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영화 편지 김대환#2] '초행' 시대와 함께 걷겠다는 용기
[한국독립영화 편지 김대환#2] '초행' 시대와 함께 걷겠다는 용기
  • 김민세
  • 승인 2023.03.1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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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떨림이 희망의 이미지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며"
ⓒ 인디플러그

김대환의 영화가 시작되는 중심에는 '말'(대사)이 있다.

<철원기행>에서 갑작스럽게 이혼을 선언하는 아버지의 말로 영화가 시작된다면, <초행>을 시작하는 것은 한밤중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연인 수현에게 생리가 멈췄다고 조심스레 고백하는 지영의 말이다. 여기서 <철원기행>의 아버지의 말이 밖으로 향하는 한탄이자 용기였다면, <초행>의 지영의 말은 안에서 맴도는 고민이자 망설임이다.

전작에 이어 <초행>은 말이 지니고 있는 의미의 무게를 정확히 아카이브하며 동시대의 현실에 더 가까워져 간다. 이 말의 무게는 결혼 시기를 앞두고 있지만 각자 자리를 잡지 못한 지영과 수현의 상황과 맞물리며 어디를 가든지 그들의 삶에 깊이 박혀있다. 그리고 주변인에 의해 끊임없이 들춰지고 위협받을 인장이 된다. 그럼에도 그 말은 끝내 대답되지 않는, 그저 지영과 수현의 두 사람 안에서 계속해서 진동하는 질문으로 남는다.

 

ⓒ 인디플러그
ⓒ 인디플러그

김대환은 시나리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행>의 장면 대부분을 배우들이 대사를 모두 암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연기하도록 연출했다. 이것을 단순히 현실에 가까워지기 위한 리얼리즘의 방법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초행>에는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태도'와 '삐걱대는 리듬'이 있다. 이를테면 수현과 그네를 타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지영의 아버지가 난데없이 넘어져 옷이 찢어질 때, 수현의 부모가 사는 삼척으로 향하는 차 앞에 갑자기 새 무리가 날아 덮칠 때,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불현듯 영화에 스며들어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를 멈추게 할 때, 김대환은 왜 그것을 내버려 두었을까. 단순히 지영과 수현을 둘러싼 불안함의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우연이었기에 그 필요성을 느꼈을 수도 있고, 그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엔 이상할 만큼 '스산한 포기의 심정'이 있다. 어떻게 보든 간에 그 순간에는 영화를 오롯이 지탱하고 있던 '연기'라는 약속이 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대부분 원씬 원컷으로 촬영된 <초행>의 장면들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들이 아닌 무엇보다 배우의 '말'(들)이다. 어떠한 이미지보다는 연기라는 약속의 범위 안에서 즉흥적으로 오가는 말이 진실임을 믿기에 카메라는 끊김 없이 이들의 말을 응시한다. 이때 말이 시작된다는 것은 씬이 시작된다는 것이 되고, 말이 끝난다는 것은 씬이 끝난다는 것이 된다. 그 시간 안에서 말이 잠깐 멈추어지더라도, 그 리듬이 변화하더라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동안에 말은 연기라는 약속 안에서 영화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배우가 말한다는 것은 연기를 이어나가겠다는 주고받음의 신호이다.

   

그런데 그 우연의 순간에 말이 멈추거나 반응이 튀어나온다.

이때의 반응은 그 전까지의 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의 것이다. 넘어진 지영의 아버지가 몸을 털고 일어나면서 찢어진 옷을 만지작 거릴 때, 갑자기 튀어나온 새 무리를 본 지영과 수현이 놀라 소리를 지를 때, '이 반응은 영화 속의 인물의 것일까, 영화 밖의 배우의 것일까' 이 순간이 아카이브 하는 것은 배우의 말이 현실과 부딪혀 가로막히고 마는 어떠한 실패의 순간이다. 이것은 오히려 <초행>의 리얼리즘은 '어느 현실의 순간 앞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솔직한 고백 같은 것이다. 가령 대통령 퇴진 시위가 한창인 지하철역의 인파 사이를 뚫는 수현의 말없는 걸음 또한 그 어떤 즉흥도 현실 앞에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다는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

 

ⓒ 인디플러그

그러나 이 실패가 <초행>이라는 영화의 실패를 의미하진 않는다.

김대환은 실패의 연속 끝에 배우와 현실이 만나서 공명하는 어떠한 지점에 도달한다. 그 둘은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한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첫째'는 삼척의 바다 위로 일출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먼저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의 단절이다. 카메라가 차 뒷좌석에 있을 경우, 차 안에서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던 지영과 수현은 이 장면에서 유일하게 차의 안과 밖을 넘나 든다. 지영이 차 안에 홀로 앉아 있을 때, 수현이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말을 하며 차 유리창을 두드리고, 수현이 겨우 안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지영은 홀로 밖으로 나간다. 차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둘의 말은 제대로 오가지 않는다. 이때 소통의 역할을 상실한 이들의 말은 단지 일출을 마주하기 위한 시간을 흐르게 하기 위해,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 말들 사이에는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가 있다. 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천천히 해는 떠오르고 지영과 수현 모두 차 밖으로 나와 그 풍광을 바라본다. 예상치 못한 현실의 순간에 멈칫했던 배우들의 몸은 이제 약속처럼 등장하는 현실의 시간과 함께 하나의 영화 이미지가 된다.

이 장면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배우라는 허구가 현실과 발을 맞추는 '기다림의 태도'이다.

'둘째'는 지영과 수현이 촛불 시위의 행렬 사이로 거니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방향을 찾지 못하고 앞뒤를 바꿔가며 걷는 이들의 운동은 어찌 보면 양가의 가족들과 만나기 위해 인천과 삼척, 한국의 양쪽 끝을 오가던 지난 며칠 간의 운동의 반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이전의 운동에서는 볼 수 없던, 촛불 세대라는 현실의 거대한 맥락이 있다. 그리고 그 맥락이 현실의 구체로써 우리에게 달라붙었을 때, 허구의 몸과 현실의 맥락이 우리의 눈 안에서 마찰할 때, 그 순간에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망설이는 카메라가 견인하는 서스펜스가 있다. 그러므로 이 서스펜스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의 몸이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는 것, 방향을 상실한 채 시대 안을 맴돈다는 것은 현실과 함께 걷겠다는 믿음, 삶의 긍정, 그리고 용기이다. 그 걸음의 순간에서 고정되는 이미지는 이 반짝임의 순간을 정확히 아카이브 한다. 이때, 영화를 끝낼 수 있는 것은 배우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멈춤이 아니라, 이 시대와 영화의 태도를 아카이브 한 영화 이미지가 된다. 이 합일의 이미지만이 지영과 수현의 몸 안에서 수없이 울렸던 고민과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 인디플러그

<초행>은 망설임의 연속 끝에 이미지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확신의 순간으로 나아간다. 그 끝에는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걸음이 있다. 그리고 그 걸음이 영화 이미지 안에서 멈출 때, 망설임의 서스펜스는 마음 안의 미세한 떨림으로 다가온다. 그 떨림이 설렘일지 두려움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영화 안의 지영과 수현과 달리, 아직 그 걸음을 내가 살고 있는 땅 위에서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이 영화가 내게 준 떨림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시대 위에서 이루어질 때, 그제야 나는 이 영화에서 희망의 이미지를 보았다고 뒤늦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만 할 것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 인디플러그

초행
The First Lap
감독
김대환

 

출연
김새벽
조현철
기주봉
조경숙
정도원
문창길
길해연
류제승

 

제작 봄내필름
배급 인디플러그
제작연도 2017
상영시간 100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17.12.07

김민세
김민세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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