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본 칸트' 파스빈더를 향한 애도
'피터 본 칸트' 파스빈더를 향한 애도
  • 이현동
  • 승인 2023.03.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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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의 눈물은 누구의 눈물인가"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프랑소와 오종'의 <피터 본 칸트>(2022)는 독일 영화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페트라 콘 칸트의 쓰디슨 눈물>(1972)을 원작으로 삼는다. 여기서 먼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과연 이 작품이 얼마나 원작과 변별력을 가지는가' 일 테다. 만약 그저 동성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두 작품에서 남자와 여자의 성별이 바뀐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낀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우선, '파스빈더'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파스빈더는 익히 잘 알려졌듯 동성애자이며, 함께 작업했던 이들을 가학적으로 몰아붙인 폭군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환경은 철저하게 지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고, 가족적 삶을 끊임없이 동경했다. 여기서 그가 영화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기를 다음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내가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 이는 그가 '자신을 올곧이 반영하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스빈더의 작품 세계에는 '소수자'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주노동자, 가난한 자, 성적 소수자 등이 바로 그 예시다. 그는 그들을 향한 '연민'을 가지는 동시에 소수자인 자신을 영화에 계속하여 투영했다. 그의 눈에는 독일 부르주아 사회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그 사회 안에 자신의 성적 주체를 호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영화란 매체'였다. 이러한 그의 영화가 현대에 이르러 퀴어 영화를 주로 다루던 오종을 통해 '어떻게 복권되는지'는 분명 의의가 있다. 단순히 여성의 역할을 남성으로 환원한다고 해서 원작이 가진 정서를 다른 방식으로 변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오종은 여러 자리에서 밝힌 적 있듯 '무엇이 영화의 미적 수단이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사람이지, '정치'적인 작품을 고수하는 감독이 아니다. 우린 이를 통해 지금에 이르러 다시금 재현된 <피터 본 칸트>의 특징이 드러나는 순간을 확인해볼 수 있다. 특히, 영화의 맨 처음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염을 기른 남성의 얼굴'이 '파스빈더'라는 것을 상기할 때부터, 이 영화는 오묘한 국면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관측되는 이번 오종 영화의 특징은 '파스빈더를 드러내는데 거침이 없다는 것'이다. 미리 밝혀두자면, 이는 소수자에 대한 정치적인 항거라기보다 '파스빈더를 애도하는 것'에 가깝게 느껴진다.

 

'오종'의 미학

채도를 한껏 증폭시킨 붉은색 바탕의 주인공 '피터'(드니 메노셰)의 얼굴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떠올릴 만한 '강렬한 색감'으로 프레임을 장악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든 시퀀스가 실내극으로 구성되었던 원작에서 운용되지 않았던 건물의 외형은, 무엇보다 제삼자인 오종의 시점에서 본 파스빈더의 삶이라는 점을 예고한다.

흥미롭게도 피터가 커튼을 치는 장면에서 사용되는 '점프 컷'도, 파스빈더와 전혀 다른 형질의 것이다. 원작이 브레히트를 위시한 연극적 기법의 도입으로 생성되는 무감각한 대사와 심원한 롱테이크를 원작이 구비하고 있다면, 상영시간을 124분에서 85분으로 압축한 <피터 본 칸트>는 원작에 있었던 몇몇 대사를 축약하고, '색감'과 '과장된 연기'를 통해 이를 대체한다. 이러한 프레임에서 향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국면은, 원작의 외곽을 투명하게 용해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파스빈더가 영화에 삽입하려는 자기반영성을 반대로 오종은 그의 삶을 관찰하며 풀어낸다.

숏-리버스숏이라는 구분은 인물들과의 관계를 전형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기에 모종의 각주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특히, 곳곳마다 구조적으로 인물을 비추는 '거울'은 자기 반영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한편, 오종의 영화에선 조금 다르다. 원작은 이것을 뒤틀어 그 구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했다면, 오히려 오종은 이를 정직하게 구현하려 한다. 가령 원작에서 관음적으로 인물들을 관찰하는 앵글은 '문'과 '기둥'과도 같은 장애물을 인물의 관계에서 배치함으로 폐쇄된 양식에 응집하고 있는 소수자의 현실을 직시하려고 한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오종의 영화는 상대적으로 영화라기보다 미술작품처럼 느껴진다. 그렇기에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원작이 파스빈더의 작품이든 피터가 파스빈더로 기획된 인물이든 별 상관이 없다. 다시 얘기하자면, '색감의 변용'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사랑 혹은 이별의 감정을 생성하는 기제로 발산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벽면에 걸려있던 시도니의 초상화가 아미르(칼릴 벤 가비아)로 점차 변용하는 점도 원작과 대조해보면 전혀 다른 성격의 영화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처음 아미르가 파스빈더의 구애를 받고 영화를 찍는 장면까지도 미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유연하고도 매혹적인 얼굴과 몸은 <피터 본 칸트>가 가진 미장센을 모두 압축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동성애가 원작과는 다르게 몸과 몸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 또한 오종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피터 본 칸트>는 원작에 비해 굉장히 기민하고 리드미컬한 영화이지만, 원작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 수많은 대사는 영화에서 어떠한 의미를 함의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원작에서 카린 역할을 맡았던 '한나 쉬굴라'는 이 영화에서 메타적인 접근을 지시하고 있어서 영화가 단순히 미적인 감각만을 내세우지 않도록 방지해준다.

 

파스빈더와 한나 쉬굴라

<피터 본 칸트>는 영화감독인 피터를 잠에서 깨우는 하인 칼(스테판 크레폰)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원작과 거의 유사하게 유명 배우인 시도니(이자벨 아자니)와 친분이 있고, 그녀가 소개한 남자배우 아미르와 사랑에 빠진다는 평면적인 이야기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하지만 <피터 본 칸트>가 몇몇 배우를 기용하는 방식은 마치 이 영화 캐릭터들의 '실제 삶'과 닮아있어 제법 흥미로운 지점을 시사한다. 먼저, 하인으로 충실하게 명령에 복종하는 칼은 영화에서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어떤 말도, 행위를 할 수도 없는 그는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사회에 굴종하는 시대적 배경과도 닮았다. 곧이어 대배우로 성공한 시도니(이자벨 아자니)의 등장은 이 영화에서 화려하게 구현된 색감과 일치되는 비주얼로 영화의 성질을 규정하는 인물이다. 아미르 포지션도 사실 시도니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후반부에 한나 쉬굴라의 등장은 많은 것을 함의한다.

한나 쉬굴라는 20대인 초기 파스빈더의 활동을 협력하고 연기자로 작품 활동을 함께하며 우정을 키워온 인물이다. 쉬굴라는 그에 대한 연민도 갖고 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런 그녀가 <피터 본 칸트>에서 피터의 어머니로 등장한다.

자기 아내를 만나러 가겠다고 말한 아미르의 연락이 끊긴 후, 피터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어머니의 생일 축하를 위해 모인 시도니와 딸 가브리엘(아민트 오디아르)에게 거침없는 말을 쏟는다. 로즈마리(한나 쉬굴라)에게까지 선물을 던지며 위선자라 소리치는 피터는 "그를 사랑한다"며 울먹인다. 그리고 이후 적막한 밤에 그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여기서 오묘하게 느껴지는 건, 마치 환생한 파스빈더의 영혼을 카린이었던 즉, 아미르였던 한나 쉬굴라가 그를 진정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필요한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이야. (...) 사람은 늘 진실을 말해야 한다"

이 두 문장은 파스빈더의 삶을 축약한다. 성적 소수자였던 그의 삶에서 투철하게 항거했던 무조건적 '사랑', 그리고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던 '영화'는 그의 정신을 대표한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한나 쉬굴라는 프랑스어로 진행되던 영화의 흐름을 독일어를 사용함으로 단번에 바꾸어 놓는다. 바로 그가 파스빈더이고, 그녀가 한나 쉬굴라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표명하는 것이다. <피터 본 칸트>는 언어의 변화만으로 순식간에 파스빈더를 상기하게 한다(파스빈더의 영화에서 프랑스어로 된 영화는 없다). 로즈마리 앞에서 아미르의 전화를 받는 피터는 그와 만남을 거절한다. 영화 마지막에 피터는 칼에게 이제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너에 대해 말해달라고 말한다. 칼은 그에게 침을 뱉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간다. 원작에선 침을 뱉지 않는다. 이것 또한 오종의 직설적인 양식을 도입한 것이다.

곧이어 필름을 영사하며 아미르의 모습에 손을 뻗으며 눈물을 흘린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그 프레임 한복판에는 피터의 얼굴만이 클로즈업된 채로 떠돈다. 인디와이어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나 쉬굴라는 37살에 요절한 파스빈더에 대해서이렇게  말했다. "그는 영화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일찍 죽은 것이 아니며, 영화 덕분에 37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 말에서 우린 파스빈더 뿐만 아니라 영화란 매체가 선사하는 담백하고도 애절한 애도를 목도하게 된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피터 본 칸트 
Peter von Kant
감독
프랑소와 오종
Francois Ozon

 

출연
데니스 메노체트
Denis Menochet
이자벨 아자니Isabelle Adjani
칼릴 벤 가르비아Khalil Ben Gharbia
한나 쉬굴라Hanna Schygulla
스테판 크레퐁Stefan Crepon
아민트 오디아르Aminthe Audiard

 

수입 루믹스미디어
배급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8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2.15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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