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전생했더니 상업영화이었던 건에 대하여
[Critique] 전생했더니 상업영화이었던 건에 대하여
  • 김경수
  • 승인 2023.02.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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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 혹은 짤방 영화의 탄생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2022)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B급으로 찍은 30분짜리 원테이크 영화로 시작한다.

'켄'(피네건 올드필드)과 '치나츠'(마틸다 안나 잉그리드 루츠)를 좀비 영화의 마지막 컷을 찍는 중이다. 치나츠가 계속 어색한 연기를 하자 감독 '히구라시'(로맹 뒤리스)가 둘에게 욕을 퍼붓는다. 이윽고 영화 세트장에 불길한 전조가 감돌기 시작한다. '나오'(베레니스 베조)는 이 영화 세트장이 실은 세계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생체실험이 진행된 곳이라는 진실을 급작스레 말한다. 그리고 영화 팀원 중 한 명이 좀비로 변해 토사물을 내뱉는다. 이 와중에 '조나단'(라파엘 끄나르)이 촬영장 밖으로 나가서 좀비가 되고, 이윽고 이들의 어설픈 추격전이 시작된다.

 

ⓒ 까멜리아이엔티

잠깐, 영화 설명이 살짝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에 대한 비평을 진지한 문체로 쓰는 것이야말로 45년 전, 로메로의 영화를 해석할 때나 나오는 시대착오적 좀비의 정의를 그대로 내뱉는 켄의 행동이나 다름없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는 우에다 신이치로 감독의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2017)를 프랑스에서 리메이크한 영화이고, 켄과 치나츠, 히구라시, 나오를 연기하는 배우는 프랑스 배우다. 의문은 품지 말고 그냥 영화감독이 까라면 까라는 거고, 믿으라면 믿는 거다. 영화에서 영화감독을 맡은 레미(로맹 뒤리스)도 일본 제작사에서 배역 이름을 이따위로 지으라고 할 줄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제 나름대로 각색도 했는데 제작사가 하라니까 하는 거겠지. 배우가 그러하듯 어쩔 수 없이 관객도 거기에 따라야 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선동과 날조, 뻔뻔함으로 승부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는 솔직히 킹받았다. '킹받는다'라는 표현 외에는 마땅히 이 영화가 관객에게 안기는 유쾌한 짜증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말하려니 괜히 헛웃음이 나지만, '미셸 하자나비시우스'는 지금껏 유쾌한 짜증을 유발하고자 영화를 찍은 감독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 또한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리메이크라지만 리메이크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없고, 원작의 구조를 그대로 복사한다. 그 복사 과정에서 생기는 기이한 변화가 이 영화의 의의를 설명한다.

 

ⓒ 까멜리아이엔티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의 초반 30분은 원테이크인 B급 좀비 영화, 중반 30분은 "싸고 빠르고 많이" 영화를 찍는 레미가 원테이크 생방송 좀비 영화를 찍자는 제작자의 제안을 승낙하고 이 영화의 프로덕션에 참여하는 과정을, 후반부는 그 프로덕션이 엉망진창이 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라고 소리치면서 이 B급 좀비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을 담는다.

사실, 도입부와 후반부는 원작에서 화질과 촬영만 조금 더 나아지고, 배우만 프랑스 배우로 캐스팅한 것일 뿐 감독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리메이크라기에는 메시지도 그대로라서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저예산 학생 영화인 원작에 비해서, 이 영화는 프로가 찍은 상업영화라는 차이가 있는데 말이다. 문제는 중반부다. 영화의 이야기는 프랑스에서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데에 생기는 차질과 제작 과정을 다룬다. 문제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 또한 프랑스에서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라는 것이다. 프랑스어판 일본 영화에 프랑스 이름을 쓰지 못하게끔 하는 영화의 설정은 그야말로 작위적이지만, 둘 사이에는 왠지 모를 유사성이 생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는 주인공들이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가 제작되고 망가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후반부에서야 드러나지만, 영화는 계획대로 찍히지 않으며, 배우의 대사는 대체로 애드립이다. 일본 원작이 이를 영화과 학생의 열정을 담으려는 데에 비해,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는 프로가 제 뜻대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상업영화 현장을 담아내는 데에 집중한다. 애드립에서 터져나오는 소비자본주의 비판은 상업영화 안에서 터져나오는 제작자의 비애를 담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원작의 후속편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를 보고 킹받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신선한 돈낭비이자 잉여짓이다. 얼마든 더 잘 찍을 수 있는 감독은 제작자에 의해 상업영화가 망하는 과정을 담으려 영화를 망가뜨린다.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킹받는 순간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를 좀 더 즐기기 위해 감독인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필모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2011년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포함한 5개 부문에서 수상한<아티스트>(2011)는 1910년대 미국 무성 영화의 클리셰를 한 데에 모아둔 작품이다. 이 영화는 1개의 클리셰는 관객을 짜증나게 하지만, 100개의 클리셰는 관객을 울린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그대로 영화화한 듯이 감동적이다.

<아티스트>에서 눈여겨 볼만한 시퀀스는 단언코 엔딩이다.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순간부터 영화는 뮤지컬이 되더니 유성영화로 전환된다. 여기에는 그간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화제작 현장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는다. 사회적 배경이 탈색되고 그 시대의 분위기만 남는다. 전혀 노스탤지어가 아니지만, 왜인지 아카데미에서는 프랑스 출신 감독에게 상을 퍼다 주었다. 그의 영화는 영화사를 다루되 대상을 정확히 모방하는 데에 중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패러디와 오마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패스티시와 전용, 그리고 밈이라 할 수 있는 수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방된 대상을 잘라내는 데에서 그의 영화가 시작한다.

 

<네 멋대로 해라: 장-뤽 고다르> ⓒ 이수C&E

하자나비시우스의 스타일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영화는 <네 멋대로 해라: 장-뤽 고다르>(2020)다. 오죽하면 콧대 높은 고다르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를 보다가 욕을 하고 뛰쳐나갔을까. 고다르를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그리기는커녕 그를 우스꽝스럽게 그리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도발적이다.

<네 멋대로 해라: 장-뤽 고다르>는 고다르의 아내이면서 소설가인 안느 비아젬스키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했다. 원작은 거들뿐이다. 안느가 고다르를 보는 시점만 빌려와서 아예 다른 내용의 로맨틱코미디를 찍는다. 영화는 68혁명이 한창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해 5월 유행했던 68혁명은 당시 프랑스의 기성세대가 만든 보수적인 관습을 부수려는 돌파구였다. 그때의 청년들은 두 가지 문화를 접했다. 1960년대 베트남 반전으로부터 시작된 반문화와 반전 록큰롤 등의 미국문화, 마오주의라든가 허버트 마르쿠제 등의 철학 이론이 그것이었다. 또한 미셸 푸코나 알튀세르 등 사회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문제시하는 이론이 유행했다. 그 시기에 파리의 한 대학교에서 일어난 징계에 대한 반대 시위, 반전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서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노동자가 학생들과 연대했고, S.I(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 등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최전선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기 드보르와 아스게르 욘 등을 중심으로 하는 상황주의자는 당시 영화나 광고 등 매스미디어를 탄 매체들을 스펙터클이라 칭했다. 스펙터클은 거칠게 요약하자면 "지배경제의 이미지"로, 상품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 소비사회의 모습을 지칭하는 말이다. "현대적 생산 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축적물"(스펙터클의 사회, 기 드보르, 유재홍 역, 울력, p.13)이 되며, 이 스펙터클은 "정보나 선전, 또는 광고물이나 곧바로 소비되는 오락물이라는 특정한 형태 아래 사회를 지배하면서 오늘날 삶의 전범을 이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엇이든 구경거리인 상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가 누려야 할 삶과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가로막는다는 말이었다.

상황주의자들은 당시 영화나 광고 등등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모든 예술작품을 거부했다. 그들은 이미지 생산을 거부했고, 이에 저항하는 전략으로 "전용Detournement"을 택했다. 기존의 언어를 자신만의 은어로 쓰는 식이다. 그들은 즉 일상의 모든 것들을 혁명으로 바꾸는 전략으로 혁명을 주도했다. 하자나비시우스가 그려내는 장-뤽 고다르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다. 그는 무엇이든지 정치와 영화 연관해서 설명하고, 심지어 연인인 안느 비아젬스키와(스테이시 마틴)의 관계마저 그리 해석한다. 원체 그 의미를 알기 힘든 아포리즘을 남발하면서 그것으로 자기연민이나 하는 영화 속 고다르는 킹받는 인물이다.

 

<네 멋대로 해라: 장-뤽 고다르> ⓒ 이수C&E

하자나비시우스는 전작에서 고다르의 캐릭터만을 우스꽝스럽게 그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고다르의 미장센을 맥락을 소거한 채 가져와서는 짜깁기한다. 고다르의 말대로, 형식과 내용의 일치에서 정치가 가능하다면 이 영화는 그 말을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고다르의 영화를 노골적으로 따라 하는 이 영화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되 맥락은 다른 상황을 만든다. 고다르가 칸 영화제 개최를 반대하고자 "전 국민이 혁명인데, 영화제를 열 수 있겠냐"고 비난하면서 여기는 "트래킹 쇼트"를 논할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때 카메라는 트래킹 쇼트로 수영복을 입은 안나 비아젬스키를 비춘다. 이는 고다르의 "트래킹 쇼트는 모랄의 문제다"라는 것을 풍자한다. <비브르 사 비>(1962)를 패러디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안나 카리나가 <잔 다르크의 수난>(1928)을 보고 우는 장면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느 비아젬스키가 그것을 보고 울게 한다. 영화 속 우는 여인이 영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다르 옆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영화와 정치에 과몰입하는 고다르의 모습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고다르는 옆에서 울고 있는 안나 비아젬스키를 보지 않는다.

고다르가 "나는 도덕적 칼뱅주의자"야라고 할 때, 카메라는 고다르를 분장한 루이 가렐의 나체를 적나라하게 비춘다. 고다르가 학생에게 비난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의 얼굴이 네거티브 필름으로 바뀐다. 이는 고다르 후기작을 인용한 것이다. 고다르가 자살할 즈음, 고다르 <알파빌>(1965)에 등장한 외화면 내레이션이 나와 현학적인 언어로 그 자신의 비겁함을 옹호한다. 더군다나 장마다 붙은 이름은 고다르의 필모그라피를 모욕하는 듯 보인다. 모자이크처럼 고다르 영화들의 파편이 모여 고다르 전기영화가 된다. 심지어 하자나비시우스는 상황주의자의 목소리를 빌려서 고다르를 우롱하기까지 한다. 실제로 하자나비시우스의 영화는 상황주의의 전략과도 맥이 이어져 있기도 하다. 상황주의자는 모임에 불청객으로 와서는 엉뚱한 아포리즘을 이야기하는 고다르더러 "당신은 현대 사회의 소비재에 불과해. 당신은 코카콜라나 미키마우스에 불과하다고!"라는 상황주의자의 일침은 감독의 자조와 맞닿는다.

 

<네 멋대로 해라: 장-뤽 고다르> ⓒ 이수C&E

   

패러디나 오마주는 '원본으로 삼는 예술 작품이 그 예술 장르의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를 파악해야만 할 수 있는 수사법이다. 패러디는 원본의 맥락을 작가의 의도대로 뒤틀어야만 하고, 오마주는 원본의 맥락을 존중하고 수용해야 한다. 

<아티스트>, <네 멋대로 해라: 장 뤽 고다르>에서 하자나비시우스가 쓰는 수사는 원본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는 패러디나 오마주로 칭하기 힘든 것이다. 오히려 원본을 탈맥락화해서 스타일만 가져다가 쓰는 패스티시나 상황주의자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전략으로 쓴 전용에서 탄생한 밈이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데에 더욱 유용할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는 짤방이 제작되는 방식과 같다. 짤방은 짤림 방지에서 비롯하는 말이다. 2000년대 초 한국 인터넷에서는 게시물마다 게시판과 상관있는 키워드를 올려두어야 했다. 그러나 이 제약을 통해서 키워드만 사용하고 내용을 쓸데없는 내용으로 채우는 게시물이 유행했다.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게 만드는 사진이 바로 짤방이다. 짤방이라는 제약으로 인해서 오히려 유저에게는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는 상업영화에 가해지는 무수한 제약을 그대로 드러낸다. 제약 아래서 생기는 돌발상황을 애드립으로 헤쳐 나가는 배우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자나비시우스가 켄을 통해서 내뱉는 대사는 그야말로 하찮다.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농담에 치부되지만, 저항이 농담으로 드러나는 균열이야말로 이 감독이 주목하는 순간이 아닐까.

 

ⓒ 까멜리아이엔티

끝으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가 일부러 고예산으로 저예산 영화를 찍고 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만하다. 원본을 일부러 원본보다 높은 퀄리티로 모방하되, 그 내용은 열화하는 이 영화의 기획은 영화의 쓸모를 생각하게 한다. 자본주의가 비효율적이므로 이 영화도 같이 잉여스러움과 비효율을 자처한다. 이 감독의 재능 낭비는 영화의 미덕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긴 밈이 계속 생산되게끔 하는 것은 밈을 생산하는 사람의 잉여력에 달려 있으니까.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프랑스에서도>가 엉망진창이라 느껴서 비판하고자 한다면 영화에 속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아방가르드의 불가능성을 조명한다. 이 영화는 그래서 상황주의자가 1972년 제작한 영화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거울상과도 같다. 후자가 원본을 무단으로 도용해다가 거기다 아무런 상관없는 프로파간다성 자막과 더빙을 입혀서 아예 다른 영화로 재구성하는 기법을 쓰는 데에 비해서, 이 영화는 그 전용마저 불가능해지는, 원본과 같은 영화되기마저 실패하는 자학적 퍼포먼스를 통해서 잉여되기를 실천한다. 이는 로잘린 크라우스가 인류 최후의 아방가르드가 만든 수사인 전용마저 자본주의의 시스템으로 편입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한다. 어느새부터 저항은 안 멋지다. 이건 하나의 TV 혹은 유행쇼다. 원테이크쇼가 그러하듯 말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된다." 이 엉망진창인 영화에서도. 그게 감독의 유일한 저항이라고 이 영화는 말한다.

[글 김경수 영화평론가, rohmereric123@ccoart.com]

 

ⓒ 까멜리아이엔티

카메라를 멈추면 안돼! 프랑스에서도
Coupez!, Final Cut
감독
미셀 하자나비시우스
Michel Hazanavicius

 

출연
로망 뒤리스
Romain Duris
베레니스 베조Berenice Bejo
그레고리 가데부아Gregory Gadebois
피네건 올드필드Finnegan Oldfield
마틸다 안나 잉그리드 루츠Matilda Anna Ingrid Lutz
리에스 살렘Lyes Salem
샤를리에 뒤퐁Charlie Dupont
장-파스칼 자디Jean-Pascal Zadi

 

수입 제이씨엔터웍스
배급 까멜리아이엔티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2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2.15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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