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전쟁과 코즈믹 호러는 한 끗 차이
[NETFLIX]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전쟁과 코즈믹 호러는 한 끗 차이
  • 김경수
  • 승인 2023.02.02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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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인간은 사물이자 기계라는 잔혹한 진실"
ⓒ 넷플릭스(NETFILX)

전쟁 영화의 윤리는 인간을 다루는 시선이 아니라 '무기가 다루는 시선'에서 드러난다.

그 이유는 전쟁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무기'이어서이다. 전장에서 인간은 무기를 운반하고 작동하는 매체에 불과하다. 전쟁이 가해자와 피해자 가리지 않고 전장에 머물렀던 모든 이에게 잔혹한 이유는, 그들이 주체를 박탈당하고 작전을 수행하는 체스말이자 무기로 움직인다는 경험에 의해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자 왕'이라 언급한 것도 비스름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이 소멸되는 전쟁터에는 무기의 성능과 그 크기에서 오는 스펙터클만이 남는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장면은 탱크의 첫 등장 장면이다. 전투가 한 차례 일어난 전장에는 앙상한 나무와 시체만이 남아 있으며, 짙은 안개가 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어둠 너머로 탱크의 실루엣이 등장한다. 탱크가 다가와 참호를 부수고 군인을 짓뭉개는 동안, 카메라는 인간의 눈높이보다 아래인 참호의 시점에서 탱크를 마주하고 있다. 탱크에 잇따라 부상병을 소각하려 다가오는 화염방사병을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저 기능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도 관객을 압도당하게 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인간이 전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영화다. 대신에 이 영화는 인간이 사물이자 기계로 전락하는 모습을 지독하리만치 강렬하게 재현하기에 걸작이다.

 

ⓒ 넷플릭스(NETFILX)
ⓒ 넷플릭스(NETFILX)

영화의 시대성

영화의 원작이자, 독일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가 자신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반전反戰소설의 대표작으로, 각각 1930년과 1979년에 할리우드에서 두 번이나 영화화되었다. 독일인에 의해서 영화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파울 보이머(펠릭스 카머러)라는 청년의 참전기로, 신병훈련대에서 시작해 그가 죽기까지의 과정을 1인칭으로 드러낸다. 청년기의 한가운데를 전장에서 보내는 이들이 느끼는 절망과 허무, 전장에 대한 참혹한 묘사, 마초적인 병영 생활 등이 어우러진다. 한편으로는 희생만이 이어지는 전쟁이 계속 이어지자 휴전 협정을 체결하러 모인 외교관들이 있다. 전쟁에서 겨우 몇 km 떨어진 이곳에서 전쟁의 운명이 결정된다. 거기서도 평화를 중요시하는 이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이들이 모여서 갈등한다.

원작에선 파울 보이머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다가 그가 죽는 것을 급작스레 드러낸다. 이는 전쟁에서는 누구든 부조리하게 죽을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잔혹한 응시처럼 보인다. 반대로 소설과 달리 영화에서는 파울 보이머가 휴전 협정 체결 후에도 살아 있다. 영화는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뒤에도 일개 사령관의 명예욕으로 인해 파울 보이머가 희생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경험하는 숱한 부조리에 화룡점정을 찍으려 하는 것이다.

이때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선택하는 길은 선명하다. 영화는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장과 병영, 그리고 휴전 협상 테이블을 교차편집해 드러낸다. 이를 통해서 두 세계가 완전히 분리하고 후자가 전자를 결정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물론, 1930년작에도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이만큼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명분이나 이해관계가 개인을 전장으로 몰아세운다는 주제의식은 오래도록 반복되어온 것이다. 이는 같은 소재를 다룬 스탠리 큐브릭의 <영광의 길>(1953)부터 쭉 이어져 내려온 관점이다.

 

ⓒ 넷플릭스(NETFILX)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9개 부문에 예비후보로 이름을 올릴 수 있던 데에는 이러한 주제의식이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해서다. 물론, 이 영화를 두고 소소한 반응이 있기는 했으나 이만큼의 선전을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여기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에 대한 기대치 하락 등의 여러 배경도 있을 터) 특히나 이 영화를 연출한 '에드바르트 베르거'는 베네딕트 컴배비치가 주연을 한 드라마 <페트릭 멜로즈> 시리즈로 연출력을 인증받은 감독이기는 하나, 대중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넷플릭스는 기존에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한 알레한드로 두 감독인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2022)나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2022) 대신, 오스카 레이스에서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선택했다. 그 이유에는 이 영화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양상은 놀라우리만치 이 영화가 그려낸 전쟁과 유사하며, 언뜻 그 영향도 비춰 보인다.

이는 재작년 샘 멘데스의 <1917>(2020)이 브렉시트와 영연방의 해체, 더 나아가 EU의 위기에 대한 정치적 반응으로 보인 비슷한 양상이다. 전쟁 영화로 세계 2차 대전이 주로 주목받았던 데에 비해 최근 세계 1차 대전이 영화에 소환되고 있는 이유 또한 여기에 맞닿아 있는데, 세계 1차 대전이 그 명명에 비해 유럽에 국한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이유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17>은 당시에 생긴 서구 사회의 분열을 되새기면서 지금 서구인이 되새겨야만 하는 고전적 가치를 되돌아보게 하기에 그 당시 아카데미에서 유력 후보가 되었다.

아카데미에서 독해되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명분 없는 전쟁을 그만두자'에 더 가까운 편이다. 이 영화는 1차원적 메시지로 보기에는 다양한 해석 층위를 지니고 있다. 이 영화는 각 국가의 입장과 동맹 관계, 힘의 논리에 의해서 전쟁이 발발한다는 게임화된 지정학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영화는 지정학으로 전쟁을 보는 것을 비판한다.

 

전장에 펼쳐진 우주적 공포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의 감각적 체험을 호러 장르의 어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쟁이 공포라는 것은 이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그간 영화가 시도하지 않은 공포를 연출하고자 한다. 바로 전쟁을 우주적 공포를 다루는 코스믹 호러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코스믹 호러'는 세계 1차대전 전후로 등장한 호러의 하위 장르 중 하나다. H.P.러브크래프트에 의해서 보편화된 이 장르는 괴수나 괴물, 유령을 소재로 하는 고전적인 호러, 무의식의 공포를 다루는 에드가 앨런 포 스타일의 호러와는 완전히 다르다. H.P.러브크래프트는 세속과는 단절된 으스스한 고저택이나 고성에 머무르게 된 인물이 거기에 사는 가족에서 생기는 광기 어린 사건을 다루는 '고딕 호러'를 계승한다. 여기에 SF 문법까지 동원하면서 이전에 없던 호러 문법을 창조한다. 그것은 인간이 실체를 완전히 인식할 수 없는 '우주적 존재와 마주할 때 느끼는 공포'다.

여기서 우주적 존재는 인간이 지구에 있기도 전에 지하에 머물러 있고,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다. 이는 서구인의 무의식에 원형으로 자리하는 대왕오징어 등의 다족류 생물에 대한 공포를 자극한다. 그 공포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순간에 (대부분은 과학자이거나 탐정인) 인간은 미쳐버리며, 그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설정이 H.P.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에 반복된다. 이는 이성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탐구할 수 있다는 과학적인 사고 아래서 나온 추리물의 뒤집힌 거울상이기도 하다. (이 장르가 세계 1차 대전 전후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눈여겨 볼만하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지정학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전쟁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라는 데에 치중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 영화가 아니라 우주적 공포에 더 가까운 영화다. '전쟁을 공포로 다루고 말겠다'는 주제의식은 이 영화의 스타일에 두드러져 있다. 영화는 이미지텔링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이미지로만 이를 그려내려고 한다. 그야말로 영화다운 영화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영화다.

 

ⓒ 넷플릭스(NETFILX)

앞서 언급한 탱크와 화염방사병의 촬영에서 이러한 공포가 더 두드러진다. 그것들은 모두 일부만 드러날 뿐이지 완전한 형체로 찍히지 않고 인간이 한눈에 볼 수 없는 대상으로만 찍히고 있다. 이는 코스믹 호러에서 크툴루가 서술되는 방식과도 비슷하다. H.P.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를 묘사할 때 의학이나 건축, 과학 용어를 써서 그 대상의 일부만 묘사했다.

"생물체의 신장은 210센티미터, 통널처럼 튀어나온 다섯 개의 줄기 조직이 있는 몸통이며 그 중심부는 둘레가 100센티미터, 말단은 30센티미터. 짙은 회색에 신축성이 있으며 대단히 견고함. 막 조직으로 이루어진 210센티미터 길이의 날개들 역시짙은 회색이며 유익된 다섯 개의 조직 사이마다 움푹 들어간 곳에 접혀진 상태로 붙어 있음. (...)" 『H.P.러브크래프트 전집2』 中 「광기의 산맥」, H.P.러브크래프트, 정진영 역, 황금가지, 2009, p.245

위와 같이 소설에서 그 대상의 디테일은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드러난다. 그림으로 그리려 하면 전혀 말이 안 되는 이미지이지만, 이 같은 기괴한 서술은 과학으로 아무리 그려낸다고 한들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탱크는 세계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에 연합국 진영에서 먼저 등장한 살상 병기다. 영국의 MK 시리즈가 최초의 탱크로 불리나 프랑스에서도 자력으로 탱크를 생산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생샤몽 탱크는 참호전을 중심으로 하는 전술을 무력화했고, 연합국 측의 승리를 견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알을 거뜬히 방어하는 생샤몽 탱크는 전장의 독일군에게 우주적인 공포를 안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는 러브크래프트가 그려내는 공포와 이어져 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장에 있는 군인이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 인간을 냉소하는 것에서 벗어난다. 영화는 전쟁이 전장에 낀 안개처럼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형체 없는 것들의 집합체로 본다.

이러한 태도는 음악에서도 두드러진다. 북소리는 총소리로 들리며, 언제 울릴지 알 수 없다. 외화면에서 그것이 울릴 때마다 언뜻 총알이 울리는 듯한 감흥을 준다. 이는 참호 안에 숨어서 적을 마주해야 했기에 상대해야 할 적이 분명하지 않고, 미지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감각을 그대로 재현한다. 이 소리에 따라 편집점이 정해지면서 영화의 독특한 리듬감이 형성된다. 점프 컷과 화면 전환 등 실험적 기법을 동원하는 데도 어색하지 않은 것은 전쟁이 그만큼 광기의 경험이어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오프닝에서부터 이를 전면으로 드러낸다. 부대가 전멸하자마자 군복을 거두어서 그것을 빨래터로 보낸다. 빨래터에 있는 여성은 기계적으로 일하며 그것을 새 군복으로 보이게끔 한다. 인간은 그 군복을 새로 입을 또 다른 매개체에 불과해진다. 이는 엔딩에서도 반복된다. 전장은 전투가 아니라 노동으로 가득해진다. 참호에 고인 물을 퍼낸다든지, 전사한 전우의 목걸이에 있는 군번줄을 수집하는 일을 인간이 도맡아 할 수밖에 없어서다. 이는 전쟁의 스펙터클을 두드러지게 한다기보다, 전쟁을 또 한 차례의 노동으로 보이게 하는 피로를 연출한다.

 

ⓒ 넷플릭스(NETFILX)
ⓒ 넷플릭스(NETFILX)

파울 보이머

영화 속 주인공 '파울 보이머'는 영웅이 아니라 그 숱한 고난에도 우연히 살아남아서 그것을 계속 마주하고 있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카메라 또한 파울 보이머의 시점에 최대한 이입하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다룬다.

파울 보이머는 전쟁의 진행과정은 물론 나가야 하는 이유조차도 모르는 채로 계속 전쟁에 불려 나간다. <1917>이 원테이크로 군인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카메라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려는 것과는 정반대로,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플롯이 이어져 있지 않다. 그저 에피소드의 나열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인물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이는 주로 플롯이라기보다 인물이 쓰는 소품에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카메라가 두 번 파울 보이머의 시점에 카메라가 이입할 때가 있다.

하나는 자신이 죽인 프랑스 군인의 얼굴을 마주할 때다. 1930년에 제작된 영화와도 비스름한 구도가 드러난다. 이 영화는 호러 영화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1930년대의 구조에 하나의 설정을 더한다. 바로 '굳은 진흙으로 뒤덮인 파울 보이머의 얼굴'이다. 리자드, 샌드맨 등 마블 코믹스에 나올 법한 빌런의 얼굴과 닮아있게끔 연출된 이 얼굴로 인해서 관객은 파울 보이머의 심리를 이해하게 된다. 파울 보이머는 자신이 전쟁 안에서 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하며, 진흙으로 뒤덮이지 않은 나머지 반의 얼굴로 연민의 눈물을 흘린다.

마찬가지로 파울 보이머가 전우 스타니슬라우스 카친스키(알브레히트 슈흐)의 죽음을 마주할 때다. 카친스키는 전쟁의 모든 순간에서 인생의 교훈을 얻으려 하고, 그것을 파울 보이머에게 알려준 정신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을 이성이자 교훈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는 달걀을 훔치다가 닭 주인이 쏜 총에 죽었다. 보이머는 그제야 전쟁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전쟁 기계로의 자신을 인식한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영웅 서사라기보다 반-영웅 서사다. 그러나 반-영웅마저도 그리 폭발적인 힘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저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인간이 사라져버린다는 잔혹한 진실만이 남는다. 이 영화는 인간을 기계로만 그려내기에 윤리적이고 정치적이다. 전쟁 영화는 지금까지 이만큼의 비정을 지니지 못했다. 그렇기에 이 비정과 냉정함이야말로 전쟁의 경험을 정반대로 느껴지게끔 한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넷플릭스(NETFILX)

서부 전선 이상 없다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감독
에드바르트 베르거
Edward Berger

 

출연
펠릭스 카머러
Felix Kammerer
알브레히트 슈흐Albrecht Schuch
아론 힐머Aaron Hilmer
모리츠 클라우스Moritz Klaus
에딘 하사노비치Edin Hasanovic
티볼트 드 몬탈렘버트Thibault de Montalembert
다니엘 브륄Daniel Bruhl

 

제작 어뮤즈먼트 파크
제공 넷플릭스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4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공개 2022.10.28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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