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6번 칸>은 202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그의 전작이자 첫 번째 장편인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2016)은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상영되어 대상을 수상했다. 유럽의 감독이라고 해도 첫 번째 장편 영화가 칸의 경쟁부문이나 주목할만한 시선에 상영되는 것은 꽤나 드문 일이다. 그는 첫 번째 장편의 성공에 힘입어 두 번째 장편으로 빠르게 경쟁 부문에 진입하였고,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스웨덴의 루벤 외스틀룬드와 더불어 칸이 선택한 북유럽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명백한 온도의 차이는 있다.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2022)이나 <스퀘어>(2017)가 현실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냉소적이고 지적인 영화라면, 쿠오스마넨의 영화는 종종 자동차 불빛이나 가로등의 불빛들이 집이나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포착한다.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에서 주인공 '올리'(야르코 라흐티)를 지켜보던 연인이 말없이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홀로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에서 이러한 연출이 등장한다. <6번 칸>에서는 기차의 창밖으로 명멸하는 빛의 산란이 라우라의 캠코더에 담기거나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라우라'(세이디 하를라)의 시선이 종종 등장한다. 두 감독의 영화 모두 북유럽의 차가운 공기를 깔고 있지만 공기를 품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6번 칸>은 모스크바의 하숙생 '라우라'가 무르만스크의 암각화를 보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으로 전반부를 채운다. 러시아어를 배우러 온 핀란드 유학생 라우라는 집주인 '이리나'와 연인 사이다. 암각화를 보는 여정을 계획한 것은 이리나 때문(으로 짐작된다)이었다. 영화 첫 장면인 홈파티에서 이리나는 한 교수에게 라우라를 소개하며, 내일 암각화를 보러 간다고 신나게 떠벌린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이리나는 모스크바에 남고, 라우라만이 기차에 오른다.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없음을 대수롭지 않게 보여주며 시작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시간이 끝나고 있음을 서늘하게 드리운다.
라우라가 탑승한 무르만스크행 기차의 2등석은 객실로 분리가 되어 있는 구조다. 그런데 6번칸에 러시아 남자 '료하'(유리 보리소프)가 탑승을 하며 문제가 생긴다. 두 사람만이 객실 안에 있어야 하는 상황. 심지어 료하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며 라우라에게 시비조로 말을 건다. 에스토니아인지 물어보았다가 핀란드 사람이라고 하자 러시아를 과시하며 무례함을 드러낸다.
시비를 거는 남자와 말하기 싫은 여자 사이의 짧은 대화로 보이지만 인물의 대화 속에는 은근히 역사가 깔려 있다. 에스토니아와 핀란드는 러시아 북서부 지역에 연접한국가다. 에스토니아는 구소련 체제에서 연방에 편입되어 있었고 나중에 독립한 국가다. 핀란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1939년에 시작된 '겨울전쟁'에는 핀란드와 멀지 않은 무르만스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적 진지함을 건드리는 영화는 아니지만 기차의 종착지인 '무르만스크'는 겨울전쟁 당시 포화의 한가운데 있었던 러시아의 영토였다. 조금 멀리 나가면 료하의 자랑은 단순히 무지한 남자의 허세가 아니라 과거 전쟁의 결과로 핀란드의 땅 일부를 차지했던 러시아의 힘을 과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료하의 태도는 라우라의 여행을 망쳐버린다. 그녀는 식당칸에 머무르거나 다른 자리를 찾지만, 결국 그녀가 한밤중에 잠을 청할 수 있는 것은 '6번칸' 뿐이다.
대다수의 로드무비가 그러하듯이 여정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등장하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 자체다. 로드무비의 새로운 만남은 전환점이 되기 마련인데 료하는 장애물로 먼저 나타난다. 한참을 지나서야 그는 새로운 전환점으로 라우라의 여정을 돕는 여정에 앞장선다. 료하의 이러한 변화는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와는 결을 달리하는 설렘의 영화가 아니라 낯섦을 더욱 강조하는 영화가 된다.
그런데 목적지를 향해 다가갈수록 궁금증이 커진다. 어째서 라우라는 홀로 암각화를 보기 위한 여정을 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연인이 함께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여행을 취소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여정의 초반부는 부재하는 '이리나의 기호들'로 가득 차 있다.
기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에서 모스크바 다음으로 여겨지는 도시다)에 도착했을 때 라우라는 짐을 싸 들고나온다. 그녀는 역무원에게 모스크바행 기차의 시간을 확인한 후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건다. 그런데 이리나는 라우라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벌써 돌아오려는 건 아니지?"라고 반문한다. 그 말이 라우라의 말문을 막는다. 심지어 수화기 너머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라우라는 "당신은 늘 누가 옆에 있구나."라며 탄식하듯 말하지만, 이리나는 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6번 칸>은 무르만스크의 암각화를 보러 가는 여정을 그리지만 심리적으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이리나에게 돌아갈 수 없는 라우라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이별의 전초 단계에 가깝다. 이 과정은 목적지 암각화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애초에 암각화를 보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리나가 그토록 강조한 것이었다. 어쩌면 라우라가 원한 것은 암각화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하는 여행 자체일지도 모른다. 암각화이든, 오로라이든, 러시아가 아니라 핀란드여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6번 칸>의 내적 여정의 종착지는 암각화가 아니다. 라우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료하와의 첫 만남은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보이지만 여행을 통해 오해는 이해로 변하기 시작하고, 라우라가 키스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이리나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려는 모험이며, 모스크바에 두고 온 것과는 다른 사람, 다른 경험,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는 라우라를 보여준다.
캠코더의 여정
라우라의 여정에는 은밀한 '동반자'가 있다. 라우라는 모스크바에서 '캠코더'를 챙겨온다. 캠코더는 공중전화 부스, 워크맨과 카세트테이프 그리고 영화 말미에 언급되는 <타이타닉>과 함께, 또한 영화에 사용되는 영국의 록밴드 '록시 뮤직'의 'Love is drug'과 드시렐(Desireless)의 1986년 유로 팝 히트곡 "Voyage Voyage"와 함께 이 영화의 시공간적 기호를 대변한다. 전작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이 1960년대 핀란드를 배경으로 삼았다면 <6번 칸>은 대략 1990년대 후반이다.
<6번 칸>은 코닥 35mm 필름으로 촬영되었는데, 화면의 인상이 동시대 영화보다 좀 더 무디게 느껴지고, 낡은 기분을 느꼈다면 우연은 아닐 수 있다. 기차의 인상이나 추운 날씨 때문만이 아니라(결국 미술적 효과이지만) 필름으로 촬영한 시도가 이러한 인상을 가중시킬 수 있다. 캠코더나 주인공 라우라가 기차 밖을 내다보는 장면들 중에는 취재를 위해 감독이 가져간 8mm 카메라 장면이 활용된 경우도 있다. 필름룩이라는 것이 대단한 환상을 자아내는 수준은 아니겠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시대와 정서는 아날로그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모스크바에서 챙겨온 캠코더에 어떤 영상들이 담겨 있었고, 기차를 타고 가며 라우라가 어떤 장면을 담는가다.
담겨진 장면은 대부분 이리나의 모습이다. 기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이리나에게 공중전화를 거는 이유 중 하나가 전날 캠코더에 담긴 이리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가 챙겨 온 캠코더는 '모스크바'인 동시에 '이리나'이며, 무르만스크행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지만 새로운 풍경을 찾기보다는 캠코더의 기록된 화면을 뒤적거린다. 그녀의 마음은 캠코더와 함께 여전히 모스크바에 이리나 곁에 있는 셈이다.
라우라는 캠코더로 기차 안과 밖을 담기도 한다. 아마도 여행이 끝난 후 이리나에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때로는 이층 침대칸에 누워 모스크바에서 찍어 두었던 영상을 뷰파인터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료하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객실 내부를 촬영하면서 료하의 침대를 촬영하며 "저게 당신 침대였다면 좋았을 텐데. 당신 베개, 당신 물건들, 당신 양말."이라고 울먹이기까지 한다. 캠코더에 찍힌 화면은 객실 내부이지만 그녀의 마음과 상상은 여전히 모스크바의 이리나에게 향해 있다.
초반부의 여정이 강조하는 것은 이리나의 부재다. 라우라는 홀로 떠나야 하는 외로움 속에서 모스크바로 돌아갈 기차의 시간을 확인하거나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영상을 확인한다. 그런데 라우라는 자신의 의지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이리나와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여정은 파도에 떠밀리듯 해변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형상을 띤다. 료하에게 이리나가 대단한 여성이라고 말할 때 라우라의 모습은 작고 위축되어 보인다.
그녀의 단독 여정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을 생략했지만 라우라가 결코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외국인으로서 그녀는 종종 위축이 된다. 영화에 설정되어 있는 장면 중 하나가 발음의 문제다. '암각화'를 말할 때(물론 러시아어로) 종종 상대방이 되묻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장면이 슬쩍 묘사된다. 그런 점에서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여정은 라우라가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장애물로 등장한 료하를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단순히 무식한 남자를 만나 불편하기만 한 상황이 아니라 언제든 도움을 주었을 이리나가 아나리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한다는 것이 라우라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된다. 암각화를 보고 난 후, 라우라가 료하에게 사과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초반의 오해가 꼭 료하 때문이 아니라 움츠려 있던 본인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말이다.
그런데 기차 여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캠코더의 도난'이다.
페트로차보츠크에 도착한 열차가 하룻밤 동안 정차를 해야 할 때 또다시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나섰던 라우라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이리나가 전화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통화도 하지 않으며 뭐하는 거냐고 라우라에게 화를 낸다. 뒤따라오던 료하가 이 광경을 보고 라우라를 돕는다. 덕분에 기차 안에서 나이 든 사람을 만나러 가자는 료하의 제안을 거부했지만, 도움을 받은 후에는 자연스럽게 '유리'를 만나러 간다. 유리가 누구인지 아주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료하의 할머니로 짐작된다.
우려와는 달리 유리는 인정 많고, 삶의 지혜가 담긴 할머니였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라우라는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마음을 열고 감정을 교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드러낸다. 그리고 보드카가 없는 탓에 밀주를 마시며 만취한다. 유리 할머니의 말은 이 영화의 지침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자는 아주 영리한 동물이야. 우리 내면에는 작은 동물이 사는데 그걸 받아들이고 믿어야 해. 그저 내면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야. 엄마, 아빠, 딸, 남편 말은 전혀 들을 필요 없어. … 중략 … 다행히 난 15살 때 스스로 믿는 법을 깨우쳤어. 그렇게 43년간 쭉 행복하게 살고 있지. 내면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그것은 러시아에서 이리나의 말대로 살았던 라우라를 뒤흔드는 말이다. 무르만스크행 기차에 탄 것도 혼자 다녀오라는 이리나의 말 때문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내면이 아니라 타인의 말을 따랐던 라우라는 내면에 대한 자각을 시작한다. 무엇보다 라우라의 행동이 변화한다. 료하를 이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러시아어를 할 줄 모르는 핀란드 남자를 도와 자신의 객실 안에 머물게 한다. 그는 티켓이 없는 남자였고, 승무원은 2등실 출입을 거부하였지만 라우라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결과 여행이 조금은 즐거워진다. 핀란드에서 온 남자는 기타를 치며 여흥을 돕기도 하고, 기차가 멈췄을 때 라우라와 함께 주변 마을을 둘러보기도 한다. 그곳에서 술을 한 병 선물로 받아온다. 이전 같았으면 타인을 거부하고, 접촉을 거부했을 라우라였겠지만 유리 할머니와의 만남 이후 주변에 대한 적극성을 띤다. 료하는 객실에 무임 승차한 남자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지만, 라우라는 그의 반응에 크게 상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자신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전이 등장한다. 핀란드 남자는 무르만스크에 도착하기 이전에, 열차에서 내린다. 라우라가 배웅을 해준다. 그런데 기차가 객실로 돌아온 라우라는 자신의 캠코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자식이 내 카메라를 가져갔어요. 나쁜 자식."
"훔쳐 갔다고요?"
"네! 모스크바 추억이 거기 다 담겨 있는데."
"인간은 다 죽어야 해."
내면의 목소리를 따른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먼저, 그녀가 캠코더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리나를 지우기 시작했다는 것과 동의어다. 캠코더에는 모스크바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캠코더의 상실은 더 이상 모스크바 혹은 이리나에게 속박될 필요가 없는 라우라를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핀란드 남자에게 베푼 호의가 적의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라우라를 자유롭게 만든다. 아마 이러한 모습에 어울리는 고사성어는 새옹지마일 것이다. 료하를 만났기에 유리 할머니를 만났고, 유리 할머니를 만났기에 핀란드 남자를 도왔으며, 그가 라우라의 캠코더를 훔쳐 갔기에 료하와 축하 파티를 열기에 이른다. 그것은 달라지는 라우라를 보여준다. 내면의 목소리란 최상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처럼 인생의 순환과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지혜의 충고다.
"내 남자 친구 이름은 이리나에요(식당칸에서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편집자 주).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죠. 원래 여행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어요. 그래도 난 혼자라도 왔어요. 왜 그랬는진 모르겠어요. 이리나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요. 아름다운 아파트에서. 소설 속 주인공처럼요. 나도 그 삶의 일부가 되고 싶었어요. 그 아파트에서요.""아파트가 어떤데요?"
"거긴… 오래되고 아름다운 나무바닥이 있고 천장이 높아요. 그리고 벽에 그림도 그려져 있는데 무늬처럼 벽에 종이가 붙어 있어요."
"벽지 말이에요?"
"네."
"벽지요."
"맞아요. 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오래된 가구도 있죠. 주말이 되면 둘이서 긴 산책을 했고 박물관에 갈 때도 있었어요. 저녁에는 손님들이 놀러왔어요.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죠."
"멋지네요."
"이리나가 많이 그리울 줄 얄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날 바라봐주는 눈빛이 그리울 뿐이에요."
료하에게 던지는 라우라의 말은 모스크바의 추억을 떠나보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리나가 그리워질 줄 알았는데 "자신을 바라봐주는 눈빛"이 그립다는 인식은, 이리나가 전부가 아니라 자신이 외로운 것이 문제였음을 깨닫는 말이고, 이제 눈빛은 료하의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그녀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캠코더를 잃어버리기 전, 라우라가 마지막으로 찍은 것은 이전의 촬영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흐릿하고, 명멸하는 기차 밖 풍경. 그것은 이리나를 위해 담은 장면들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미지를 담은 것이다. 그녀는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라우라의 말을 다 들은 료하가 갑작스럽게 제안한다. 그는 무르만스크에 도착하기 전이니 축하를 하자며 식당칸으로 향한다. 그들은 술과 음식을 주문하고, 자신들만의 축배를 든다. 두 사람의 감정이 달아오르는 상황에서 라우라는 자신이 그린 료하의 초상화를 건넨다. 그리고 자신도 그려 달라고 요청한다.
료하는 이 상황을 어색하게 여기며 황급히 객실로 돌아온다. 뒤따라온 라우라가 료하에게 키스를 한다. 내면의 소리를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 라우라의 적극적인 변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료하가 이 상황을 외면한다. 그것은 여태껏 보여진 료하와는 다른 모습이다. 료하가 도망치듯 달아나 버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도 못한 채 무르만스크역에 내린다.
암각화 혹은 하이스타 비투!
라우라는 예약한 호텔에 도착한다. 하지만 호텔 직원은 날씨로 인해 암각화를 볼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라우라는 친구가 볼 수 있다고 해서 왔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자 호텔 직원은 "어떻게요?"라면서 길이 막혀 갈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한다. 어째서 이리나는 암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일까. 그녀는 처음부터 제대로 알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암각화가 대단하고, 지금 가면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 라우라에 대한 지배력이 아니었을까.
호텔의 직원들은 다른 관광지를 안내한다. '영웅도시, 무르만스크 투어' 프로그램이다. 이 장면에도 역사적 사실과 아이러니가 함축되어 있다. 러시아는 몇몇 도시에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1980년대 후반까지 부여했는데, 무르만스크는 1986년 5월 영웅도시 칭호를 받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으로부터 항구를 지켜낸 전승의 결과를 기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독일과 연합하여 구소련에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핀란드의 과거사에 서서 보면 그다지 반가운 관광지는 아니다. 투어 장면 중에 등장하는 설명은 정확히 러시아와 핀란드가 전투를 벌인 겨울 전쟁 시기와 겹치는데, 라우라는 암각화가 아니라 자신의 전쟁 역사를 러시아의 입장에서 듣게 되는 셈이다. 아이러니는 그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아무려나 라우라는 이리나에게 전화를 걸어 암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아쉽게 됐네."라는 말이 전부다. 애초에 이 여행을 기획하였으면서도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이리나는 말한다. 무료하게 관광지에서 시간을 보내던 라우라는 갑작스럽게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그녀는 택시를 타고 료하가 말했던 광산 공장을 직접 찾아간다. 비록 료하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늦은 시간에 료하가 라우라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온다.
"자, 갑시다."
"어딜요?"
"그 돌멩인지 뭔지 보러요."
"저 사람들이 절대 못간다던데요."
"게을러터져서 그래요."
"(웃음) 알았어요. 겉옷 걸치고 올게요."
두 사람의 재회가 이뤄지고, 암각화를 향한 여정이 이어진다. 이제 더 이상 암각화는 라우라와 이리나의 계획이 아니라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케 하는 료하의 노력과 수완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그곳에 가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이제 암각화는 모스크바에서 꿈꾸었던 허망한 계획이 아니라 료화와 함께하는 부딪히는 현실이다.
드디어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배를 타고, 암각화 앞에 도착한다. 그런데 험악한 날씨를 뚫고 암각화 앞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암각화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부터 암각화라는 말이 등장했고, 암각화를 다룬 책도 등장했으며, 이 여정의 목표가 암각화임을 재차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암각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라우라가 보고 왔다는 상황을 전할 뿐이다. 이를 지켜보던 료하가 묻는다.
"저게 다에요?"
"저게 다에요."
무르만스크의 암각화가 만 년 전에 만들어진 엄청난 유산일지 몰라도, 이리나가 소개한 교수의 말처럼 인간의 근원에 관한 것인지 몰라도 암각화에 대한 짧은 감상은 "저게 다예요."가 전부다. 어쩌면 료하가 암각화를 표현하는 것처럼 오래된 돌멩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을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는 순간, 암각화에 짓눌려 있던 라우라의 영혼이 가벼워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이나 누군가에는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무거운 것이었을지 몰라도, 라우라는 경험을 하고 난 후 "저게 다예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만 년 전 돌멩이의 무거움을 현재의 가벼움으로 전환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일어날 수 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암각화에 대한 이야기들 여러 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보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예외적인 연출이다. 에릭 로메르의 여행지 영화인 <녹색광선>(1986)의 마지막에도 녹색광선이 등장하고, 보다 대중적인 문법을 지닌 <노킹 온 헤븐스 도어>(1997)에서도 죽어가는 남자들 앞에 그토록 바라던 바다가 등장한다. 모름지기 여행하는 영화는 그토록 바라던 실재 이미지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그인데 <6번 칸>은 철저하게 기대를 저버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그들의 사랑이 이뤄지든 아니든 여정이 끝났다는 기분 좋은 피로가 마음에 남는다. 그것은 저마다의 암각화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흔히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인생을 조금 살다 보면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생긴다.
그런데 <6번 칸>은 온갖 형식으로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었고, 만남이었고, 우연의 결과임을 반복한다. 라우라는 료하의 도움으로 새로운 길을 간다. 그것은 목표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목표에 대해서는 "저게 다예요."라며 일갈할 뿐이다. 여행의 목표는 여행 중에 이미 달라졌다.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행위야말로 만년을 견딘 암각화의 무게를 버틸 만한 새로운 시간이다. 우리는 이 시간의 아이러니를 마지막 장면을 통해 재확인한다.
무르만스크에 도착하기 직전 식당칸에서 라우라는 료하를 그린 스케치를 선물로 건네면서 자신도 그려달라고 말한 바 있다.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짧게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료하는 공장으로 돌아가고, 랴우라는 호텔로 향한다. 택시 기사는 료하가 쓴 편지를 라우라에게 전해준다. 편지에는 라우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뒷면을 돌렸을 때 거기에는 "하이스타 비투"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료하가 "사랑해."를 핀란드어로 무엇인지 물었을 때 가르쳐준 말이었다. 그런데, 라우라가 알려준 "하이스타 비투"는 '사랑해'라는 말이 아니라 '엿먹어'라는 뜻이었다. 6번 칸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러시아 노동자에게 멸시하듯 던져버린 말이었다.
<6번 칸>은 '하이스타 비투'라는 말을 새롭게 활용한다. 그토록 보고자 했던 암각화가 라우라에게는 철 지난 하이스타 비투일 수도 있고, 이 여행을 끝마쳐야 하는 상황이야말로 정말 엿 같은, 하이스타 비투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스타 비투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원래 언어가 어떤 뜻을 지니고 있거나 통용되는 것인가와 상관없이 료하가 쓴 하이스타 비투는 "사랑해."라는 뜻을 담는다. 이 말이 두 사람의 어긋난 만남에서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새로운 의미, 새로운 관계, 새로운 시작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말처럼 "사랑은 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만이 있을 때 많은 이들에게는 친숙한 것이 낯선 것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낯선 것이 친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암각화를 보러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어떤 기적적인 감정과 체험이 최종적으로 건네준 말속에 들어있다. 히이스타 비투,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이자, 두 사람만의 밀어다.
※ 추신
이 글은 3월 11일 '더 숲 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이상용의 씨네모어]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6번 칸
Compartment No.6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Juho Kuosmanen
출연
세이디 하를라Seidi Haarla
유리 보리소프Yuriy Borisov
율리야 아우크Yuliya Aug
디나라 드루카로바Dinara Drukarova
폴리나 아우그Polina Aug
갈리나 페트로바Galina Petrova
수입|배급 싸이더스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07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