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th Venice] '키아라' 사회화된 카메라와 그 얼굴들
[79th Venice] '키아라' 사회화된 카메라와 그 얼굴들
  • 이현동
  • 승인 2023.02.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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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살과 몸이 없어도 말한다"

유명한 실존 인물을 다룬 작품들은 많지만, 그 후광에 가려진 주변 인물들을 다룬 이야기는 그렇게 흔치 않다. 그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영화감독 '수잔 니키아렐리'는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앤디 워홀의 뮤즈였던 벨벳 언더그라운드 가수 '니코'를 영화화한 작품 <니코, 1988>(2017) 와 칼 마르크스의 막내딸인 엘리너에게 헌정한 <미스 마르크스>(2020)가 그 사례다. 그리고 그녀의 여성 3부작이라 불리는 이 작품의 마침표를 찍는 영화인 <키아라>(2022)는 여성 공동체가 남성우월주의 문화 사이에서 구동되는 변화를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다룬다.

1211년부터 1228년까지의 시기를 명시적으로 다루는 <키아라>는 성녀로 알려진 '키아라'(마르게리타 마주코)의 나이를 18세 소녀로 설정함으로 일종의 성장영화로 그린다. 그녀의 얼굴상 자체가 성숙함과 거리가 먼 얼굴상을 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강조한다. 흑암이 가득한 숲을 지나 산에서 내려오는 키아라와 그의 친구를 길게 풀 쇼트로 잡을 때, 그들은 동물 소리에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반응한다. 영화 초반의 이 장면은 영화구도 전체에 대응하는 요소이다. 더욱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희망이 계속해서 관객에게 던져질 것이라는 예고는 뮤지컬 장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키아라에 부여된 프란체스코와의 우정은 성장 서사와도 그 궤도를 같이한다. 여기서 그녀에게 세례를 주는 남성 프란체스코는 이 영화가 가진 여성성이 단지 러브스토리로 남용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이를 제어하는 소스로 배치된다. 둘의 갈등과 시간이 지나 병이 들어 죽을 위기에 처한 프란체스코와 키아라가 다시 만난 시점에서의 포옹 장면에서도 둘은 애정이 아닌 깊은 '우정'을 나누면서 시퀀스가 종료된다. 장면 장면이 극적인 서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캐릭터의 감정이 체감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이 영화가 선택한 숏들이 밀도 높은 자극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 Vivo film

<키아라>에는 다소 급진적인 선택이 있다.

영화를 뭉뚝하고, 다소 주제 의식을 쉽게 발화하게끔 만드는 뮤지컬 장면이 바로 그 예시다. 이 장면에서 주연인 키아라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 모두에게 시간을 일률적으로 분배한다. 각각의 시간의 흐름을 명시하는 장의 끝에 함께 모여 노래와 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심을 표출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사회적인 형상과도 그 의미를 교류한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건 성서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구현한 장면이다. 빵이 무한으로 재생되는 이 기적 앞에서 프레임은 모든 이들에게 얼굴을 할당한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과 기적을 선사한 키아라보다 앞서 군중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다채롭게 촬영하는 카메라는, 이 성장 서사의 꼭짓점이 민중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사회주의를 영화의 서사에 결부시키는 감독의 의도를 살짝 엿볼 수 있다. (나는 그의 전작이<미스 마르크스>라는 점부터 그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마르크스가 기독교인이었다는 단서는 이런 식으로 경유할 수 있는 것일까)

여성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이런 의도를 충분히 부각할 수 있는 요소다. 여기서 여성이 가진 신체적 특징이 강조되기보다 얼굴이 강조된다. 얼굴만이 둥둥 떠다니는 이 공동체에서 개인의 의미는 결국 사회적인 연대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영화에선 여성과 신앙이라는 두 대표적인 성질이 영화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양상보다 여성만으로 구성된 집단이 어떻게 하면 이 시대가 요청하는 연대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에 더 큰 의문부호를 부착한다.

 

ⓒ Vivo film

영화에선 반복적으로 회칙을 구성해야 한다는 말이 언급되고, 라틴어가 아닌 속어로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 등장한다.

영화가 나타내는 시대는 교육을 받은 중·상류층만이 라틴어로 된 성서를 봉독하거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시대였다. 백작의 딸인 키아라가 계속하여 호명하는 문제는 제도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되는 셈이고, 그것을 감독은 카메라에 밀착하여 담고 있다. 그녀는 "가난하게 살겠다"고 말하며 아버지와 거리를 둔다.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키아라는 후반부에 이르러 여성의 지위를 격상하고 싶어 하는 욕망보다 사회질서를 지키는 선 안에서 행위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후반부에 그녀는 주교에서 교황이 된 남성을 초대하여 회칙을 만들고 싶다는 권유를 한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며 자신의 심정을 어필하는 키아라의 모습에서 우리는 감독의 여성상을 발견한다. 특정 집단과 사회를 분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영화가 중시하는 건 이러한 합의이며 카메라 앵글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우린 키아라뿐만 아니라 다양한 여성의 얼굴들과 마주하며 이 영화가 함축하는 구도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된다.

 

수많은 얼굴을 본다는 것에 의미

<키아라>는 목적이 분명하다. 영화는 여성의 시대를 촉구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투쟁이나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서술보다 인물 한명 한명을 포커스하며 얼굴이 가진 형상을 묘사하는 데 정성을 기울인다.

개인의 양식으로만 이미지를 구현하려 하지 않는 <키아라>는 한 사람의 감정에만 동화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구성한다. 가령 성서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보다 말씀을 듣는 여성의 얼굴들에 더 많은 시간이 부여되고, 발을 씻기는 키아라보다 씻김을 당하는 여성의 얼굴이 더 많이 나온다. 특히 서두에 언급했던 뮤지컬 장면의 여성의 얼굴은 이 영화가 키아라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지 않음을 은연중에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이 가진 특성은 사회적이라는 것도 있지만, 더 나아가 주체가 가진 얼굴의 특수한 형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 Vivo film

<키아라>는 두 종류의 풍광이 등장한다. 공동체가 거주하는 성전을 위시한 패쇄적인 건축물과 밖에 광활하게 펼쳐진 평야가 그 예다. 밤과 낮, 그리고 공간의 채도와 명암에도 얼굴은 계속해서 '어떤' 역할을 감행한다. 그 역할이란 건 카메라의 성질이 개인의 특성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배경의 유형이 프레임에 침투할 때 관객은 얼굴의 표면과 마주한다. 얼굴의 어원이 persona라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영화에서 기능하는 얼굴이 가진 개인의 역동적인 잠재력을 시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신을 위한 제례에서 특정 역할을 맡은 사람이 가면을 쓸뿐더러 여러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원을 가진 얼굴은 타자에 대한 이해로부터 작동하는 것임을 생각해보자.

또한, 들뢰즈-과타리는 얼굴을 인간을 형성하는 표현의 항에 해당하는 실체, 곧 언어를 형식으로 부여받은 질료로서 정의한다.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애덤 윌킨스도 말의 의미를 보강하고 숨겨진 감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미묘한 얼굴과 표정과 말을 결합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고 말했다. 개인이지 못했던 여성들의 얼굴을 다룬다는 점에서 <키아라>는 탈자적인 여성의 형태를 근대를 뚫고 묘사하기를 힘쓴다.

 

ⓒ Vivo film

 

   

영화에서 여성의 얼굴은 결코 은폐되지 않는다. 관객으로 하여금 얼굴로 하여금 그 공동체와 개인이 가진 위력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키아라'라는 개인은 계속해서 자신을 포기한다. 기적을 행하는 '성인'으로 부르지 말고, 똑같이 생각해달라는 요청은 관객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프레임을 세공하는 공통된 단서를 숨겨둔 그의 작품은 철저히 프레임의 분배를 여성의 얼굴에 허용한다.

"여자는 살과 몸으로 남자들을 악으로 행하게 한다"라는 대사는 이 시기를 설명하는 문장일지언정 개인과 집단이 가진 힘을 강하게 한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여성은 이 문장을 해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들의 얼굴은 결국 웃는다. 그 웃음은 결코 남성에게서 벗어난 독립적인 여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회칙이 가동되어야 하는 현실은 그들에게 있어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빵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와 그 기쁨을 누리며 연대하는 하나의 '사회'가 되는 기쁨. 감독 수잔나 니키아렐리는 그렇게 키아라의 마지막 얼굴에 그 의미를 심어놓았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 Vivo fil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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