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불우한 처지에도 간절함이 필요하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불우한 처지에도 간절함이 필요하다…
  • 변해빈
  • 승인 2023.02.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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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불행은 공감을 사고, 어떤 불행은 피로를 유발한다. 불행에 허덕이는 저 인간의 삶이 어떤 때는 내 일상과 밀착되고, 다른 때는 한낱 투정처럼 느껴진다.

그 차이가 단순히 불행 자체의 강도에 의한 문제는 아닐 테다. 영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에는 그런 각자의 불행을 감당하는 데 지친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그러니 이 영화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느 과거에서부터 응축된 인물들의 삶을 논하고 있다. 관객이야 당연지사고 영화도 극의 바깥을 완연히 알 수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현재를 그려낸다.

그렇다고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속 인물들의 불행을 알아차리고 우리의 일상에 대입하기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꿈을 포기하는 것, 연쇄적으로 딸려 오는 비운, 누군가를 상실한 경험, 말처럼 쉽지 않은 사람 사는 일, 전부 겪어보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괴롭고 슬픈 사연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또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각자의 불행을 아는 또 다른 인간이다. 정답지처럼 반짝이진 않아도, 외면하고 있을 뿐 실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

 

ⓒ 디오시네마
ⓒ 디오시네마

나태함에 빠진 불행의 소국

그런데 간혹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을 심지어 일일이 설명해내고 있음에도 피로만 누적시키는 영화가 있다. '그건 덜어내야 하는 것'과 '설명해야 하는 것'을 반대로 착각했다는 뜻일 테다.

사실상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인물들의 감정이 서사적 짜임새가 형성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는 두 가지 엉뚱한 태도를 보인다. 먼저, 저 인간 군상들이 지닌 숱한 사연 중 관객이 살면서 마주했던 별의별 불행의 종류가 하나쯤은 있을 거란 거만한 태도. 여기에는 상대와 교감하고 공감할 여유 없이, 단순한 방식으로 그들의 삶의 고통을 명명하는 나태함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불행에 대해 당신은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다는 방어기제를 갖춘 채 영화는 인물들의 삶과 그 속의 불행에 구체적으로 뛰어들기보다는 불행의 전시하기에 급급해하고 있다.

예컨대 이 영화는 한국인 가족과 일본인 가족의 우연한 동행을 그리면서 인물들 사이 정서적인 작용을 영화 바깥의 한일관계(날 선 적대감을 화해와 화합의 이해관계로 전환하는 패러다임)에서 끌어왔다. 관련 인터넷 기사 타이틀을 카메라에 노골적으로 들어 보이기도, 후엔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들이 한 편이 되어 곤경을 피하게도 되지만, 불충분한 소통의 자리에 급작스러운 감정선이 틈입하면서 오해와 이해의 개연성을 파괴해버린다.

 

ⓒ 디오시네마

소설을 쓰는 토오루(이케마츠 소스케)는 영화 속에서 문장 하나("그 슬퍼 보이는 눈동자,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은")를 완성하는 데에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그는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우연히 보았던 한 여자 솔(최희서)의 눈동자를 떠올리려 애쓴다. 토오루는 "슬퍼 보이"는 것 같지만 미처 알지 못하므로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판단을 유예한다. 그는 섬세한 관찰자이기도, 신중한 탐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질은 오직 소설을 쓰는 때에만 선택적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그는 주유소 직원이 베푸는 친절을 사기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이 토오루네 가족과 솔 네 가족의 화합이라고 오해한다. 토오루를 이중인격자로 설정하지 않은 이상, 그건 솔에 대한 단순한 호감일 때 설득력을 얻는다. 또한 비참한 상대를 마주하고 곤경에 휩싸이다 끝내는 눈물을 흘리는 상황이 주는 인물의 전시된 고통은, 화해와 이해라는 이후의 결말을 위해 피동적으로 배치되었을 뿐이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사람과 사람 사이 오해와 이해의 관계를 일률적으로 이해하고, 손쉬운 방식으로 오해되는 과정으로 채워질 뿐이다. 모두의 이해가 아니라, 모두가 오해해도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면 그것만으로 상관없다는 쪽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한일관계를 둘러싼 패러다임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디오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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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언제고 영화에 대한 비판이 감독만을 향해 있어야 할까.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한국으로 온 일본인 가족과 한국인 가족이 강릉으로 가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런데 영화의 로케이션은 서사적인 인과성과 의미망에 귀속되지 못한다. 인적이 드문 것은 물론이고, 촬영 허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운, 심지어 누가봐도 촬영이 가능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 보이지 않는 이 영화의 사연이 관객의 눈에 선하게 보인다. 가령 토로우가 솔의 눈을 들여다보는 그 중요한 순간은 어디에나 있는 편의점 앞에서 흐지부지 이루어지는 게 맞을까. 협소한 공간의 한계 탓에 배우들의 얼굴은 불필요하게 클로즈업 화면 안으로 갇히며, 그들이 쏟아내는 감정은 과잉된 나머지 한낱 투정으로 여겨진다.

 

단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장면도 있다. 솔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불행한 삶의 구원자, 곧 천사가 등장하던 때다. 솔을 연기한 배우는 주변의 파도 소리에 묻히는 목소리를 살려내기 위해 힘겹게 소리친다. 현장 녹음을 위한 기본적인 음향 장비와 주변 통제, 후시 녹음에 대한 고려가 안 되었단 뜻이다. 덕분에 배우들의 연기는 감정을 묘사하기보다 억지로 호소하는 격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그녀가 마주 본 천사의 형상은 난처하다. 허술한 분장과 배우의 포즈는 물론이고, 곧 이어진 배우의 대사(그는 천사의 모습을 멋대로 규정하면 안 된다며 자책하고 각성한다)는 관객의 냉소를 예상한 변명처럼 들린다.

   

추측하건대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은 그런 허술한 천사의 형상으로 삶을 구원해줄 존재는 당신 곁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나태함에 빠진 불행의 소국에는 진심을 전할 여력 또한 남아있지 않다.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을 보며 다시금 깨닫는 건, 타인의 인생과 그 안의 불행을 이해하기란 우리가 평생 뉘우치고 깨우쳐도 부족한 일이라는 것, 딱 그뿐이다. 어쩌면 엉뚱한 모습으로 이 지상에 내려온 천사의 난감한 등장도, '그런 조심성 안에서 방황하다, 덜어내야 할 거만함과 방어기제를 움켜쥐고 설명해야 할 근원적인 불행에 대한 고민과 인간의 본성을 외면하고 말았던 게 아닐까' 하고 영화와 애써 교감하며 또 영화를 향해 미약한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또 하나, 자기 불행에 지레 겁을 먹으면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듯,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면 역으로 무례를 범하고 만다. 불우한 처지에도 간절함은 필요하다. 불행도 하나의 삶이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지금도 산다. 그 안에 들어갈 자신이 없으면 우리도 영화를 믿을 수 없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디오시네마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The Asian Angel
감독
이시이 유야
Ishii Yuya

 

출연
이케마츠 소스케
최희서
오다기리 죠
김민재
김예은

 

제작|배급 디오시네마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8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1.10.28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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