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여긴 다 수상쩍어요!"
[Critique] "여긴 다 수상쩍어요!"
  • 이상용
  • 승인 2023.03.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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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거미>가 파고드는 현실의 거미줄

알리 압바시 감독의 <성스러운 거미>(2022)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다루지만, 이 영화가 건드리는 맥락들은 보다 섬세한 독해와 현재진행형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영화는 단순하게 여겨질 수 있다. 순교자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이란의 종교도시 '마슈하드'에는 거리의 여성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가 있고, 여기자 라히미(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는 사건을 취재하면서 직접 범인을 쫓기에 이른다. 결국 기자의 함정 수사 덕분에 16명의 여성을 살해한 사이드 하네이(메흐디 바제스타니)가 붙잡힌다. 하지만 감옥 밖에서는 그를  석방하라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고, 사이드의 지인들은 빼내어 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그는 구출되지 못한 채 법정에서 내린 교살형을 당하고 만다. 16명의 여성을 살해했던 방식대로 사이드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성스러운 거미>의 목표가 '제아무리 희대의 살인마라고 할지라도 그의 범죄를 무죄라고 주장하는 종교적, 사회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악은 처벌당한다'는 정의를 실현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알리 압바시 영화의 방식이 아니라, 할리우드 대중 영화의 오랜 관습이다. 희생자와 가해자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주인공이자 여기자인 라히미의 입장은 단순한 선과 악의 구별을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살인마 사이드 하네이마저도 악마적으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2000년에서 2001년에 이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실화를 영화로 옮긴 것일까. 

 

ⓒ 판씨네마

알리 압바시 감독은 전작 <경계선>(2018)에서 인간처럼 살아왔지만 뒤늦게 트롤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된 티냐(에바 멜란데르)를 통해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인간의 존재를 묘사하고, 트롤의 본성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성스러운 거미> 또한 마찬가지다. 가해자, 희생자 그리고 이를 추적하는 기자의 경계선을 통해 일상에 스며있는 폭력과 사회적 인식을 추적하고 있다. 연쇄살인마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지성이 부재한 공포스러운 현실이다. 

예를 들어, 사이드의 아내는 남편의 살인행위를 옹호하며 부도덕한 여성을 살해했을 따름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여성적 정체성보다 더 크게 작용하는 가족적, 종교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이 있다. 사이드의 아내가 입장을 드러내는 순간 살인보다 더 끔찍한 것은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대해 정의로움과 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로 포장해 버리는 이념의 살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것은 사이드의 아내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이어진다.

<성스러운 거미>의 섬뜩함은 연쇄살인을 벌인 거미의 실체를 설명하는 장면이 아니라 거미가 얽혀 있는(펼쳐놓은) 다양한 거미줄의 망에 걸려드는 순간이다. 외화된 폭력의 현실 속에 무감해지고 내면화되어 버린 일상의 폭력성을 끄집어낸다.

 

세 가지 시선

영화에는 크게 세 가지 입장이 교차한다. 16명의 희생자들 중에 감독이 선별한 네 명의 캐릭터(그중 하나는 아주 잠깐 등장한다)와 그녀들을 살해한 사이드 하네미라는 남자 그리고 자신이 17번째 희생자의 위치에 나서서 범인을 유도하고 체포하는 데 공을 세운 여기자 라히미의 활약이다. 기본적으로 희생자와 가해자의 사연이 실화를 바탕으로 삼았다면, 여기자의 활약은 가공된 허구를 기입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허구'의 위치야말로 중요하다. 현실을 현실 자체의 수준으로 묘사했다면 한꺼번에 고구마 백 개를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자의 활약을 통해 현실의 답답함을 장르적 쾌감으로 넘어서기도 하고, 작가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항변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기자 라히미의 역할은 관객들에게 사건의 개요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사건을 둘러싼 현실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라히미는 경찰, 종교지도자, 희생자의 가족 등 여러 인물들을 직접 만나면서 이어주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관객들은 라히미 덕분에 비교적 원활하게 마슈하드라는 낯선 곳의 문화와 현실을 둘러보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밤중의 거리를 활보하는 연쇄살인마를 목격하게 된다. 

 

ⓒ 판씨네마

<성스러운 거미>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절제되어 있는 것은 희생자의 입장이다. 제목(타이틀)이 뜨기 전에 등장하는 꽤 긴 오프닝 장면은 9번째 희생자(그녀가 몇 번째인지는 아주 명시적이지는 않다)의 밤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죽음이 영화의 오프닝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가 여성 매춘부를 살해하는 한 남자의 행적으로 다루는 영화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가'를 집약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후의 희생자들을 보여줄 때에는 집에서 출발하는 그녀들의 하루를 촘촘히 전개하지는 않는다. 오프닝은 희생이 이뤄지기까지의 하루를 요약 정리할 뿐만 아니라 엇비슷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희생자들의 현실을 전달한다. 

한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밤일을 나가기 위해 담배를 물고 속옷을 차려입으며, 화장을 한다. 이 모습은 마슈하드의 분위기와 대조된다. 영화의 제목이 강조하는 '성스러움'을 제대로 위반한다. 매년 특정한 시기가 되면 순례자들이 몰려오는 마슈하드에서 밤을 채우는 것은 매춘부들이라는 사실은 꽤나 역설적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그 많은 남성 순례자들의 밤은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가? 그녀의 삶은 순례자의 아침이 아니라 어둠이 깔리는 밤과 함께 시작이 되고, 담배를 피워 물고 상반신이 노출된 채로 등장한다. 

영화는 대비되는 그녀의 모습을 거울 이미지를 통해 구현한다. 어째서 그녀의 첫 등장이, 영화의 첫 이미지가 거울인가 하는 것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 확실히 짐작이 가는데, 끔찍한 현실 자체를 비춰내듯이 변신해야 하는 밤의 서사를, 도시의 이면을, 표면적인 사건에 가리어진 진실의 얼굴을 자기반영적(self reflection)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준비하는 매춘부의 거울 이미지는 영화 전체의 아이러니를 함축하는 시작이다. 과연 더 나쁘고 무서운 것은 그녀인가, 그녀가 바라보는 거울(세계, 현실)인가를 던져놓는 셈이다. 

   

알리 압바시 감독이 <성스러운 거미>를 제작한 것은 이란 사회가 하나의 거울처럼 영화 속에 투영되어 지금까지도 여성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프닝 장면이 끝날 무렵 거울 이미지는 그녀의 마지막 하루였고, 생계를 위해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약한 자의 허망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일을 나가기 전 잠을 자고 있는 아들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다. 그녀의 직업은 쾌락의 차원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아이의 양육을 위해 선택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녀가 매춘을 하는 이어지는 장면들 또한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제대로 약속받은 돈을 받지 못하는가 하면,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단장을 하려 해도 빨리 나오라고 닦달을 당할 뿐이다. 그녀는 고통을 잊기 위해 외상으로라도 아편을 구매한다. 그녀의 밤은 매춘과 아편의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끝내 살인마를 만나기에 이른다. 그의 집에 도착한 여자는 거부 의사를 드러내며 떠나려고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도움이 아니라 목을 조르는 죽음의 손길이다. 여자는 죽기 전에 자신에게 아이가 있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집에서 잠을 자고 있을 그녀의 아이와 상관없이 살인마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후 시체를 밭에 내다 버린다.

 

ⓒ 판씨네마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살인마뿐만 아니라 경찰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이들의 존재는 값어치가 없다. 경찰의 고위관리는 그녀들이 매춘부일 뿐만 아니라 약쟁이라고 비난한다. 사회적 약자에 속한 이들은 매춘과 마약의 결합을 통해 이미 타락한 존재이고, 제대로 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입장은 연쇄 살인이 일어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살인자 사이드의 주장처럼 사회청소라는 명분에 동조를 보내는 분위기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매춘부이자 희생자가 된 그녀의 밤 시간이다. 과연 거기에 어떤 비윤리적인 범죄가 있는가. 그녀는 어째서 매춘을 하고 약을 하는가. 그녀는 어째서 자신의 아이를 집에 두고 거리에 나오는가. 그녀가 약을 외상으로 달라고 할 때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호소한다. 가난의 고통이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고, 매춘의 고통이 약을 선택하도록 이끈다. 고통은 이처럼 만연해 있지만 살인이라는 행위 앞에서 침묵으로 사라져 버리고, 남는 것은 객관적인 태도를 가장한 윤리적 판단이다. <성스러운 거미>가 희생자의 목소리를 직접으로 내거나 항변하는 대신 어째서 그녀들이 직접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인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녀들뿐만 아니라 가족까지도 생계를 책임진 그녀를 수치스러워하며 침묵한다. 

다음에 등장하는 희생자는 사이드가 열 번째 희생자를 물색하는 장면이다. 오프닝처럼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더 이상 묘사되지는 않지만 등장하지 않지만, 열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는 사실은 금세 도시에 퍼져나간다. 소문과 풍문과 기삿거리 속에서 그녀들은 불의한 존재로 또다시 침묵해야만 한다. 

 

소그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 번째 희생자의 이름은 '소그라'다.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다른  희생자들과는 달리 소그라의 이름은 여러 번 언급되고 강조된다. 오프닝 장면에 등장한 희생자가 거리에서  약을 파는 노인에게 '소그라'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 장면이 그녀를 언급하는 첫대목이다. 그녀의 본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거리의 여성을 취재하기로 결심한 라히미가 카페테리아에서 소그라와 마주치는 장면이다. 화장실을 쓰게 해달라고 가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던 소그라는 라히미의 도움을 받는다. 소그라는 라히미가 건넨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이름이 뭐에요?"

"소그라"

"밤에 다니는 거 안 무서워요?"

"왜요?"

"살인마때문에요. 혹시 본 적 없어요? 수상쩍은 남자요."

"여긴 다 수상쩍어요."

"당신도 해요? 약 같은 거요. 매일 호텔 앞에 나와요?"

계속되는 기자의 물음에 부담을 느낀 소그라는 고맙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왜소한 체격의 소그라는 다음 희생자로 등장한다. 그런데 소그라의 죽음을 묘사하는 대목은 확실히 시선을 끌도록 연출되어 있다. 친정에 간 사이드의 아내가 아이들을 남겨둔 채 홀로 집으로 온다. 살인을 저지른 직후 다급해진 사이드는 카펫으로 시체를 말아 감춘다. 아내는 "이렇게 말아 놓으면 카펫 상해요."라며 손을 대려고 한다. 그러자 사이드는 자신이 하겠다며 저녁을 차려달라고 말한다. 시신을 카펫으로 말아둔 채 그들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사랑을 나눈다.

나중에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아내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남편이 여자를 집으로 들인다는 목격담과 소문 때문이었다. 아내는 남편에게 자신이 새로 한 머리를 보여주고 사랑을 확인하려고 한다.  한쪽에 말아둔 시체와 부부의 섹스가 교차한다. 자극적인 연출과는 거리가 멀다. 매춘부의 죽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아침이 되고 소그라의 시체가 밭에서 발견된다. 현장을 보겠다고 나왔던 라히미는 희생자를 알아본다. 놀란 마음에 라히미는 고꾸라지고 구토를 일으킨다.

무명의 죽음에서 아는 이의 죽음으로의 전환은 알라 압바시 감독이 이들의 존재성을 강조하는 전환인 동시에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친구, 누군가의 자식의 죽음이 지닌 희생자의 차원을 건드린다. 

 

ⓒ 판씨네마

라히미는 소그라의 주변을 취재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은 더한 끔찍함을 동반한다. 호텔로 찾아온 경찰은 소그라가 임산부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역겨워요. 임신한 여자가 그러고 다니다니."라면서 희생자를 비난한다. 그 태도야말로 역겨움을 일으킨다. 라히미는 소그라의 어머니 '자리 부인'을 만난다. 하지만 소그라 일 때문에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런 애는 모른다면서 쫓아내려고 한다. 라히미는 자라 부인의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자라 부인으로부터 튤립 광장 근처에서 다른 여성들이 보았다는 살인마의 목격담을 전해 듣는다. 라히미는 이 사실을 경찰에게 진술했는지를 묻는다.

"매일 아편을 6g씩 피우는 노인네가 경찰한테 어떻게 가?"

"저랑 같이 가세요."

"아가씨 바보야? 경찰 대신 사회를 정화한다는 놈이야. 근데 잡을 것 같아?"

소그라의 죽음을 보며 일으킨 라히미의 구토는 현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경찰, 유가족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어김없이 관객들로 하여금 반응을 일으키도록 작용하고 있다. 그 누구도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를 비난하거나 또 다른 비난의 대상자를 찾는다. 그것이 이 사회에 펼쳐져 있는 공포의 거미줄이다. 공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약자의 위치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며, 어디에서도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다.

광장에서 살안마를 목격했던 청소부는 라히미에게 경찰에게 더 이상 진술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매춘부도, 청소부도 이곳은 보호받을 수 없는 사회이고, 그들의 진술과 하소연은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라고 말한다. 무기력함은 경찰과 권력의 무능함 이상으로 만연해있고, 무능함과 무기력이 만난 사회에서 돌파구를 찾기는 어렵다. 소그라를 둘러싼 여러 반응들이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입장의 강조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등장한 희생자는 좀 다른 결을 보여준다.

그녀는 사이드의 힘에 쉽게 제압당하지 않고, 피해를 주기도 한다. 주검이 된 그녀를 오토바이에 태운 채 달리는 모습은 처참하지만, 영화 속에서 네 번째 희생자를 묘사하는 장면은 '기괴한 유머'라고 부를만한 태도가 있다. 그녀의 힘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는 상대적으로 사이드는 그다지 가공할 만한 존재도 아니고 압도적인 살인마는 더더욱 아니다. 힘센 여자에게 제압당할 수 있는 늙은 남자에 불과하다. 이 지점은 꽤 의미심장한데 현실에서도 종종 가해자에 대해 '악마'라는 라벨을 붙임으로써 별 볼 일 없는 대상을 초월적인 존재로 격상시킬 때가 있는데, 그녀가 사이드에 맞서는 장면은 그 역시 별 볼 일 없는 한 남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마 이 대목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철학자는 한나 아렌트일 것이다. 아이히만 전범 재판을 지켜보며 내놓은 저작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유명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은 '악의 진부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한데 악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흔해 빠져 있고, 진부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성찰이다. 네 번째 희생자의 모습을 통해 비춰지는 사이드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는 늙고 그다지 힘이 없는 남자일 따름이다. 아주 진부한 살인마다. 

아무려나 <성스러운 거미>는 16명의 희생자를 모두 보여주지도 않으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형이 어떤 특징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이름이 여러 번 언급되는 소그라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익명성과 밤거리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을 보여줄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살인마의 살인 방식이나 희생자를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리는 태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살인마의 다른 모습이나 허구적으로 덧붙여진 기자 라히미를 통해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살인자의 낮과 밤

<성스러운 거미>의 두 번째 입장은 살인마 사이드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은 오프닝의 첫 번째 희생자를 살해한 장면이 지나간 이후에 라히미 기자가 마슈하드에 당도하고 세 번째의 위치에 해당한다. 그는 첫 번째 희생자를 살해할 때에는 또렷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라히미를 돕는 지역 신문의 기자가 녹음한 테이프 속의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성을 먼저 드러낸다. 그리고 녹음된 목소리는 집을 허물고 있는 건축업자 사이드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집에서는 이맘 레자에게 기도를 드리기 위해 순례의 여정에 모여든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된다. 이처럼 일을 하고, 종교적이며, 가정적인 가장의 모습이 사이드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의 구성이다. 

또다시 사이드가 등장하는 순간은 오토바이에 아들을 태운 채 성지에 기도를 드리러 가는 장면이다. 오토바이는 사이드와 동의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로 아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러 가지만, 밤이 되면 오토바이를 타고 희생자를 물색하기 위해 거리를 활보한다.

그런데 사이드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다수의 장면은 '한낮'에 속한다. 일을 하고 있는 장면도 잠깐씩 등장하지만, 주된 모습은 집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그런데 가장 사이드는 아이들을 대할 때 종종 이상한 모습을 보인다. 약속한 대로 자신과 놀아달라는 딸아이를 외면하기도 하고, 공터에서 축구를 하다 아들이 실수로 찬 공에 맞자 이상할 정도로 화를 내기도 한다. 아내를 시댁에 데려다준 직후에도 갑자기 일이 생각났다며 가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사이드를 아내는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하지만 사이드가 아내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사명을 따른다는 명목 아래 희생자를 물색하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가에 대한 설명은 꽤 여러 가지로 등장하지만, 그 어느 것도 완벽한 답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현실을 유지하면서도 결코 아이들에게도 아내에게도 집중하지 못한 채 다른 욕망을 찾고 살인을 꿈꾼다. 그것이야말로 종종 한낮에 멍하니 있는 '사이드의 얼굴'이다. 

 

ⓒ 판씨네마

흥미로운 것 중의 하나는 사이드의 이러한 입장이 과거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드의 집 내부를 보여줄 때,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벽에 걸린 사진들이다. 과거에 그는 군인이었고,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벽에 붙여 놓았다.

사이드의 과거는 장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등장한다. 장인은 손주에게 전쟁 당시 사이드의 행동을 과장되게 설명한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같은 부대 소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딸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겠지만 사이드의 모습에 수상쩍은 기미를 느낀 장인은 자식들보다 사이드를 더 잘 안다면서 "분명 뭔가가 있어. 살도 빠지고 좌불안석이잖아. 말해 보게. 여자 문제인가?"라고 말한다. 사이드는 화를 내며 차에서 내리겠다고 하지만 달래는 장인의 태도에 현재 심정을 털어놓는다.

"전 쓸모없는 놈이에요. 이룬 거 없이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시시한 건축업자가 제 소명일 리가 없어요. 전쟁이 안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는 순교하고, 누구는 실종되고, 누구는 불구가 되고, 전사해서 유해로 돌아오는데 전 멀쩡하게 돌아왔죠. 순교할 가치도 없는 놈이니까요."

사이드의 말을 들은 장인은 다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면서, 그것은 신이 정할 일이며, 가족을 잘 보살피는게 우리의 본분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사이드에게 장인의 말은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차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사이드의 심리가 군대 시절에 묶여 있으며, 동료들의 무수한 죽음을 보면서 어떤 상처나 강박적인 태도를 지니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전쟁에서 죽은 동료들의 모습을 신의 소명이라 여겼으며, 살아남은 것에 부끄러워한다. 그리하여 현실에서 자신의 소명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은 부정한 여자들을 살해하는 것이다. 

사이드의 행동은 단순히 종교적 원리주의를 따른 결과가 아니라 이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전쟁의 광기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크고 작은 국지적을 제외하고 이란의 가장 큰 전쟁은 이라크와 벌였던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이란-이라크 전쟁이다. 법정 변호사의 진술 중에는 1981년부터 1988년까지 623일간 최전방에 배치돼 복무했다는 설명이 등장한다. 변호사는 사이드의 심신미약을 주장하기 위해 그의 군인 경력을 심리적 트라우마로 들먹인다. 

하지만 그것이 사이드의 살인을 설명하는 하나의 기재가 될 수 있을지언정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명들이 살인마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드 또한 전쟁의 트라우마로 인한 희생자일 수 있지만, 이것이 그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군인이었다는 신분이 사이드라는 인물의 중요한 배후라는 사실이다. 장인과도 얽혀 있는 '재향군인회'는 감옥에 간 사이드를 풀려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성스러운 거미>는 연쇄살인마의 등장이 단순히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란 사회의 남성성 내지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고 있는 양상들이 뒤엉켜 있는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약속과는 달리 사이드가 처형되는 순간의 허무를 드러내는 것은(최후의 순간까지도 사이드는 도망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가해자조차도 거대한 사회적 통념 속에 희생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 판씨네마

<성스러운 거미>는 사이드의 밤보다 더 강하게 대낮의 세계에 집중하면서 그의 이상한 행동들을 통해 전쟁으로 인해 병들어 있는 남자들의 모습을 언급하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정신착란을 건드린다.

사이드는 신문 가판대에서 자신의 살인 기사가 나왔는지를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인물이며, 소그라의 시체 유기 현장에도 버젓이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세상이 알아주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살인죄로 법정에 기소되었을 때 정신이상으로 판결을 내리도록 도와주겠다는 변호사의 제안을 거부하고,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항변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선택은 공권력이 미처 하지 못하는 일을 대리하는 소명 의식의 발로이자 정의로움의 실천이라는 항변이다.

이러한 광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란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그를 영웅으로 포장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감옥에 간 이후에 사이드의 자식들은 손가락질당하는 것이 아니라 식료품 가게의 주인으로부터 많은 식료품을 받고, 아버지는 정의로운 일을 한 것이라는 어머니의 설명을 들으며 감동을 받는 아들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한 살인마의 등장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문제일 수 있음을 연결하면서, 어느 순간이나 어느 자리가 형성된다면 이 사회에서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끔찍한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사이드를 둘러싼 모습에서 살인마와 영웅은 가까이 있다. 그것은 종종 전쟁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인데, <성스러운 거미>는 이란 사회가 여전히 전쟁의 한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배우 '에브라히미', 기자 '라히미'

희생자, 살인자에 이은 세 번째 입장이자 실화를 옮기는 과정에서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은 여기자 '라히미'다. 그녀는 가공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실화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작품은 이란에서 촬영될 수 없었다. 영화의 크레딧만 보아도 이란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어디에도 없다. 이 영화는 이란 사회의 치부를 건드리는 영화다. 만일 이 영화가 이란 내에서 제작될 수 있었다면 그 사회는 꽤나 성숙한 사회일 것이다. 여러 국제적 자본이 투여되어 완성된 이 작품을 실제로 촬영한 곳은 요르단이다.

영화를 만든 이들도 국외자의 위치에 놓인 인물들이다. 영화를 만든 '알리 아바시' 감독은 이란 태생이기는 하지만 성인이 된 후 스웨덴으로 가족 전체가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제작 현장에서 누구보다 필요한 인물은 이란어를 능숙하게 하는 라히미를 연기할 배우였다. 라히미 기자 역의 자흐라 아미르 에브라히미는 이란 태생의 배우다. 그는 <성스러운 거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BBC가 선정한 2022년 올해의 여성 100인에 오르는 등 작년에 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이란에서 활동하는 배우였다면, 영화의 촬영은 물론이고 올해의 여성을 대변하는 인물의 자리에 오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판씨네마

에브라히미는 2006년 이란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섹스 동영상의 주인공이었다. 불법적으로 카피가 된 DVD 속 여성으로 에브라히미가 지목되면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이 아니라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그녀를 향한 비난은 커져갔고, 이란 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국가적 수치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라마를 비롯한 모든 활동에 제지를 당하고 중단해야만 했다. 결국, DVD제작의 장본인인 미스터 X로 불리는 인물이 체포가 되고, 에브라히미가 영상 속 인물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그녀는 더 이상 이란 사회에서 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에브라히미는 프랑스로 이주를 선택한다.

영화 속 기자의 이름이 라히미인 것은 2006년 이란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거짓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에브라히미의 이름을 고스란히 차용한 감독과 배우의 선택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2000년에서 2001년 사이에 있었던 연쇄살인마 실화뿐만 아니라 에브라히미의 억울한 스캔들을 포개어 넣은 작품인 셈이다. 라히미가 취재를 할 때 그를 돕던 동료 남자 기자도, 인터뷰를 하는 성직자도, 호텔로 찾아온 경찰도 모두 수도 테헤란에서 있었던 편집장과의 스캔들을 언급한다. 그것은 배우 에브라히미의 오인받은 스캔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려나 동료 기자의 질문에 대해 라히미는 편집장이 자주 야근을 시켰고, 자신을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했다고 말한다. 이 사건을 고소하자 결국 해임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동료 기자들뿐만 아니라 그녀가 취재 과정에서 만나는 공직자들과 성직자들은 그녀를 문란한 여성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캐릭터의 설정은 단순히 배우의 현실을 옮긴 것일 뿐만 아니라 살인마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겹쳐놓은 것이기도 하다.

 

ⓒ 판씨네마

배우 에브라히미는 사회로부터 매춘부 취급을 당하였고, 결국 이 사회로부터 달아나야 했다. 이에 대한 사과도 없이 모든 것을 여성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그것은 연쇄살인마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원인은 부도덕한 매춘부들에게 있으며, 그녀들은 약쟁이이고,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 겹침은 이란 여성의 인권에 대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실제로 에브라히미 배우는 스캔들 사건 이후 이란 내 여성 인권에 대한 항변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자신의 이름에서 '에브'를 지운 영화 속 캐릭터인 라히미도 부당한 대우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호텔에 투숙하였을 때 미혼인 여성이 홀로 투숙한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드러내면서 예약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방이 없다는 식으로 쫓아내려고 한다. 그러자 라히미는 자신이 기자라는 사실을 밝힌다. 호텔은 곧바로 태도를 바꾸어 방을 내어준다.

호텔방에 들어갔을 때, 관객들은 비로소 그녀의 맨얼굴을 보게 되는데 대부분의 여성처럼 긴 머리카락이 아니라 단발머리를 하고 편한 옷차림으로 있는 라히미의 모습은 순종적인 이란의 여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영화 속 첫 번째 희생자처럼 담배를 피우고 취재를 위해 거리로 나선다. 매춘부와는 다른 목적이지만 영화 속 이미지들은 종종 매춘부와 기자, 혹은 희생자와 스캔들 여배우가 겹치게 묘사한다. 

심지어 그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면서 짙게 화장을 하고 거리의 매춘부로 나선다. 자신이 미끼가 되어 사이드를 잡기 위해서였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모습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 등장하는 희생자 여성의 모습과 겹쳐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이란 사회의 끔찍한 현실을 겹쳐 보이도록 이끈다. 항변한다. 경찰도, 남자 기자도 나서지 않는 현실에서 라히미는 스스로 나서 범인을 잡고자 한다. 이 장면은 영화적 허구이겠지만 역설적이게도 감독과 주연 배우 자신이 가장 원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거미 없는 거미줄의 끔찍함

<성스러운 거미>가 묘사하는 세심함은 누가 살인마인지를 찾는 스릴러의 형식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살인마는 영화의 초반부에 얼굴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얼굴 뒤의 세계다. 사이드의 배후, 희생자들을 둘러싼 현실 그리고 기자의 활동을 통해 세상에 얽혀 있는 거미줄을 파고든다.

사이드는 영화 중반인 한 시간을 조금 넘어선 지점(1시간 17분쯤)에서 체포된다. 이때부터 사이드를 둘러싼 이란 사회의 반응이 펼쳐진다. 그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사회적 여론 또한 영웅의 탄생으로 비화하면서 법정에 선 살인마를 당당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뻔뻔함이야말로 <성스러운 거미>의 후반부가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모습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를 흉내 내며 17번째 희생자를 만들어 내고 있고, 사이드의 아내는 아들에게 부정한 여자들을 처리한 거라면서 곧 풀려날 거라고 설명한다.

 

라히미가 희생자의 가족들을 찾아갔을 때 듣게 되는 말은 사람들이 찾아와 온갖 이유를 대며 돈을 주었다는 것이다. 살인마를 용서하라면서 말이다. 딸이 매춘부라는 것을 말하기 부끄러워 법정에 나오지 못한 유가족들의 모습이나 처형보다는 보상을 원하는 유가족의 현실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설하고 있다. 라히미는 화가 나서 말한다. "다들 절박하니까 돈을 선택하겠죠."

현실의 가난함과 종교적 이념 속에서 사이드는 결코 범인임을 자각하지 않는다. 전쟁 참여로 인한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법정에서도 그는 자신의 정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사명에 미쳤다면서 종교적 숭배의 대상인 '이맘 레자'에게 미쳤다고 진술한다. 판사는 이곳은 간증의 자리가 아니라고 만류하지만 신께 미쳐 있다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더욱 무서운 장면은 면회실에서 아들 알리가 어떻게 살인했냐는 질문에 여자들을 죽인 행위를 상세히 설명하는 장면이다.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사이드의 모습은 영화의 결말로 이어지는데, 끝내 교살형을 당한 사이드의 최후를 확인한 후 테헤란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라히미 기자는 캠코더를 켠다. 거기에는 사이드의 가족을 인터뷰한 장면이 들어 있다. 아들 알리는 아버지 사이드가 되고, 막내딸은 희생자가 되어 아버지가 했던 행동을 고스란히 모방하며 재현한다.

<성스러운 거미>의 대부분은 2.35:1의 비율의 와이드로 촬영되었지만, 이 대목에서는 캠코더의 답답하고 작은 화면을 통해 재현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갑자기 변해버린 화면의 사이즈와 거친 화면의 입자는 이 세계의 끔찍함이 거대하게 펼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밀한 작은 세계에 스며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무지성적으로 살인을 재현하는 아이들의 천진함은 공포의 차원을 미래로 이끈다. 

   

거미를 잡는다고 해도, 거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미줄은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마음속에 집을 짓고 산 지 오래다. 거미줄이 있다면 누구라도 거미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성스럽다는 이유로, 영웅이라는 찬사로, 도덕적 행위라는 칭송으로 왜곡되며 펼쳐진다. 이 사회에서 거미의 먹이가 되지 않을 운명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살인자마저도 약속이라는 허울을 두른 채 허무한 죽음(법에 의한 심판이 아니라)을 맞이하는 끔찍함이 도처에 피어있다. 

 

※ 추신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은 2월 18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 [이상용의 씨네모어]를 토대로 작성됐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판씨네마

성스러운 거미
Holy Spider
감독
알리 아바시
Ali Abbasi

 

출연
자르 아미르 에브라히미Zar Amir Ebrahimi
메흐디 바제스타니Mehdi Bajestani
아라쉬 아쉬티아니Arash Ashtiani
포로우잔 잠시드네자드Forouzan Jamshidnejad
마스바 탈레브Mesbah Taleb
사라 파칠라트Sara Fazilat

 

배급|수입 판씨네마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8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3.02.08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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