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빨간 보름달 아래서 깨어나는 인간의 자유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빨간 보름달 아래서 깨어나는 인간의 자유
  • 박정수
  • 승인 2023.03.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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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배하거나 당하지 아니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때때로 인류는 달이 지구의 그림자 속으로 숨는 월식을 접한다. 월식은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이 되는 바로 그 순간에만 성립하기에 진귀하다. 안 그래도 희귀한 월식, 그런데 월식 중에서도 더욱 희귀한 적월(blood moon) 현상이 이따금씩 발생한다. 이 적월이 너무 신비로웠던 나머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에 대한 전설과 신화를 무수히 만들어냈다. 그런데 대체로 이 설화들은 부정적이었다. 많은 문화권에서 적월을 보고 피를 연상하였기에, 혹 피가 구체적으로 암시되지 않더라도 적월의 빨간색은 폭력적이고 불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나 릴리 아미푸르'는 이 적월에 대한 부정적인 믿음을 신작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에서 뒤집는다.

영국 출신의 애나 릴리 아미푸르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영화감독이다. 아미푸르는 청각에 경미한 장애가 있어 청각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풍부한 대사보다는, 시각으로 대신 말하는 작법을 선택하기에 다소 듬성듬성한 느낌의 연출이 특징이다. 또 과감하게 터부를 뛰어넘는 탐미적인 연출이 그녀만의 색채이다. 그녀는 이러한 연출로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영화를 선보인다. 국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그녀의 두 장편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2014), <더 배드 배치>(2016)에선 초자연적 존재 '뱀파이어'가 등장하거나, 현실의 특정 시공간과 조응하지 않는 '생지옥'이 펼쳐진다.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존재와 세계를 보여주는 아미푸르, 그러나 감독에게 영화 속 초자연성, 비현실성은 현실에서 분명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생지옥엔 현실 속 변두리로 내몰린 타자·약자들의 삶이 반영된다. 그녀의 생지옥은 실재한다. 그러나 초자연적 존재도 존재해야만 한다. 초자연적 존재는 그녀의 영화에서 사랑과 자유를 가르치며 절망적인 세상을 한 꺼풀 정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 세상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보이게 만드는 아미푸르. 그녀의 시선에서 이 시대는 자유와 사랑을 가르치는 존재가 초자연적인 존재로 전락할 정도로 타락했고 곪아있다.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에는 제이 리빙스톤과 레이 에반스가 부른 '모나리자'라는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신비로운 미소를 가진 모나리자, 그녀는 외롭기 때문에, 아니면 마음의 상처를 가졌기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여기서  그녀의 표정을 가수가 주관적으로 유추하고 있다.

본 노래의 기원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1503)는 미술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초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 빈치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연기처럼'을 의미하는 이탈리아 단어이다. 다 빈치는 단어의 의미처럼 대상의 윤곽과 색채를 희뿌옇고 불명확하게 처리했다)으로 그려진 「모나리자」는 금방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아스라함이 특징이다.

또 다 빈치는 인간을 표현할 때 분명하지 않은 동작과 표정을 선호하였기에, 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인식이 단언에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감상자에겐 친절하지 않은 작품이지만, 한편으로 작품에 담긴 모델에겐 매우 친절한 표현일 수 있다.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불분명함, 불확정성이 자신에게 자유로운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는 흔히 감상자를 유혹하는 신묘한 작품이라 일컬어지지만, 그 유혹이 작품의 모델이 의도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다 빈치는 단지 타인의 인식에 봉사하지 않는 자유로운 표정을 「모나리자」에서 묘사한 것뿐이다.

타인을 위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하는 자유는 타인 입장에서 불분명하여 신비롭다. 타인은 대상의 신비에 매혹됨과 더불어, 신비로움을 밝혀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를 몰아내고자 작품을 주관적으로 규정하려할 테다. 그것이 영화에 삽입되는 '모나리자'라는 음악이랴. 그런데 과연 그 시도가 「모나리자」라는 작품과 모델을 존중하는 일인지는 의문이다.

 

지배와 자유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의 '모나'(전종서)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자유롭고 신비로워서 여러 인물들이 그녀에게 매혹되고 심지어 지배된다. 물론, 모두가 모나에게 홀리진 않는다. 영화에는 지배되는 사람과 지배되지 않는 사람이 구분된다. 가령 영화에선 모나리자의 손발톱을 깎으려던 간호사, 프런트에서 과자를 먹고 있던 간호사, 그녀를 체포하려는 경찰 헤롤드, 보니벨에게 싸움을 거는 아이린이 모나에게 지배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모순적이게도 모나를 지배하려 했지만, 역으로 모나에게 지배된다.(이들은 지배당하는 과정에서 '음식을 빼앗긴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포박된 모나나 수술을 앞둔 보니벨, 만만한 꼬맹이 찰리만 쥐 잡듯이 잡는다. 이들은 자신보다 유약한 약자들을 착취하며 스스로를 강자로 드높인다. 아이린 또한 신체적으로 우위인 남자친구 레이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는 반면, 그가 눈길을 준 보니벨에게 괜히 시비를 튼다. 신체적으로 비슷하거나 만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나는 다르다. 타인에게 의존하며 음식을 받아내지 않고, 또 빼앗기지 않는다. 더욱이 상대가 공격하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지배하려는 저들과 달리, 모나리자는 자신이 위협당하지 않는다면 선뜻 공격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모나는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강인하다. 반면 타인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은 언뜻 보기엔 강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나약하다. 간호사·경찰 모두 상부가 행동을 지시하고 그 책임을 위에서 져준다. 타인이 책임을 대신 짊어지는 이들은 자유를 몸소 감당하기에 나약하므로, 자유를 퍼뜨리는 자들을 탄압한다. 또 유약하고 결함이 있기에 더 약한 타인들을 착취하며 만족감을 얻는다. 그렇게 유약하여 지배받고 있기에, 더 강한 모나에게 쉽게 휘둘린다. 모나를 지배하려는 사람들은 사실 그녀를 두려워했다. 그녀의 예측불허한 자유가 말이다. 그래서 그림 '모나리자'를 해석하려는 OST '모나리자'의 가사처럼 그녀를 통제하려 했다. 지배는 타인의 자유의지를 착취하고 억제하여 자신만의 배를 불리는 해악이다. 영화 속 TV에서 송출되는 안보 위기와 전쟁은 국가의 지배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니벨, 찰리, 퍼지는 모나에게 지배당하지 않는다, 찰리와 퍼지는 그녀를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매우 주체적이기 때문에, 타인의 지배가 파고들 틈이 없다. 보니벨은 아이린이 자신에게 덤벼도 쉽게 굴복하지 않고, 헤롤드가 꾸짖어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제 의견을 피력하며, 미혼모로서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로 꿋꿋하게 찰리를 길러낸다. 찰리는 아직 어리지만, 본인이 입을 옷은 스스로 빨아서 입는다. 퍼지는 어두운 밤임에도 빛날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독창적인 형광으로 구축한 주체적인 사람이다. 자유롭기에 진정 강한 이들은 상대를 위협적으로 보기 보다는 좋아하며 포용한다. 이들에겐 너그러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나가 정신병원에서 갓 탈출했을 당시 길거리의 어느 밴드가 그녀를 위해 신발과 먹을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처럼.

여기서 주목할 만한 장면은 퍼지가 모나의 신분증을 만들어주는 장면이다. 모나를 사랑하는 퍼지는 국가가 발행하는 신분증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신분증을 만든다. 이때 이름을 묻는다. 타인의 판단에 의해 꼬마, 마약상, 중국인이었던 그들은 '꼬마가 아닌 찰리', '마약상이 아니라 DJ 퍼지',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 모나리자'로 서로를 밝힌다.

 

그런 이들은 보름달에 전율한다. 모나는 내내 잠들어 있다가 보름달에, 그것도 적월에 깨어난다. 또 보니벨은 보름달이 뜨는 날엔 자궁이 차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즉 자유로운 사람들은 달이 보름에 자신의 온 형체를 회복하고 빈틈을 없애듯, 보름달처럼 온몸과 정신에 스스로를 꽉 채워 타인이 파고들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도 적월의 색채처럼 자신의 피와 살을 오롯이 회복한다. 반대로 지배를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양이 보름달이 아닐 것이랴. 타인의 지배가 파고들 수 있을 만큼 틈이 있고, 제 몸이 온전치 않으리라, 반달이나 그믐달에 가까우리.

보름달에 깨어나는 자유로운 사람들, 이와 동시에 모나리자는 월식에 해방된다. 월식 이전에 모나리자는 깨어나지도 않았고, 사람들은 그녀에게 지배당하지도 않았다. 월식은 무엇을 상징할까. 이를 가늠하기 위해선 모나의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모나의 서류에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했다고 적혀있다. 모종의 이유로 국가를 떠났는데, 이후 TV에 트럼프-김정은이 송출되는 것을 상징으로 본다면, 한국인인 그녀가 도망친 대상은 북한, 곧 독재였을지 모른다. 독재 국가를 떠났으나 이후 미국에 지배되어 폐쇄병동에 갇힌다. 그러나 월식이 일어나며 기존의 달이 그림자에 가리고 모나리자가 깨어난다. 그렇다면 그림자에 가린 것은 다름 아닌 국가가 아닐까. 일반적으로 인간이 지배받는 대상은 국가다. 그 국가의 시선을 그림자로 가릴 때, 진정 주체적인 자신을 회복할 수 있다. 모나는 독재 국가를 떠났으나, 그렇다고 해서 망명한 미국에 마냥 지배당하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써 진정 자유롭다.

아미푸르는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에서 적월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긍정적으로 뒤집는다. 아미푸르는 적월을 보며 제 피와 살에 솔직한 인간의 자유를 연상한다. 그 자유는 다 빈치의 신비롭고도 자유로운 작품 「모나리자」를 인용한다. 하지만 단순히 외부 장치, 작품에만 의존하지 않는 그녀 고유의 연출이 매혹적이다. 이는 모나가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이 담긴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모나가 간호사나 헤롤드, 아이린 등을 지배할 때, 이와 동시에 자신은 해방될 때, 이들의 얼굴을 줌인으로 밀착한다. 모나는 그녀 자신에게, 비로소 자유에 가까워진다. 반면 간호사는 모나리자에게 클로즈업되는 만큼 본래 머물던 공간과 멀어지고, 기묘한 카메라 워킹에 의해 공간은 흔들리고 일렁인다. 그간 양자를 지배하던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모나 마음대로 이를 규정한다. 아미푸르는 보니벨의 관능적인 춤을 클로즈업하고, 퍼지의 개인 공간을 휘황한 형광 미장센으로 승화하여 감상자가 감각적인 숏에서 눈을 못 떼게 만든다.

아미푸르에게 진정 아름다운 것은 '자유'다. 스크린을 통해 펼쳐진 자신에게 밀착한 존재들이 아름답다. 그렇게 인간은 나 자신에게 가까워져야 한다.

[글 박정수 영화전문기자, green1022@ccoart.com]

 

ⓒ 판씨네마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Mona Lisa and the Blood Moon
감독
애나 릴리 아미푸르
Ana Lily AMIRPOUR

 

출연
전종서
케이트 허드슨Kate Hudson
크레이그 로빈슨Craig Robinson
에드 스크레인Ed Skrein
마이클 카롤로Michael Carollo
에반 휘튼Evan Whitten

 

수입|배급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3.22

박정수
박정수
예술은 현실과 차별화된 고유하고도 독립적인 차원입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타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술만의, 오직 영화만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동시에 영화는 현실에서 비롯되고, 인간에게 이바지합니다. 그렇기에 현실-예술, 인간-영화를 이어내는 교두보와 같은 글을 제공하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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