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신카이 마코토', 대지진의 상흔을 치유하는 거장이 되다
[Critique] '신카이 마코토', 대지진의 상흔을 치유하는 거장이 되다
  • 김경수
  • 승인 2023.03.08 13: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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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메의 문단속> 세카이계에서 다크투어리즘으로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 쇼박스

신카이 마코토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그리는 세계는 그가 지금껏 만든 그 어떤 영화의 세계관과도 비슷하지 않다. 이 영화는 그의 전작 <너의 이름은.>(2016), <날씨의 아이>(2019)와 함께 재난 3부작으로 불리지만, 전작과의 과감한 '단절'을 선언하는 영화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활극으로의 재미와 미장센은 물론, 사유의 깊이, 트래킹 등 영화적 연출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연출력까지 그의 세계관은 한 차례 진화한 것이 틀림없다. 심지어 두 전작에서 비판받기도 한 여성혐오적인 맥락을 제거하고 여성 서사로의 전환까지 이루어냈는데도, (끝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는데도) 어쩐지 양가적인 감정을 들게 한다. '이 진화를 약진으로 볼 것이냐, 단절로 볼 것이냐' 이 영화를 보고 양가감정을 느낀 이유는 여기서 비롯한다. 물론, 3.11 동일본 대지진과 일본의 민간 전설, 시공간을 초월한 연인의 만남 등 그의 세계관 전반에 계속 등장하는 여러 모티프는 낯이 익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의 인장이라 할 수 있는 뮤비스러운 연출 등 여러 영화적인 장치가 희미하다는 첫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시이 마모루 등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거장과 나란히 할 수 있는 국민 감독의 탄생을 두 눈으로 마주하는 감동과 지금까지의 신카이 마코토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안타까움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이다. 이 영화를 어찌 보아야 할지는 훗날의 관객이 판단할 테지만, 당장은 이 혼란이 밉지 않다. 신카이 마코토가 이 영화로 비로소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시네아스트로 거듭났다고 느껴서다. 특히, 2002년 미야자키 하야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황금곰상을 탄 뒤, 21년이 지난 후인 올해 신카이 마코토의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은, 그가 <스즈메의 문단속>을 통해서 하야오의 뒤를 이을 거장 감독으로 지목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한편으로는 주인공 소타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과 닮아있고, 곳곳에 지브리 스튜디오에 대한 오마주가 있기에 하야오를 계속 연상하게끔 한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 쇼박스

규슈의 한적한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녀 '스즈메'는 문을 찾아 여행 중인 청년 '소타'를 만난다. 스즈메는 그의 뒤를 쫓다가 산속 폐허에서 낡은 문을 발견한다. 그녀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문을 열자 마을에 재난의 위기가 닥쳐온다. 이때 가문 대대로 문 너머의 재난을 봉인하는 소타가 나타나 간신히 문을 닫는다. 재난을 막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수수께끼의 고양이 '다이진'이 나타나 소타를 의자로 바꿔 버린다. 이로 인해 일본 각지의 폐허에 재난을 부르는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스즈메는 의자가 된 소타와 함께 재난을 막기 위한 여정에 나선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틀은 판타지지만, 이를 그려내는 장르는 로드무비다. 스즈메가 소타의 저주를 풀어야한다는 임무는 후반에 이르러서야, 대지진의 상흔을 안고 있는 도시를 체험하게끔 하려는 도구로 드러나기에 더욱 그러하다. 결국 관객이 여기서 느껴야 할 것은 영화의 플롯이라기보다는 감독이 그려내는 정서와 장소에 가깝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전의 두 작품과 달리 3.11 동일본 대지진을 직접 드러낸다. <너의 이름은.>의 혜성이 충돌한 곳, <날씨의 아이>의 이상기후 등 3.11 동일본은 항상 다른 상황으로 우회된 알레고리로 등장했다. 또 재난을 경험하는 일본의 무의식을 환상을 통해서 그려내고자 했다. 이번에야말로 신카이 마코토는 역사를 직접 마주하기를 택했다. 규슈의 대지진부터 도호쿠의 대지진까지 일본의 역사를 관통한 대지진을 소타와 스즈메의 여정을 통해서 한 데에 아우르고 그 모든 재난을 애도하고 거기에서도 (가업으로 토지시를 하는 소타와 같은 자원봉사자와 마찬가지로) 서로 살리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이를 통해서 역사와 정치에 한층 더 가까워지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역사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는 하야오와는 달리 마코토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애도'라고 먼저 말하는 듯하다.

 

소년과 소녀의 감수성은 '풍경'이 된다

신카이 마코토의 작화는 빛의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는 종종 렘브란트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의 세계가 한 인간의 심리를 풍경으로 외화해서 미적인 것으로 포착하고, 그것이 개인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풍경으로 확산되는 일본의 '모노노아와레'를 반영하고 있어서다.(『일본정신분석』,박규태, 이학사, 2018, p.311) 이는 신카이 마코토의 풍경이 사실에 가까우면서도 어쩐지 슬퍼보이게 만드는 마력을 만든다. 이 마력을 한층 두드러지게 만드는 것은 그가 작품 전반에서 차용하는 세카이계 설정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2002)는 '세카이계'의 시작으로 이야기되는 작품들 중 하나다.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했듯이 2002년에 한 인터넷 유저가 쓰기 시작한 말에서 비롯한 이 단어는 200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을 관통하는 여러 설정을 설명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를 그 기원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세카이계는 그 정의가 명확하지 않은 뉘앙스에 가깝다.

세카이계는 (아톰처럼 성장하지 않는) 두 미성년 사이의 너와 나라는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그 둘의 관계가 구체적인 중간항 없이 세계의 위기와 대면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2046년을 배경으로 하는 <별의 목소리>에서 중학교 3학년 미카코와 노보는 연인으로 발전하기 이전의 단계다. 미카노는 급작스레 거대로봇을 조종하는 파일럿으로 선발되고 시리우스 성계로 가게 된다. 이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초호기 파일럿으로 선발된 신지와 아스카, 레이가 일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설정의 변주로 보인다. 미카코는 거기서 노보루와의 삶을 그리워하지만, 메시지는 편도로 8년 7개월이라는 긴 세월에 거쳐야만 지구에 도착한다. "빛의 속도로 8년이라는 거리는 영원이란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그는 메시지를 보내려고 한다. "난 지금도 노보루가 좋아"라는 메시지는 잡음으로만 남아 전달되지 않는다. 이때 두 메시지의 거리를 아득하게 만드는 것은, '이 둘이 있는 풍경의 교차'로 인해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풍의 우주와 2046년이라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우리 세계와 닮아있는 거리는 공간과 공간을 넘어서 시간과 시간의 아득한 격차를 느끼게끔 한다. "나는 중학생 때까지 세계란 휴대전화의 전파가 도달하는 곳까지를 의미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라고 말하는 미카코의 나레이션은, 엔딩에 다다를 즈음에는 세계란 내가 파악하기 힘들 만큼 거대하다는 사실로 이어지고, 이는 곧 '성장'을 의미한다. 이처럼 두 공간의 선명한 대비는 연인의 목소리와 겹친다. 다른 공간에서 모놀로그로 두 연인의 '목소리'가 삽입되는 것은 분명 눈여겨볼 만하다. 둘이 대화하는 장면에서마저 '풍경'이 더 두드러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풍경으로 인해서 이 둘이 이어져 있음을 전달하며, 목소리가 도리어 사실적인 풍경을 구성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어서다. 신카이 마코토의 개성은 이러한 연출에서 비롯한다.

 

영화 <초속5센티미터>(2007) ⓒ 에이원 엔터테인먼트
영화 <언어의 정원>(2013) ⓒ 팝엔터테인먼트

신카이 마코토의 경력은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는 문학 전공이며, 보통 다른 감독이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이력을 시작하는 데에 비해 신카이 마코토는 애니메이션의 팬이었는데도 게임 회사에서 게임 오프닝 영상을 만드는 데에서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신카이 마코토는 곧 1인 제작으로 독립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부터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등등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그는 2002년 <별의 목소리>가 주목받고 애니메이션계의 신성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업 애니메이션의 세계가 아닌 외부에서 안으로 진입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의 초기작은 1인 프로덕션으로 제작되었기에 작가의 색이 선연히 드러난다는 장점이 있다.

1인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다는 것은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가 소설적이라 느낄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매번 영화를 소설로 쓸 만큼이나 소설의 문법에 익숙해 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 등 문학 작품을 탐독하는 신카이 마코토는 근대문학에서 드러나는 풍경을 작품 전면에 내세운다.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 순간 인서트로 삽입하는 풍경은 이 감수성을 드러낸다. 롱테이크로 포착되는 데다가 심도까지 깊은 마코토의 풍경은 일본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이야기하는 근대문학의 풍경과 닮아있다.

고진은 『일본 근대문학의 탄생』에서 회화의 기하학적인 원근법을 객관과 주관을 발명한 장치로 서술하고 있으며, 여기서 근대문학에서의 풍경이 탄생했다고 본다. 이 기하학적 원근법은 하나의 점에서 풍경을 보는 투시도법에 근간하고 있으며, 이것이 문학에서는 화자의 관점을 거쳐서 자연이 관찰되는 주관적 풍경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투시도법은 반대로 자연물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파악하게 한다. 원근법이 탄생하기 이전의 종교화가 배경을 인물을 이야기에 있게 만들려는 최소한의 당위만을 제공하며 그 자체로 상징으로 쓰인 데 비해 원근법 이후의 풍경은 일정한 시공간에 있는 객관적인 대상으로 묘사된다. 근대문학에서 이것이 투명한 언어로 서술되는 삼인칭 객관적 시점 서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고찰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근대문학적 풍경에다가 애니메이션의 리얼리즘을 더한다. 애니메이션의 리얼리즘은 실재를 왜곡하면서 탄생했고, 그것이 동시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못한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은 사실적인 풍경으로 인해서 영화와 한없이 닮아있으면서도 그것을 결국 근대문학에서의 풍경 서술로 쓸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안게 된다. 소설적 풍경이 애니메이션의 문법과 포개지면서 마코토의 세계관에는 복합적인 결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실적 풍경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그 사실적 풍경이 인위적인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모순이 생겨서다. 이는 <너의 이름은.> 이전의 그의 초기작에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초속 5cm>(2007)의 1부는 <별의 목소리>를 도쿄로 이전해 찍은 듯한 영화다. 문제는 이어지는 2부와 3부다 두 주인공은 성장했지만, 서로에 대한 추억을 일상에 묻어버린다. 1부에서 누구보다 설렌 첫사랑을 나눴던 아카리와 타카키의 연은 시간의 흐름에 무참히 찢기고, 감독은 그들이 어떻게 그 뒤 패턴화된 일상을 견디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가는지를 다룬다. 지루한 일상에서 불쑥불쑥 차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설명 못 한 채로 살아간다. 성장하려면 첫사랑을 버리고, 첫사랑을 유지하려면 유아적인 세계를 붙잡고 그 자리에 머물러야만 한다. 이때 감독은 도쿄의 정류장을 깊은 심도로, 무엇보다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둘은 먼 거리로 갈수록 서로를 회상하지만, 결코 둘은 이어질 수 없다.

마코토의 비관론은 <언어의 정원>(2013)에서까지 반복된다. 결국 시간의 흐름에 엇갈려 둘 사이에는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구름 저편 약속의 장소>(2004)에서는 "나만이 세계의 외톨이로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자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 같은 예감"이자 "나 혼자만 세상에 멀어질 것 같은 예감"으로도 이어진다. 신카이 마코토는 풍경의 연결로 이어져야 하지만 이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매개하고자 한다. 사랑은 실패하더라도 자연으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의 세계로 매개될 수 있으며, 이것이 신카이 마코토가 '나와 너를 잇는 중간항'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두 인물이 만날 즈음에는 인물에 포커스를 두어서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끔 보이도록 심도를 조정하는 영화적 연출을 택한다. 두 사람이 풍경에 우선하도록 말이다.

 

영화 <너의 이름은.>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이러한 초기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세카이계적인 세계를 확장한 것이다. 그새 3.11 동일본 대지진이 탄생했고, 토호쿠 지방은 아예 여행이 불가능한 지역이 되어버렸다. 신카이 마코토는 토호쿠를 그대로 그려내는 대신에 세카이계에 그것을 그려내고자 한다.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가 (3.11 동일본 대지진을 연상시키는) 혜성충돌을 마주하는 설정이 그것이다. 오프닝에서 타키는 자신이 경험한 두 가지 사건을 아울러 "이상한 꿈"이라 고백한다.타키와 미츠하는 서로 신체가 뒤바뀐 상태로 깨 거울 속 다른 나를 마주한다. 타키는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짝사랑하는 누나에게 호감을 드러내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하는 소년으로, 그전까지 여자를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미츠하가 누나와 데이트를 끝마친 뒤 잠에서 깨면, 타키는 어찌 반응할지 몰라 허둥댄다. 이처럼 숫기가 없고 무기력한 타키에게 재난과 여성의 신체는 예고도 없이 급작스레 마주한 것이기에 그에게 환상처럼 느껴진다. 타카하시 루미코 풍의 러브 코미디는 급작스레 끝난다.

둘이 서로에게 마음을 갖기 시작할 즈음 혜성충돌로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한다. 타키는 그제야 미츠하와 자신이 시간이 엇갈렸다는 것을 알고 실제 인물이던 미츠하와 그녀가 살던 마을의 기록들을 모은 끝에 참상을 마주한다. 타키가 혜성충돌로 사라진 미츠하의 마을을 볼 때, 그의 표정은 처음으로 떨린다. 그 뒤 타키는 미츠하와 만날 수 있는 산 한가운데로 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제야 "이상한 꿈"인 미츠하는 이름을, 혜성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커다란 구멍으로 묘사된 재난의 현장을 마주하게끔 되고 거기서 두 사람은 서로 이름을 부르고 이어지게 된다. 결말에 이르러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하는 장면은 둘이 한 곳에 있어도 엇갈릴 수밖에 없던 <초속 5cm>의 뒤집힌 장면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관에서는 이 만남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봉합'인 셈이다. 타키와 미츠하의 조우는 3.11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와 그것을 보는 오타쿠의 조우로 이어진다. 신카이 마코토에게 더없이 필요한 것은 '둘의 로맨스를 통한 사회의 통합'이었다. 희생자가 살던 일상을 경험하고, 산에서 그들의 증언을 듣고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신카이 마코토가 소망하는 유토피아이며, 그의 정치적 무의식에 남아 있는 풍경인 셈이다.

이처럼 신카이 마코토는 세카이계적 상상력만이 다른 세계에 속해있던 둘을 만나게 하는 유일한 끈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너의 이름은.>의 괴력은 역사와 무관한 개인을 억지로라도 역사와 마주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 그때, 두 남녀의 개인적 만남은 무너진 일본사회를 봉합하려는 커다란 화합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봉합을 이루어내고자 신카이 마코토는 무스비와 미인주와 같은 토속적인 서사 장치를 동원한다. <별의 목소리>에서는 무전으로 연결되던 소년과 소녀는 풍경 그 자체에 깃든 과거로 인해서 연결된다. 둘이 운명이게끔 보이도록 말이다. 결국 이는 사회적 풍경으로 이어진다.

 

영화 <날씨의 아이>(2019) ⓒ 미디어캐슬

<날씨의 아이>는 3.11 동일본 대지진이 생긴 뒤 어두침침한 도쿄의 풍경을 그려낸다. 미성년자 성매매, 총기 매매, 가출청소년 등 공권력의 권위가 무너진 일본 사회의 문제를 압축하고, 어떤 범죄가 생기든 책임을 피하는, 스가의 말마따나 "애초에 미쳐 있던" <너의 이름은.>과 반대의 세계를 그린다. 또한 재난의 트라우마를 잊어버리고자 히나라는 한 소녀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기성세대와 오타쿠를 공격한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호다카와 히나의 시점으로 본 세계는 더없이 잔혹하고, 아무리 도주한들 잡힐 수밖에 없는 '지옥'이다. 날씨를 치료하는 히나에게는 날씨를 치료해봤자 그녀와 그녀의 동생을 고아라고 보육원에 데려가려는 시스템은 변할 수 없다. 여성과 아이들이 그저 '기분'을 풀려고 하늘에 희생당한 세계의 본질은, 절대로 아름답게 표현될 거리가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가 도쿄를 물에 잠기게 한 뒤 "원래대로 되돌아왔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너의 이름은.>에서 희망에 찬 세계의 본모습이 그랬을테니까. 신카이 마코토가 <날씨의 아이>에서 신화적 상상력을 축소하고 유독 도쿄의 풍경을 개입시켜 현실을 유지하려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온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경찰에 휘둘리고, 운명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온 힘을 다해 망가진 세계에 체념하기' 이것이 신카이 마코토의 태도다. <너의 이름은.>가 제공한 판타지보다 그 온 힘을 다해 체념하는 태도가 내게는 오히려 진실된 태도로 보인다.

여기엔 OST 가사처럼 "사랑 노래가 너무 많"고,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는 세상에서의 애도를 고민하는 그의 고뇌가 담겨있다. 이는 오컬트 잡지를 출간하는 스가 캐릭터에 잘 반영되어 있다. 세카이계는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때는 옴진리교와 고베 대지진 등으로 대안 역사를 생산할 수밖에 없던 시기의 산물이다. <에반게리온>에서의 인류보완계획은 옴진리교의 교리와 제법 비슷하다. 감독은 세카이계로 인한 봉합이 오컬트와 비슷할 수도 있다는 것을 스가 캐릭터로 자인한다. 또한 호다카가 스가의 밑에서 일하고 오컬트의 문법을 체화하지만 거기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세카이계가 지하에서나 소비하는 서브컬처가 되어서다. 신카이 마코토가 제 나잇대와 비슷한 캐릭터인 스가를 전면에 드러내면서 세상에 미쳐있다고 말하게 한 선택은 이 작품의 핵심과도 이어진다.

신카이 마코토는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에 생산되는 치유의 서사의 정반대에 서서, 치유가 섣불리 이루어져서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또한 미래 세대에게 도쿄의 어두침침한 세계는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생겨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떤 가족>(2018)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9) 등 여러 영화에서 등장한다.

 

영화 <날씨의 아이>(2019) ⓒ 미디어캐슬

<날씨의 아이>는 이미 망가진 세계를 긍정하면서 환상으로 봉합하는 대신에 무너진 세계를 직시하려 한다. 또 세계에 절망해 있는 두 아이에게 세상이 원래 미쳐 있으므로 미래 세대의 애도를 발견하라고 길을 여는 듯한 영화다. 이는 이 영화의 운명론적 자연관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히나와 같은 맑음소녀는 시대마다 등장해 자연을 달래기에 이 일이 역사 전체에서 두드러지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은 인간의 의도와 무관히 움직인다는 그의 세계관은 "천지는 인간을 지푸라기 개처럼 대한다"라는 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재난이 일본 역사에서 여태까지 반복되었기에 그것은 누구도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명에 굴복하는 듯이 보이는 듯하지만 그러하지 않다. 이러한 운명론적 세계관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지진을 경험한 여러 시공간을 연결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결국 자연은 인과를 지니고 있지 않기에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거기서 보아야 할 것은 서로의 얼굴이라는 듯이 말이다.

<너의 이름은.>에서와 달리 <날씨의 아이>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이제 개인 차원에서 이뤄진다. 아이의 연대는 어떤 시스템도 바꿔내지 못한다. 사랑도 성장도 성취하지 못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지옥이다. 맑음소녀라는 음모론적 상상력은 사회를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 세상이 망가지는 가운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유아적 세계로 도피해 사랑하는 것뿐이다.

<날씨의 아이>의 결말에 호다카가 (아주 우연히) 히나를 만나 "우리가 세상을 바꿨어"라 말하는 순간, 호다카가 서 있는 곳은 비가 내리고 있으며 히나가 서있는 곳만 꽃이 피어있다. 감독은 비 내리는 도쿄와 히나라는 희망을 만나게끔 하려 했으나 호다카의 절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었다라고 했을 때 그 우리가 히나와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이 영화는 무엇도 바꾸지 못한 실패를 바꿨다고 우기는 실패가 될 것이다.

그런데도 스가는 호다카를 청년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미래를 이어 나갈 것이라 격려한다. 자라지 못한 미래 세대가 삶을 이끄는 주체가 될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너와 나의 내면이 세계를 만든다는 명제는 후반에 드러나는 공중 낙하로 인해서 드러난다. 어른이 보기에 그들은 구름 위를 창조해낸 것이나 다름없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세카이계의 유통기한이 끝났단 것을 인식한 신카이 마코토가 새 세계를 열고자 하는 새로운 시도일 것이다.

 

우리는 감히 재난을 관광할 수 있는가

<스즈메의 문단속>은 로드무비를 빌려서 찍은 다크투어리즘이기도 하다. 다크투어리즘은 체르노빌 원전이라든지 후쿠시마, 아우슈비츠 등 참사가 생긴 곳을 관광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지진이 발생한 곳이라든지, 사라진 유원지 등을 여행하는 작업이다. 이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은폐되어 있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 쇼박스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작과는 다르게 3.11 동일본 대지진을 우회하려 하지 않는다. 또 재난을 VR로 체험하게끔 하는 생생히 재현하려 하지 않는 결기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후반에 드러나는 명계가 재난 당시를 재현하되 그 선이 이전 작품만큼이나 선명하지 않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고, 그러하기에 초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 매개하는 것은 문을 닫는 과정으로 재난 현장을 보게끔 만들면서, 그곳에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삶이 존재했는지를 체험하는 상상이다. 거기서는 "안녕하세요" 등의 일상어만이 쓰인다. 이는 "어떠한 사실을 알려면 상상해야 한다"라고,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아우슈비츠를 둘러싼 재현의 윤리를 논의할 때 이야기한 명제를 생각나게끔 하는 상상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대신에 3.11 동일본 대지진 희생자의 증언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않으며, 그들이 살았을 법한 삶이 우리와 똑같다는 것을 여러 장면을 잇는 몽타주로 매개한다. 영화에서 문을 닫는 작업은 희생자의 목소리를 이해하면서도 전달하되 보통 사람의 트라우마를 명계 너머로 편히 보내주는 애도 작업이다.

한편 미미즈는 재난을 기억하는 이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재난의 잔상이기도 하다. 미미즈는 지진 경보라든지, 새가 날아가는 전조현상 등으로 지진 현장에 있던 이들의 트라우마를 비주얼로 그려낸 존재다. 미미즈를 닫는 행위는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재난 트라우마를 잠재우는 애도이기도 하다. 이때 미미즈가 생물로 보이고, 재난을 이미지로 왜곡했기에 포르노적인 재현이라는 비판이 충분히 따라올 수 있기도 하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 쇼박스

<스즈메의 문단속>은 다크투어리즘이기에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바람의 목소리>(2019)와 똑같은 플롯 구조를 공유한다. <바람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로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고아가 된 주인공 하루(모토라 세레나)가 고향으로 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재난 현장에서 다양한 사람을 마주한다. 동일본 대지진의 자원봉사자로 온 외국인 등이 그 예다. 이 영화를 이끄는 것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나오는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기한 모리오다. 그는 동일본 대지진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준 자원봉사자를 발견하고자 하는 중년이다. 선뜻 하루에게 호의를 건네는 모리오의 존재는 하루가 그간 만난 험난한 여정 끝에서 만난 존재이기에 더 소중하다. 이런 의미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은 <바람의 목소리>를 상업영화라는 형식에 맞게끔 각색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엔딩에서 드러나듯이 미래의 스즈메가 과거의 스즈메에게 괜찮을 것이라며, 미래에도 그녀가 꿋꿋하게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로 위로를 주려 한다. 문을 닫는 애도 행위로 상흔이끝내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 영화는 트라우마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인간군상을 외면한다.

안타깝게도 <스즈메의 문단속>이 로드무비로 매력이 반감되는 이유는 여기서 온다. 영화의 위기는 오직 다이진으로부터 생기며, 재난이 생긴 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서 오지 않는다. 주민은 그들을 의심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선의만을 건넨다. 이는 치유의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환상으로 도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는 문을 닫는 환상적인 순간에만 현실에 접근하고, 그 반대로 일상에서는 환상에 접근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러하기에 스즈메와 소타의 감정선은 잘 이어지지 않고, 인물은 평면적으로만 그려졌다. 소타의 친구는 그 누구보다도 비현실적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의 애도가 반 정도만 완성된 이유가 여기서 비롯한다. 그런데도 영화를 괜스레 감싸고 싶은 것은 이 감독이 애도가 완성될 수 없다는 불가능을 무릅쓰고도 영화를 만들어서다. 이 불가능성이 이 감독이 거장이 될 수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 쇼박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 쇼박스

앞서 이야기했듯 신카이 마코토의 풍경은 '문학적 리얼리즘'에 기반한 사실적인 풍경과 사실이 될 수 없다는 애니메이션의 풍경 사이에서 모순에서 탄생했다. 특히나 다크투어리즘은 그 현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미덕으로 하기에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은 이 다크투어리즘을 그리는 데에 어울리지 않는다.

프랑스 영화평론가 세르주 다네는 애니메이션이 "카메라로 찍힌 것 앞에서 느끼는 정서-두려움과 전율-가 없기 때문에 어떤 아름다운 이미지도 하물며 그려진 것은 더욱더 나를 사로잡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카메라는 재난 현장의 생생함을 눈앞에 들이미는 충격 효과를 주고, 또한 그것이 가공된 이미지가 아닐뿐더러 그것이 어딘가 있다는 공포를 지니게 한다. 이를 보는 데에서 충격이 생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실제 재난 현장이 아니고 신카이 마코토의 시선에 의해서 재구성된 재난 현장에 불과하다. 이때의 사실적 풍경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실이 될 수 없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로 인해서 의도치 않게 재난의 재현불가능을 이야기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지적하듯이 관광은 관광지를 2차 창작하는 상품으로 가공한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관광이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가서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관광객의 철학』,아즈마 히로키, 리시올, 2020, p.36)이고 중산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도 여유가 생기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관을 보러 가는 행위도 이 관광과 이어져 있기도 하다. 마코토는 2차 창작으로의 소비를 유도하고자 이 영화를 제작한 듯하다. 세카이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애도를 함께 할 수 있게끔 다크투어리즘을 떠나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그 관광 체험을 다시 그림으로 그린다는 데에서 2차 창작을 다시 2차 창작으로 만든 3차 창작이기도 하다.

마코토는 재난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의 불가능을 폭로하면서도 재난과 희생자를 드러내는 결기가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애도를 향한 절박한 자기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매력적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재현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장면은 <날씨의 아이>에서 히나와 호다카가 호텔에서 밤을 보내는 장면이다.

히나와 호다카가 처음 침대에 잠들려는 순간이다. 히나는 호다카에게 질문한다. "날씨가 맑아졌으면 좋겠어?"라는 질문에 호다카는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히나는 호다카에게 보라는 듯, 옷을 벗는다. 그때 히나는 호다카를 도발하듯 묻는다. "대체 어디를 보는 거"냐고. 그때 히나는 날씨를 맑게 만든 대가로 투명해져서 사라져가는 몸을 그에게 비친다. 호다카는 울기 시작하며 히나에게 "나는 너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때 호다카가 마주하는 히나의 몸은 2D 픽셀처럼 보인다. 호다카는 그제야 자신이 성애화하던 여성의 몸이 2D 만화처럼 만든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 너머에 자신의 무의식에 깃든 환상에 의해서 희생제물로 사라질 여성이 있다. 나츠미의 가슴을 관음하고 그 관음을 부정하는 호다카는 그제서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 것이다. 이는 <너의 이름은.>에서 여성의 타액이 든 미인주를 마시는 방식을 정반대로 뒤집은 셈이다. 이 논쟁적인 시퀀스는 애니메이션적 캐릭터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작품 속의 일본 사회의 시선에 관객을 동참하게 만든다. 결국 사회는 히나든 아니든 타인을 희생자로 삼는 한에서 해당 대상을 투명한 육체로 보기 마련이니까.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 쇼박스

신카이 마코토는 그려낸다는 것이 결국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을 그리는 감독이었다. 이는 3.11 동일본 대지진을 그린 스즈메의 노트에도 드러난다. 노트는 검정색으로 색칠되어 있고, 우리는 스즈메가 경험한 트라우마를 목소리로만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감독의 사실적인 작화는 재난 앞에서 그제야 무력해지며, 감독은 계속 3.11을 금지된 영역에 두어서 자신의 실패를 고백한다. 신카이 마코토는 여기에서 모든 것을 그려내야만 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만드는 거장으로 성숙하기에 이르렀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스즈메가 외치는 "잘 다녀오겠습니다"가 괜스레 눈물이 흐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미미즈를 단속하러 문을 넘어가는 순간에 그는 이전과는 다른 시네아스트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쇼박스

스즈메의 문단속
Suzume
감독
신카이 마코토
Makoto Shinkai

 

출연(목소리)
하라 나노카
Hara Nanoka
마츠무라 호쿠토Matsumura Hokuto
후카츠 에리Eri Fukatsu
이토 사이리Itoh Sairi
하나세 코토네Hanase Kotone
하나자와 카나Hanazawa Kana

 

수입 미디어캐슬
배급 쇼박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22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3.08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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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8 02:59:17
좋은 해석일 수 있어도, 좋은 글인지는 모르겠어요... 잘 정돈된 학술지 읽는 기분이...

홍길동 2023-03-12 20:00:04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