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일' 동시대 허무주의자에게 허락된 구원
'더 웨일' 동시대 허무주의자에게 허락된 구원
  • 김경수
  • 승인 2023.03.0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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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의 아득한 격차를 넘으려는 익명의 서사"

변증법 대신에 삶이 찾아왔으니, 의식에도 완전히 다른 것이 생겨나야만 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2』 中

 

<더 웨일>(2023)의 오프닝은 어딘가 당황스럽다.

탁 트인 평원에서 정체 모를 한 남자가 버스에 내리는 것을 부감으로 찍는 장면으로 시작하더니 곧장 화면이 전환된다. 열다섯 명이 접속한 줌 화상강의 한가운데 꺼진 화면이 등장한다. 화면 너머로 찰리(브랜든 프레이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서론과 본론, 결론을 단락 구조가 든 파일을 보내며, 구조에 따라서 글을 쓰는 것이 제약을 느낄 수 있더라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끔 글을 쓰게끔 하는 과정이라 강의한다. 영화가 끝날 즈음에도 주인공인 찰리보다 먼저 등장한 남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찰리가 사는 도시로 가는 토마스(타이 심킨스)로 지레짐작만 가능할 뿐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더 웨일>은 두 배우의 얼굴을 은폐하면서 시작한다. 얼굴은 캐릭터의 개별성을 각인하는 기호이다. 얼굴이 없기에 앞에 등장한 두 사람은 누구든 될 수 있다. 둘의 얼굴은 오프닝이 끝난 뒤에야 그 정체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물론, 지금껏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그것으로 극을 전개하는 감독의 스타일을 미루어보았을 때 제법 의아한 선택이다. 얼굴의 은폐가 만드는 익명의 미스터리는 이 영화를 모든 이의 이야기라고 보게끔 한다. 이는 동시대를 빗대는 알레고리로 보아야 하는 이 영화만의 방법론을 넌지시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족 서사로도, 퀴어 서사로도 보이지만 단순히 이로만 환원하기에는 그 맥락이 제법 복잡한 지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더 웨일>의 문제는 어떻게 절대악일 수도 있는 다가올 익명의 세대를 이해하고 마주할 것이냐의 문제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272kg의 거구인 찰리가 있다. 그는 대학 제자이자 동성 연인 앨런이 죽은 뒤 폭식증에 걸렸다. 그는 앨런의 여동생 리즈(홍 차우)의 간호 아래서 집에 갇혀서 꼼짝도 못 한다. 리즈는 그의 수명이 일주일가량 남았다는 시한부를 알리지만, 그는 결코 병원에 가지 않으려 고집부린다. 이단인 새생명 교회의 선교사 토마스는 우연히 그의 집에 방문한다. 때마침 찰리가 게이 포르노를 보고는 발작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찰리는 급히 누군가 쓴 『모비 딕』의 에세이를 낭독해달라고 부탁했고, 토마스는 찰리를 신앙으로 구원하겠다는 구원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힌다. 리즈는 토마스를 경계한다.

찰리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의 딸인 엘리(셰이디 싱크)에게 에세이를 봐준다는 핑계로 보고자 한다. 찰리는 8년 전 동성 연인 앨런을 만나고 아내 매리(사만다 모튼)와 딸 엘리를 두고는 가출한 이력이 있고, 그로 인해서 엘리는 찰리를 증오하고 있다. 엘리는 찰리가 자신을 내쳤다는 트라우마로 비행청소년으로 자라나고 있다. 네 인물이 찰리의 집에 교차해 등장하면서 각 인물의 비밀이 드러난다. 그리고 진실이 켜켜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처럼 다양한 캐릭터가 하나의 공간에서 교차하는 서사 구성은 영화 원작이 새뮤얼 D.헌터의 동명 연극이기 때문이다. 새뮤얼 D.헌터도 본인의 고도 비만 경험을 기반으로 해 원작을 쓴 것이며, 시나리오 각색 과정에도 참여했다. 그는 10년 전에 이 연극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고, 영화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던 참에 연극을 영화로 제작하기에 이른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연극 원작을 각색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세계관을 집대성하기에 이른다. 과잉된 그의 세계관은 이번에는 인물 간의 관계로 절제되어서 드러난다.

 

비루한 타자를 마주하려는 윤리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세계관은 두 가지 키워드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캐릭터다. 중독과 광기 등 감독이 작품에서 그려내는 캐릭터는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영화가)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타인을 관계 맺게 하는 것이 전부"라고 이야기했다. 이는 그가 이 영화의 원작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찰리'라는 복잡한 정체성을 지니는 이를 알아가는 과정을 영화로 찍으려 한 것이다. <레퀴엠>(2000), <더 레슬러>(2009). <블랙 스완>(2011) 등 그의 필모 전반에서 재현되는 다양한 인간군상은 그가 타자를 소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특히, <블랙 스완>에서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도래라는 테마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배우까지 포함되어 있다.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 <블랙 스완>의 위노나 라이더가 그 역할을 도맡았다. 미키 루크가 권투 선수 출신이지만 할리우드 섹시 스타로 스타덤에 오르던 참에 몰락하는 과정, 위노나 라이더가 할리우드의 대표 여배우이던 시절을 뒤로 하고 쇠락하는 과정은 영화의 캐릭터로 은유된다. 이는 대런 아로노프스키뿐만 아니라 숱한 감독이 택하는 연출이지만, 그의 영화에서 더 두드러진다.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더 웨일>에서 '브랜든 프레이저'의 캐스팅도 이의 연장선이다. 웨일은『 모비 딕』의 부제일 뿐만 아니라 고도비만을 경멸조로 지칭하는 비속어이기도 하기에 고도비만인이 아닌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이 병으로 고통받는 당사자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감독은 브랜든 프레이저가 마주한 상황이 은둔한 영문학 교수 찰리의 사회적 정체성과 이어져 있다고 판단해 그를 캐스팅했다.

브랜든 프레이저는 블록버스터 <미이라>시리즈로 스타 배우로 부상했던 배우다. 그는 <미이라>2편 촬영 중 무리한 스턴트로 인해서 척추와 무릎 연골이 으스러졌다. 설상가상으로 성대결절까지 걸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커리어가 추락했다. 그는 2007년에 결국 아내와 이혼했고, 10년간 매달 1억 원가량의 양육비를 보내야 해서 전 재산을 매각하기에 이르렀다. 자폐로 태어난 큰아들은 그가 돌보아야만 했다. 2018년에 그는 미투 운동의 피해자로, 자신이 전 할리우드 외국인 언론 연합회장인 고위 간부 피터 버크에게 2003년에 성추행당했으며, 그로 인한 PTSD로 우울증을 앓으며 폭식증에 걸렸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브랜든 프레이저의 상황은 밈으로 쓰이기까지 했다. 그의 인생사를 아는 이에게 찰리가 당하는 수난은 그의 이야기로도 보일 것이다.

아로노프스키는 한동안 대중의 주목받지 못했던 브랜든 프레이저를 캐스팅한 이유를 그가 찰리의 나약함, 그리고 주제에 내재된 위험을 드러낼 수 있을 것으로 믿어서라고 말했다. 또한 집을 영화의 촬영장과 비슷한 환경으로 구성하고, 여러 전문가에게 비만인의 움직임은 물론이며 그들이 앉아있을 때의 무게중심까지 자문받으면서까지 연기에 헌신하는 브랜든 프레이저의 집념은 이 영화를 완성한다. 감독은 우리가 만날 수 없는 브랜든 프레이저를 재현하는 경지에 이른다. 배우를 통한 픽션과 현실의 연결은 감독의 주제의식을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영화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타인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누군가도 그토록 수난당하고 있을 수 있다고 느끼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은 그저 찰리라는 캐릭터를 보고 흘리는 눈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찰리가 세상 어디에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로 채택된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를 보고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다.

   

이는 비극적 운명을 경험한 모두를 위한 연민의 감정으로 전이된다. 이 둘이 교차하면서 <더 웨일>은 비루한 타인을 마주하는 기적적인 순간에 이른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그에게 잠시나마 허락되는 초월은, 찰리에게 허락된 것이라기보단 배우에게 허락된 것에 더 가까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 혹은 대런 아노로프스키가 발탁한 배우가 그 이상을 연기하지 않는 것은 오롯이 이 순간을 위해서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다만, 영화에서 찰리는 긍정적인 톤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4:3의 화면비로 인물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드러난다. 화면비는 육중한 보철물을 달고 움직이는 찰리를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찰리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프레임 안에서 절단되기에 이른다. 이는 줌 수업에서 두드러진다. 프레임에 절단되는 찰리를 본 학생은 그 충격에 놀라 사진을 찍기에 이른다. 찰리가 진정성과 솔직함이라는 상투적인 주제를 강조하는 장면인데도 왜인지 눈물이 나는 것은 왜일까. 화면에 담기지 않는 숭고를 보고는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놀란다. 한편으로 찰리에게 매일 피자를 배달하러 온 배달부는 찰리의 실물을 처음 보고는 "Oh my god"이라 외친다. 영영 타인에게 잘려 나가서 존재할 수밖에 없기에 신이 되기도 하고, 비웃음거리가 되기도 하는 찰리를 온전한 한 개인으로 마주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결말에 다다라서야 찰리의 육체가 처음으로 스크린에 한 번에 담긴다. 인물을 풀숏으로 잡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그는 타자를 만나는 경험을 열어젖힌다. 이는 찰리의 작문 강의에 나와 있다. 처음에는 서론-본론-결론에 이르는 단락 형식이 명확하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쓰게 하지만, 결국 서로를 진실하게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 좋은 글을 쓰게 한다는 자기 위안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그의 장광설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하지는 않는다. 바보이기에 오히려 인간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인물 유형인 유로지비(바보 성인)의 전형으로 보이는 찰리는 엘리의 입장에서 진정성이란 단어로 포장된 기만적 인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판단을 관객에게 맡긴다. 그가 아무리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서 "정말이지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발견하는 거야. 끊임없이, 영원히 발견하는 거지. 이미 발견된 것은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한들 그저 타락한 탕자로만 볼 수도 있도록 말이다. 그의 상투적인 말은 납득되기보다는 질문에 부쳐지기에 더욱 눈물이 나게끔 한다. 이는 그가 언제나 시대착오적 인물로 있어서다.

 

다신론과 염세주의를 넘어 '대화의 장'으로

<더 웨일>의 또 하나의 키워드는 무신론에 기반한 '염세주의'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어릴 적에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유대교 신앙에 회의를 지니기 시작했다. 교회에 나간 이 중에 진실된 신앙을 추구하는 이가 없어서다. 종교적 모티프는 그의 작품 전반에 등장하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했다. 특히 그의 근작인 <마더!>(2017)와 <노아>(2014)에서의 미학적인 과잉은 평단과 관객을 가리지 않고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신성모독을 담아서 성경을 장르 문법으로 각색했다. <마더!>는 고딕 호러에, <노아>는 슈퍼히어로 장르에 가깝다. 성경에 있는 온갖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 상징으로 나열하는 그의 방법론은 충분히 호불호가 갈릴 만하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출발해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의 메타포를 있는 대로 나열하는 <마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영화 <마더!> ⓒ 롯데엔터테인먼트

<노아>와 <마더!>는 둘 다 성경의 모티프로 현대를 마주하려 애쓰는 동시대성을 지니고 있다.<노아>와 <마더!>는 생태주의자의 염세론과 닮아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마더!>를 둘러싼 인터뷰에서 자신은 환경보호주의자고, 어머니는 자연, 즉 가이아를 의미한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집에 막 들이닥치는 이방인은 환경을 광적으로 파괴하는 군중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는 다양한 해석을 옹호한다. <마더!>에서는 인간이 자연, 혹은 신을 파괴하는 역사를 짜깁기해두었기에 이는 홀로코스트 비판으로도 볼 수 있다. 그가 겨냥하는 지점은 기술 문명 전체이다.

<레퀴엠>에서부터 드러나는 타락한 인간은 <마더!>에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적으로 치환된다. 이는 <노아>에 먼저 드러난 테마이기도 하다. 노아(러셀 크로우)는 신의 뜻을 오해해 환경을 파괴하는 인류를 멸종하겠다는 염세주의에 경도된 안티-히어로로 그려진다. 이 두 작품은 결국 새로이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공포를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블랙 스완>에서의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자리를 승계하는 니나(나탈리 포트먼), 다크호스인 니나(밀라 쿠니스)의 격돌은 결국 미래에 어떠한 것이 올 것이냐에 대한 감독의 어두운 전망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블랙 스완>에서 도플갱어 모티프는 곤 사토시의<퍼펙트 블루>(2001)와 도스토옙스키의 『분신』에 기반하고 있다. 『분신』에서 골랴드킨은 어느 날 우유부단한 자신과는 다른 성격이 악마적인 분신을 마주한다. 또 다른 분신이 나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골랴드킨을 정신병원으로 보내고야 만다. 분신의 모티프는 소비와 중독에 매몰되는 인간이 진정한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그런데도 그러한 이들이 사회 도저에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감독의 공포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는 <더 웨일>에서 찰리와 절대악이라고 일컬어지는 엘리의 관계로 드러나며, 세대 간의 알레고리로도 볼 수 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에게 동시대는 허무주의자의 탈을 쓴 악마가 범람하는 세계이다. 그의 영화에서 천사와 악마는 외부와 내부라는 공간으로 드러난다. <노아>의 '방주'는 <더 웨일>에서 '7일간 내리는 폭우'로, <마더!>에서의 '불청객'은 <더 웨일>에서 '네 명의 인물'로, 나아가 <레퀴엠>에서의 '집'은 <더 웨일>에서 '찰리의 집'으로 전환되고 변형된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아울러 <더 웨일>에 등장하는 찰리의 '폭식증'은 <레퀴엠>의 마약 중독과도 맞닿아 있다. 찰리는 폭식하다가 음식이 목이 막혀서 죽든, 심장이 발작을 일으키든 죽음에 가까운 상황을 마주한다. 그런데도 거기에 탐닉하고 몰두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감독은 인간의 무의식 너머에 있는 죽음에의 충동으로 인간 실존의 한계를 탐구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중독에 빠져드는 인물로 인해서 발생하는 서스펜스는 그의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더 웨일>에서는 토마스가 엘리로 인해서 강제로 대마초를 피우게 되는 장면이라든지, 찰리가 더 빨리 죽음에 다다르려 피자를 폭식하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감독은 롱테이크로 캐릭터가 중독에 사로잡힌 순간을 통해서 굳이 아름다운 생에 반대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린다. 캐릭터가 아름다움에 다가갈수록 죽음에 더욱 근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아름다움과 죽음, 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인간의 스펙트럼을 드러낸다. 인간은 각자의 신 혹은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살아가고 그러한 중독 아래에서 동등한 위치를 지닌다.

영화에 상징으로 쓰이는 『모비 딕』에서 '퀴케그'는 다신론을 드러내는 캐릭터다. 퀴케그는 문신으로 몸을 뒤덮은 이교도 식인종으로 피쿼드에 작살잡이로 오르는 캐릭터다. 기독교를 배우고자 작살잡이에 지원하는 데도 거기에 동화되지 못한다. 스타벅의 경우도 저만의 미신에 빠져 있는 경우다. 숭고한 대상을 마주하려는 일신론적인 에이헤브만이 기독교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인 휴버트 드레이퍼스는『모든 것은 영원히 빛난다』에서 『모비 딕』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만신전"이라고까지 보았다.

『모비 딕』에서 모비 딕은 얼굴 없는 존재이다. 눈, 코, 귀, 입도 없고, (그것을 한눈에 정확히 볼 수 없기에) 진정한 의미의 얼굴이 없다는 멜빌의 묘사는 이 모비 딕이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모비 딕은 해부학과 온갖 잡학으로 설명되나 전부 물질적인 것으로만 묘사된다. 거대한 물질은 우리가 마주하는 지구와도 같으며, 각 인간은 중독이라는 행위로 저마다의 신을 이해하고 발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찰리는 폭식에서, 토마스는 종말론에서, 엘리는 반항에서 저마다의 신을 섬긴다. 이는 모든 가치가 상대적인 포스트모던적 세계다.

 

엘리(세이디 싱크)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 맥락에서<더 웨일>은 찰리가 염세주의를 넘어서 새로운 세대를 마주하기까지의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다.

아로노프스키가 두려워하는 새 세대는 영화에서 넌지시 드러나듯이 트럼프 이후의 세계이다. 영화에서는 언뜻 TV로 트럼프의 승리가 중계되고, 코로나 이후로 세계는 단절되어서 찰리의 방 같은 개인의 공간만 남게 되었다. 엘리는 특히 아무도 교류하지 않는 SNS에다가 기성세대를 조롱하는 것을 올리면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다. 더군다나 레즈비언이라는 루머까지 도는(어쩌면 레즈비언일 수도 있는) 그녀를 영문학을 전공한 고전주의자인, 월터 휘트먼을 가르치려는 찰리가 이해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휘트먼이 퀴어인데도 그녀는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해서다. 어쩌면 마리가 그러하듯 찰리에게는 그녀를 절대악으로 여기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이다.

<더 웨일>에서 고래라 여겨지는 것은 찰리의 가혹한 운명이지만 실제로 모비 딕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엘리'다. 찰리는 다가올 세대의 표상인 엘리를 있는 대로 긍정하고, 이해하려는 포즈를 택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찰리의 고백은 절절하기 그지없는 부성애인데도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않다. 그는 이미 엘리에게는 최악의 인물이기에, 용서와 구원은 불가능하다. 최악과 최악의 만남으로 인해 관객은 그 둘 중에 누구를 따를지 저울질하게 된다. 이는 정-반-합이 부딪히는 변증법의 과정과 같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의 이해가 무조건적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둘 다의 윤리적 문제를 들추며, 누구도 긍정할 수 없게끔 하면서 진행된다.

 

토마스(타이 심킨스)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리즈(홍 차우)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방법론과도 비슷하다.

『죄와 벌』 3장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저지른 뒤 병상에 누워 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벽장같이 자그마한 방에 여러 인물이 와서는 각자 사상을 토론한다. 캐릭터를 포착하는 카메라가 연극을 영화화한 것인데도 다수의 인물이 동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캐릭터의 표정에 더 집중하는 것은 이 인물 하나가 사상 하나를 드러내서다.

엘리와 토마스, 찰리, 리즈의 갈등은 대화를 통해서 결국 서로의 사상이 변모하는 국면으로 나아간다. 토마스는 종말론자이기를 포기한 채 가족으로 되돌아간다. 리즈는 앨런의 죽음을 애도하기에 이른다. (『모비 딕』에 빗대면 토마스가 초월을 욕망하는 이슈마엘이고, 리즈가 이교도 퀴케그일 것이다.) 이는 동시대의 허무주의자가 고전주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사상을 오해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해라는 작업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자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피자배달부와 그가 가르치는 학생은 그의 실물을 보고 그 자리에서 즉시 놀라거나 비웃기에 이른다. 찰리는 그들과의 대화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대화를 진즉 포기한다.

감독은 '집'이라는 공간을<마더!>에서는 지구로 은유했다. <더 웨일>에서는 집을 세대와 세대가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인 담론장으로 은유한다. 그 담론장은 가족이라는 상상된 공동체다. 가족이라는 가상의 테두리가 있어야만 세대가 겨우 하나일 수 있어서다. 이러한 가족주의는 대화적 상상력의 기반이며, 강제적 장소가 있을 때만 가능해지는 셈이다. 미국 영화에서 가족이 귀환하고 되풀이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 웨일>은 끝에 이르러서 찰리의 성장을 그려낸다. 급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기적은 원래 그리 일어나는 법이다. 찰리가 성장하는 순간 등장하는 몽타주는 예수가 물 위를 걷는 이미지와 비슷하다. 아로노프스키는 새로운 세대를 긍정하려는 순간에 기적이 발생하고, 세계가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애러노프스키는 무신론자로 공통의 신을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구원은 거기에 없다. 어떠한 것이 제대로 된 가치인지도 모르는, 동시대의 허무주의자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구원이 서로를 믿는 데에 있다고 넌지시 말하는 듯하다. 상대에게 끝없이 진정성을 지니라는 상투적 교훈과 한 발자국이 허무주의의 시대에 필요한 유일무이한 기적이자 미래일 것이다. 거기서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하고, 의식은 변한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더 웨일
The Whale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Darren Aronofsky

 

배우
브렌든 프레이저
Brendan Fraser
세이디 싱크Sadie Sink
홍 차우Hong Chau
타이 심킨스Ty Simpkins
사만다 모튼Samantha Morton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7분
등급15세 관람가
개봉 2023.03.01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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