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당신이 알지도 모르는 '미국 영화'
[Critique] 당신이 알지도 모르는 '미국 영화'
  • 이현동
  • 승인 2023.02.2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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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모든 미소에는 눈물이 있다"

 

할리우드의 모든 미소에는 눈물이 있다.

<쇼걸 인 할리우드>(1930) 中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의 형태가 특별한 사회적 질서 안에서 '말해지거나 만들어지거나 행해질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볼 수 있거나 들을 수 있도록' 구성된다"고 말합니다. 우린 이 구절에서 영화사에서 배치된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데미안 셔젤의 <바빌론>(2023)은 무성 영화에서 발성 영화로 넘어가는 시기를 다루면서 우린 영화사적인 변화와 이슈를 조망할 수 있었죠. 또 이 영화는 영화 산업의 발전, 영화에 대한 인식, 스튜디오의 변천사까지 볼 수 있었던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주었습니다.

 

ⓒ Edison Kinetoscope Records: Annie Oakley(1894)

미국 영화사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에디슨'입니다.

전구를 발명한 과학자로도 알려진 에디슨은, 미국 영화사뿐만 아니라 영화사 전체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1894년 그는 동전을 넣으면 한 사람씩 기계 안에 설치된 영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사기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공개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영화산업을 주도하기 위해서 1891년에 특허를 받고, 1893년에 영화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자신의 이름으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사인 '에디슨사'(Edison Manufacture Company)를 설립했죠.

여기서 미국의 중요한 영화감독이 등장하는데 <미국 소방수의 생활>(1903)과 <대열차 강도>(1903)를 연출한 '에드윈. S. 포터'입니다. 그는 불타는 집과 엄마와 아이의 무대 장면을 결합하는 병렬 편집을 선보이거나 모션 컷, 프레임 중앙에 액션을 유지하기 위해 카메라 무빙, 대각선 구도 등을 통해 영화 기법을 창의적으로 구현해냈습니다.

 

영화 <바빌론> ⓒ 롯데엔터테인먼트

   

<바빌론>에서 성공한 중견 연기자인 잭 콘래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 같은 노동자도 영화를 보며 성장했다" 

산업이 점차 자동화되고, 노동조합도 힘을 갖게 되면서 1900년대 66시간에 이르던 노동자들의 주당 노동시간이 1920년대에 41시간 정도로 대폭 감축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에게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주어지게 됩니다. 당시 영화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설계된 상설영화관인 '니켈로디언'(Nickelodeon)의 등장은 영화산업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계기가 되지요. 저렴한 입장료는 이민자와 노동자에게 더할 수 없는 훌륭한 레저활동이 되는 동시 상업화의 물결은 점차 중산층과 상류층에게도 이어져 영화 궁전이라는 대형 극장이 설립되기도 합니다.

극장의 확장과 변화하는 와중에서도 영화특허회사에만이 필름을 공급되면서 점차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산업의 고착화는 결국 영화산업 전반에 있어 창작성을 위협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지요. 하지만 이들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름을 공급하던 이스트만 코닥은 법, 정치적으로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계약을 파기하고, 생필름을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점차 독립제작자들이 등장하게 되지요.

1909년 4월 미국 최대의 배급회사를 운영했던 칼 렘믈이 영화특허회사에 속하지 않는 제작자들로부터 영화를 배급받고 제작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디슨사를 비롯한 강력한 9개의 회사(MPCC)의 제약에 대응하기 위해 독립 제작사들은 점차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로스앤젤레스 외곽에 자리했던 할리우드에 정착하게 되죠. 자연스럽게 영화계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1910년 3십 1만 명이었던 인구가 1930년에 1백 2십만 명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칼 렘믈은 할리우드 북쪽에 있는 거대한 닭 사육장을 가장 근대화된 스튜디오로 만들어 효율적인 영화 제작 환경을 조성합니다. 야외촬영지, 필름 현상실, 편집실, 의상실, 동물원과 같은 분업화된 공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지요.

이때 독립제작업자들은 장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하지만, 영화특허회사는 장편영화의 인기를 인식하지 못한 채 1~2릴(12분~20분 사이)의 영화만을 제작하면서 점차 쇠락하게 됩니다. 

이때 미국 상업영화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었던 건 '기획력'에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무성 영화는 서부극, 슬랩스틱, 코미디 멜로드라마, 역사 및 성서의 이야기 등 친숙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등 인기 배우들은 많은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지요. 여기에 스타를 위주로 한 이미지메이킹은 굉장히 성공적이었습니다. 당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주니어, 루돌프 발렌티노, 메리 픽포드, 글로리아 스완슨 등 다양한 스타가 등장합니다.

 

ⓒ 영화 <재즈싱어>

1920년 후반, 혁명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사운드'의 도입입니다. 할리우드에서 동기화된 사운드의 성공적인 추가는 앞으로 영화사 제작을 송두리째 뒤바꿀 정도로 위대한 작업이었습니다. 1920년 중반에는 여러 편의 싱크로 된 뮤지컬 단편 영화들을 촬영하고, 대사가 없는 장편 영화인 <돈 후안>(1926)에 이르러 사운드트랙을 동기화시키므로 새로운 가능성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한 최초의 발성 영화 <재즈싱어>(1927)를 통해 혁신을 거듭하게 됩니다. 유성 영화의 등장은 녹음 장비 구입, 추가 임금 지급, 전문 음향 기술진 섭외 등의 제작비 증가로 연결되기도 했지만, 매력적인 작품을 탄생시킬만한 잠재력 또한 갖고 있었습니다.

이때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배우 대부분은 자신의 목소리가 대사와 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대표적인 예였죠. 그의 영화는 음향효과만 있을 뿐 대사는 없었습니다. 그가 말을 처음으로 시작한 건 독재자인 히틀러를 조롱하기 위한 영화인 <위대한 독재자>(1940) 때였습니다.

사운드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영화 산업을 지배하는 거대 스튜디오 회사는 제작, 배급, 상영 수단을 통제하지만 화려함과 기술, 매력적인 작품들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 <필라델피아 이야기>(1940), <카사블랑카>(1942) 등이 그러했지요.

 

ⓒ 영화 <카사블랑카>

이어 1950년 '텔레비전의 등장'은 영화 관객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다만, 메이저 영화사들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영화에 비해 스케일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대중들이 금방 싫증 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군소 제작사들이 과거 서부극이나 단편 영화들을 제공하여 대중들의 시선을 이끄는 데에 성공합니다. 영화제작자들은 영화의 외관과 음향을 발전시켜 극장으로 관객을 유도합니다. 색채와 와이드 스크린 기술 등을 통해 작은 흑백 텔레비전으로 구현할 수 없는 시각적 경험을 관객들에게 선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1930년대 이후 영화의 20%가 컬러 영화였다면, 1950년대는 50%가 컬러 영화였습니다. 1952년에는 세 대의 전자 동기화 카메라가 필요한 와이드 스크린이 개발되면서 보편적으로 와이즈 스크린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변모하게 됩니다.

하지만 1960년대는 영화 관람객이 감소하고, 개봉 편수 또한 줄어들어 스튜디오의 시스템이 점차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 영화 <택시 드라이버>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기운과 함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청년들이 증가하면서, 영화 또한 새로운 방향을 맞이하게 됩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 '뉴 아메리칸 시네마'(American New Wave, New Hollywood)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당시 젊은이들은 획일적이고 오락 지향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반감이 있었습니다. 이 맥락 속에서 필름 스쿨 세대의 등장은 다채로운 영화들을 생산하게 되는 배경이 되지요. <밤의 열기 속에서>(1968), <이지라이더>(1969), <대부>(1972),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택시 드라이버>(1976), <천국의 나날들>(1978)과 같은 뛰어난 영화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도 블록버스터 영화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스>(1975)와 조지 루카스 <스타워즈>(1975) 등은 청소년 관객들에게 어필하며 흥행을 이어 나갔습니다.

스튜디오 업계는 이런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금 균형을 찾게 됩니다. 소규모 제작사와의 유기적인 연대는 이전보다 창의적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대본 준비, 캐스팅, 편집이 협력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스튜디오는 단독적으로 작업을 집행했던 초기와는 달리 에이전시, 텔레비전, 비즈니스 및 마케팅 업계와 끊임없이 교류가 이어졌습니다. 인기 스타를 만들고, 반복적인 장르와 이야기의 결합은 대중들에게 많은 호응을 이끌었습니다. 독립 영화 제작자와 커뮤니티의 활성화는 예술가들에게 활동 반경을 넓히는 주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독립 영화 제작자는 독립 영화와 스튜디오를 넘나들며 미국 영화의 또 다른 발전 가능성을 논구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성공한 독립 영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코엔 형제, 스파이크 리, 스티븐 소더버그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 넷플릭스(NETFLIX)

그리고 지금,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애플 TV 등 OTT의 발전으로 미국 영화 감독은 창의적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요건 또한 갖추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영화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2018) 나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 맨>(2019), <돈 룩업>(2021) 등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겠죠.

미국 영화(사)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세계의 가장 큰 영화시장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 처음에 언급했던 대사처럼 영화에 눈물이 있었고, 피와 땀이 숨겨져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조금이나마 각별하게 애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글 이현동 영화평론가,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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