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용의 영화 일기] 2023년 3월 1일
[이상용의 영화 일기] 2023년 3월 1일
  • 이상용
  • 승인 2023.03.04 14: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냥 보고 느끼는 대로 느끼는 것이 전부"

한동안 개봉 영화를 잘 보지 않았는데 이런저런 일정으로 관람하는 편수가 늘어났다. 쓰는 글들은 한정되어 있고, 또 길게 쓰는 게 많다 보니 언급하고 싶어도 지나치는 영화들이 생겨났다. 개인 블로그나 이런저런 플랫폼에 올려도 좋겠지만, 불특정하게 일기를 써도 괜찮겠다 싶어 적기로 한다. 일종의 새해 결심이다.  

 

<애프터썬Aftersun> 샬롯 웰스Charlotte Wells|2022

작년부터 워낙 화제가 되었던 영화. 보고 나서의 첫 느낌은 '괜찮다'와 '나쁘지 않다' 사이의 어딘가. 강연을 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마음을 접었다. 그것은 영화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를 굳이 말해야 할까' 라는 고민 때문이었다.

<애프터썬>은 20년 전 튀르키에의 한 리조트에서 아버지와 딸이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적 구성은 캠코더로 찍은 기록(객관적 기록)과 딸의 기억(주관적) 사이를 오간다. 아마도 강연을 열었다면 기록과 기억을 구별하는 것이 시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강연을 하지 않기로 한 결정적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기억과 기록 사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아버지를 잃은 딸에게 오래전 기억 혹은 기록은 하나의 추억이자 상실 그 자체이고, 어린 소녀에게 구별은 무의미하다. 객관적 기록과 주관적 기억이 뒤섞여 '어제의 세계'가 된다.

이를 토대로 영화적으로 구현했으니(결국 대중에게 보여질 것을 전제로 기억과 기록을 섞어 만들었으니) 가타부타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영화가 애당초 하고 싶은 것은 주관과 객관의 구별은 무의미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 영화는 과거의 상처 혹은 추억을 말하는 것 사이에 혼란, 기억과 기억의 편린들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어제의 세계, 그것을 추억하기도 하고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남기는 여운에 가깝다. 그런데 주관적 기억이나 상처를 말하는 순간에는 종종 이상한 작용이 일어난다.  

ⓒ 그린나래미디어

누군가 어떤 장면은 아프게 다가갈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푼크툼일 장면들이 그렇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바르트가 언급한 사회적 지표의 이미지라 할 수 있는 '스투디움'으로 다가갈 것이다. 『밝은 방』에서 저자 롤랑 바르트는 제아무리 푼크툼이라고 해도 그것이 발화되는 순간 스투디움으로 전환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분석틀을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내게는 이 지점이 중요했다. 그 장면이 찔리는 푼크툼인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스투디움인가 구별하는 것은 이미지에 대해 말하는 순간 무색해진다. 이미 말해진 것은 더 이상 푼크툼이 아니다.

이 영화를 말해야 하는 운명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평론가가 나서서 제아무리 그럴듯하게 설명해 보았자, 이 영화가 전달하고 싶은 어떤 푼크툼들이 상실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영화는 보는 것, 그 자체로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다만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일기를 쓰는 것은 어떤 공적인 의무감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서다. 그저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잘난 체로 여겨주시기를.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냥 보고 느끼는 대로 느끼는 것이 전부다."라고 쓰고 싶다.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 김덕중|2021

개인적으로 꽤 흥미롭게 본 영화. 전작 <에듀케이션>(2020)에서 조금 더 나아간 김덕중 감독의 신작이다. 아주 큰 반향을 일으키기는 어렵겠지만, <컨버세이션>은 어른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눈길이 갔다.

일률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요즘 한국의 독립 장편 영화들의 상당수는 <에듀케이션>과 닮아 있다. 성장하는 존재들의 세계, 성장하는 것의 고통을 이야기로 다룬다. 에드워드 양이나 허 샤오시엔을 참조하든, 독일의 헤세나 토마스 만을 참조하든 어떤 레퍼런스를 가져올 수 있다. 이에 따른 일정한 반향과 에너지를 일으키는 시기가 있고, 동시에 성장담은 쉽사리 진부해지는 때가 반드시 온다. 요즘 한국의 독립장편 영화들의 전반에 느끼는 생각은 대략적으로 이러했다.

ⓒ 필름다빈

그런데 <컨버세이션>은 어른들의 이야기였다. 성장을 멈춘 아니 성장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영화는 균질하지 않고,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는 엇갈리거나 겹쳐지거나 사라지면서 흘러간다. 어떤 중심을 붙잡을 수가 없다. 그것이 현재 어른들의 이야기라면 이야기일 것이다. 택시 운전사와 주인공의 대화처럼 길고 지루한 반복이 어둠 속에서 휘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리와 연결의 고리를 더 파고들었다면(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끝내 붙잡으려다 실패하는 지점을 더욱 또렷하게 그려냈다면(이 영화 전체가 이러한 정서와 세계를 담고 있다), '그래도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갈 기회가 마련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본 어른의 영화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제목에 대한 고민이다. 전작 <에듀케이션>도 그렇고, <컨버세이션>도 그렇고, 'tion'을 좋아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런 라임에 굳이 사로잡힐 필요는 없을 듯. 너무 유명한 영화들과 경쟁하는 제목이 이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Mother Land> 박재범|2022

근래에 본 한국 영화 중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장편 애니메이션인 탓도 있다. 하지만 불모의 현실에서 스톱 애니메이션을 장편으로 만들어 냈다는 식으로 사전에 칭송하며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불모이든, 쓸모이든 관객의 입장에서는 작품으로 판별할 따름이니까. 그런 점에서도 꽤나 진지한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갈 뿐만 아니라 끝까지 보게 하는 힘이 있다. 

ⓒ 더쿱디스트리뷰션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의 애니메이션 과정을 통해 완성한 작품인데, 알다시피 한국영화아카데미는 홍대 시절을 접고 영화진흥위원회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있는 상태다. 그것이 현재 상황에 꽤 변화를 주었다는 것은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동안 한국영화아카데미는 봉준호, 장준환을 비롯한 한국 영화감독의 요람 구실을 했다. 지금도 그런가라고 묻는다면, 과감히 아니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주는 경우는 <엄마의 땅>과 같은 작품 때문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 애니메이션은 간헐적으로 선보인 바 있고, 한국에서는 산업이 아니라 교육 기관 프로그램을 통해서 장편이 제작되는(물론 뽀로로나 '연필로 명상하기'는 예외다) 예외적인 형태가 튀어나오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서 어떤 작가나 작품이 나오는 것은 변함없는 예외상태이고,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여기에 일조해 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은 없다.  

아무튼 <엄마의 땅: 그리샤와 숲의 주인>은 스톱 애니메이션으로 3년에 걸쳐 제작이 되었고, 장편으로 완성되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의 앙시영화제나 다른 기회를 먼저 잡았으면 어땠을까 할 정도로 완성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더 숲 시네마에서 마련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통해 만나 본 박재범 감독과 이윤지 감독은 명민한 사람들이다.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듯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많은 기지와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들이 산업적 지지를 받아 새로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상황,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이 글을 남긴다. 캐릭터 촬영의 섬세함은 물론이고, 어떤 것을 수공업적으로 표현해내는 장인의 기질이 농후하다. 알다시피 장편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장인적 기질'이다. 이야기만 좀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갈 수 있다면, 이를 구현할 아이디어는 충분한 팀이다. 신화와 옛이야기적 세계를 표현하는데 훌륭한 능력을 입증했지만 이들의 단편 중 <더미: 노 웨이 아웃>과 같은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면 SF야말로 이들의 미래가 아닐까 싶기도 할 정도다.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다음 소희Next Sohee> 정주리|2022

전작 <도희야>(2014)에서 멀리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좋은 부분이라면, 한 시간이 지날 무렵 바통을 터치하는 배두나가 본격적으로 등장할 때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사회 초년생으로 고통을 당하는 소희의 모습과 선택은 가슴 아픈 사연이지만 한편으로는 진부하기도 하다. 오히려 '그러한 소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배두나가 연기하는 인물을 통해 제기된다.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더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미처 다 말하기도 전에 끝난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소희의 이야기를 삼십 분 정도로 압축하고, 그녀의 죽음을 발화하는 배두나의 이야기를 늘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것이 바로 '다음 소희'의 문제를 건드리니까.

극장에서는 단체 관람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전해 들었다. 여전히 우리의 문제이고, 일정하게 영화는 이를 소구하며 호응을 가져온다. 하지만 영화가 보다 영화이기 위해서는 지정된 단체 관람이 아니라 자체 관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독립 장편 영화들에게 이렇게 되는 일조차도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닌 절반가량의 성공이 보다 보편적인 목소리로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긴다.

배두나가 등장하는 한 시간 이후는 전반부의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효과보다 더 큰 사회적 죄의식을 건드리면서 이것이 전체의 문제임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종 공분이 더 효과적으로 보일 때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분노하는 목소리만큼이나 사회적 이해를 구하는 방식에 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그런 점에서 참고가 되는데, 전제는 공분을 일으킬만한 상황이지만,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언제나 노력하는 것은 '이를 어떻게 스며들게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죄의식의 차원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이야기 안에, 카메라의 운동 안에 공감의 확산을 일으킬 수 있다. 십 대들의 노동에 관한 일명 '로제타법'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럴 때 다음 소희만이 아니라 지금 소희도 기억할 수 있고, 어제의 소희도 떠올릴 수 있다. 이 영화가 모두의 소희를 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궁지에 몰린 쥐는 치즈 꿈을 꾼다The Cornered Mouse Dreams of Cheese> 유키사다 이사오Yukisada Isao|2020

ⓒ 홀리가든

한국에도 자주 방문했던 '유키사다 이사오'의 신작. 요즘 한국에서 통용되는 용어로는 BL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키사다 감독은 인물을 구축해 가는 능력 면에서는 탁월하다.

일상 속에서 인물들의 선택과 고민을 갖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일본 특유의 것이 있다. 최근 넷플릭스에 올라온 <치히로 상>(2023)도 마찬가지. 물론, 이러한 흐름의 영화들만 따라가다 보면 지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인들 모두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고, 그들이 힘을 내어 서로를 돕고 위로한다는 전개는 지극히 따뜻한 듯하다. 동시에 이러한 식으로 장르화 된 관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마디로 많이 본 태도라는 것이다.

모두가 선한 이들로 채워진 대표적 사례는 누가 뭐래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메모 식당>(2007)과 <안경>(2007)일 것이다. 그는 지금도 비슷한 스타일의 영화를 쌓아가고 있다. 그에 반해 유키사다 이사오에게는 '보다 더 강렬한 캐릭터'가 있다. 인물들의 엇갈린 선택으로 인한 파국도 훨씬 강렬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사오 감독의 근래 작품은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이었던 <리버스 엣지>(2018)다. 일본풍의 코미디 드라마를 내장했지만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에 대한 태도는 훨씬 더 냉소적이고 보편성을 지향한다.  
 

 

<더 웨일The Whale> 대런 아로노프스키Darren Aronofsky|2022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제 막 개봉한 작품.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이자 연극을 영화로 옮긴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도 연극처럼 한 공간에서 두 시간을 이끌어 간다. 몸이 고래처럼 커진 아버지와 딸의 사연이 엔딩에서 일정하게 감동을 다가온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의 감동은 좀 진부했고, 오히려 '글쓰기(에세이)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더 많은 흥미가 간다.

주인공이 자신을 드러내듯이 결국 글쓰기란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이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되겠지만(그리하여 주인공은 화면을 끄고 에세이 수업을 진행한다) 결국 드러내지 않으면 다가갈 수가 없다. 자신의 딸에게도, 죽은 이에게도. 그 선택은 나쁘게 작용할 수도 있지만 예기치 않은 좋은 효과로 다가가기도 한다. 그 복합성이 두 시간 남짓 되는 영화 안에 깔려 있다. 결국 글이란, 자기의 인생을 사는 것이란 자신을 드러내고 마주할 때 비로소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면서 모비딕과 고래를 쫓는 에이헤브 선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본다. 주인공 아버지는 모비딕이었을까? 에이헤브였을까? 결국 선장은 흰고래가 아니라 자신을 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많은 것을 어렵지 않게, 한 인물을 통해 간결하게 전달하는 힘이 돋보이는 영화. 물론, 이 캐릭터를 연기한 브렌든 프레이저(미이라의 그 배우다)는 사실 자기 인생을 연기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가 스타가 된 후 영미권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건에 휘말려 왔던가. '프레이저'에게 이 영화는 누가 뭐래도 '고백록'인 셈이다. 물론, 이 사실을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 영화의 층위란 그런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영화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너무 종교적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구원을 다루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노골적으로 종교적거나 한 종교에 의지할 때는 메타포의 위력이 오히려 감쇠된다. 그런데 <더 웨일>은 전작들에 비해 덜해진 종교적 색채 속에서(물론 종교에 대한 언급과 인물은 풍부하다) 구원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훨씬 풍부해진 구원의 메타포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