

베라치드 감독은 여성이 언어를 박탈당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아슬리와 사이드는 영어나 독어로 소통할 수 있다. 영어나 독어로 말하는 사이드는 그녀에게 "보고 싶었어", "사랑해", "이젠 안착하고 싶어"와 같은 달콤한 말을 내뱉는다. 그는 그녀와 많은 아이를 낳아서 북적거릴 '미래'를 예견한다. 그러나 이는 연기다. 도입부에서 아슬리가 가르쳐준 '기절 게임'을 사이드가 시도할 때, 그는 기절하지 않았음에도 쓰러진 척 한 것처럼, 듣기 좋은 대사를 구술할 뿐이다.

사이드는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랍어'도 구사하는데, 영어나 독어로 말하는 내용과 아랍어에 담는 내용이 다르다. 사이드가 어머니와 아랍어로 통화할 때, 치의학과 진학은 그의 뜻이 아니라 어머니의 바램임이, 사실 그는 '조종사'를 바랬다는 진실이 드러났다. 또 사이드는 아랍어로 소통하는 익명의 누군가와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통화하며, 아슬리 몰래 예멘으로 갈 꿍꿍이를 꾸민다. 예멘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진실이 영어나 독어에는 담기지 않는다.

문제는 사이드는 영어와 독어로 아슬리를 구슬려놓고, 정작 결혼, 맹세, 약속은 자기만 아는 아랍어로 체결한다는 점이다. 아슬리는 영어와 독어를 쓰는 사이드를 믿고 결혼하지만, 정작 그녀가 해독할 수 없는 '아랍어 서약' 아래서 그와 결혼한다. 사이드가 그녀에게 해석은 해주지만 번역해준 바가 맞는지 단언하지 못한다.

이윽고 사이드의 불명확한 약속은 아슬리를 부조종사로 전락시킨다. 맹세에 따라 아슬리는 맹목적으로 부군의 주장에 찬동한다. 사이드와의 약속에 의해서 시댁에 그가 예멘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그녀는 말할 수 있지만, 그에 의해서 말할 수 없다. 사이드는 겉으로는 아슬리의 바람을 헤아려주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것과 상반된 조항을 여성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체결한다. 사기를 당한 여성은 공간과 언어를 조종사 남성에게 빼앗긴다.

 

불연속되는 여성의 삶

아슬리가 바라는 삶은 남성이 공간을 옮기거나 언어를 박탈함에 자꾸 '끊기곤' 한다. 감독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연속되지 않는 여성의 삶을 편집으로 반영한다. <나의 연인에게>는 아슬리와 사이드가 사귄 5년이라는 시간을 연도별로 다섯 장으로 나눠 구성한다. 영화는 이전 장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 당혹스럽게 어둠이 내려앉는 '블랙아웃 숏'을 활용한다. 블랙아웃 숏은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이전 장과 다음 장을 어둠으로 가로막고 차단한다.

단순히 형식만 그런 것이 아니다. 블랙아웃 이후의 아슬리는 항상 이전 숏으로부터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전 숏에 아슬리가 의대생이었다면, 사이드의 개입으로 블랙아웃 숏이 발생하면서 그녀는 아내로 뒤바뀐다. 반대로 사이드가 사라지면 아슬리가 다시 의대생으로 되돌아가지만, 그가 불현듯 또 나타나면 아슬리는 아내로 이어진다. 이처럼 블랙아웃 숏은 아슬리가 바라는 삶의 단절을 가시화한다.

한편, 2장에서 3장으로의 연결은 유일하게 '페이드아웃'이다. 서서히 부드럽게 사라졌다가 다시 조심스레 나타나는, 흡사 두 숏이 녹아들며 중첩되는 디졸브처럼 섞어 들며 전후가 연속된다. 희소한 페이드아웃은 2장에서 결혼을 마치고 눈을 살포시 감는 아슬리와 3장의 아기 탄생을 이어낸다. 의대생으로서 그녀의 삶은 항상 거칠게 단절되지만, 남성에 의한 여성인 '아내'와 남성과의 결과물만 '아기'만 여성에게 부드럽게 연속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 까멜리아이엔티

감독은 <나의 연인에게>를 통해 가부장제 내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조종사-부조종사로 묘사하고, 조종사 남성이 부조종사 여성에게서 갈취해가는 것들이 공간과 언어라고 진단한다. 그들은 여성에게 테러 예행연습을 한 이후 더 거대한 공간과 언어를 침략한다. 그 과정을 블랙아웃 숏을 활용한 편집으로 가시화하는 베라치드 감독은 안주하지 않고 더 나아간다. 

4장에서 5장까지의 블랙아웃 숏은 사이드에 의해서 불발되는 아슬리의 자유와 소망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5장 말미에 발생하는 블랙아웃 숏은 다르다. 어머니가 아슬리에게 사이드를 아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아슬리는 답하지 않고 블랙아웃 숏이 출현한다. 이후 그와 함께한 시절의 긴 머리를 짧게 친 그녀가 나타난다. '사이드에 의한, 그를 아는 여성'을 단절한다. 대신 이어지는 것은 '사이드와 무관한, 그를 모르는 여성'이다.

결말에서 그 여성은 다량의 거울이 위치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현실에 아슬리의 육체가 있고, 거울 속에 네 명의 아슬리가 복제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복제된 아슬리는 원본 아슬리의 행동을 따라하지 않는다.

원본(본래의) 아슬리가 사이드의 편지에 몰두해있는 반면, 거울에 의해 복제된 아슬리는 사이드의 편지를 떨어트리고 대신 원본 아슬리를 바라본다. 그 네 명의 아슬리는 무엇인가, 앞서 아슬리의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온 것을 비추어보면, 지금껏 빠져나온 아슬리의 영혼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블랙아웃 숏이 네 차례가량 사용된 만큼, 그 횟수에 맞춰 빠져나온 아슬리의 영혼이다. 그 영혼들이 제 육체를 응시한다.

사이드에 의해서 육체를 잃어버린 아슬리의 영혼들은 제 육체를 돌려받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슬리의 육체는 여전히 망설인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조종사일 수 있는 여성은 분명 자신에게 가장 옳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 까멜리아이엔티

나의 연인에게 
Copilot
감독
앤 조라 베라치드
Anne Zohra Berrached

 

출연
카난 키르
Canan Kir
로저 아자르Roger Azar
다리나 엘 준디Darina El Joundi
외차이 페히트Ozay Fecht
세시 추Ceci Chuh

 

수입 씨네블루밍
배급 까멜리아이엔티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19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3.29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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