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zon Prime] '아르헨티나, 1985년' 민주적 몽타주
[Amazon Prime] '아르헨티나, 1985년' 민주적 몽타주
  • 이현동
  • 승인 2023.01.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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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힘보단 집단의 힘을 믿는 자들을 위한 메뉴얼"

국가란 거대한 부조리에 대응하는 영화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법정 영화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변호인>(2013)과 6.10 민주항쟁을 배경으로 유명 배우들을 동원하여 화제가 되었던 <1987>(2017)이다. 이 두 영화의 작법은 '부조리를 타파하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힘을 어떤 방식으로 맵핑할 수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재판 씬에서 보여주는 롱테이크 연기는 영화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강력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 반면에, 다소 산만해 보이지만 <1987>은 캐릭터의 조합의 힘을 끝까지 끌고 간 측면이 있다.

<아르헨티나, 1985년>은 이 두 가지 장점을 골고루 반영한 작품으로 보인다. 산티아고 미트레 감독은 전작 <7일간의 정상회담>(2017)에서 주연으로 기용한 배우 리카르도 다린을 다시금 소환하면서 캐릭터가 가진 힘을 구현해낸다. 그러나 여기서 그 힘은 <변호사>에서 송강호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송강호(혹은 그가 연기한 인물)가 홀로 극의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견인했다면, 리카르도는 그보다 팀적인 힘을 지지하며 팀원들과 협력한다. 그가 극 초반에 자신의 계획을 예고하는 "혼자 안 해, 팀을 꾸릴 거야. 함께 일할 사람이 있어"라는 인상적인 대사는 이를 충실하게 반영한다.

 

ⓒ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아르헨티나, 1985년>의 배경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군사 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 이후를 토대로 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검사 훌리오 스트라세라(리카르도 다린)는 약 3만 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납치한 비극적인 사건인 군부세력의 탄압에 관한 재판을 지휘한다. 이러한 공론화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서 포착하기에 가장 쉬운 이미지는, 실상 피해자들의 사연을 재구성한 플래시백(flash-back)일 것이다. 얼마나 잔혹하고 비극적인 일들이 발생했는지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방식만큼 편의적인 것은 없으니 말이다. 이것이 일정 부분 프로파간다로 인민의 정서를 정치적으로 유도하기 가장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지만,

<아르헨티나, 1985년>은 좀처럼 감정적인 접근을 하지 않는다.

국가의 위정자가 행사했던 위협과 부조리를 자극적인 이미지로 환원하지 않는 <아르헨티나, 1985년>은 사건의 진중함과는 별개로 '유머스러운 요소'를 지속적으로 삽입한다. 가령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무수히 받는 살해위협을 받는 가족들의 반응은, 두려움이 아닌 오히려 경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다. 그의 아내는 종일 살해 협박 전화를 받고, 남편에게 지겨워 죽겠다고 토로한다. 여기서 그녀의 어조는 두려움이 전혀 실려 있지 않다. 이는 이 영화가 디자인하고 있는 대표적인 톤이다.

또한, 후반부 약 8분 동안 이어지는 재판 시퀀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이미지가 아닌 '말의 힘'이다. 그때 훌리오는 팀원들과 함께 수집한 자료를 읽는 데에 주력할 뿐 그 안에서 감정을 담지 않는다. 이것은 이 영화가 축적해온' 팀워크의 힘'이자 '이야기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영화가 3만 명의 희생자를 양산한 이 사건에서 죽음을 이미지로 등장시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미지의 자극보다 '민주적인 방법으로 관객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민주화와 쇼트 배열

배심원들이 모여 아버지를 칼로 찌른 소년의 살인 혐의를 두고 유·무죄를 판결하기 위한 논쟁을 벌이는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1957)은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영화 중 하나다. 그 이유는 판결 과정도 그렇지만, 이미지를 배열하는 솜씨 또한 민주적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재판의 최후의 판결을 앞둔 12명의 배심원들이 투표를 하는 과정에 있어서 어느 한 인물도 배제하지 않고, 그들의 이미지를 한사람씩 배열해 나아간다. 

<12명의 성난 사람들>와 같은 동일한 형질을 <아르헨티나, 1985년>의 초반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훌리오는 비서관으로 일하는 한 여성에게 브루소가 전화가 오면 명령이니 끊으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훌리오는 "날 위해 일한다는 걸 기억해요"라고 말하는데, 그녀는 "아뇨, 전 정규직이에요, 절 해고하실 순 없어요"라고 응수한다. 이렇듯 영화는 인물의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꾸밈없이 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이는 프레임에 인물을 담는 방식에서도 상호적으로 연동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쇼트에 있어서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면, '플롯의 배열이 한 인물로 집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특징적으로 정면 숏(front-shot)이 등장하는 이미지에서 일종의 민주적인 경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사건의 예비 심문 장면에서 처음 자신을 소개하는 인물은 쿠데타로 군사정권을 일으켜 대통령이 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인데, 이 자는 '남미의 나치'라 불릴 정도로 인권 탄압을 저지른 악명 높은 인물이다. 이 자를 시작으로 각기 다른 인물들을 차례대로 소개하며,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정면 숏으로 그들을 비춘다.

또한, 함께 일할 동료를 뽑는 면접도 이와 마찬가지다. 번갈아가며 자신을 어필하는 면접자들 중 한 명도 탈락하지 않고, 함께 협업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민주적인 방식을 고수한다. 심지어 아카이브를 진열하는 방식도 그렇다. 조그마한 TV에서 인물은 정면으로 얼굴만 거의 보일 정도로 찍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민중의 호소는 영화의 파급력을 고조시키거나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훌리오의 아들은 또 어떠한가. 아들은 판사들이 모이는 자리를 미행하고, 그들의 인상착의와 분위기를 보고한다. 

마지막 장면뿐만 아니라 곳곳마다 등장하는 흥미로운 쇼트는 훌리오가 검사라는 직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원들과 함께 그 자리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의 궤적은 서로의 의견을 제시하고, 묻고, 보고하고, 문서가 전달되는 일련의 과정을 내포한다. 상호적으로 호응하는 이 과정에 있어 어느 누구도 외면받지 않는다.

 

ⓒ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아울러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민주주의가 계속되고 있다"라는 대사는<아르헨티나, 1985년>이 가진 태도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은연중에 정치적 요소를 대담하게 실행하는 영화는 불량한 구석이 느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긍정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건, '끝까지 영화의 방식을 변용하지 않으려는 뚝심'에 있다. 얼마나 관객이 역사적 사실에 공감하기 위해 있을지에 대한 내용도 주요하지만, 더 나아가 시대적 정신과 영화의 쇼트를 동일한 정신으로 배열하는 디테일은 이 영화가 가진 훌륭한 성취로 기록될 법하다. 결과적으로 이런 영화의 작품성은 역사를 얼마나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과정에서 유지되고 있는 감독의 태도가 얼마나 적절하게 빌드 업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르헨티나, 1985년>은 이를 충실하게 설계한 작품이다.

   

끝으로 질문을 하나 해보자면,

'왜 영화에서 그토록 TV를 통해 낡은 화질인 과거의 아카이브들과 모종의 이중 이미지가 마치 콜라주처럼 이질적인 모습으로 중첩되고 있는 것일까' '그뿐만 아니라 몇 번씩 라디오란 매체가 시대를 표현하는 디제시스 사운드로 시간과 공간을 음성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과거가 시뮬라크르로서 현재에 소환할 때 실제 아카이브들이 TV와 라디오를 통해 구현된 시대의 이미지는 영화라는 매체로 갱신됨을 선언한다. 예술이 되고 작품으로 현현하는 이 형식은 시대성 또한 민주적으로 구현하려 하는 것 같다. 이런 현재와 과거 사이의 연결이 미학적인 수사가 될 수 있는 건, '감독의 몽타주가 배열하고 있는 이미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된다.

영화에서 많은 피해자가 재판대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는 '진술의 이미지'가 가장 강렬한 순간으로 각인될 수 있었는 이유는 <아르헨티나, 1985년>이 무엇보다 말과 목소리의 힘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포로로 붙잡힌 여성이 눈을 가린 채 강제로 출산해야 했던 순간을 회고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말의 권능이 효력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순간이다. 감정이 폭발되는 순간에서도 영화의 플롯은 플래시백을 의도적으로 제외하거나 절제하고, 감정을 증폭시킬만한 도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계산하고 있다. 이 영화의 수사는 어떤 요행을 바라지 않고, 부동자세로 민주적인 영화가 무엇인지를 모색하고 있는 체계적인 영화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아르헨티나, 1985년
Argentina, 1985
감독
산티아고 미트레
Santiago Mitre

 

출연
리카도 다린
Ricardo Darin
페테르 란사니Peter Lanzani
카를로스 포르탈루피Carlos Portaluppi
노만 브리스키Norman Briski
헥토르 디아즈Hector Diaz
알레한드라 플레치네르Alejandra Flechner

 

제공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40분
등급 15세 관람가
공개 2022년 9월 29일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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