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 무대 위를 덮은 소음들
'타르' 무대 위를 덮은 소음들
  • 이지영
  • 승인 2023.02.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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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추악한 '마에스트로'들을 위한 세상"

베토벤 교향곡 5번은 정박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호흡, 정확히는 8분 쉼표로 시작된다.

이 숨이 얼마나 길 것인지, 나아가 1악장 전체가 휘몰아치게 빠르게 흘러갈지 혹은 거인의 발자국처럼 장중하게 흘러갈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연주자의 소관이 아니다. 연주의 운명은 예비박을 주기 위해 지휘자가 지휘봉을 들어올리는 순간에 이미 결정 난다. 2분 음표에 붙은 늘임표(fermata)도 마찬가지다. 이 음이 얼마나 지속할 지도 지휘봉의 끝에 달려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이끄는 세계적인 지휘자 '리디아 타르'(케이트 블란쳇)는, 영화 초반부 사회자와의 대담에서 지휘자는 '인간 메트로놈'이 아니라 시간을 통제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이때, 그녀는 베토벤 5번 교향곡 1악장을 예시로 든다. 

과거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서 여성 지휘자와 베토벤 5번을 연주했던 필자는, 이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연주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베토벤 교향곡 5번은 입체적으로 짜인 큐브처럼 조밀한 곡이기 때문에, 지휘자와 연주자 모두에게 긴장감을 준다. 잠시라도 호흡을 놓치면, 각 성부들이 쌓아 올리던 음이 와르르 무너지기 때문이다. 지휘자와의 완벽한 호흡과, 연주자의 자기 통제 하에 있어야만 1악장의 마지막 음에 다 같이 사뿐히 내려앉을 수 있다.

가령 카라얀 같은 마에스트로들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연주 영상들을 보면, 지휘봉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마에스트로의 권위와 힘을 드러내는 듯이 '위에서 아래로 세차게 내려치는 동작'을 취한다. 이는 타르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 궁정 음악가였던 '장-밥티스트 륄리'의 시대에 지휘자가 실제로 바닥을 곤봉으로 내리쳤다고 하는데, 한 번은 륄리가 자기 발을 내리찍는 바람에 발이 폐색되어 그가 죽게 되자, 이후부터 이런 관행을 그만뒀다고 한다.(이러한 17세기의 지휘 풍경은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에 자세히 그려진다)

곤봉을 내리찍는 행위, 지휘단에 올라가 작곡가의 의도를 해설하고 연주를 지시하는, 교단의 설교와 비슷한 행위, 시간을 통제하는 신적인 존재, 이것은 클래식 음악에서 부권 전통을 은유한다.

 

ⓒ 유니버설 픽쳐스

다시 영화로 돌아와, 타르가 도이치 그라모폰의 클래식 LP 음반들을 퍼즐이나 지도처럼 펼쳐 놓고 발로 그 배열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번스타인, 아바도, 푸르트뱅글러, 바렌보임… 클래식 청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지휘자들의 명반들이 지나간다. 20세기를 지배하였고, 지금도 위용을 떨치고 있는 지휘자들은 모두 남성이다.

이 장면은 '인류'의 음악적인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클래식 지휘 씬의 젠더 지형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문학에서는 제인 오스틴이나 메리 셸리 등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등장을 기점으로, 젠더 불균형을 2세기에 걸쳐 극복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반면 클래식 음악계, 그중에서도 지휘라는 영역은, 아직까지도 공공연하게 가부장적인 전통이 유령처럼 살아있는 마지막 보루이다.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클래식 청중들이 고령화되어가면서, 신진 여성 지휘자들의 연주는 마에스트로들이 남긴 옛 영상들의 아성을 이기지 못한다.

여성주의 문학에서는 문학적 전통의 부권 은유, 즉 프로이트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선대의 전통과 영향력을 직면했을 때, 남성 작가들은 느끼는 '긴장, 불안, 적대감, 결여'를 여성 작가들은 똑같은 맥락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남성 작가들에게 프로이트적인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을 느낀다. 따라서 '여성 작가들의 투쟁'은 매번 여성 선배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행위로만 시작할 수 있다. 여성 선배 작가는 부인하거나 죽여야 할 위협적인 힘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학의 권위에 저항할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된다.(『다락방의 미친 여자』, 샌드라 길버트·수전 구바, 북하우스, pp.139-151)

 

ⓒ 유니버설 픽쳐스

'타르'는 이런 여성의 불모지에서 음악 실력만으로 숱한 남자 지휘자들을 제치고 세계 최정상에 오른 신화적인 인물이다.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흐릴 정도로 극 중 설정이 이해가 갈 뿐 아니라, 심지어 타르를 연기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지휘와 렉쳐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녀는 지휘자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롤모델이자 귀감이다. '아코디언 재단'은 여성 지휘자를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취지로 세워진 재단이다. 리디아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는 프란체스카 란티니(노에미 멜랑)도 사실은 아코디언 재단에 발탁된 촉망받는 여성 지휘자인데, 그녀는 언젠가 리디아의 조력 아래 베를린 필 부지휘자가 되기를 욕망한다.

 

그런데 타르는 생물학적으로는 여성 최초의 베를린필 상임 지휘자라는 타이틀을 가졌을 뿐, 실은 남성적이고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영화에는 리디아가 딸 페트라를 괴롭히는 아이 요한나를 찾아가서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요한나에게 "나는 페트라의 아빠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이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아이에게 겁을 준다. 이 말은 곧 "내가 널 지켜볼 것이다"라는 말과도 같다. 이것은 리디아가 남성 중심적인 클래식계의 오랜 전통을 온몸으로 체득한 결과이다.

줄리어드 마스터 클래스에서 제자와 부딪히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야 말로 음악에서 부권의 상징이다. 그는 평생 교회에서 작곡하고 연주하며, 지금도 클래식 음악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음악의 보고를 남겼다. 그런데 한 학생은 바흐가 20명의 아이를 낳을 만큼 가부장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자신과 맞지 않다고 말한다.

음악의 세계 안에 갇혀서 그 절대적인 가치만을 내면화한 타르는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것과 바흐의 삶이 가부장적이었다는 사실이 무슨 상관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즉, 예술에 대한 판단과 예술가의 삶에 대한 판단을 결부짓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화는 인간으로서 리디아와 사회적인 맥락으로서 리디아를 보여주며, 그 판단을 유예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제자에게 도전을 받고 나아가 공격받는 타르의 모습은 음악에 대한 권위자의 해석이 무의미해진 포스트모던한 세상이 도래했음을 알린다. 이런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타르가 쌓아 올린 공고한 음악 세계에 균열이 내기 시작한다.

 

타르는 아바도와 번스타인이 그랬듯이 말러 교향곡 전곡의 녹음을 끝내고,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진 말러 5번 교향곡 녹음만 앞둔 상태이다. 그리고 더 높은 경지인, 스스로 작곡을 한다는 관문만 남기고 있다. (비슷하게, 그녀는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시간을 관장하는 데서 나아가 하나의 우주를 직접 창조해내는 작업. 이는 빈의 유명한 지휘자에서 작곡가가 된 구스타프 말러와 레너드 번스타인의 오마주이다.

하지만 그녀의 작곡은 불시에 끼어드는 '소음'으로 난항을 겪는다. 연주 중에 객석의 청중은 다른 소음을 내지 못하도록 통제되지만, 무대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밤중에 작동되는 메트로놈 소리, 냉장고의 소음, 반복되는 벨 소리, 앰뷸런스 소리, 여자의 비명소리가 불시에 들려온다. 이 소음들은 리디아를 불안하고 불면하게 만든다. 그녀가 유일하게 소음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공간은 달리는 차 안이다. 차가 달릴 때 소리를 제거하여 진공에 떠가는 우주선과 같은 인상을 준다.

 

ⓒ 유니버설 픽쳐스

앞서 언급한 소음들은 타르가 쌓아 올린 공고한 음악 세계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소음은 같은 여성들로부터 나온다. 그동안 타르는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여성 음악인들과 동성애 연애를 하고, 관계가 깨지면 이들의 앞길을 악의적으로 가로막기도 했다. 한때는 가까운 사이였던 크리스타의 자살이 리디아와 연관되었다는 루머는 처음에는 텍스트(책, 이메일)로 된 소리 없는 '위협'이었다가 점차 누군가의 속삭임으로, 나중에는 거리의 시위행진의 외침으로 점점 증폭된다.

결국, 스캔들이 통제할 수 없이 터지면서, 타르는 소음 그 자체가 된다. 그녀가 작곡하는 피아노 소리는 아파트를 팔려는 이웃들에게 방해되는 소음으로 불린다.

프란체스카는 리디아 타르가 음악적 지향점이자 이끌어주는 조력자가 아니라, 같은 여성 음악인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앞길을 막기까지 하는 배신자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TAR라는 글자를 배치하여 RAT이라고 써놓고 사라진다. 마치 첩보물에서 상대편으로 돌아선 배신자를 '쥐'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반면 그녀의 새로운 뮤즈이자 관심 대상인 첼리스트 올가는, 리디아가 주는 특혜를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그녀는 통제 불가능한 사람이다. 그녀는 채식주의자이면서 기분이 내키면 송아지 요리를 시키고, 리디아의 작곡 노트의 음을 슬쩍 바꾸기도 한다. 올가를 따라간 리디아는 지하실에서 거대한 들개를 마주치고, 얼굴을 다치면서 자신의 괴물 같은 양면성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 유니버설 픽쳐스

모든 소음들이 터져 나오고, 명예가 바닥까지 실추된 상황. 

말러 5번 연주회가 평소처럼 진행된다. 그런데 타르가 아직 무대 밖 대기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시작된다. 마치 말러의 의도처럼, 무대 뒤에서 팡파레를 울리는 트럼펫과 무대위에 있어야 할 리디아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 이 연주는 앞서 언급한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과 비슷한 주제로 시작되지만, 말러 5번은 운명의 두드림이 아니라 장송 행진곡이다. 자신의 자리를 뺏겨 분개하고 광기에 찬 타르가 연주 중인 부지휘자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가 몸통 박치기로 밀쳐내고, 발로 걷어찬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프로이트적이다. 이것은 결국 지휘자 경력에 종말을 고하는 자살 행위, 자기 발을 내리찍는 행위다.

뉴욕의 고향집을 거쳐, 다시 제 3국에서 무대를 되찾은 타르는, 코스프레를 한 게임 팬들 앞에서 갈라 콘서트를 지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휘자가 헤드셋을 착용해야 하고, 모든 주변 상황에 스스로를 맞춰야 한다. 말러로 시작된 클래식 지휘자로서 커리어의 죽음은, 우주선으로의 승선을 알리는 게임의 대사와 함께 화려한 피날레를 맞는다. 또 한편으로는, 순수하고 경직된 타르의 음악이 죽은 대신, 다른 가능성과 음악 세계가 깨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통제에서 해방으로, 순수음악에서 토속음악과 장르 음악으로… 이것은 새로운 음악적 도전인가, 그저 제 3국으로의 비열한 도피인가.

<타르>는 케이트 블란쳇을 주연으로 한 다른 영화 <블루 재스민>처럼 위선적인 인물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는다. 타르는 엄연히 남성적이고 프로이트적인 투쟁에서 완패했고, '레너드 번스타인'이 되고 싶었지만, 원치 않았던 '제임스 레바인'이 되었다. 하지만, 백인 여성이고 베를린필 지휘자였다는 특권적인 이유로 제 3국에서 다시 지휘자 자리에 오른다. 

타르에게는 '예술'이란 얄미울 정도로 영원한 도피처가 있다.

 

ⓒ 유니버설 픽쳐스

<타르>의 오프닝에서는 장황하게 긴 엔딩 크레딧과 함께 조용한 독백 같은 에스닉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이는 영화의 오프닝과 중간, 엔딩을 TAR라는 글자처럼 서로 뒤섞으려는 시도이다.

이 뒤섞임 속에서는, 알을 깨고 새로 태어나려는 음악가와, 지워지지 않는 과거로부터 도피하려는 비겁한 인간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한다. 번스타인의 렉쳐처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의 순수성과 그 외의 것들(쏟아져 나오는 해석과 말, 소음들)의 대결. 이 팽팽한 대결 속에 필자가 느낀 것은 오로지 어지러움과 구역감뿐이었다.

※ 참고

1. 올가와 리디아는 명백하게 자클린 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의 암시한다. 올가는 발병 이전 자클린의 천진한 모습을 상기하며, 끝까지 바렌보임의 아내로 죽기를 원한 자클린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완전히 도치한다.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클래식 레퍼런스들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2. 제임스 레바인은 성추행 미투사건으로 2018년 메트 지휘자 자리에서 해고되었다.

[글 이지영 영화전문기자, karenine@ccoart.com]

 

ⓒ 유니버설 픽쳐스

타르
TÁR
감독
토드 필드
Todd Field

 

출연
케이트 블란쳇
Cate Blanchett
노에미 메랑Noemie Merlant
니나 호스Nina Hoss
줄리안 글로버Julian Glover
앨런 코더너Allan Corduner
마크 스트롱Mark Strong
시드니 레먼Sydney Lemmon
알렉 볼드윈Alec Baldwin
프랑크 뢰트Frank Roth

 

수입|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58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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