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냉소 어린 힙스터 스펙터클
'바빌론' 냉소 어린 힙스터 스펙터클
  • 김경수
  • 승인 2023.02.0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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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를 향한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 나르시시즘"

"그는 '탕진'이라는 말의 의미를 순식간에 깨달았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 분명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바뀌어 버리는 것."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2』 中 「바빌론에 되돌아가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하창수 역, 현대문학

 

"1920년대 할리우드를 바탕으로 할리우드의 어둠과 불안을 한 데에 드러내고 싶다"는 '데이미언 셔젤'의 선언은 그야말로 야심만만했다. 그에게서 꿈의 공장으로 불리는 '초기 할리우드'를 날것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스타 시스템, 사운드의 도입, 스튜디오 시스템 등 1920년대 중후반은 영화사의 빅뱅과도 같던 시기다. 영화 문법이 차츰 자리를 잡고 제7의 예술로 부상한 것도 이즈음이다.

 

ⓒ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1954)

영원 회귀하는 '1920년대 할리우드'

1920년대 할리우드는 진즉에 여러 차례 소환되었다.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1950), 진 켈리의 <사랑은 비를 타고>(1954)부터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아티스트>(2011) 등은 유성영화가 도래한 패러다임의 전환기를 재조명해서 시네마의 의의를 계속해 질문했다.

특히나, <선셋 대로>와 <사랑은 비를 타고>는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는 물론, TV의 등장으로 인한 기술적 위기,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등장으로 인한 미학적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 탄생했다. 두 영화는 1920년대 중후반 토키 영화의 탄생으로 영화사 뒤편으로 숱한 사람이 사라졌을지언정 스튜디오 시스템이 생존했듯이 영화가 계속 대중에게 꿈의 공장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환상을 드러낸다.

<선셋 대로>에서 "작아진 것은 화면이야!"라고 외치는 노마의 슬픈 표정, 극에서는 이미 죽어있지만 스스로 3인칭으로 지칭하며 나레이터로 개입하는 조의 비극적 운명은 무성영화의 죽음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을 드러낸다. 한편 <사랑은 비를 타고>는 <재즈 싱어>(1927)가 개봉하고 막 스튜디오에서 유성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제작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배우가 끝내 어떻게든 (실제 영화제목과 동일한)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영화를 만들고 간판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끝난다.

영화가 위기를 마주할 때마다 1920년대를 호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고, 2020년대에 <바빌론>이 등장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8) ⓒ 소니픽처스코리아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시네마가 위기에 처했다'는 자기반영성을 드러내는 영화가 등장했다. 기술적으로는 OTT가 등장했으며, 사회·경제적으로는 COVID-19가 유행했다. 미학적으로는 MCU를 기반으로 하는 디즈니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이끄는 주축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중첩되는 가운데 마틴 스콜세지가 MCU가 시네마가 아니라 말한 것은 여태껏 시네마에 대한 찬반양론이 이어지게 한 시발점이었다. 그는 특히나 미학적인 위기를 문제로 삼았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공동창작을 중심으로 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작가의 개성이 사라지고, 중소규모 영화가 더는 힘을 발하지 못하는 상황을 비판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8)가 로만 폴란스키와 마틴 스콜세지 등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면서, 미국 영화의 두 번째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뉴할리우드 시네마가 탄생한 시기를 영화화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폴란스키 일가에 생긴 참사를 다루지만, 역사를 있는 그대로 다룬다기보다 상상력을 동원해 대체 역사를 만들어낸다. 스턴트맨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가 우연히 샤론 테이트를 지키는 플롯은 <사랑은 비를 타고>의 엔딩을 반복한다. 할리우드를 의인화하면서도 커튼 뒤의 대역이 할리우드를 수호한다는 데에서 더욱 그러하다. 

<바빌론>을 둘러싼 정보의 파편과 여러 맥락으로 지레짐작해 보았을 때, 이 영화도 시네마의 위기를 어떻게든 봉합하려는 영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할리우드의 어둠과 불안을 날것 그대로 비추겠다는 감독의 선언을 보고는 예상과는 다른 영화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조안 크로포드, 존 질버트, 알리스 기 블라셰 등 1920년대 인물을 모티프로 하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외신을 접하고는 기대했다. 더욱이 이 영화에 대한 구상을 오래전에 했지만, 2020년 즈음부터 촬영을 시작한 것도 흥미로웠다. 정확히 백 년의 시차가 생기는 것을 의도하고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 보여서다.

 

21세기의 <부기나이트>인가?

<바빌론>은 할리우드를 떠도는 이들의 이야기다.

가난한 가정환경을 딛고서 스타 배우가 되고자 하는 넬리(마고 로비)와 멕시코 이민자 2세로 시네필이지만 영화광인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는 배우이면서 제작자인 영화계의 거물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오기로 한 키노스코프사의 파티에 어떻게든 참여하려 애쓴다. 속된 말로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고자 하는 심정이다. 넬리는 신분을 속이고 매니 토레스는 파티에서 서빙하는 아르바이트로 마약과 섹스로 범벅된 광란의 파티 한가운데에 온몸을 맡긴다. 거기에는 (듀크 엘링턴을 연상하게 하는) 재즈 연주자로 활동하는 시드니 팔머(조반 아데포), 댄서인 레이디 페이 주(리 준 리)와 같이 할리우드를 방황하는 이들도 있다.

매니는 넬리와 코카인을 같이 흡입하면서 만난다. 찰나의 시간 동안 매니는 넬리에게 반해서 쭉 그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파티를 계기로 매니는 잭 콘래드의 매니저로, 넬리는 대역배우로 우연히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 둘은 기지를 발휘해서 거기서 스타로 단번에 부상하지만, 토키 영화(talkie)가 탄생하고 무성영화의 위기가 그 둘 앞에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매니는 키노스코프사의 영화 제작자로, 넬리는 배우로 각기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친다. 매니는 토키 영화의 탄생과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서 은퇴 위기에 처한 넬리를 스튜디오 전속 배우로 고용하고 변신을 꾀하지만 실패한다.

그러던 와중에 잭 콘래드의 유성 영화가 실패하고, 잭 콘래드는 자살한다. 매니는 넬리의 도박 빚을 탕감하려다 마피아와 연루되고 멕시코로 도피하기로 한다. 넬리는 그제야 매니가 오래도록 자신을 짝사랑한 것을 알아차렸으나 사랑의 도피에 실패하고 어둠 너머로 사라져 죽는다. 매니는 25년이 지난 후인, 1952년 <사랑과 비를 타고>를 보고는 애상에 잠겨 눈물을 흘린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 롯데엔터테인먼트

<바빌론>은 줄곧 비교되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나이트>(1997)와는 다르게 깊이가 얕다.

<부기나이트>는 파편화되는 플롯으로 포르노 장르를 통해서 영화계를 톺아보고, 할리우드의 심층에 있는 미국의 남성성을 드러낸다. <바빌론>도 촬영 현장과 영화 사이의 괴리를 최대한으로 벌리는 데에 집중한다.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거나 하는 영화 현장에서의 묘사는 당연히도 사실에 기반한 것일 터다. 또한 토키 영화로 패러다임이 전환하는 시기에 전문 인력이 없어서 고난이 있는 것은 <사랑은 비를 타고>도 재현하는 장면이다. 20분 넘게 나오는 넬리의 첫 토키영화 촬영은 머리 위에 있는 마이크를 의식해 두 눈을 계속 거기에 두는 초기 토키 영화의 어색함을 그대로 고증한다.

셔젤은 영화 현장에서의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배경을 자세히 드러내기보다는 유머러스하게 다룬다. 방울뱀 등 여러 에피소드는 이 영화를 천일야화처럼 느껴지게 하는 기지까지 느껴진다. 숱한 고난과 진흙탕 싸움 끝에 하나의 영화가 제작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중반까지는 <바빌론>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특히, 넬리와 매니, 잭 콘래드라는 세 인물의 서사를 교차편집하는 플롯 구성은 정교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다소 파편적인 서사를 이끄는 세 배우 마고 로비와 브래드 피트, 디에고 칼바의 연기력 앙상블은 가히 압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셔젤은 고고학에 요구되는 엄밀성을 배제하고 백 년 전 할리우드를 악마로 묘사하면서 그것을 성급하게 지금의 할리우드와 포개려 애쓴다. 스태프의 희생 등 타당한 것도 있으나, 매니가 시드니 팔머에게 흑인처럼 분장하라고 흑연을 바르게끔 하는 장면은 'PC(Political Correctness)가 디즈니를 망쳤다'는 인터넷 밈과 유사하고, 제법 유치하기까지 하다. 또한 영화와 음악 둘 다에서 <라라랜드>(2016)의 자가복제에 그치는 시퀀스도 곳곳에 있다. 특히나 중반부의 파티 시퀀스는 <라라랜드>의 「Someone in the crowd」 시퀀스와 비스름하다는 인상을 준다. 완성도로는 범작으로 칠 수 있는 편인 이 영화에 선뜻 마음을 줄 수 없는 것은 이처럼 이 영화가 드러내는 윤리 때문이다.

 

 

연예계 찌라시와 『위대한 개츠비』는 동전의 양면

장장 세 시간이 넘는 <바빌론>은 오프닝부터 1920년대를 둘러싼 관객의 판타지를 깨뜨리는 데에 주목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매니는 파티에 코끼리를 운반하다가 코끼리 똥으로 뒤범벅된다. 다소 심술궂은 농담을 보인 뒤에야 등장하는 오프닝 타이틀은, <라라랜드>를 잊어달라는 선언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윽고 장차 20분에 걸쳐서 나오는 파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미성년자가 성접대로 동원되고, 모든 이가 마약을 피우고 난교가 계속된다. 가히 소돔과 고모라라고 할 수 있는 파티 시퀀스는 파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유려한 카메라, 황금으로 치장된 미장센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저스틴 허위츠의 재즈는 한없이 자극적이면서도 스펙터클을 완성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호불호를 떠나 이 감독의 연출력이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화려하면서도 '속은 텅 비어 있는' 이 파티의 정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 또한 거기서 비롯하는 영화 전체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유는 1920년대 미국 문학의 흐름인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감수성이 깃들어 있어서다. 잃어버린 세대에 속하는 두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는 세계 1차 대전을 접한 세대다. 둘의 소설에 담긴 '허무주의'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은 세계 2차 대전 직전에 대공황이 닥치기 직전, 과거의 전쟁으로 인해서 수출 특수로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가로 부상했다. 전쟁에다가 청춘을 허비한 젊은이는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거기서 생긴 우울감을 해소하고자 성공에 집착하는 속물이 된다. 넬리와 재회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흥행에 집착하는 영화 제작자로 성장하는 매니의 서사는 데이지와 재회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개츠비의 서사와 비슷하다.

또한, 데이지와의 사랑이 실패하고 죽는 순간에 다다라서야 초록색 불빛으로 드러나는 순수성을 회상하는 개츠비의 최후는 <라라랜드>와 <바빌론>의 엔딩과 유사하다. <라라랜드>는 이미 각자의 영역에서 성장한 미아와 세바스찬 둘 다 서로의 눈을 마주함으로 순수를 복원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둘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직시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인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 속으로 떠밀리고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할 것이다."(『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정회성 역, 책세상, p.271)라는 문장과 <라라랜드>의 엔딩 시퀀스의 정서는 이처럼 비슷하다.

바즈 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2013)에 닉 캐러웨이를 연기했던 토비 맥과이어를 조연으로 캐스팅한 것도 <바빌론>이 『위대한 개츠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단서일 수 있다. 특히나 이 '바빌론'이라는 제목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성경에서 무성 언어에서 유성 언어로 탄생하는 과정으로 인해서 인간이 갈라서고 싸우기 시작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의미가 가장 크다. 한편, 바빌론은 스콧 피츠제럴드 단편에서 전쟁으로 쇠퇴한 파리를 지칭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셔젤은 <바빌론>에서 아예 잃어버린 세대로 되돌아간다. 1920년대를 둘러싼 온갖 고증으로 정신적 쇠퇴와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을 찍고자 했을 것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하지만 <바빌론>은 『위대한 개츠비』의 개성 있는 재해석으로 보일 수도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도 그 수준에 다다르지는 못한다. 이 영화에서의 환락과 퇴폐는 『위대한 개츠비』와는 다르게 캐릭터의 정서에 깊숙이 침투한다기보다 위악적인 과장으로도 보인다. 할리우드의 어둠이라 불리는 데에 집착한 나머지 "연예계는 동물의 왕국이다"라는 찌라시로 도는 통속성을 드러내는 데에 그친다. 이는 그만큼이나 셔젤이 재현하는 할리우드의 어둠, 거기에서 드러나는 야만이 피상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잭 콘래드를 통해서 셔젤은 '영화를 본디 세속적인 것'으로 이야기하고, '성스러운 것인 예술'과는 구분하려고 한다. 1920년대의 할리우드가 연극이나 소설로부터 구분되어 있다는 인식은 다소 편협하다. 서부극과 스크루블 코미디라는 영화만의 고유한 장르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영화는 다른 장르를 흡수하면서 성장했다. 또 당대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것이 곧장 할리우드에서 흥행하기도 했으며, 피츠제럴드 등의 소설가가 할리우드에 진입하기도 했다. 이는 문학을 전공했으나 영화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극 속 한 인물의 입으로도 드러난다.

   

영화는 대중예술이고 더러운 장르라는 것을 위악적으로 옹호하는 감독의 욕망은 '냉소 어린 힙스터'를 보는 듯하다.

이는 전도된 유미주의로도 보인다. 유미주의가 엘리트가 예술을 사회문화적인 맥락에서 벗어나는 초월적인 대상으로 숭배한다면, 셔젤의 힙스터리즘은 예술이 초월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숭배한다.

영화가 난교 파티, 지하 동굴로 드러나는 암흑가, 온갖 로비와 이미지메이킹 등 비즈니스에서 탄생하는 것을 위악적으로 강조하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위악적으로 과장을 하는 셈이다. 대체로 감독이 나열하는 할리우드의 어둠은 찌라시 수준에 그치지만, 그래야만 제 주장에 근거가 생기기에 감독은 더럽다고 여기는 것을 한껏 부풀려 연출한다. 마피아 두목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의 소굴은 이를 잘 드러낸다. 장애인과 기형아를 동원한 1930년대의 프릭쇼, 후대의 포르노와 스너프 필름 등을 앞세운 이 시퀀스는 영화에서 유기적인 에피소드로 보이지 않는다. 되려 영화 비즈니스의 세계가 이만큼이나 추하다는 과장으로 보인다.

세계를 냉소하면서 세계의 마지막 도피처가 영화라는 태도는 나르시시즘으로도 이어진다. 절망으로 가득한 세계를 냉소하고 싶은 마음을 견디기는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냉소가 날것 그대로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거리를 두고는 울타리를 치려는 방어기제에서 비롯해서다. <바빌론>은 잃어버린 세대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냉소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캐릭터의 감정을 포착하기보다는 관객을 벼랑 끝으로만 몰고 가는 데에만 혈안이 올라 있다. 이는 고고학적인 태도라기보다 과거를 야만시하는 계몽주의의 태도에 가깝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에 대한 헌사가 아니라 사탄 숭배

<바빌론>은 『위대한 개츠비』가 되고자 했으나, 그토록 개츠비가 마주하고자 하는 순수를 모든 관객에게 설득하지는 못한다. 사실 넬리가 어둠 너머로 사라지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더없이 아름답게 끝났을 것이다.

감독은 여기서 그만두지 않고 한 차례 더 나아간다. 매니가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던 중에 급작스레 영화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영화를 몽타주하는 것을 보는 장면이다. 이 시퀀스는 영화를 보는 1952년의 매니가 아닌 2023년의 관객을 겨냥한다. 영화를 둘러싸는 제4의 벽이 무너지고, <에반게리온> TVA 시리즈를 연상하게끔 하는 정신분열적인 몽타주가 등장한다. 활동사진부터 <아바타>(2012)까지 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숱한 영화를 나열하는 엔딩 시퀀스는 미디어아트에 가까울 정도로 난삽하다. 마치 <위플래쉬>의 엔딩 시퀀스에서의 드럼을 치는 속도와 비스름한 속도로 컷이 넘어간다.

이 영화는 자신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영화가 앞으로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엔딩을 반복한다. 기나긴 시간에 걸쳐서 관객더러 시네마를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의도가 선명히 드러났다. 이때 '감독이 스스로 시네마의 성자란 자의식과잉에 빠져 있구나'가 느껴졌다. 시네마와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애상감, 그리고 그들의 노고로부터 나오는 숭고함은 여기에 없다. 이는 영화사에 대한 헌사로 이어지기보다 엉망진창인 영화 제작 환경에서도 시네마를 사랑하는 자신을 찬양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이어진다.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바빌론>은 영화를 사탄으로 숭배하고 있다. 똥과 오줌, 술, 마약, 찌라시, 난교 등을 통해서만 영화라는 신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어서다. 그는 지리멸렬한 리얼리티를 나열하면서 그것만이 진짜로 여기는 초기 홍상수를 반복하고 있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롯데엔터테인먼트

바빌론
Babylon
감독
데이미언 셔젤
Damien Chazelle

 

출연
브래드 피트Brad Pitt
마고 로비Margot Robbie
디에고 칼바Diego Calva
진 스마트Jean Smart
조반 아데포Jovan Adepo
리 준 리Li Jun Li
토비 맥과이어Tobey Maguire

 

수입|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89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3.02.04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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