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정이'를 위한 몇 가지 가정과 물음과 제안
[NETFLIX] '정이'를 위한 몇 가지 가정과 물음과 제안
  • 변해빈
  • 승인 2023.01.24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가운 육신이 뒹굴던 세상은 어디로 갔을까"
영화 <돼지의 왕> ⓒ KT&G 상상마당

연상호의 먼 디스토피아로부터 시작해보려고 한다. 때는 2011년, 영화 <돼지의 왕>의 마지막 장면이다. 당시 연상호의 디스토피아는 개와 돼지, 반이성적 가축의 서열이 침투한 교실과 학교의 부조리한 참상을 향해있었다. 우상화된 서열과 부조리에 대한 씻기지 않은 개별자의 분노와 모멸감, 암담한 굴종은 친구와 가족, 연인과 사회로 확장된다. 그렇게 15년의 유랑의 끝,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자가 삶을 원망하며 울부짖자 그를 염려한 연인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직전까지 남자에게 두들겨 맞았던, 역시나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 연인의 목소리가 바닥에 엎드린 남자의 절규마저 강탈해간다. 그는 깨우친 것이다. 육신의 부서진 잔해가 배회하는 "이곳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스팔트와 그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이다."

<돼지의 왕>을 디스토피아로 닫아버렸던 위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린 건 <정이>의 유토피아를 여는 엔딩에서였다. 지구 종말 이후의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정이>는, 효율적인 살상을 위해 개발된 인공지능 로봇 '정이'가 인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삶을 되찾으며 끝난다. 자발적 죽음을 택한 인간은 정이가 떠나간 길 위로 다음의 문장을 띄운다. "이 세상 모든 행운이 함께하길." 이는 연상호의 세계에서 폐허의 기운을 희망적 미래로 끌어올리는 드문 예언일 것이다.

<돼지의 왕>에서 절망에 취한 육신이 가로막힌 세상을 실감하며 지상으로 추락한다면, <정이>에서 죽음을 각오한 차가운 쇳덩어리 신체는 감지 센서 너머에서 도달한 미지의 온기에 휩싸이며 상공에 근접한 세상 위로 일어선다. 그리고 나는 <돼지의 왕>이 영구적 상태로 난도질해놓은 절망만큼 강렬한 희망을 <정이>의 마지막 순간에 보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엔딩이 영화 전체의 공백을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또한, 고철 덩어리 얼굴 표면에 비치는 노을을 보면서 살덩어리의 온기까지 느껴지는 듯했지만, 직전에 맞붙은 몇 개의 쇼트에 의한 충동적 감흥임을 모르지 않는다. 이토록 분명한 행운과 희망적 기운을 번복하게 되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1.

여러 이유를 열거할 수 있겠지만, 우선 <정이>는 몇 줄의 문장으로 설명하기도 유추해내기도 차고 넘치게 수월한 작품이다. 개요를 보충하면 이렇다. 종말 이후 우주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한 인간들은 내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투 용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전설로 불렸으나 현재는 식물인간이 된 인간 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 전투로봇 개발에 애를 쓴다. 이 연구 조직에는 어느덧 중년이 된 정이의 어린 딸 서현과 오직 성공적인 기술 개발에 혈안된 상훈(류경수)이 있다. 이들은 같은 목표를 지니고는 있지만 인간성을 둘러싼 윤리적 물음과 직면하며 어긋난다. 권선징악에 기댄 결말까지 읊으려니 좀 늘어지는데, 여하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안드로이드와 AI와 클론, 각종 이분법과 페미니즘 등의 SF 장르의 이론적 요소가 분명하지만 다소 간단한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다.

그러므로 관객이 <정이>를 관람하는 태도 역시 예상할 수 있다. 장르적 플롯과 사건의 얼개 사이의 빈 공백을 알아서 메워가며 탐문하거나 혹은 CG와 액션의 스펙터클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 그도 아니면 영화사의 일세를 풍미하던 배우에 대한 여러 겹의 감정이, 생의 종말과 육체의 사멸을 통과하는 장르적 형식과 우연히 맞물리는 경이를 극 내부로 침투시키는 태도가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스펙터클 중심의 유희도 씁쓸한 기억과 감정의 번뜩임도 비평적 관점을 앞세워 문제 삼을 생각이 없다. 또한 연상호의 이번 작품이 얼마나 많은 공백으로 듬성듬성한지 여타의 SF 장르 콘텐츠와 비교해가며 지적할 생각도 없다.

 

ⓒ 넷플릭스(NETFLIX)

왜냐하면 짜임새가 헐거우면 단점은 오히려 명확해서 비교적 간단한 작업에 그친다. 거기서 비롯된 지적의 나열에 그치는 비평적 허무가 더 나은 영화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지 않으며, 그런 영화 시장의 현행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현행을 반복적으로 지적할 뿐인 비평적 게으름에 대한 고민 역시 필요하다고 느껴서다. 그래서 지적을 거둬 낸 자리에 가정과 물음과 제안을 채워 넣어 보려고 한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연상호라는 설계자가 시도하려던 것이 '혹시 이런 것은 아니었을지' 가정하고, 하려던 이야기가 이것이 맞는지 묻고, 그렇다면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지 제안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때 가정, 물음, 제안의 근거가 되는 발판은 다음을 통해서다. 최소한 연상호의 디스토피아는 '부조리를 향한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발화하는 육신이 역동적으로 활개치는 장소로서 설계되고, 감정이 향하는 대상은 그러한 육신이 속한 '세상'이었다. 그러므로 '분노와 절망'이 향하는 대상으로서의 '세상' 속에서 그의 육신들은 차라리 역겨울 만큼 취약하다.

역으로 각 신체는 외설적이고, 처참하게 분해되는 고통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통로를 제시해왔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죄악은 그 죄질에 따라 육신을 잔혹하게 파괴하는 처벌 형식으로 가시화되고(<지옥-두 개의 삶>, <지옥>) 정신적으로 통제되고 지배된 육체들의 불합리한 서열적 질서가 판을 치거나(<사이비>, <창>, <돼지의 왕>), 물리적 접촉에 의한 감염과 죽지 않은 시체로 재현된 혐오 사회(<부산행>, <서울역>, <반도>)를 비롯해 연상호의 디스토피아는 사는 것의 공포를 죽음으로 털어내는 유의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어떤 육신으로 어떤 몸짓을 취할 것인가, 어떻게 파괴되는가'는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태도였다. 그리고 <정이>에도 디스토피아적 세상, 기계와 인간이 융합된 육신, "세상 모든 행운"을 기원하는 감정은 극의 골자를 이루는 주요한 테마로 쓰이고 있다.

 

2.

아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로부터 가장 먼저 이런 물음을 받지 않을까. "<정이>에는 '세상'이라고 명명할 개념 자체부터 흐릿하지 않던가?"

그렇다. 디스토피아 장르의 기틀을 가지고 왔지만, <정이>가 묘사하고 경고하는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부 격차, 정체성의 문제 등은 SF 장르의 극도로 기초적인 정의를 정직하게 복습한 차원에 그친다. 또 연상호가 이 영화의 엔딩, 곧 "세상 모든 행운"을 기원하며 모색한 미래사회에 대한 가능성과 대안은 신체와 정신의 구속에서 벗어난 특정 개인의 감정적인 해소에 머문다. 그 개인이란 '정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클론과 비윤리적 복제 기술을 개발하는 거대한 시스템의 파괴로 확장되기보다는 '정이'라는 브랜드명이 붙은 하나의 클론을 탈출시킨 한 명의 인간 서현의 죽음이 어린 시절에 상응하며 여과된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라 보아야 할 것이다.

 

ⓒ 넷플릭스(NETFLIX)

그런데 돌이키면 하나의 교실에서 학교와 사회(<돼지의 왕>), 열차 한 칸에서 플랫폼 전체(<부산행>), 심지어 연상호 본인의 단편영화 <지옥 - 두 개의 삶>의 세계관은 시리즈 <지옥>으로 더 많은 인물과 시공간의 차원으로 확장되지 않았던가. 실제 우주라는 광대한 차원으로 장소를 이동한 연상호는 왜 결국 한 개인의 감정과 기억에 머무르면서 끝을 내고 만 것일까?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가정해보고 싶다. "연상호가 <정이>를 통해 말하려던 세상은 대우주가 아니라 소우주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는 한 개인의 기억, 감정이 범우주적 원리와 법칙 속에서 고유한 리듬을 형성하면서 구성된 소우주로서의 심연이 <정이>의 디스토피아적 세상일 순 없던 건지 물으려는 것이다.

실제 <정이>의 디스토피아적 세상을 묘사한 대목에서 강조되는 풍경은 그것을 바라보는 서현의 무의식이 특정 신체 기관을 통해 외재적으로 발현된 것이다. 이 풍경은 서현이 공중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찰나, 그녀의 시선이 닿는 세상의 단면으로 구성된다. 회색으로 뒤덮인 지상, 음식을 배식받는 노숙인들, 쓰레기장을 치우는 로봇과 끝도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노동,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별하는 모녀의 애달픈 사연과 어린아이의 눈물. 서현의 시선을 경유하기까지 그녀가 바깥으로 표출한 정서적 반응이 무척이나 단출하고 필수적인 (타인을 향한) 응답 정도에 불과했음을 고려하면, 이 세상의 단면은 서현의 육신이 표출한 강력한 언어이다.

<정이>의 디스토피아는 차원의 범주를 소우주로 좁히더라도, '서현이 바라보는 세상'이자 그녀의 '시선에 담긴 황망함과 외로움, 도무지 해소될 길 없는 깊은 비애감'이라는 정념에 더욱 무게가 실려 있다. 

더군다나 <정이>에 이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던 것도 아니다. 모성이 주춤하는 사이, 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평생을 죽음의 공포와 싸웠고 죽어서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딸의 도의적 죄책감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서현은 "엄마가 나를 원망하지 않을지"에 대한 유년의 은폐된 감정과 상실감으로 괴로워한다. 이러한 뼈대를 지니고서도 과거의 기억을 공회전하는 억압된 삶과 끝이 보이지 않는 상실감을 앓는 것만큼 더한 종말은 없다고 전하지 못한다면, 마음의 고통을 명백한 외상으로 인정해내고, 그러한 심연을 해부해낼 과거의 내력을 쌓아내지 못한다면 <정이>가 굳이 미래의 우주를 항해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3.

세상의 문제를 보았으니 다음으로 '육신'을 이야기해보자.

유혈이 낭자하고 피부와 신체가 끔찍하게 절단되고, 때로는 먼지처럼 산산이 조각나기도 하던 연상호의 육신은 <정이>에서 피를 볼 일도, 절단 부위의 고통을 느낄 필요도 없이 영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고철 기계가 된다. 인공지능 로봇 정이가 전투 시뮬레이션 도중 총을 맞고, 신체가 잘릴 때 느끼는 고통은 몸의 기억에 의한 일련의 망상이다. 뇌에 축적된 고통에 대한 인지 작용, 곧 환상통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정이' 개발자들이 갈구하는 미지의 영역은 기계를 통한 신체의 재생성과 영생이 아니라 자극에 의한 감각적 반응의 기억이다.

물론, <정이>는 기계적인 신체에 인간의 마음의 문제가 엮어졌을 때 어떤 인과관계에 의하여 더 강력한 전투 용병이 탄생하는 건지 과학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관객이 서사적 공백을 수용할지언정 지어낼 순 없는 노릇이니, 허술한 짜임새를 논하기보단 기계에 의해 대체가능한 신체를 제외하고 남은 부위에 대해 고민하려고 한다.

<정이>에서 개발자들을 통해 보여지는 건 클론 정이를 개발하는 단계라기보단 반복되는 실패의 잔영이다. 클론 정이가 실험과정에서 제 몫을 해내지 못하면 개발자들은 클론 정이를 면담하고 폐기한다. 면담이라기보다 기계 점검에 가깝지만 그럴싸한 윤리적 뉘앙스만 풍기려는 것이다. 이때 클론은 뇌를 지탱하고 그 반응을 전달하는 회로로서 어깨부터 목, 머리만이 남겨진 채 사지가 모조리 절단된 상태다.

언급했듯 이미 <정이>의 세계에서 팔과 다리와 이를 잇는 몸통의 역할은 기계에 맡겨진 지 오래이므로. 그런데 나는 연상호가 방점을 찍으려던 부분이 뇌가 맞는지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과학적인 이론의 부재를 포함해서 오히려 화면에서 강조되는 이미지는 신체 내부이기보다 머리의 앞 표면, 얼굴에 있다.

 

ⓒ 넷플릭스(NETFLIX)
ⓒ 넷플릭스(NETFLIX)

미약한 단서에 그칠 뿐이지만, 그 몇 가지 단서를 붙잡아보자. 상훈은 죽은 생선의 "표정이 너무 억울해 보인다"는 이유로 음식이 신선한지 확인한다. 물론 이것은 상훈의 싸늘한 유머이지만, 그가 구사하는 말은 '재밌다', '감동받았다', '결기가 있다' 같은 자기감정과 마음의 묘사로 구성된다. 게다가 상훈에게는 클래식이 흐르는 방과 노을의 찰나가 주는 감동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상훈은 특정 자극 요소에 대한 적절한 감흥을 표출하도록 설계된 사이보그일 뿐 우리에게 실제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진 않는 존재다. 말로 설명되는 그의 감흥은 상황과 자주 어긋나고 얼굴은 절제되어 있다. 외려 우리가 극 중 인물의 감정에 어떤 자극을 느끼도록 설계된 쪽은 '클론 정이'이다. 그녀의 얼굴은 환상통의 공포에 떨고 고통스럽게 절규하다가 일순간 정지된 형태로 클로즈업된다. 엄마의 억겁의 고통을 '대면'하는 딸의 심리를 노골적으로 반영하려는 장치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그때마다 서현이 애써 외면하려 하듯, 연상호는 뇌파 측정 그래픽 화면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정이>의 얼굴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연상호의 외면에 의문을 제기하려는 건, 그의 작품 속 '육신'에서 모든 부위가 배제되고 남은 한 가지가 바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에서 실사로의 변화 과정에서 고려된 단순한 선택일지 모르겠으나, <지옥 - 두 개의 삶>의 등급을 매기던 천사는 <지옥>에서 전신이 사라지고 거대한 얼굴만 남았다. 그의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은 동물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지닌 혼종체로, 우리는 말하는 동물의 얼굴과 대면하곤 했다. <부산행>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침투한 육신 중 얼굴만큼은 생명의 탄생이라는 삶의 기원을 회억하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면 그저 우연일까? 무엇보다 <정이>에서 또렷하게 변주되는 건 뇌가 아닌 '얼굴'이다. 뇌의 미지의 영역이 모성인지, 기억인지 논하는 건 지루하다. 그보다 물음은 배우 김현주의 실사 형태의 얼굴이 동일한 외형을 복제한 더미들 머리 위로 옮겨졌다가 최후에는 실제 얼굴의 고유한 특징을 완만하게 무너트린 고철 가면으로 변주되는 이유에서 생성되어야 한다.

또한, 자칫 외모에 대한 품평에 그칠까 우려되면서도 정이를 연기한 배우가 김현주라는 점은 적어도 국내에서만큼은 궁금증을 가져 볼 만하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기계 고철로 구현한 김현주의 얼굴 대칭과 굴곡이 매력적이라고 감탄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이 정작 복제된 클론으로 쭉 나열된 광경의 섬뜩함을 자아내는 얼굴인지는 모르겠다. (김현주의 몸이 보여주는 액션이 아니라면) 오히려 낯익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느낌이란 언제고 열어둘 뿐이지만 연상호도 보기에 화려함 혹은 그로테스크한 불쾌감보단 안정감을 추구했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밖에. 정이는 딸 서현의 시선으로 느껴야 하는 그리운 얼굴이다. 그래서 딸 서현의 입장에서 구분이 무뎌진 엄마(의 인공지능 뇌가 심어진) 얼굴은 여생 동안 억겁의 얼굴이 상징하는 고통스러운 삶과 상품으로서의 클론 정이에 가해진 대상화에서 벗어나길 염원하는 마음의 반영일 수 있다.

한편에선, 가정용 로봇으로 상품 용도를 확장하기에 가장 무난한 디자인이라고 개발 회사의 입장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앞서 말한 가정과 제안 단계에 머물고 말거나 마침표보다는 물음표가 찍혔을 때 더 어울리는 내 사변일 테다.

 

ⓒ 넷플릭스(NETFLIX)

4.

다만, 연상호의 얼굴이 피사체를 구성하고 감정을 반영하는 면적으로는 강조되는 한편, 외관상의 선명함이나 고유한 특징은 거대한 하나로 통합되고 보편적인 질서를 체계화하는 쪽으로 흐릿해진 사태에 대해선 궁금하다. 기괴할 정도로 고통과 불안에 솔직하던 얼굴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그가 바라본 세상이 이제는 앙상한 희망에 기대를 걸어볼 만큼 살만하게 변한 걸까? 정이의 얼굴 위로 난입한 "세상 모든 행운"이 <정이>의 엔딩을 유토피아로 안내하고는 있지만 인간의 요소가 사라진 무표정의 고철 얼굴이 희망에 기대를 걸었다고 할 수 있을까?

정이의 얼굴로부터 일말의 희망을 느낀 관객이 있다면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표지가 제거된 정이의 얼굴에 서현의 흘러넘치는 감정이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딸이 엄마의 낙관적 미래를 염원하는 진심 자체를 매도할 순 없다. 그런데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 '행운'이라는 점은 곱씹을만 하다. 서현의 미래에는 필연적인 죽음이 있고, 정이에게는 성찰할 과거도 구체적인 미래의 계획과 가능성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연상호도 마찬가지다. 정이가 마지막에 도달한 광활한 자연의 경관은 과학이라기보다 판타지로 이해할 때 수용된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을 건 어쩌면 '운'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나는 서현의 이 마지막 말이 노을의 온기처럼 정이의 얼굴 앞을 비출 게 아니라 걷히지 않은 안개처럼 허무한 잔영에 가까울 때 보다 구체적인 미래가 그려진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두 인물의 대조되는 감정의 배치를 보면서 어쩌면 연상호가 그간의 작품에서 단점으로 지적받았던 흘러넘치는 감정의 문제를 막아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서사상으로도 감정의 방류에 대비한 방어막의 근거를 마련해두긴 했다. 탈출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만이 남아있는 정이에게 감정을 인식하고 표출하는 체계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연상호가 무언가를 막아내고 우려하고 대중과 타협하려는 데 급급한 이 무표정의 방어벽 자체가 오히려 답답하다.

그러니까 감독은 무척이나 가혹한 상황과 그걸 감당하는 고통으로 육신이 부패되는 자의 세상을 두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덧입히느라 정작 자기 세계를 겉돌고 있다. 나는 그가 "세상의 모든 행운"이 깃드는 미래가 아니라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허무와 터무니없음에 대한 실감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연상호의 인물들은 쉽게 성찰하지 않는다. 아니, 그들에게 주어진 성찰의 틈은 차가운 현실에 대한 실감과 통각으로 메워져 있었다. 이는 앞으로의 연상호의 세계가 무조건 불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세계를 지탱하는 감정을 억지로 다른 감정으로 막으려 해서 생긴 균열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또한 <정이>의 행운이 깃든 세상을 보고도 비관하게 되는 이유다. 이것이 단지 연상호라는 설계자와 그의 (디스토피아를 감추려 드는) 유토피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거대하고 낙관적인 미래 세계의 발견에 급급해 암담하게 잠식되는 소우주의 파괴를 발굴해내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자리를 앙상한 희망에게 쉽게 내어주어서도, 세상을 유랑하는 분명한 고통이 잔가시처럼 여겨져 힘없이 부서져서도 안 된다. "세상 모든 행운"에 터무니없이 기대기보다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과 제대로 대면하는 얼굴이 나는 보고 싶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넷플릭스(NETFLIX)

정이
Jung_E
감독
연상호
Yeon Sangho

 

출연
강수연
김현주
류경수

 

제작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제공 넷플릭스(NETFLIX)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96분
등급 12세 관람가
공개 2023.01.20

변해빈
변해빈
2020년 경기씨네영화관 영화평론 우수상,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현재 《코아르》 영화평론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