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치히로 상' 사랑하지 않는 그러나 실연하는
[NETFLIX] '치히로 상' 사랑하지 않는 그러나 실연하는
  • 변해빈
  • 승인 2023.03.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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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정함 밑, 고독의 풍경"

이마이즈미 리키야의 신작 <치히로 상>을 다음 원고에 쓰겠다 편집장에게 전한 뒤, 일주일이 지나 연락 한 통을 받았다. 다름 아닌 원고를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는 매우 드문 상황이다. 나는 계획이 틀어지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편집장은 마감을 독촉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중요한 건 이것이 '그럴 만한' 요청이란 점이다.

바로 직전, 나는 <애프터썬>에 대해 쓰면서 개인적인 감정이 분리가 안 된다는 이유로, 며칠의 시간을 오히려 양해받은 쪽이었다. 창피하지만 또 다른 원고 하나는 어영부영 마감일을 미루다 그대로 날려 먹었다. 문제는 정당한 수준을 넘어 너그럽기까지 한 이 요청을 두고 나는 또다시 자기비하식 표현으로 상대의 말문을 막고야 만다. "저 자신이 정말 무섭네요"

누군가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을 이 방황의 서사를 구태여 떠들어본 건, 외관상 하릴없이 흘려보낸 시간 동안 적어도 내 생활에서 <치히로 상>을 잊어본 적은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다. 외려 이 영화로부터 위안을 얻기 내지는 의지하던 나날이었다. 볼품없는 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기분. 그것을 투명하게 응시하는 세계이므로.

 

ⓒ 넷플릭스(NETFLIX)

때는 무어라 이름 붙이기 모호한 어느 밤. 치히로(아리무라 카스미)는 그저 방안에 누워있다. 벨소리가 여러 번 울려 퍼지는 동안 그녀는 꼼짝하지 않는다. 실은 못 한다. 다행스럽게 벨소리는 그녀가 받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다. 치히로가 전화 너머 상대에게 중얼거린다. "지금은 못 가요. 물 밑에 있거든요" 우리도, 그 말을 들은 상대도 치히로가 왜 그런 심정으로 침수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보다 극의 후반부로 접어든 해당 대목에서 아마 이유를 따져 물으려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치히로 상>은 주어진 특정 상황을 집요하게 파헤치기보다 '그 순간, 당장에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다정함을 베푸는 영화'다. "(인간의 몸은) 죽었든 살아 있든 물 위에 다 떠. 몸부림치지 않으면 물에 뜨지만 버둥대면 가라앉고 말지." 상대의 상념에 기꺼이 호응하며 말이다. 이 영화가 쓰는 다정함의 질료는, 상대의 손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움켜쥘 때가 아니라 잠시 잡았다가 놓을 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생겨난다. 치히로는 외로운 존재들 사이에 깊숙이 파고들어 자리를 마련한 뒤, 소외된 타인에게 다시금 그 자리를 내어주며 떠난다. 그야말로 유령적이고 고독하다.

치히로가 어떤 이유로 '안 어울리는' 성매매 업계에 스스로 발 들이게 되었는지, 죽은 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가 정작 엄마의 부고는 시간이 지나서야 실감하려 애쓰는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 수 없다. 변두리 삶을 살던 인물들은 더 이상 그들의 과거를 감추지 않지만, 또한 스스로 밝히지 않은 과거는 묻어두기로 암묵적으로 약속한 자들이다. 살아온 과거 혹은 '나'를 구성하는 정보의 여백을 메우기보다 그것 자체를 일면으로 인정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가장 먼 타인, 곧 자아의 (외로움을 털어내고) 고독을 붙잡는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만남은 신비롭고 애틋하지만 흘러넘치지는 않는다.

떠남의 과정은 간결하고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다. 길 위의 고양이가 카메라를 먼저 차지하고, 치히로가 외려 그것의 부정형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던 오프닝을 보며, 영화가 치히로보다 앞서 그녀의 미래를 상정하긴커녕 때가 되면 결국 떠나보내고 말 것이란 예감은 진작 만연했다. 치히로는 그녀가 잠깐 잡았다 놓은 어느 여인(동명 치히로)의 손처럼 프레임 속에 붙잡아둘 존재가 아니다. 마을 구석구석 분리된 이들을 이웃으로 엮어내길 자처할수록 그녀는 관계의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조용히 물러난다.

 

ⓒ 넷플릭스(NETFLIX)

<치히로 상>의 다정함이 우연적일지언정 결코 가볍지 않음을 말하기 위해서 '실연의 풍경'을 말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실연은 '인연을 끊어내는 아픔 속에 침수된 상태'로 넓게 풀어서 이해해야 한다. 치히로는 죽은 갈매기의 무덤을 만들어 준 뒤 남은 귀갓길을 홀로 걷는 중이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아니하고 외딴 세상 속에 불시착한 외로운 영혼의 형편에 동화되어서일까. 그녀는 홀로 밤을 지새우던 유년기, 슬픈 시절의 풍경을 바꿔놓은 어느 여인의 다정함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밤은 혼자 남겨진 어린아이와 (애석한 표현이지만) 어둠의 위태로움에 익숙해진 여인의 조합으로 이뤄진다. 추측하건대 이 여인은 잠시 일터를 빠져나왔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성 노동자다. 이때의 다정함, 어떻게 가능한 걸까.

여성과 아이의 편이 되어주는 드문 밤의 풍경은, 역설적으로 그 속의 여성과 아이 그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만약 그들 중 한쪽이 아이 혹은 여성이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외로움과 남들은 보편적이라 말하는 관계의 왜소함을 모를 수 있다면, 그 '밤은 우리 편'이라 말해질 수 없었다. 아이가 자신과 발맞춰 걷는 어른의 손을 당연하게 잡아왔다면, 짤막한 만남이 일평생 지속될 고독의 길을 비추는 기억이 되지 못했다. 또 치히로(이치카와 미아코)가 무너진 동심을 가슴 아파하며 억지로 봉합하려 했다면, 성인이 된 아이(치히로)가 죽은 무언가의 무덤을 만드는, 곧 작별을 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치히로 상>이 구태여 이야기의 여백, 느슨한 관계의 관절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인 까닭은, '같은 고독을 알아보는 사람이 그 고독을 하찮게 대하지 않는다'는 어쩐지 애달픈 경험치 안에서 맹렬히 상호작용하기 때문일 터이다.

 

ⓒ 넷플릭스(NETFLIX)

치히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독차지하는 일이라면 사랑은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녀는 무언가와의 깊은 실연에 빠져 있다. "날 너무 좋아"해서 그랬을지 모른다고 에둘러 말하더라도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치히로의 흉터가 그녀의 아프지 않은 과거일 수는 없다. 사람이든 세상이든 버림받고 방황하는 존재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는 일에 몰두하는 그녀는 적어도 그들과 같은 아픔을 알고 있다. '치히로'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다정한 그녀들의 손길은 물 밑으로 빗대어진 음울한 취기와 정서적인 허기짐 속에서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내 본 적 있다는 묵시적 신호와 같다.

   

사랑에 쉽게 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실연에 익숙한 사람의 몸부림치지 않는 태연한 태도가 (물결이 비치는 집의 외관처럼) <치히로 상>의 물 밑의 세계를 지상으로 끌어올린다.

따라서 치히로의 떠남은 지상으로 떠올라 두 다리로 나아갈 길 위를 딛는 회복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는 사랑에 빠지는 황홀함을 설파하기보다, 주변의 타인에게 하염없이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하기보다, 자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가만히 응시하기, 그 자체를 강조한다. 치히로가 자신에 대해 "그냥 벤또 가게에서 일했어요"하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

치히로는 조금 더 먼, 자기 과거와의 실연을 끝마친 뒤 조금은 더 일찍 그리고 덜 서툴게 물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방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글 변해빈 영화평론가, limbohb@ccoart.com]

 

ⓒ 넷플릭스(NETFLIX)

치히로 상
Call Me Chihiro
감독
이마이즈미 리키야
Rikiya Imaizumi

 

출연
아리무라 카스미
Arimura Kasumi
토요시마 하나Hana Toyoshima
시마다 텟타Tetta Shimada
van
와카바 류야Wakaba Ryuuya
사쿠마 유이Yui Sakuma
나가사와 이츠키Itsuki Nagasawa
이치카와 미와코Ichikawa Miwako
스즈키 케이이치Suzuki Keiichi
릴리 프랭키Lily Franky
후부키 준Fubuki Jun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3
상영시간 13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2.23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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