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자라지 않는 어른의 세계
[Critique] 자라지 않는 어른의 세계
  • 이상용
  • 승인 2023.02.1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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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이 그려내는 달의 뒷면

<유랑의 달>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0살의 소녀 사라사(시라토리 타마키)가 후미의 집에서 두 달을 보낸 후 집으로 돌아오고, 이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재회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성인이 된 사라사(히로세 스즈)를 둘러싼 세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15년 전 후미(마츠자카 토리)와의 사이에 있었던 진실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회상', 다른 하나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과 편견'. 마지막으로 사라사와 후미의 '재회'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반응과 그들만의 세계를 결심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영화가 다루는 세 가지 모습(회상, 시선, 재회)은 여러 방식으로 재구성되거나 통합되기도 하면서 '이들의 과거와 현재란 무엇인지', '단절된 15년의 세월은 어떤 공백이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을 둘러싼 현실의 폭력성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복합적으로 연결한다.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우려나 호기심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태연하게 대응하는 사라사이지만, 그녀 또한 15년 전의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유랑의 달>이 보여주는 애잔함이 여기에 있다. 주인공들은 달라지려고 애쓰거나 스스로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다. 심지어 주인공들조차도 과거라는 감옥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작과 영화에 동일하게 제목으로 쓰인 '달'(상대적으로 일본 문학작품이나 영화에는 달이 들어간 제목이 많은 편이다)이 시간성을 상징하는 것임을 생각하면―달력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작품의 숨겨진 제목은 '유랑의 달'이 아니라 '머무르는 혹은 변하지 않는 달'일지도 모른다. 세상만사가 흘러가기를 바라지만 자세히 보면 한낮에도 달은 하늘 위에 떠 있다. 영화는 이를 반영하듯 과거의 회상 장면에서 호숫가의 한낮에 달이 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달의 주된 이미지는 만월이 아니라 '이지러진' 모습이다.

 

ⓒ 왓챠

자라지 못한 어른들

<유랑의 달>에서 주인공들의 행적을 제외하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사라사 주변의 직장 동료, 연인, 경찰들이다. 사라사는 연인 료(요코하마 류세이)와 동거를 하고 있는데 젊은 연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그림자가자주 드리워진다. 사라사는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드러내기보다는 연인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성관계는 물론이고,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도 사라사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상대적으로 료는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고 사라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료의 반복되는 제안에 따라 할머니 문병하러 시골집을 찾아갔을 때(실제로는, 집안과의 상견례였다), 료의 사촌인 아즈미는 료의 과거를 귀띔해 준다. 

"사라사 상, 그 멍 료 때문이죠? 우리 부모님도, 큰아빠도 다 알아요. 우리가 모두 속이는 거 같아서 다 말하는 건데 예전 여자친구 사귈 때도 그런 말이 있었어요. 사라사 상만큼은 아니지만 그분 집안도 꽤 복잡해서… 료는 꼭 그런 사람을 고른단 말이죠. 그런 사람이라면 엄마처럼 자길 안 버릴 거 같나봐요."

"그런 사람이요?"

"만일의 경우 도망칠 곳이 없는 사람?"

처음 본 자리에서 이러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과도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 장면은 료의 문제를 드러낸다. 사촌의 말에 따르면, 그가 연인으로 선택하는 인물들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탓에 도망치지 못하고 료에게 순종하는 인물이다. 료는 상대를 지배하고자 한다(그렇기 때문에 폭력을 휘두른다). 그는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라사에게 폭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헤어진 후에도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며 집착을 보인다. 심지어 사라사가 찾아간 후미의 카페를 인터넷상에 올려 물의를 일으킨다.

 

15년 전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후미가 소아성애자일지는 몰라도, 사라사의 기억 속에 있는 후미는 사라사가 원한다면 이곳에 있으면 된다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고 했던 인물이다. 과거에도 그랬을 뿐만 아니라 다시 커피숍을 찾아온 사라사에게도 동일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사라사를 지배하지 않는다. 사라사가 후미를 잊지 못하는 것은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미안함(죄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미와 함께했던 두 달은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시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촌 아즈미의 말 중에 유심히 새겨볼 대목이 있다. 료의 폭력적이고 집착적인 기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그의 엄마 때문이었다. 어릴 적 부모와의 유대 관계가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이야기의 설정은 꽤나 진부할 수 있지만 <유랑의 달>은 '료'뿐만 아니라 많은 인물들이 부모와의 연결에 실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유랑의 달>의 회상 장면은 대부분 사라사의 것인데, 후미의 회상 장면이 슬쩍 끼어 있다. 후미가 집에서 있던 기억이고,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이다. 어린 후미는 어머니가 정원에서 나무뿌리를 뽑아내는 모습을 본다. 나중에 성인이 된 후미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데 이날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며 묻는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정원에 심었던 나무. 빈약하고 성장이 더뎌서 결국 어머니가 틀렸다며 뽑아버렸죠."

"성장이 멈춘다는 게 뭐지? 네가 이상한게 널 낳은 내 탓이니?"

"역시 저는 틀린 건가요? 어머니. 저를 똑바로 보세요."

어머니는 남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후미를 방관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구체적인 사연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나중에 후미의 성기가 자라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과 연결해 보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후미를 외면하며 거리를 두고 지내온 셈이다. 후미가 어머니를 향해 "똑바로 보세요"라고 말할 때 과거의 기억이 또다시 오버랩되면서, 정원의 나무를 뽑은 채로 어린 후미를 똑바로 쳐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자라지 못하는 나무를 뽑으며 후미를 보던 어머니의 모습은 일종의 거세 공포다. 그것은 후미뿐만 아니라 영화 속 대다수의 인물들이, 나아가 일본 사회가 이러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반복적이고 집요하게 영화 곳곳을 채운다. 이제 성인이 된 후미는 그때를 떠올리며, 어머니의 그 모습을 회고하며, 자신을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후미의 말에는 분노가 깔려 있다.

그것은 책임지지 않는 부모(세대)를 향한 분노다. 

 

ⓒ 왓챠

사라사에게도 부모 문제가 있다. 사라사의 아버지는 어릴 적에 병으로 타계하였고, 어머니는 사라사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 버렸다. 어머니가 재혼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의 선택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사라사를 버리고 갔다는 사실만은 명백하다. 10살짜리 소녀는 이모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눈치를 보며 살던 사라사가 끝내 가출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모의 중학생 아들 때문이었다.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이모의 아들은 어린 사라사의 방을 찾아온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사라사는 가출해 버린다.

   

책임지지 않는 부모 세대는 아이들을 유기해 둔 셈이 되었고, 몸은 성인이 되었어도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것 속에서 살아가거나 여전히 누군가에게 버려질까 두려운 채로 살아간다. 그 가운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라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믿음과 신뢰다. 사라사가 이것을 발견한 것은 부모 세대도 아니고 현재의 연인도 아닌, 사건으로 얽혀진 '후미'를 통해서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를 통해 <유랑의 달>은 사라사를 버려둔 부모나 사라사가 말할 수 없었던 이모(혹은 이모의 아들)보다 소아성애자인 후미가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질문한다. 하지만 은폐된 개인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세간에 드러나 있는 후미만을 손가락질할 뿐이다. 

여기에 덧붙여진 흥미로운 묘사 중 하나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씁쓸한 묘사다. 후미가 다시 경찰에 소환된 이유는 8살 소녀 리카(마쓰다 미오) 때문이었다. 리카의 어머니이며, 사라사의 직장 동료인 카나코는 미혼모로 등장한다. 그런데 카나카는 남자와 여행을 가기 위해 리카를 잠시 맡겨둔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리카는 사라사의 집과 이웃인 후미의 집을 오가며 돌봄을 받는다. 경찰은 후미의 전력 때문에 이를 문제 삼는다.

<유랑의 달>은 과거의 부모 세대뿐만 아니라 현재의 부모 세대도 다르지 않음을 묘사하면서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현재에도 문제적 인간으로 낙인찍히는 후미를 보여준다. 15년 전 그날의 사라사처럼 리카는 후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이 모습을 본 후미는 아이를 지키려고 발버둥 친다. 그것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지만 경찰이 보기에는 소아성애자 후미의 광기일 따름이다.

 

ⓒ 왓챠

사실과는 다른 진실의 얼굴이 있다. 어린 사라사가 집을 나와 후미의 집에 머무르게 된 것도, 리카가 후미와 지내게 된 것도 모두 부모들의 문제에 기인했지만, 후미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귀결된다. 어머니가 돌보지 않은 탓에 이모 집으로 가야 했고, 카나코가 오지 않는 탓에 리카가 맡겨졌지만, 소아성애자 후미라는 단 하나의 '사실'만이 중시된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2010년 이후 여러 원작 소설을 영화로 옮긴 이상일 감독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하다. <악인>(2010)의 주인공은 분명한 살인자이지만 어째서 그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의 과정은 진실의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으로 이어진다. 세 유형의 그룹이 등장하는 <분노>(2017)는 누가 연쇄살인마인지를 추적하며 전개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해와 편견은 결코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이상일의 작품은 누가 살인마인가, 그는 소아성애자인가 하는 사실 확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이면으로 들어가 진실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한다.

<악인>, <분노>, <유랑의 달>은 불편한 소재를 끌어온 만큼 편안하게 관람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관객을 궁지로 몰아넣고 범인을 찾거나 탐구하는 미끼를 던지는 가운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보편성을 던진다. <악인>에서 살인마와 함께 도피 행각을 벌이게 된 여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분노>에서는 살인마와 친분을 쌓게 된 소년을 통해, <유랑의 달>에서 소아성애자 후미와 재회하는 사라사를 통해 문제적 인간보다 더 문제적인 세상의 허위의식을 드러내고, 나약하고 위선적인 현대인의 얼굴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얼굴이기도 하다. 

 

폭력보다 더 폭력적인

사라사가 료에게 던지는 반복적인 대사 중의 하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불쌍한 애가 아니야"라는 항변과 이해의 요구다. 연인 료뿐만 아니라 사라사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이다. 사라사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을 해도, 힘들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것 만을 보고, 자신이 하려고 하는 말만 한다. 

사라사에게 가해지는 여러 폭력들이 있지만, 그녀의 정체성을 둘러쌓고 가장 집요하게 반복되는 것은 언어적 폭력이다. 그것은 친밀한 관계뿐만이 아니라 직장의 관계자들, 황색저널의 주간지, SNS, 경찰에 이르기까지 공적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어쩌면 언어의 폭력은 이모의 중학생 아들이 방에 들어오는 직접적인 폭력과 연인 료가 행하는 데이트 폭력만큼이나 끔찍할 뿐만 아니라 더욱 집요하고 인격 파괴적이다. 폭력은 상호성을 단절시키고, 일방향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양상을 띤다. 그런데 언어적 폭력은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친근한 얼굴을 하고 다가온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다.

료는 사라사에게 "너답지 않아."라고 말한다. 상대가 어떻게 나다운 것을 알 수 있을까? 실상 료가 말하는 나다움은 자신에 의해 규정된 사라사일 뿐이다. 사라사의 고통과 성장은 이러한 편견, 위로를 가장한 언어로부터 달아나는 데 있다. 자신을 피해자이든, 희생자이든, 그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15년 전의 세계에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사라사는 이미 변해 있고, 성장해 있음에도, 사람들은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만을 보고 말한다. 

후미와 사라사 사이에 놓인 15년은 이러한 일들의 반복이었다. 그리하여 사라사의 각성은 과거와 또다시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15년 전 집을 나온 사라사에게 "갈래?"라고 말했던 후미는 료를 피해 카페로 찾아온 사라사에게도 동일하게 말한다. "갈래?" 그것은 유혹의 언어가 아니라, 사라사를 존중하는 말이다. 15년 전 뉴스에서 사라사의 실종 사건이 다뤄질 때 후미는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말한다. 후미는 반복적으로 이 대사를 날린다. "원하는 만큼 여기 있어도 돼"  연인 료가 던지는 떠나지 말라는 말과는 달리 후미는 항상 사라사의 생각을 묻는다.

<유랑의 달>은 15년 전의 만남을 반복하는 사라사를 통해 다른 선택을 하는 사라사를 보여준다. 그것은 후미와의 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선택을 비로소 선택하는 성인이 된 사라사의 결단으로 이어진다.  

 

ⓒ 왓챠

사라사의 회상에서 가장 중요한 반복 중의 하나가 호수 장면이다. 두 사람에게 경찰이 다가온다. 10살의 사라사는 후미에게 도망치라고 말하지만 후미는 달아나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손을 꽉 잡는다. 그는 도망친 부모 세대와 달리 손을 잡으려고 한다. "사라사는 사라사만의 것이야. 아무도 마음대로 하게 두지마." 직접적으로는 이모의 중학생 아들을 염두해 두고 한 말이지만 실상 사라사 인생 전체의 화두가 된다.

사라사의 성장은 자신의 것을 자신이 선택할 때 비로소 실천된다. 그것을 끄집어내기까지, 세상의 변하지 않는 시선과 마주하기까지 15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후미와의 재회가 요청되었다. 15년 전의 자신과 다시 마주하였을 때 사라사는 비로소 자라기 시작한 셈이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의 모습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유일한 인물은 8살 짜리 소녀 리카다. 그는 후미의 집 앞 우편함에 소아성애자임라는 것을 조롱하는 전단지를 보고는 '소아성애자'(일본어로는 로리콘)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후미는 그 뜻을 정확히 설명한다. 그러자 리카는 후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후미는 성인인 사라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지금 후미가 함께 하고자 하는 인물은 '성인이 된 사라사'이다. 그럼에도 리카를 제외한 세상 사람들은 두 사람을 과거 속에서만 바라본다. 어쩌면 인간 사회에서 가장 강렬한 폭력은 물리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을 넘어서는 편견의 폭력, 상대의 변화를 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대하는 인식의 폭력일지도 모른다.

<유량의 달>은 이 점을 반복적으로 건드린다. 좀 집요하고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묘사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이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미묘한 것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낙인찍힌 자들의 낙원

<유랑의 달>의 위기와 절정은 료의 자해 소동으로 사라사가 경찰에게 조사를 받고, 세상에 정체가 드러난 후미가 연인으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는 장면이다. 그런데 사라사를 조사하던 경찰은 료에 대한 것이 아니라 후미에 대한 것을 묻기 시작한다.

"리카와 있는 거 사에키 후미죠? 지금은 미나미라는 어머니 성을 쓰고 있죠."

"저는 료씨 건으로 여기에 있는 거 아닌가요?" 

"주간지는 참 천박하지요. 마치 당신이 리카를 짝지어 준 것 같잖아요.

조사가 끝났음에도 경찰은 사라사를 붙잡아 둔 채 후미를 데려오라고 지시한다.

"사에키 후미 데려와 줘. 얘기 좀 듣게. 여덟 살짜리 여자애도 같이 있으니 보호하고."

"아니, 잠깐만요! 후미는 아무 짓 안 했다고 했잖아요."

"공교롭게도 그 사에키 후미에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은 잘 알잖아요."

'낙인이 찍힌 인간'은 쉽사리 돌아갈 수가 없다. 주간지의 기사처럼 후미는 범죄자일 뿐이고, 사라사는 어린 소녀를 자신을 대신해 짝 지워준 이상한 인물로 묘사될 따름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후(후미에 대한 오해는 어느 정도 풀린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라사가 다시 후미의 집을 찾는다.

"나 때문에 후미가 상처받고 후미의 인생이 망가졌어. 하지만 그래도 후미를 떠나고 싶지 않은 내가 있어. 이기적이고 끔찍하다는 건 알지만 너무나 후미와 함께 있고 싶었어. 그때 호수에서 손을 잡아주던 거 기억해? 나는 그때의 그 감촉에 의지하며 살아왔어."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얽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고백처럼 던진 후 사라사는 뒤돌아선다. 떠나는 사라사를 향해 후미는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선다. 그것은 성적 위력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라지 못한 성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영원히 나만 어른이 될 수 없어. 사라사는 성장해서 어른이 됐는데 나는 틀려먹었어. 이런 내 장애 때문에 누구하고도 연결될 수 없어. 사라사가 가까이 있을수록 무서워졌어. 사라사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라사가 알았으면 했어. "

"응"

사라사는 다가가 헐벗은 후미를 끌어안는다. 자신의 가장 못난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연결되는 장면은, 비록 두 사람의 관계가 플라토닉 러브에 머무를지는 몰라도,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잠든 후미를 바라보면서 사라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데 15년 전 후미와 사라사가 밥을 먹던 중에 일어나는 장면이다. 후미는 사라사의 입술에 케첩이 묻었다고 알려준다. 어린 사라사가 닦아내지만 오히려 입 근처로 번져버린다. 후미가 티슈로 입술을 닦아주다가 손으로 소녀의 입술을 만진다.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해 가장 조심스러운 대목이었을 것이다. 과거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토록 과거의 사건을 단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쉽고, 이러한 탓인지 후미에 대한 사라사의 회상에는 성적인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리 섬세하게 연출한다고 할지라도 오해를 일으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시키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짐작된다.

하나는 영화를 마지막까지 본 관객들이 더 이상 두 사람의 과거를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고 두 사람의 조심스럽고 미묘한 끌림을 보여주는 순간의 묘사다. 어쩌면 두 사람은 일찌감치 서로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그것은 운명론적 묘사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염두는 후미가 제아무리 소아성애 행위를 저지른 적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가 지닌 성향을 감출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일 수 있다. 이것은 충분히 오해를 살 수도 있지만 후미의 자라지 못한 성기를 보여준 후이기에 그가 끌리는 순간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충 설명하는 대목이 될 수도 있다.

<유랑의 달>은 인간의 면모를 감추는 영화가 아니다. 어린 사라사의 입술을 만지는 장면은 불필요한 오해만을 살수도 있지만, 주인공 후미를 결코 영웅시 하지 않는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후미는 단순히 사라사의 구원자가 아니다. 그 또한 나약하고 유혹당하는 연약한 인간일 따름이다.

 

ⓒ 왓챠

<유랑의 달>이 다루는 두 인물의 관계는 아름다운 것만을 아름답게 끌어안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의 오욕이나 상처를 보듬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타인의 침을 불결하게 여기기 마련이지만(코로나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기꺼이 타액을 섞는다. 그것이 사랑의 놀라움이고, 사랑의 현실 그 자체다.

   

<유랑의 달>은 어쩌면 두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자세히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진실의 면모를 드러내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사랑의 형태와 인간의 억압과 폭력성을 드러낸다.

두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어른이 없음을 질타하는데 그치지 않고 서로의 타자성을 끌어안음으로써 성장할 때 비로소 맞이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의 모습이다. 더 이상 달의 모양은 중요하지 않다. 사라사의 마지막 말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고, 살아낼 뿐이다. '유랑의 달'은 변화되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의 형성되는 달의 모습을 가리키는 영화의 제목이다.

 

※ 추신

1.

개인적으로 이상일 감독을 처음으로 본 것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자갈치 시장에서였다. 1999년 <청>이라는 영화로 부산을 찾은 이상일 감독과 합석을 하게 된 경우였는데, 희미하게 나는 기억 중의 하나는 일본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하마에게 물리다』라는 작품을 갖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었다. 지금은 절판이 되었지만, 한때 겐자부로 전집이 '고려원'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청>은 꽤 자전적인 작품이기도 했는데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길이 때문에 '와이드 앵글' 부문에 초청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 시간 미만은 단편이라고 여긴 셈이다. 중요한 것은 조선인 학교에 다니는 주인공은 야구를 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주변의 친구들이 일본인과 사귀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보여준다.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그의 첫 작품부터 지속되는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회 한 점과 소주와 함께 겐자부로의 소설 제목을 일본 발음대로 '이뽀'(하마)라고 말하던 것이 인상에 남았다.

이후 극장에서 흥미롭게 본 이상일의 영화는 <식스티 나인>이었다. 지금은 덜 하지만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일본의 작가로 두 명의 무라카미가 꼽혔고, <식스티 나인>은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다. 다른 무라키마는 짐작하듯 하루키다. 아무려나 일본 고교를 배경으로 '짝퉁' 68혁명을 벌이며 바리케이트를 치고, 고다르 영화를 흉내 내는 장면들은 아마도 이상일 감독이 꿈꾸던 세계처럼 보였다. 하지만 <훌라걸스>(2006)는 아오이 유우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고, 메이저화된 이상일을 보여주었을지는 몰라도 그다지 흥미가 가지는 않았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도 영국에서 한참 만들어지는 2000년대의 탄광촌 영화들을 떠올리게 했다. 대처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브래스드 오프>(1996)이나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2000)와 같은 영화들 말이다. 물론 달드리의 영화는 단순한 탄광촌 영화는 아니라 여기에 위치시키는 것이 정확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식스티나인>에서 보여준 짝퉁 68혁명의 모양이 고스란히 이어져 당대의 유행을 일본으로 옮겨온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한 흐름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막부 시대로 가져와 리메이크한 <용서받지 못한 자>(2013)까지 이어진다.

 

<분노>(2017)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이상일 감독의 최근까지 이어지는 행보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되는 장르적 완성도를 지닌 작가들의 원작을 동반하면서다. 비교적 자전적인 성향이 깔려 있거나 재일교포 작가들의 원작을 선택하는 최양일 감독과는 달리 <악인>(2010), <분노>(2017)는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옮긴 것이다. 미유마 베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로도 꽤 많이 옮겨졌는데 사회파 추리소설은 추리와 미스테리 장르의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야기의 소재에 있어서는 사회적 문제를 반드시 끌어들인다. 작가에 따라 추리적 기법이나 구성에 더 기울어져 있거나 오히려 사회적 문제나 인간에 대한 탐구를 끌어들이는 데 집중하는 경우가 있는데 요시다 슈이치는 후자에 가깝다. <악인>이나 <분노>를 보고나면 주인공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강렬하게 기억나는 것은 연출의 특징도 있지만 원작이 지닌 인간의 복잡성에 대한 묘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201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이상일의 세계는 악인이 되거나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수용되기 어려운 인간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정상성에 대한 분노와 그것이 지닌 위선을 드러낸다. 나기라 유우의 동명 소설을 옮긴 <유랑의 달>의 경우도 연장선에 있다. 


2.

ⓒ 더숲 아트시네마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은 지난 1월 23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 [이상용의 씨네모어]를 토대로 작성됐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왓챠

유랑의 달 
Wandering
감독
이상일

 

출연
히로세 스즈
Hirose Suzu
마츠자카 토리Matsuzaka Tori
요코하마 류세이Yokohama Ryusei
타베 미카코Tabe Mikako
슈리Shuri
미우라 타카히로Miura Takahiro
시라토리 타마키Tamaki Shiratori

 

수입|배급 왓챠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51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3.01.18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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