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지만
'애프터썬'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지만
  • 변해빈
  • 승인 2023.02.14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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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몸부림과 앓음, 그것을 욱여넣는 통증을 껴안으며"

먼발치에,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뒤돌아선 이가 있다. 죽여낸 모든 소음을 홀로 감당하는 몸짓, 그런 시늉으로 근근이 시간 속에 자신을 욱여넣는 외로운 혼돈이 바로, 이 앞에 있다.

<애프터썬>은 그 유일한 하나를 끌어안으려 하지만, 이에 마저 선뜻 다가설 수 없는 '물끄러미'라는 행위에 심혈을 기울인다. 우리는 단지 거리를 유지하고 소리죽여 바라볼 뿐이지만, 말이 안 나오게 다 쏟아부은 심정... 이조차 감추려는 이를 보며 몇 초의 시간이 몇백 년처럼 흐른다는 말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님을 새삼 되새긴다.

 

ⓒ 그린나래미디어

튀르키예 여행지에서의 낯선 밤. '캘럼'(폴 메스탈)이 잠든 어린 딸 '소피'(프랭코 코리오)의 곁을 지나 발코니로 이동하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소피의 평안한 수면의 몸짓을 응시하던 영화는 이내 그녀의 등 뒤, 유리문 너머로 건너간 캘럼의 뒷모습을 향해 유유히 이동한다. 나른함과 비틀거림이 뒤섞인 캘럼의 몸짓이 우리의 시야(화면) 외곽으로 아슬하게 기울어지는 가운데, 소피의 얕은 숨소리가 적막을 깨고 담배 연기에 섞여 터져 나오는 캘럼의 호흡과 묘하게 운을 맞춘다. 소리 없는 몸짓과 그것에 숨결을 불어 넣는 작은 숨소리. 생기를 감돌게 하는 이 조심스러운 거리감이 만들어낸 광경을 보고 있자면 덩달아 숨을 낮게 고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계산되지 않은 타이밍에 캘럼이 문득, 소피가 있는 뒤를 돌아보던 찰나도 빼놓기 어렵다. 그녀가 인기척을 낸 것도, 잇따라 캘럼의 다음 행위가 이어 붙는 것도 아니다. 그의 '뒤돌아봄'은 오직 자신이 미처 바라보지 못한 주변의 누군가를 떠올린 다음 이어지는 즉각적인 감응이다. 영화의 도입부, 호텔 직원을 찾아 계단을 오르던 캘럼이 뒷걸음치며 멈칫거렸던 그런 순간. "나는 괜찮아"라는 어딘지 시큰둥한 소피의 반응이 이어진 후 잠시간 화면에서 사라졌던 캘럼은 아주 짤막한 경과 후 다시금 그녀의 안부를 묻는다. 그는 이런 심경이었을까? 무심코 넘긴 영화의 짧은 순간들이 마음속에서 쉽사리 여과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의 순간들을 조금 더 붙잡아 보려 한다.

캘럼은 이따금 연결된 공간을 벽과 문으로 나누었을 뿐이고, 혹은 단지 마주할 수 없는 몸짓이 형성될 때면, 언제나 소피를 향해 물어 왔다. "별일 없지, 소피?", "괜찮은 거야?" 그는 자신의 앞보다 제 뒤를 바라볼 누군가와 스스로가 놓친 어떤 순간을 간절히 더듬는 자이다. 그리고 소피를 포함한 우리는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없는 사실 속으로 느리고 깊숙이 가라앉고야 만다. '뒤돌아봄'의 감응도, 물음이 향하는 그곳도 캘럼 자신에게마저 내어주기엔 협착된 대상이거나 그를 향해 물음들을 메아리치게 하지 못하였음을, 소리를 죽인 채 물끄러미 볼 뿐인 지금에야 겨우 알게 된다는 것. 찬란한 지난날의 햇볕에 살갗을 데인 기분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 그린나래미디어

   

<애프터썬>은 목이 메어 끝마치기 어려운 종류의 무언가를 떠올림 '받는' 영화이다.

'어느 애틋한 부녀'가 떠난 여행의 시작과 끝에는 어떠한 사정이 있는지 설명되지 않고, 캘럼과 소피 또한 상대가 어떤 생각에 사로잡혔는지, 그 내막을 정교하게 알아내지 못한다. 드문드문 서로를 바라보는 캘럼과 소피의 시선이 캠코더를 경유해 풀 프레이밍 삽입되곤 하지만, 두 사람 주변을 훑어가며 '물끄러미'를 행하는 영화의 시선은 누구의 소유인지 딱 잘라 나눠지지 않는다.

각 장면을 구성하는 성인 소피(실리아 롤슨-홀)의 무의식을 타고 울컥, 쏟아져 나온 기억의 파편들은 조각나고 겹치기 일쑤다. 소위 엿보고 엿들은 단면이거나 제때 못 본 이면이 출몰하고, 축축하고 헐떡이는 정체불명의 암시들이 기억의 여백을 메운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는 사실은 점점 증식되고 자리를 잃은 채 배회한다.

가장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사실은 출몰하는 많은 것 중, 어느 때보다 어둑한 천공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품고 주저앉은 형상 또한 목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시늉마저 바닥나고 소음이 밖으로 뚫고 나올 때, 기를 쓰고 유지해온 적막의 질서가 파괴되면 더욱이 무언가를 욱여넣고야 마는 슬픈 모순들. 그 침묵과 적막의 공기는 마치 소피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던 노랫가락처럼 이렇게 울려 퍼진다. "이런, 내가 너무 많이 말해버렸네." 숨죽인 종류의 요란만이 바라보는 자에게 용인되는 유일한 소음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니 '미처 이어지지 않은 말들과 충돌하며 흩어지는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깨닫는 것은 엄연히 통증이 수반되는 일이다.

캘럼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욱여넣는다는 인상을 안긴다. 몸을 옥죄는 석고붕대와 다이빙슈트의 탄력은 차라리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통증이다. 그는 시종 무언가를 불현듯 떠올리고 금방이라도 쏟아내려던 말을 돌연 삼킨다. 그만하면 다행이지, 그는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고 울음을 죽이기 위해 실체적 감각을 부러 이탈하는 중이다.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수반된 <애프터썬>의 주된 공간은, 외려 캘럼을 영화 안에 붙잡아두려고 사력을 다하는 것 같다. 물속에서 눈물은 흩어지고 태양 아래 찡그린 얼굴은 엇비슷하다. 소피가 길을 헤매는 사이, 캘럼이 삶을 헤매던 밤도 회상해본다. 캘럼이 어둠이 내린 해변을 가로질러 검은 바다로 사라진 뒤 무인의 프레임이 마련될 때, 그의 몸부림을 감싸 안는 건 깊은 내면의 어둠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상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리죽인 어떤 것들, 캘럼의 심신과 몸부림과 울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 그린나래미디어

<애프터썬>은 기억을 '이곳'으로 지시되는 일련의 시공간으로 형상화한다. 영화의 각 장면을 구성하는 소피의 기억은 어쩌면 캘럼이 침잠할 수 있는 단일한 곳, 아득한 수중이자 헤매는 꿈속이며, 잃어버린 고향이다. 더불어 '이곳'은 캘럼이 기억하려 애쓴 찰나의 얼굴이 끊임없이 재생되는 시공간이기도 하다. 캘럼이 불현듯 덮쳐오는 감정을 욱여넣은 뒤, 찾아오는 산발적인 중단의 당혹감을 유연하게 풀어버리는 건 다름 아닌 소피이기도 하다. 보이는 것으로 인식한 모든 질서가 반대로 이탈하던, 캘럼의 사이키델릭한 내면의 시공간에서 소피가 그를 돌려세워 붙잡을 때의 감동은 또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양쪽에서 일어난 물결이 비로소 부딪히며 서로를 부둥켜안을 때, 미처 채워지지 않은 괄호들이 만나 하나의 문장이 된다고, 몸부림치는 상대를 끌어안는 그 간절한 힘으로 영화는 세심히 눌러 새기며 전한다.

<애프터썬>은 한꺼번에 터지는 유의 통증이 아니라 하나의 기억(프레임) 위로 희미한 자국이 새겨지듯(오버랩) 조용하게 스며드는 기억들의 공전을 앓는 영화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연속적으로 마주치는 인물들의 맨얼굴, 그 안에 담긴 시선은 말로는 다 옮겨지지 않는 교감의 몸짓으로 헤매이는 삶을 어루만진다. 순간으로 움터서 영원으로 머무는 기억의 문제는 어쩌면 통상적인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누가 자신에게조차 감추려는 맨얼굴을 선뜻 대면해낼 수 있을까. 나는 영화와 내 사사로운 감정을 분리하려 애쓰면서도 느낌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해 동시에 껴안는 심정으로 보았다. 이 양가적인 심정은 차마 다 알아낼 수 없는 무언가일 테지만, 내 삶의 질서가 뒤바뀌는 분명한 체험의 한 종류였다. 멀어진 사람, 그 사람이 닫은 문, 그리고 다시금 문이 열리게 될 미지의 순간을 기다리는 이 영화의 애달픈 시선에 감사를 표한다.

P.S. 튀르키예의 오늘에 평온이 깃들기를 바란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애프터썬
Aftersun
감독
샬롯 웰스
Charlotte Wells

 

출연
폴 메스칼Paul Mescal
프랭키 코리오Frankie Corio
실리아 롤슨-홀Celia Rowlson-Hall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01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2.01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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