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온화함 속의 강인함, 빛을 발하는
[Interview] 온화함 속의 강인함, 빛을 발하는
  • 홍상현
  • 승인 2023.02.1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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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미증유> 주연 다카하시 유스케
언제나 차분하고 상냥한 느낌의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 그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건 오직 ‘표현의 장’에서 뿐이다. (C)Keisuke Sakurai
언제나 차분하고 상냥한 느낌의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 그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건 오직 '표현의 장'에서 뿐이다. (C)Keisuke Sakurai

"어디 계신지 보셨나요?"

"어? 아직 도착 안 하셨어요?"

"아뇨, 체크인은 하신 걸로 확인되니까 분명히 건물 안에 계실 겁니다."

이미 준공이 끝난 상태지만 본격적인 오픈까지 시간이 필요한 탓에 다소 휑한 느낌이 들던 부천아트센터 로비가 전에 없이 붐비고 있었다.

그도 그럴 밖에, 코로나19 사태 이후 완전한 정상개최를 선언하고 3년 만에 레드카펫 행사를 포함한 개막식을 거행하는 것 아닌가. 물론 여러 가지 면에서 만만치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가장 최근인 2019년 개막식이 치러진 곳은 판이하게 다른 구조의 부천종합운동장이었으니까. 당연히 개막식 참석자 대기실과 포토월, 내빈석까지의 이동경로와 소요시간 등을 이미 초단위로 체크해두었을 테고, 몇 번에 걸친 시뮬레이션까지 이뤄졌겠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리 순탄하던가. 입국시간도 제각각에 부천에 도착하자마자 체크인, 곧장 개막식장으로 향해야 하는 스케줄은 누구에게든 빠듯하기 마련이다.

"제가 찾아내서 레드카펫 대기 장소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아닙니다. 이 상황에 내 일 남의 일이 어디 있나요."

 

BIFAN에서는 「미증유」의 루와 스크린 밖의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를 매치시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왜 아니겠는가? (C)allen
BIFAN에서는 「미증유」의 루와 스크린 밖의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를 매치시키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왜 아니겠는가? (C)allen

슈트에 패용한 배지에 적인 '게스트'라는 단어를 보고 흠칫하는 자원 활동가. 괜찮다. 미안할 게 뭐겠나. 어차피 영화제가 시작되면 다시 이런저런 업무에 협조해야 할 처지. 스태프들에게 혼선을 주지 않은 한도 내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다. 일단 오프닝 리셉션 장소를 떠나 도착하는 게스트들, 분장실에서 나오는 게스트들, 그리고 이미 대기를 마치고 입장 중인 게스트들이 합류해 복작이는 이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벗어나볼까 싶어 몇 걸음을 옮기다 '운명처럼' 그와 마주쳤다. 소란스러운 실내 분위기에서 붕 떨어진 '진공상태의 아우라'를 뿜어내는 차분한 분위기의 사내.

"혹시 다카하시 유스케 님?"

"아 네, 그렇습니다. 안녕하세요!"

비구름을 가르는 햇살 같은 웃음. 그였다. '어디 계셨냐'고 물으니 살짝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내내 다른 게스트들과 같이 있었단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깨달았다. 자원 활동가들이 왜 그를 쉽게 발견할 수 없었는지.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메탈 누아르 부문 초청작 <미증유>(2021)에서, 짧은 갈색머리에 껄렁한 이미지로 거리를 누비는 '인도네시아ㆍ일본 혼혈인 캐릭터 루'와 그를 연기한 '7년 차 배우, 다카하시 유스케'를 매치시키지 못한 게다.

하긴, 평소의 그는 거칠어 보이지만 속마음은 여린 <사랑이, 그래서, 와라>(2018)의 고교생 '하기와'나 얼추 루와 이미지가 겹치는 <투명불꽃>(2020)의 '헌팅 강사' 엔조보다 슬럼프 와중에 자신의 페르소나였던 여배우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갈등하는 <우리는 변함없는 아침을 맞이한다>(2021)의 섬세하고 여린 성품의 영화감독 '후지이'의 이미지에 훨씬 가까우니까.

그날 이후 시상식이 있던 7월 19일까지, 하루 보통 서너 편의 영화를 꼬박꼬박 채워 보는 놀라운 성실함으로 필자를 감동시킨 이 시네필(Cinephile) 배우와 <미증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은퇴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건강문제를 두 번이나 경험한다. 당시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건 「부기 나이트」의 더크 디글러와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였다. (C)Keisuke Sakurai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은퇴까지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건강문제를 두 번이나 경험한다. 당시 그에게 용기를 주었던 건 「부기 나이트」의 더크 디글러와 「스카페이스」의 토니 몬타나였다. (C)Keisuke Sakurai

홍상현

배우경력 7년, 네 번째 주연 작품인 <미증유>로 BIFAN에 오셨습니다. 해외영화제 직접 참가는 처음이시라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다카하시 유스케

해외영화제 참가가 배우생활의 목표 중 하나이기도 했던 까닭에 정말 기쁩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워낙 영화관에 잘 가지 않는 분이라 그동안 제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셔서 걱정이 많으셨는데 BIFAN에 와서 레드카펫을 걷는 동영상이나 사진을 보내드렸더니 이제야 안심이 되신 것 같아요.

 

홍상현

7년 동안이나 뭘 하는지 모르셨다는 게 정말 놀라운데요. (웃음) 하긴, 유스케 배우가 워낙 본인에 대해 자랑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이 인터뷰는 BIFAN 종료 후 도쿄에서 이뤄졌음. ※ 주)

그런데 부천에서 지내시는 동안, 영화를 진짜 열심히 보시더군요.

다카하시 유스케

매일 다른 일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런 날들이 한 1년 정도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요. (웃음)

부천이라는 도시도 정말 좋았어요. 음식도 맛있고 다들 굉장히 따듯하게 대해주셔서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정말 꿈만 같은 9일이었네요. 꼭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홍상현

다음은 "홍상현의 인터뷰"를 통해 뵙는 분들께 항상 드리는 질문입니다.

평소에 한국영화를 즐겨보시나요. 좋아하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다카하시 유스케

이창동 선생님의 <박하사탕>(1999)이 일본에서 워낙 인기였고, 제가 배우 데뷔를 하고 나서도 앙코르상영을 보러 갈 기회가 있었는데요. 지금도 영화를 다 보고 난 순간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점심 무렵이었는데 감동이 가시질 않아 온종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때 생각한 게 있는데, 영화란 허구의 세계잖아요. 저는 그날 단지 영화를 보았을 뿐이고. 그런 허구의 세계가 제가 살아가는 세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박하사탕>이라는 작품을 통해 배웠습니다. 연기를 업으로 살아가는 제가 장차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리고 어느 정도의 경지를 지향해야 할지를 확인한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었죠. 그랬는데 BIFAN 개막식 때 바로 그 <박하사탕>의 주연배우인 설경구 배우를 보고, 영화제 기간 동안 그분의 거의 모든 출연작도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어서 말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행복했어요.

 

이창동 감독을 깊이 존경하는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당신에 대해 언급할 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C)Keisuke Sakurai
이창동 감독을 깊이 존경하는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당신에 대해 언급할 때 꼬박꼬박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C)Keisuke Sakurai

홍상현

앞으로 한국 관객들과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다카하시 유스케

(꾸벅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타카하시 유스케라고 합니다.

1992년생으로 올해로 서른 살입니다. 일본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고요. 좋아하는 음식은 라면이에요. (웃음) 강을 좋아해서 일이 없을 때는 자주 강변에 들러 느긋하게 책을 읽고는 합니다. 영화나 책만큼 음악도 좋아하는데 톰 웨이츠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를 즐겨 들어요. BIFAN에 다녀온 것을 계기로 한국어 공부도 시작했습니다. 다음에 부천에 가면 관객과의 대화에서 통역 없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서요.

 

홍상현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배우님을 지켜보면서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보는 배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되신 것도 역시 영화를 좋아하시기 때문이었던 거죠?

다카하시 유스케

유년기나 학창시절에는 영화와 정말 무관했고, 딱히 흥미도 갖고 있지 않는 소년이었습니다. 대학도 이과를 나와 남들처럼 취업활동까지 했죠.

그런데 바로 그 무렵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다닐수록 샐러리맨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친한 친구와 상담을 했는데 '야, 너처럼 속박을 싫어하는 애는 절대 직장인이 될 수 없어!'라고 하더군요.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던 건 제 착각이었던 거죠. (웃음)

그 길로 나고 자란 니가타를 떠나 도쿄로 와서 배우양성소에 들어갔습니다. 영화를 많이 보게 된 건 거기서 만난 선생님의 영향이었고요. 일단은 영화를 많이 보는 게 공부의 시작이라고 하시기에 무조건 하루에 네다섯 편씩 DVD를 봤는데요. 그럴수록 점점 영화에 빠져들어갔습니다.

 

“아니, 「미증유」 분홍머리가 이 훈남인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BIFAN 유튜브 서브채널 비비빞의 인터뷰 날, 한 스태프의 말에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C)BIFAN
"아니, 「미증유」 주황머리가 이 훈남인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BIFAN 유튜브 서브채널 비비빞의 인터뷰 날, 한 스태프의 말에 다들 웃음보가 터졌다. (C)BIFAN

홍상현

특별한 계가가 될 만한 작품이 있었던 건가요?

다카하시 유스케

네. 꼭 영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 있었습니다. 짐 자무쉬 감독의 1986년 작 <다운 바이 로>였는데요. '감동'이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들더라고요. 충격적인 한편으로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온화한 기분. 당시까지 많은 영화들을 보면서 감동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이었죠. 그래서 지금도 그 영화에 나왔던 웨이츠의 음악을 좋아하는 합니다.

 

홍상현

문득 배우로서의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 계신지 궁금해지는데요.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로서 라기보다 인생의 롤 모델로 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 속 인물이 있습니다.

우선, 폴 토마스 엔더슨이 연출한 <부기 나이트>(1997)의 주인공으로 마크 윌버그가 연기한 더크 디글러, 다음으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스카페이스>(1983)에서 알 파치노가 분한 토니 몬타나가 있는데요. 이 두 캐릭터에게서 공통되는 점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신의 손으로 미래를 거머쥔다는 겁니다. 제가 지향하고 싶은 삶의 태도이기도 하죠.

저는 건강문제로 두 번이나 큰 수술을 받고 오랜 기간 동안 입원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힘들어서 배우생활을 접고 낙향을 하고 싶었죠. 그럴 때마다 이 두 인물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어요. 질 수 없다는, 뜨거운 마음을 심어준 그들을 지금도 동경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보는 시네필 배우 다카하시 유스케. 하지만 배우양성소에 다니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에 딱히 흥미가 없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C)Keisuke Sakurai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를 보는 시네필 배우 다카하시 유스케. 하지만 배우양성소에 다니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에 딱히 흥미가 없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C)Keisuke Sakurai

홍상현

과연 시네필 다운 롤 모델 아닌가 싶네요. (웃음)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출연작을 봤는데요. 그중에서도 첫 주연 작품인 <사랑이, 그래서, 와라>의 하기와, 그리고 <우리는 변함없는 아침을 맞이한다>의 후지이 역이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후지이 같은 경우, 하마구치 류스케홍상수 영화의 주인공 같은 느낌이더군요.

다카하시 유스케

무슨 말씀이신 지 알 것 같아요. (웃음) <우리는 변함없는 아침을 맞이한다>의 후지이는 예술가의 자기반영적 캐릭터 성격이 강하죠. 극 중에서도 창작력이 고갈되어 괴로움을 겪는 걸로 묘사되고. 저 역시 작업을 하다 종종 느끼지만 창작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물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작품을 만들기 힘들어지는 건 정체성의 문제와도 직결되죠. <우리는 변함없는 아침을 맞이한다>의 후지이도 그래서 엄청나게 힘겨워하고요. 그런 그를 연기하면서 늘 창작의 기쁨과 더불어 불안감 또한 안고 있는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아마 그런 정서가 전해진 것 같습니다.

 

홍상현

그러던 어느 날, 말 그대로 '느닷없이' 본격적인 아웃로(out law) 캐릭터라 할 수 있는 루 역을 맡으셨습니다. 이제까지의 커리어를 거는 큰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얼추 데뷔작인 <사랑이, 그래서, 와라>의 하기와와 비슷한 점도 있어 보이죠?

다카하시 유스케

그렇습니다. <미증유>의 루와 <사랑이, 그래서, 와라>의 하기와, 두 인물은 분노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닮았죠.

그렇지만 명확한 차이도 분명히 있어요. 하기와의 분노가 사춘기 소년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인 반면, 루의 분노는 그 원인이 정체성이라든가 경제적 형편에 따른 사회적 소외 등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연기를 하는 저로서도 상당한 도전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택한 해법은 일단 일상에서의 저 자신을 덧대어 보는 거였어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늘날 일본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년인 저, 다카하시 유스케 역시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 분노를 안고 있거든요. 하지만 이를 모두 발산하면서 지내기란 쉽지 않죠. 아니, 평소에는 도리어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뚜껑을 덮듯 대부분을 억눌러야만 일상생활을 영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루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이 모든 분노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까지 끌어올려 카메라 앞에서 풀어헤쳐놓을 수 있었던 거죠.

 

올해로 배우데뷔 만 8년. 미공개작 포함, 다섯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했지만 역시 그는 섬세하고 여린 캐릭터에 어울린다. (C)Keisuke Sakurai
올해로 배우데뷔 만 8년. 미공개작 포함, 다섯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했지만 역시 그는 섬세하고 여린 캐릭터에 어울린다. (C)Keisuke Sakurai

홍상현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미증유>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 루와 현실공간의 다카하시 유스케를 매치시키지 못하더라는 팩트로 갈음하고 싶습니다. (웃음)

<미증유>를 포함해서 이제껏 출연하신 거의 모든 작품들에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되신 걸로 압니다만, <미증유>의 경우는 촬영 시기가 시기인지라 제작 자체만을 가지고도 워낙 말들이 많았잖아요. 개인적으로 힘드시지 않던가요?

다카하시 유스케

당시는 실외에서의 활동이나 대면작업 자체를 다들 꺼리던 시기라 저 역시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때의 제 상황을 돌이켜 보면, 이미 촬영 중이거나 촬영 준비 중이었던 작품들이 대부분 연기, 혹은 무산된 상태여서 엄청난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죠. 그런데 놀라웠던 건, 상황이 꼬일수록 더 절절하게 영화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다만 제 결단이 누군가에게 상처나 피해를 주지는 않을지를 생각하면서, 저를 캐스팅해주신 프로듀서, 감독과 충분히 의논한 끝에 <미증유>에 출연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스태프는 최소인원만 투입되고 자체적으로 철저한 체온측정이나 사전 점검이 이루어진다는 점은 물론 아울러 향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문제에 대한 책임 부분까지 모든 사항을 공유하는 사람들하고만 대면작업을 진행한다는 것 등을 꼼꼼하게 체크했어요.

 

홍상현

엄청난 용기만큼 철저한 준비과정이 있었네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 더 나가보면, 당시 일본도 정부가 비상사태선언을 내놓았던 참이라 개인의 생활이 크게 제한되는 상황이었잖아요. 스케줄 이야기도 하셨지만 꼭 <미증유> 때문이 아니라도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어려운 시기이셨을 것 같은데요.

다카하시 유스케

촬영을 준비하면서 새삼 실감한 건 제가 경제사정을 비롯한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 사회의 약자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사실과 본격적으로 마주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에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죠.

<미증유> 제작팀과 관련해서는 시기가 시기이니 만큼 주로 온라인상에서 말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너무 신경을 써서 감정소모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일단 인터넷부터 끊어버리고 거의 매일 캐릭터연구나 독서 등을 하러 혼자 강변에 나갔죠. (웃음)

 

영화제 참석 기간 내내 공식일정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상영관에서 보낸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 특히 설경구 특별전을 볼 수 있어 ‘말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행복했다’고. (C)BIFAN
영화제 참석 기간 내내 공식일정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상영관에서 보낸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 특히 설경구 특별전을 볼 수 있어 '말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행복했다'고. (C)BIFAN

홍상현

현명하시네요. (웃음) <미증유>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다카하시 유스케

시나리오를 거의 촬영과 병행해서 구성해 나갔다는 말씀은 들으셨을 텐데요. 아울러 독특했던 건, 쿠도 감독이 그 모든 내용을 원고지에 수기로 적어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디지털 활자에 익숙한 세대라 꾹꾹 늘러 쓴 원고를 읽으니까 작가의 영혼, 혹은 혈액을 그대로 응시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막 팬데믹이 공식화된 시기인지라 제가 감정적으로 좀 격앙되었던 탓도 있겠지만, 엄청나게 흥분이 됐어요. 온몸의 혈관이 팽창되는 느낌이었습니다.

 

홍상현

루라는 인물을 표현하면서 어떤 부분에 가장 역점을 두셨는지 궁금합니다.

다카하시 유스케

시나리오 속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나름의 생명력을 가진 한 사람의 인물로 바라볼 때 루에게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루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기득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죠. 출생배경을 보더라도 소외된 이주노동자 부모의 아들로 태어난 혼혈인에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는 입장이고요. 보통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을 향해 엄청난 분노를 안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다릅니다. 화를 내거나 폭주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고 있지요. 포기와는 조금 다른 개념인데요. 그래서 어떻게든 최대한 밝고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요.

 

시니리오를 받아 본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손 글씨가 적혀있는 원고지를 읽다보니 ‘작가의 영혼, 혹은 혈액을 그대로 응시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고 한다. (C)Keisuke Sakurai
시니리오를 받아 본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손 글씨가 적혀있는 원고지를 읽다보니 '작가의 영혼, 혹은 혈액을 그대로 응시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고 한다. (C)Keisuke Sakurai

홍상현

확실히 <미증유>의 루는 그런 가치중립적인 시각이 인물에 대한 분석력을 배가시킨 케이스에 해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캐릭터 분석이 그토록 철저하다 보니 표현하시기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다카하시 유스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루를 연기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과제는 분노를 억눌러야 한다는 거였어요. 이를 위해서 필요한 건 곧이곧대로 화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단 '웃는' 일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게 일관된 태도였는데요. 이건 방황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미증유>의 다른 등장인물들과 루ㆍ사쿠라 사이에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였어요. 따라서 다른 등장인물들은 도망치거나 싸우기도 하지만 루는 마지막까지 거리를 두고 그들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하나 더요. 촬영을 하면서 이건 정말 힘들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연기와는 무관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이전까지의 생활에서는 필요 없었던 빈번한 소독과 마스크 착용에 적응하느라 힘들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마스크를 하고 대사를 말하기가 너무 어색하고 힘들더라고요. (웃음)

 

홍상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웃음) 하지만 힘들었던 만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다카하시 유스케

정말 많은데 그중에서도 공중화장실에 오구라 아야노 배우랑 둘이 들어가 스마트폰 카메라로 아마추어 AV 촬영 장면을 찍었던 일이 두고두고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쿠도 감독이 둘만 들어가서 촬영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처음엔 진짜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가까스로 그 장면을 찍고 났더니 자신이 붙으신 건지, 쿠도 감독이 점점 실험적인 촬영방식에 도전하셔서 살짝 당황스러운 한편으로 너무 재미있었죠. 하지만 어떤 촬영도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캐스트ㆍ스태프 모두가 참가해서 상의한 끝에 촬영을 진행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한 마디로 긴급사태선언 하의 거리에 우리 모두가 스며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최근 코로나 19로 미뤘던 개봉을 서두르고 있는 「첫 여자」에서 현대일본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인 타키이 코사쿠로 분했다. (C)Keisuke Sakurai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최근 코로나19로 미뤘던 개봉을 서두르고 있는 「첫 여자」에서 현대일본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의 한 사람인 타키이 코사쿠로 분했다. (C)Keisuke Sakurai

"<미증유>는 코로나19 초기, 그러니까 긴급사태선언 당시 도쿄의 모습과 그 안에서 점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 그리고 결코 사소하지 않음에도 누구 한 사람 인식하지 않았던 그들 주변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작품의 제작에 참여했던 우리 모두가 그 어떤 것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서 카메라에 담는다는 각오로 임했기 때문에 완성할 수 있었지요. 이런 작품으로 한국에 가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BIFAN에서의 시간들은 정말 꿈만 같았어요.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도 폐막식까지 영화를 보면서 남아 있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경험한 한국이 너무 좋아서 요즘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계신 독자 분들과도 꼭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때 영화제에서 <미증유>를 보셨노라고, 아니면 '홍상현의 인터뷰'를 읽었노라고 꼭 말씀해주십시오. 반드시 한국어로 대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을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주어진 배역에 단 1밀리미터의 타협도 없이 마주하는, 매 순간 목숨을 거는 각오로 연기에 임하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맞았던 원치 않은 공백기를 만회하려는 것일까. BIFAN 참가 이후 다카하시 배우는 내내 바쁜 매일을 보내고 있다.

도쿄로 돌아가자마자 시가 현 올로케가 진행된 모리 테츠야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 <인민의 폭력(가제)>(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 뉴트리라이트 어워드 수상작)의 촬영현장으로 향했고, 총리암살사건을 다룬 문제작 <레볼루션+1>에도 출연했다. 코로나19 때문에 개봉을 미뤘던 다섯 번째 주연 작품 <첫 여자>도 조만간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될 거란다. 일본에서의 다른 출연작이 어찌 되든, 일단 <인민의 폭력>의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은 확정적인 사실이니 재회를 위한 기다림이 그리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인터뷰 홍상현,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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