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의 (아날로그) 사랑 ['6번 칸' #1]
코로나19 시대의 (아날로그) 사랑 ['6번 칸' #1]
  • 김경수
  • 승인 2023.03.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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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영화는 시작부터 '소외감'을 드러내며 시작한다. 모스크바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하는 핀란드 출신 학생 '라우라'(세이디 할라)는 애인 '이리나'(디나라 드루카로바)와 동거중이다. 집에는 파티가 한창이며, 이리나는 손님들 한가운데에서 퀴즈를 내고 있다. 라우라는 그들 사이에 스리슬쩍 끼려 하지만 존재감이 뚜렷하지는 않다.

이때, 라우라와 이리나의 성격 차이가 선명히 묘사된다. 내향적인 라우라는 사교적인 이리나의 세계에 있을 수 없다. 마릴린 먼로의 말을 인용한 이리나의 대사로 둘의 관계는 되풀이된다. "상대와 나는 서로의 일부로만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은 공간과 육체만 공유할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어떤 교류도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다. 심지어 갑을 관계로 보이기까지 한다.

라우라와 이리나는 바위에 그림이 새겨진 고대 암각화를 보러 무르만스크에 갈 예정이었다. 암각화는 만 년 전에 그림이 새겨진 바위로, 라우라는 그 그림을 보러 가는 데 열정적이다. 하필, 이리나가 바쁘다면서 여행을 취소하게 되고, 라우라 혼자 여행길에 오른다. 라우라는 열차 '6번 칸'에서 술에 취한 채로 폭언을 쏟아붓는 '료하'(유리 보라소프)를 만나 혼란스러워한다. 처음 라우라는 료하를 피하더니 차츰 투박하고도 순진한 진면목을 알아가면서 그에게 매료되기 시작한다.

<6번 칸>은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2016)로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대상을 탄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신작으로, 2022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우연한 만남과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하기의 과정을 그리는 이 영화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선라이즈>(1995)를 연상시킨다.

 

ⓒ 싸이더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전작에 이어서 <6번 칸> 역시 '아날로그'에 주목한다.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은 시합 전날 사랑에 빠진 핀란드의 복싱 챔피언인 올리 마키의 실화를 바탕으로, 1962년이라는 시공간을 그려낸 로맨스다. 뻔하고 동화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설정에 개성을 더하는 것은 다름 아닌 '흑백 16mm 필름'이다. 디지털 영화가 표준이 된 세계에 16mm 필름이 자아내는 마법은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 영화에 담긴 모든 것이 '과거에 불과하다'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복서 올리 마키가 프로의 세계를 떠나서 일상성을 회복하는 시간은 그래서 더 소중한 것으로 다가온다.

유호 쿠오스마넨은 '아날로그가 만드는 마법의 힘'을 신뢰하는 감독이다. 매체는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장치고, 그 장치에 따라서 메시지가 달라지기 마련. 자칫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 그것이 시대착오적일 경우에 레트로라는 이름의 매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6번 칸>에서 라우라가 'VHS 캠코더' 등의 매체로 담아내는 영화 속 러시아의 풍경은, 사실 지금의 것인데도 왜인지 모르게 아득한 과거로 느껴진다.

다소 뻔한 이야기일지라도 매체가 만드는 감흥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알고 있다. VHS 캠코더가 나오는 장면마다 사적이라 느껴지고, 에세이 영화와 같은 톤으로 연출되는 것은 분명 그 매체가 가진 마력 때문이다.

 

ⓒ 싸이더스

전작과 마찬가지로 아날로그에 대한 무한한 순정이 담긴 <6번 칸>은 199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이때는 아날로그 매체의 전성기가 막 끝나갈 무렵이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1999)이 말미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영화는 막 밀레니엄 시기가 도래하는 Y2K 시기쯤으로 보인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소련 붕괴 등 복잡한 여러 정치적인 맥락을 소거한 채로 '아날로그 매체'에 주목한다. 1999년대는 워크맨과 VHS 캠코더, CD플레이어 등 이전까지는 고정된 자리에서 재생되었던 기기가 서서히 휴대할 수 있는 크기로 소량화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라우라가 '워크맨'과 'VHS 캠코더'를 제 몸의 일부처럼 들고 다니는 모습은 이러한 맥락에서 상징적이다.

반대로 료하는 아날로그와 먼 거리에 있는, 그보다 더욱 옛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라우라가 대학에서 공부한 지식인인 데에 비해서 료하는 뚜렷한 삶의 목적 없이 여기저기를 방랑하는 블루칼라 노동자다. 둘은 다른 언어를 쓰고 사고방식마저도 다르다. 영화는 6번 칸에서 둘을 억지로 부대끼게 한다.

라우라와 료하의 만남은 단순히 두 개인의 만남으로 그치지 않는다. 소통에 쓰이는 매체에 따라서 구성되는 두 시대적 감수성과 생활방식이 충돌하는 순간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전작이 과거에 사라진 가치를 재현하는 데에 그친다면, <6번 칸>은 두 가치를 대결하게끔 하며, 둘 사이의 접점을 발견하는 지점에 다다른다.

 

ⓒ 싸이더스

사실, 전혀 다른 두 인물의 만남은 이미 익숙한 고전 이야기이다. <6번 칸>이 참고하고 있는 <비포 선라이즈>와 <타이타닉>만 해도 1990년대의 산물이다. 물리적인 공간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소재로 하고, 그들의 내면이 풍경으로 드러나는 두 영화의 스타일은 이제는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보인다. 

하지만 휴대폰과 SNS가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그 만남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SNS에서의 만남은 취향이나 계급, 정치적인 의견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만나게 되는 게토화에 부딪힌다. 더 나아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은 이 상황을 한층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만 이루어지기에, 우연 대신에 알고리즘이나 자의적 선택에 의한 만남만 가능해진 것이다.

매체에 따라서 만남의 방식이 달라지는 상황은, 동시대 여러 감독에게 난제를 안겼다. 편지라는 고전적 매체를 소재로 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2020)에서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핸드폰을 욕조에 빠뜨려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극을 이끈다. 우연한 만남을 다루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2021) 1부에서는 스마트폰이 등장하지 않으며, 3부에서는 인터넷이 사라지기도 한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매체를 폐기하는 방식을 택하는 대신에, 아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를 택한다. 이는 매체라는 문제를 안 건드리고도 그것을 직접 다룰 수 있는 통로이어서다. <6번 칸>은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디지털 매체의 전성기가 도래하기 직전에 있는 연인의 사랑으로, 동시대의 매체 상황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을 마련한다. 나아가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의 만남을 생각하게끔 한다.

 

라우라가 료하와 처음 만나는 순간 보인 반응은 제법 눈여겨 볼만하다. 라우라는 몸을 팔러 가냐는 료하의 폭언을 견디다 못해 곧장 워크맨을 틀어서 헤드폰을 쓴다.

헤드폰은 곧장 료하와의 소통을 차단하고, 전에 듣던 음악을 다시 되새기게끔 한다. 캠코더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료하와 한 방에 있는데도 캠코더로 이리나와의 기억을 되새기기도 한다. 이때, 캠코더 너머 언제 어디서든 사람을 모아야만 제 정체성을 지닐 수 있는 이리나는 SNS 인플루언서의 원형으로도 보인다. 라우라는 인플루언서의 삶을 동경하고 거기에 동화되고자 하기에 자아정체성에 혼란을 경험한다.

한편, 라우라는 캠코더로 찍은 영상으로 추억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암각화를 기어이 보고자 하는 그녀의 열정은 이리나와의 감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몸부림에서 비롯된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열차에서 내릴 때마다 이리나와 공중전화기로 통화하려 하지만, 이뤄지지 못한다. 그녀 혼자만 그러한 삶에 목메는 셈이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이처럼 스마트폰 등의 기기로 인해 구성된 삶의 기원을 '아날로그'에서 발견하려 한다. 라우라는 삶을 그대로 살아가려는 료하와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의 행보를 따라 우연히 만난 여러 사람으로 인해서 자신이 현명하고, 독립적인 존재임을 깨닫는다.

 

ⓒ 싸이더스

그러던 와중 영화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우연히 합석하게 된 음악가가 라우라의 캠코더를 훔쳐 가고, 그녀는 절망한다. 그녀는 이리나에게 자신이 본 풍경을 공유하고자 했다.

이미 라우라는 이리나와의 관계가 끝난 것을 직감하고, 러시아의 공허한 풍경만을 담는 중이었다. 그녀는 풍경을 통해서 이리나가 없는 자신의 내면을 기록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공허감에 허덕이는 대신 료하와의 사랑을 택한다. 여기서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이 동시대의 이미지를 마주하는 관점이 선명히 드러난다.

이미지는 원래부터 우울의 산물이다. 재현 행위가 이미 부재한 것에 형상을 더하고, 그것에 감정을 투사하는 일이기 때문. 물리 매체에 기록된 이미지는 진즉에 지나간 것이고, 그것을 보는 일은 우울을 유발한다. 상대방의 짜깁기된 삶, 혹은 자신의 짜깁기된 삶을 보고는 우울증에 잠기는 감정은 이미 인스타그램 우울증이라는 말로 유행하고 있다.

료하는 라우라가 담은 풍경을 "암각화인지 뭔지"라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이미 라우라가 이리나에게 마음을 접은 상태이므로, 캠코더에 무엇이 있는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다.

 

ⓒ 싸이더스

끝으로 암각화를 보러 가기 전, 라우라와 료하가 서로를 어긋난 그림으로 그리고 기억하는 것은 상징적이다. 기계장치를 경유해서 상대를 정확히 담는 사진 이후의 매체를 정확히 거스르고 있다. 영화는 물리 매체가 너무도 기억을 정확하게 담기에 오히려 문제적이라 이야기하는 듯하다.

화면 바깥의 삶은 불확실성과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때로 말이나 물질로 남겨지지 않는 기억도 있다는 것을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역설한다. 시간을 뒤로 돌려서 감독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직면해 있는 코로나19 이전 상황일 것이다. 감독이 두 인물의 대화로, <타이타닉>으로 밀레니엄의 도래를 알 수 없는 미래로 지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1999년에서 2000년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연인의 모습은 어쩐지 코로나19가 닥치는지도 모르는 채로 2019년에서 2020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우리의 모습과도 같다. 20년이라는 시차로 이 둘 사이에는 왜인지 모를 유비관계가 생긴다.

<6번 칸>은 코로나19 시대에 급작스레 다가온 비대면 상황 이후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은 우리가 우연과 불확실성을 그대로 마주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또한 한편으로 이 영화가 개봉한 뒤에 생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서 우리가 다시는 러시아에 가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우연하게도 영화의 상황과 맞물린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시대 속에서 '영화'는 얼굴을 가장 정확히 비추는 매체로 그 힘을 드러낸다. 료하와 끝내 헤어지고 마는 라우라의 쓸쓸한 표정을 도저히 잊기가 힘들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싸이더스

 

6번 칸
Compartment No.6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
Juho Kuosmanen

 

출연
세이디 하를라
Seidi Haarla
유리 보리소프Yuriy Borisov
율리야 아우크Yuliya Aug
디나라 드루카로바Dinara Drukarova
폴리나 아우그Polina Aug
갈리나 페트로바Galina Petrova

 

수입|배급 싸이더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3.08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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