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엘리사와 마르셀라' 현재로 되돌아온 편지 같은
[NETFLIX] '엘리사와 마르셀라' 현재로 되돌아온 편지 같은
  • 이현동
  • 승인 2023.03.2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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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에 대한 재현과 시대적 고찰 사이를 감찰해보기"
ⓒ 넷플릭스(NETFLIX)

동성애 영화의 내러티브는 비교적 단순하다. 주로 현실에서 경험하게 되는 불능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타파하려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는 <엘리사와 마르셀라>(2019)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형태는 개괄식이 아니다. 형태를 세공하는 감독의 몫은 온전히 형식의 구현을 그 목적으로 한다. 몽타주의 활용, 리얼리즘을 위한 롱테이크 등은, 동성애 영화이기 전에 얼마나 '영화적'인가 '실제적'인가라는 물음을 대동하는 것이긴 하다. 가령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와 토드 헤인즈 <캐롤>(2016)가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전혀 다른 형질의 영화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엘리사와 마르셀라>는 후자에 가깝다.

 

<엘리사와 마르셀라>의 첫 장면에서 보이는 '두 여성이 희미하게 중첩된 뒷모습'은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하는 메타포이다. 이것은 둘의 육체, 정신적인 연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특정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희미한 궤적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이어서 한 여성이 뱉은 "난 누구지"라는 물음은 명증하게도 두괄식이다. 동성애 영화라는 점을 염두 한다면 여성이란 성별에는 변함이 없지만, 여성이 여성을 사랑할 때 생성되는 최초의 물음인 것이다. 이 문장이 열거되고 관객에게 접착될 때까지 이미지는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격렬하든, 느슨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내레이션을 읊조리는 이 여성의 목소리는 기차를 타고 있는 다른 여성을 향한다. 그녀가 마주한 한 초췌한 노년 여성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 영화는 인물의 얼굴을 먼저 등장시키지 않고, 나무(현재)와 꽃(과거)을 그 프레임 사이에 집어넣는다. 이처럼 시간성이 인물이 아닌 특정한 시대로 환원시키지 않는 '자연의 물성'의 활용은 비결정적이기도 하고 중립적인 요소의 삽입으로 볼 수 있다. 이 같은 방법은 시간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엘리사와 마르셀라>가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 넷플릭스(NETFLIX)

스페인 라코루냐 1898년을 명시하는 자막과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선 여성 마르셀라(그레타 페르난데스)는 엘리사(나탈리아 데 몰리나)를 마주친다. 한동안 아파서 출석을 못 한 마르셀라의 딱한 사정을 듣고 엘리사는 그녀의 학교생활을 돕고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사뭇 둘의 성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엘리사는 학교를 운영하는 이모 밑에서 성장하고 마르셀라는 고아원에서 다시 데리러 온 현재의 부모가 실부모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엘리사는 금기가 되는 신앙을 부정하거나 수녀와 사제를 험담하는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나눌 정도로 종교에 관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반면에 수동적인 마르셀라는 그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못하면서도 그녀의 매력에 강하게 이끌린다. 당당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엘리사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학대당하는 마르셀라의 간극 속에서 이 영화가 담는 사랑의 형태는 담담하면서도 무척이나 진보적이다.

엘리사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다고 여기는 순간이 바다에서 함께 물장구를 치며 노는 시간이라 말한다. 이 장면에서 앵글은 흥미롭다. 전체를 부각하기 위해 부감으로 촬영하지 않고 로우로 촬영했다. 물에 빠져있는 듯한 카메라는 둘을 정확하게 잡아내지 못한다. 움직임을 포착하기엔 부정확하긴 하지만 둘의 감정을 가장 생동감 있게 표출한 장면이다.

여기서 첫 장면 이후 천천히 익스트림 롱 쇼트로 보여주는 바다를 기억한다면, 이 장면과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시선의 영역'으로 복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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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엘리사와 마르셀라의 사랑은 번번이 가로막힌다. 문 앞에서 둘의 입맞춤을 하는 것을 목격한 마르셀라의 부모는 따귀를 때리고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학교를 전학하라며 강하게 압박하는 부모의 말을 듣고 둘은 수년간 만나지 못한다. 시간이 흘러 가족들로부터 해방된 둘은 교사로 활동하게 되면서 동거를 시작한다. 학생이었을 때는 이뤄지지 않았던 정사 장면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중반부는 감정의 연대를 축적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둘의 동거는 비밀스럽게 진행되었을지라도 외부의 시선에서 체감할 수 있는 건 단순히 우정이 아니었다. 여기서도 둘의 만남을 방해하고 의심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마르셀라를 의심하고 있었던 한 남성은 동료들을 불러 돌로 가격한다. 이때 엘리사와 마르셀라는 꾀를 내어 둘 중 한명을 남자로 둔갑하여 의심을 종결하려 한다. 심지어 둘은 '정상 부부'로 보이기 위해 마을 남자를 이용해 임신을 하기도 한다. 이제는 새로운 이름 마리오를 가진 마르셀라는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세례를 받고 결혼하는 계획을 실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임 신부의 의심을 받고 정체가 탄로 난 마르셀라와 엘리사는 언론을 타고 화제가 된다.

몰래 포르투갈로 떠난 그들이 도주 경로 확보를 위해 각자 일을 하지만, 그곳에서 체포된 둘은 결국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만난 교도소장은 둘의 사정을 고려해 함께 수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모순되게도 이 영화에서 가장 따뜻한 공간은 감옥이라는 것은 우화 같기도 하지만, 서사의 극적 요소를 부여하는 모범적인 양식처럼 보인다. 안젤라는 감옥에서 출산하고, 폐렴이 걸린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치료하기도 한다. 그리고 완전한 탈옥을 완성하기 위해 석방 날짜를 조작하자는 권유하는 교도소장은 차별과 혐오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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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엘리사와 마르셀라>의 플롯은 의심-이별, 의심-은폐, 의심-체포라는 다소 규칙적인 리듬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서사를 강력하게 조직하기 위해 필요한 건 형식의 매끈함이다. 그런데 이것을 영화에 잘 접목하기 위해 동원된 형식과 과정들을 결과적으로 온전히 성취해냈는가를 자문해보자면 긍정적으로만 답하기엔 어렵다.

우선, <엘리사와 마르셀라>가 스페인에서 최초로 동성애 커플의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을 유념해보자. 서두에 "실화에 기반을 두었다"는 공식적인 자막은 사뭇 전형적으로 여겨지는 말이긴 하지만, 이것은 '영화'가 실제라는 선포와 동시에 믿음을 갖게 한다. 그 믿음에 부합하기 위해 영화가 도입하는 몇 가지의 오브제는 단순히 이 영화가 개인적인 '동성애'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만 읽히지 않는다. 몇몇 장면에서 옛 필름 카메라의 아카이브가 삽입되고, 다시 디지털로 복권되는 이미지의 변용은 꽤 유의미한데, 이는 서사를 이끌어가는 방향 자체가 플래시백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필름 촬영과 디지털 촬영을 이어 붙이는 건 엄밀하게 말해 시선의 문제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피안으로 관측되는 필름이 갖고 있는 고유의 점망들은 결국 시선의 문제를 현재로 돌아와 복기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 영화에서의 현재 시점, 그리고 과거라는 시간을 조합하는 이미지는 결과적으로 사건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다. 다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문제가 된다. 모든 영화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구속하는 아이러니는 영화에서 쌓아 올렸던 탐미적인 형식을 간과할 만큼 현대에서의 의미를 소홀하게 끌고 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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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에 "스페인의 동성혼은 2005년에 합법화됐다"는 자막이 그 사례다. 영화가 이 자막을 위해 소비된 것처럼 과도한 목적성을 부여함으로 둘의 밀도 높았던 애정이 소거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결말에 있어 말을 끌고 오는 엘리사가 딸과 마르셀라에게 다가오는 마지막 장면은 충분한 감응을 끌어낼 수 있었지만, 결국 <엘리사와 마르셀라>의 여운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닌 연대에 대한 소비적인 양상으로 치환된다. 영화는 현재 동성애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의 애정을 다룬 사진을 배열함으로 서사 자체로 설득하려는 시도를 도중에 포기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끝으로 <엘리사와 마르셀라>를 보면서, 지난해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감상한 프랑스 영화가독 로뱅 훈징어(Robin hunzinger)의 다큐멘터리 <숨겨진 편지, 그리고 사랑>(2021)이 떠올랐다. 감독은 돌아가신 할머니의 어린 시절 편지 내용을 여기저기에서 저장되었던 영상 아카이브들을 수집하여 움직이는 형상으로 다시금 복권하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몽타주를 조합하는 선별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여기서 서로 다른 출처의 아카이브들이 굉장히 무질서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생명력과 질감들을 역동적으로 재현한 영화가 공언하는 건 공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에 가깝다는 측면에서 이미지는 개인적일수록 인상에 깊이 보관된다.

<엘리사와 마르셀라>는 두 명의 개인적인 서사에서 여백은 없다. 결말에 채워놓은 그 한 단락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과연 사회과학 담론의 여지를 만들어야했을까. 그렇다면 제목부터 잘못된 건 아닐까. '혁명'적인 <그녀들> 정도로 하면 되지 않았을까.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넷플릭스(NETFLIX)

엘리사와 마르셀라 
Elisa & Marcela
감독
이자벨 코이젯트
Isabel Coixet

 

출연
그레타 페르난데스
Greta Fernandez
사라 카사스노바스Sara Casasnovas
타마르 노바스Tamar Novas
프란세스크 오렐라Francesc Orella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19
상영시간 118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공개 2019.06.07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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