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청년,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다
[Interview] 청년,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가다
  • 홍상현
  • 승인 2023.01.3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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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작 <미증유> 쿠도 마사아키 감독 인터뷰
가히 영화 「미증유」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할 만한 시부야 교차로 풍경. ‘2020년 4월’의 시대상을 이처럼 잘 설명하는 컷이 또 있을까. (C)allen
영화 「미증유」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할 만한 시부야 교차로 풍경. '2020년 4월'의 시대상을 이처럼 잘 설명하는 컷이 또 있을까. (C)allen

"인생에는,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미로를 해치고 나와 숨을 고르며 돌아본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른 채 달려온 길이, 결국 높은 산맥을 오르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었음을 깨달을 때의 이 감정은, 안도감일까 만족감일까.

정확하게 규정하기란 쉽지 않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혼자 걸어가야 할 길이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각오로 나아갔지만 실은 단 한순간도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희로애락이 담긴 소중한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이 이어졌고, 그렇게 자신의 치열한 삶과 그 결과물을 망설임 없이 공유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아울러, 돌아보면 감사함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그 대화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귀 기울여 주는 분들이 계셨다.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가 한창이던 2018년 7월 18일 오전 8시 40분 첫걸음을 내딛은 뒤 가장 최근인 2023년 1월 16일 오전 10시 30분까지 116회를 이어온 바로 이 지면, "홍상현의 인터뷰" 이야기다. 물론 그전에 시대의 악성(the great musician)이나 지성(intellectual)과 조우한 일들도 있었지만 필자의 인생의 3분의 1 이상이라는 만만찮은 세월을 할애했던 고등교육 기간, 심지어 그중 절반이상(학부와 대학원)을 쏟아부은 주제인 '영화'로 범위를 좁힌 것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이 결승전에서 크로아티아를 꺾고 20년 만에 월드컵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그 여름의 일.

 

쿠도 마사아키 감독의 입버릇이 하나 있다. “저를 영화감독으로 키워주신 것도, 늘 따듯하게 맞아주고 격려해주시는 것도 한국관객”이라는 말. (C)BIFAN
쿠도 마사아키 감독의 입버릇이 하나 있다. "저를 영화감독으로 키워주신 것도, 늘 따듯하게 맞아주고 격려해주시는 것도 한국관객"이라는 말. (C) BIFAN

오프닝과 엔딩에서, 모두에 인용한 구절로 시작되는 주인공의 독백이 등장하는 영화 <아임 크레이지>(2017)의 쿠도 마사아키 감독은 4년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중단된 적 없는 "홍상현의 인터뷰"의 첫 인터뷰이다. 서른다섯 나이에 10년 가까운 조감독 생활을 거쳐 만든 데뷔작으로 BFIAN에 초청된 그는 가장 돋보이는 아시아 초청작에 주어지는 넷팩(NETPAC)상을 수상했다.

오늘 본 지면을 통해 만날 작품은 그런 그를 지난해(제26회) BIFAN으로 돌아오게 해 준 신작, <미증유>(2021)다. 쿠도 감독이 '차세대 일본 독립영화의 기수'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청년 영화인들을 모아 정부 차원의 봉쇄 명령 이상으로 맹위를 떨치는 동조압력(peer pressure)을 뚫고 2020년 4월 촬영한 이 작품은, 뇌리에 날아와 박히는 충격적인 대사, 가상현실처럼 황량한 거리 풍경 등이 초현실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실내 장면과 어우러지면서 다큐멘터리 이상의 기록적 가치를 지닌 군상극으로 자리매김한다.

   

쿠도 감독은 <미증유>를 통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궁극의 '타격'이 아니라, 단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사회적 모순이 터져 나오게 만든 '뇌관'이었을 뿐이었다고 역설한다.

내용은 이렇다.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사쿠라(오구라 아야노 분)를 만나 코로나19로 호스트 일거리가 줄었다며 아마추어 AV 촬영을 제안하는 루(다카하시 유스케 분). 사람들에게 '스테이 홈(Stay Home)'을 호소하지만 정작 동거 중인 마나부(쿠리타 마나부 분)가 동성 성매매를 하러 다니는 것은 알지 못하는 SNS 인플루언서 유카(츠지 치에 분). 피해가 막심한 대형 음식점의 점주 남편(기타가와 유우키 분)과 냉랭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히사노(사쿠라기 리나 분). 긴급사태 선언 아래 살풍경만큼이나 황폐화되어 있던 이들의 삶이 어느 날 밤에서 새벽 사이에 맞물린다.

 

사쿠라는 코로나 19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궁지에 몰려 평소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종에 발을 들이게 된다. (C)allen
사쿠라는 코로나19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궁지에 몰려 평소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종에 발을 들이게 된다. (C) allen

홍상현

"다녀오셨어요!"

제가 이렇게 인사를 드린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장편영화데뷔작 <아임 크레이지>가 초청되어 NETPAC상을 수상한 이래, 4년 만에 만드신 신작으로 부천에 돌아오셨기 때문인데요.

쿠도 마사아키

코로나19 때문일까요? 홍 씨와 인터뷰를 했던 게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데, 벌써 4년이나 지나버렸네요. 어제 GV를 할 때도 모더레이터 분이 홍 씨처럼 "다녀오셨어요!" 하셔서 완전 울컥했습니다. (웃음)

 

홍상현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또 짧은 4년 세월, 그간 봉준호 감독의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 등 한국영화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평소 유난히 한국영화를 사랑하시는 입장에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쿠도 마사아키

요전에 한국에 왔을 때는 넷플릭스나 아마존 프라임, 특히 넷플릭스가 그렇게까지 발전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인지 최근에 OTT 플랫폼도 제공되는 영상콘텐츠도 엄청나게 많아졌죠. 이로 인해 전보다 훨씬 많은 한국의 영화나 드라마, 그 외의 대중문화가 일본에 유입되면서 저와 홍 씨가 처음 만났던 당시와 비교하더라도 실로 엄청난 숫자의 일본 젊은이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다는 이야기밖에 드릴 말씀이 없어요.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가 분한 루는 쿠도 마사아키 감독의 친구인 말레이시아 출신 영화 스태프가 모델이다. (C)allen
다카하시 유스케 배우가 분한 루는 쿠도 마사아키 감독의 친구인 말레이시아 출신 영화 스태프가 모델이다. (C)allen

홍상현

작품의 타이틀이 강렬합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쿠도 마사아키

프로듀서인 기타가와 유우키와 둘이서 지었습니다.

미증유의 질병, 병원균, 바이러스가 만연함에 따라, 일본에서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테이 홈'이 강요되었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환경인데 이로 인해 가족, 친지 연인, 이웃 등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가 약회되어버렸지요. 물론 스마트폰 메신저라든가 화상통신 소프트웨어, 혹은 그 밖의 SNS 사용이 늘면서 편리해진 면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사회의 경우, 전반적으로 가족, 친지와의 직접교류와 그로 인해 형성된 유대로써 유지되는 성격이 강했거든요. 이밖에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사회적 갈등을 한꺼번에 불거졌는데요. 물론 코로나19를 그 전적인 이유로 볼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겠지만 적어도 '뇌관'의 역할은 한 것만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전무후무한, 문자 그대로 '미증유'의 사태죠. 이런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타이틀이에요.

 

홍상현

저는 이 작품의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긴급사태선언 직전의 일본에서 쿠도 감독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단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쿠도 마사아키

오랫동안 준비하던 오키나와 배경의 새 작품 제작이 코로나19 때문에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작팀을 해체하기로 하고 찻집에 모였는데, 거기 모여 있던 동료들로부터 연극이나 영화 쪽 일을 하는 사람들, 특히 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본업은 고사하고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게 돼서 생계가 막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나라에서 우리처럼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부금을 지급할 거라는 소식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스테이 홈 상태에서 어떤 경제활동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지다보면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대목에서 문득 사비를 털어서라도 어떻게든 이런 상황을 가감 없이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런 의욕이 시간이 갈수록 '역경에 맞서 싸워보자'는 투지로 변해갔습니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등장하는 마나부는 동성 성매매를 통해 생활비를 벌고 있다. (C)allen
영화의 오프닝부터 등장하는 마나부는 평소 동성 성매매를 통해 생활비를 벌고 있다. (C) allen

홍상현

배우 분들에게 캐스팅이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무척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쿠도 마사아키

무엇보다 당시 상황에서 출연을 원하는 배우들이 적었기 때문에 조금 다른 방식의 오디션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건으로는 단 하나, 봉쇄국면 즉, 정부의 긴급사태선언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촬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걸 내걸었지요.

그렇게 캐스트를 다 꾸리고 보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더라고요. 소속만 보더라도 제가 잘 아는 매니지먼트사는 물론, 프리랜서나 심지어 원래 다른 일을 하시던 분들까지.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건 다들 거의 비슷했습니다. 집세는 물론 식료품 살 돈에도 부담을 느끼는, 실로 '카오스(chaos)'라 할 만했죠.

오디션에서는 준비된 대본의 일부를 연기하게 하고, 본인이 준비한 것들을 보는 기존의 방식이 아니라 심층면접 형태로 그런 분들의 상황을 하나하나, 최대한 디테일하게 들었어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간에 말이죠.

 

홍상현

촬영을 준비하면서 영화계 분들, 특히 선배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실제로 촬영 사실에 대해 듣고 격려를 해 준 사람이 저밖에 없었다고 하셨잖아요. 정말인가요? (웃음)

쿠도 마사아키

그럼요. 완전 감사했어요. (웃음) 업계 경력으로 따지면 선배에 해당하는 프로듀서, 감독, 배우 그러니까 영화계 동료들이 '다들 참고 집에서 스테이 홈을 하고 있는데 왜 당신은 전염병을 확산시킬 위험부담을 안고 영화를 찍는 거냐.' 면서 호통을 치거나 전화, 혹은 문자메시지 등으로 비난을 넘어 사실상 위협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 입장을 말씀드리자면, 바이러스를 퍼뜨릴 생각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코로나19를 가볍게 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촬영을 하는 우리도 무서웠어요. 제발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는 상황까지는 오기 않기를 빌고 또 빌면서 매사 조심에 조심을 했고요. 하지만 그 한편으로 당시 젊은이들이 처해있던 절박한 상황 역시 코로나19 못지않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혼란스런 현실을 잊고 싶어서일까. SNS 인플루언서 유카는 일상생활조차 제쳐두고 라이브방송에 집착한다. (C)allen
혼란스러운 현실을 잊고 싶어서일까. SNS 인플루언서 유카는 일상생활조차 제쳐두고 라이브방송에 집착한다. (C) allen

홍상현

하긴, 당시 청년들, 특히 연기라든가 기타 공연분야, 음악, 미술 등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은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게다가 일본의 경우, 오히려 관계당국이 이야기하기 전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면서' 서로에게 억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른바 동조압력까지 기승을 부리던 상황이었고요. 심지어 '코로나 자경단'이라는 말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까.

쿠도 마사아키

그렇습니다. 저는 일본의 전체주의화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는 일이야 말로 영화인의 본령 중 하나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동조압력이 기승을 부리던 2년 전에는 그런 생각과 행동만으로도 일종의 테러리스트 비슷한 취급을 받았고, 그런 상황이 도리어 제 반골기질을 자극했죠.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찍었어요.

 

홍상현

촬영도 최소인원만으로 진행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예컨대 극 중에서 공원의 관리인 등을 피해 가며 진행하는 게릴라 촬영도 설정이 아닌 '실제상황'이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쿠도 마사아키

<미증유>에 나오는 모든 장면은 긴급사태선언 하에서 카메라에 담은 것들입니다. 말씀하시는 '실제상황'이 맞죠. 텅 빈 시부야 교차로나 신주쿠 가부키초, 기치조지, 이노카시라온시공원의 모습의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어요.

 

홍상현

단지 '힘든 상황 하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다'는 것 말고도 <미증유>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품입니다. 예컨대 각각의 에피소드를 단지 나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내러티브가 점점 견고해지다가 어느 날 새벽, 어떤 공간에서 순식간에 맞물리는 유기적인 구조도 그런데요. 대단히 치밀한 계산에 따라 시나리오를 쓰긴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쿠도 마사아키

감사합니다. 그렇게 봐주셨다니 정말 기쁜데요. 사실 시나리오를 써가면서 <미증유>의 촬영을 진행했어요. 일단 상황 별로 아웃라인만 정해놓고 현장에서나 촬영 전날 캐스트, 스태프와 상의해 가면서 자세한 내용을 구성했죠. 즉흥성, 그리고 현장성이 드라마타이즈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다만, 각각의 시퀀스를 어떻게 연결시킬지에 관해서는 큰 그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촬영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생각해두었던 건 아니고요. 방금 전에 언급한 텅 빈 시부야 교차로 장면을 찍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였지요. 거기 등장하는 사쿠라와 루의 이야기에 나머지 에피소드를 유기적으로 연결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요. 이 부분에 대한 구상과 함께 라스트 신의 새벽 풍경을 상정에 놓고 마치 퍼즐을 맞추는 느낌으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한 피해에 고심하는 대형 음식점 점주 역의 기타가와 유우키는 「미증유」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C)BIFAN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에 고심하는 대형 음식점 점주 역의 기타가와 유우키는 「미증유」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C)BIFAN

홍상현

다음은 작품의 시각적 완성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아임 크레이지> 때도 느꼈는데요. 색채에 대한 것이라든가, 미장센을 구성하는 감각이 정말 뛰어나세요. <미증유>의 경우, 도시, 그리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공간을 세트처럼 적절하게 사용하는 비주얼 콘셉트가 존재하지 않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쿠도 마사아키

앞서 시나리오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처럼 비주얼 플랜도 거의 애드리브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회화적으로 영감을 받은 점은 분명히 있는 게, 제가 평소 그림을 보러 다니는 걸 워낙 좋아해요. 그런 경험을 돌이켜 보건대, 화가들은 자신의 활동 근거지가 어려워지면 주로 곤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그리잖아요. <미증유>도 그런 작품 아닐까 합니다. 촬영을 하다 보면 플래시백처럼 지금껏 제가 봐왔던 그림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곤 했는데요. 그럴 때마다 머릿속 이미지들을 모사하는 느낌으로 미장센을 구성했습니다.

 

홍상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상황 때문일까요.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다른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결기가 드러납니다. 뭔가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가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캐스트에게 연기의 아웃라인을 제시하는 방식도 독특했을 것 같은데요.

쿠도 마사아키

일단 이야기가 어떻게 굴러가는지에 대해서 캐스트에게 별로 설명하지 않았어요. 그냥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의해서 지금 이곳에 있는지만 말해주었습니다. 내러티브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영화자체가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 거죠.

다만 각 등장인물의 특징에 대해서는 디테일하게 공유했는데요. 예컨대 루 같은 경우, 제 주변에 말레이시아 출신 스태프가 있거든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친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였어요. 그래서 루 역을 맡은 타카하시 유스케 배우는 그와 직접 만나 그의 성장과정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쿠라 역을 맡은 오구라 아야노 배우는 SNS에서 <미증유>에서 묘사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를테면 코로나19로 인한 생활고 때문에 성매매에까지 발을 들이게 되는)에 있는 여성들을 직접 취재를 진행했고요.

 

남편과의 냉랭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히사노. 그와 남편 사이에는 코로나 19 사태 이전부터 이미 ‘거리두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C)allen
남편과의 냉랭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히사노. 그와 남편 사이에는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이미 '거리두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C) allen

홍상현

<미증유>를 보면서 특히 놀란 것은 사람의 몸을 팔고 사는 상황 등, 대단히 자극적인 설정이 등장하면서도 카메라의 착취적인 시선은 엄격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결말부의 DV신 같은 경우, 사운드로 상황을 상상하게 만드는 연출이 절묘하더라고요.

쿠도 마사아키

이건 비단 <미증유>와 관련해서 뿐만이 아니라 제 영화적 원칙과 맞물리는 이야기인데요. 저는 모든 내용을 설명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을 지양합니다. 이런 경향은 어떤 작품에서든 엔터테인먼트로써의 요소를 요구받는 일본영화의 현실에서는 다소 이례적이랄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다 보니 잘 아시다시피 일본영화에서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라는 이유로 TV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자극적인 표현이 곧잘 등장하지요.

반면에 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한국영화에서 찾았어요. 예컨대 김기영 감독의 1960년 작 <하녀>라든가, 이창동 선생님(그는 이창동 감독에게는 '스승'이라는 의미에서 평소에도 자주 '선생님'을 붙인다. ※ 주)의 작품들은 모든 내용을 일일이 시각화하기보다 30퍼센트, 혹은 40퍼센트 정도의 정보만 주고 나머지는 관객이 스스로 상상하게 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정말 스마트한 감독의 연출법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의 시퀀스에서도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그가 히사노를 때리거나, 혹은 다른 형태로 폭행을 가하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겠죠. 그걸 의도했던 겁니다.

 

홍상현

사쿠라 역의 오구라 아야노 배우가 먼 곳을 주시하면서 도로를 건너던 신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쿠도 마사아키

<미증유>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일본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해서, 모두들 어느 정도의 반경 안에서 움직이다 끝내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반면, 사쿠라나 루의 경우는 그럴 수 없죠. 갈 곳이 없으니까. 그러니 그냥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초상화를 그리듯 표현하고 싶었어요.

다행히 직접 취재를 포함해서 철저한 캐릭터연구를 진행해 주었음은 물론, 원래 연기에 상당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보니 오구라 배우가 이 부분도 정말 제 의도 이상으로 이해해서 적절하게 보여주었죠.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일본의 미래 그 자체를 표현해주었다고 할까요. 편집을 하면서 다시 보는데 뭉클하더라고요. 덧붙여서 말씀드리면 이 컷은 단 한 번 만에 OK 사인이 나왔습니다. 카메라에 담기 10분 전부터 오구라 배우가 이미 시부야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고요.

 

긴급사태 선언 하의 살풍경만큼이나 황폐화되어 있던 등장인물들의 삶은 어느 날 밤에서 새벽 사이, 초현실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실내 장면에서 서로 맞물린다. (C)allen
긴급사태 선언 하의 살풍경만큼이나 황폐화되어 있던 등장인물들의 삶은 어느 날 밤에서 새벽 사이, 초현실주의 회화를 연상시키는 실내 장면에서 서로 맞물린다. (C)allen

홍상현

제작기 자체가 워낙 파란만장하다 보니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쿠도 마사아키

영화에 보면 화장실에서 사쿠라와 루가 아마추어 AV를 찍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 장면은 제가 연출한 게 아닙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두 배우가 직접 스마트폰으로 촬영해 주십사 부탁을 드렸죠. 최대한의 파격을 추구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제 감독인생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감독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오만가지 세세한 부분을 주문하는 수많은 감독들을 지켜봐왔는데요. 제 생각은 달랐거든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나름의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퍼포머(performer)들에게 좀 더 능동적인 표현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싶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집착을 버리는 순간에 또 다른 기적이 태어나지 않을까 기대했던 거죠.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결과도 대단히 만족스러웠어요.

 

홍상현

감독의 입장에서 가장 애착을 갖고 계신 장면은 뭔가요.

쿠도 마사아키

아... 정말 어려운 질문인데요. 사쿠라와 루가 전철에서 수다를 떠는 장면을 꼽고 싶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누구 하나 편할 사람이 없고, 당연히 본인들도 당장의 생계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인데 전혀 쓸데없는 내용으로 수다를 떨거든요. 이 자체 무척 영화적일뿐더러 관객들도 웃으며 공감해주셨던 샷이라 애착이 많이 갑니다. 촬영현장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는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사회 전체적으로 누구하나 편할 사람이 없고, 당연히 본인들도 당장의 생계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인데 전혀 쓸데없는 내용으로 수다를 떨거든요. 이 자체 무척 영화적일뿐더러 관객들도 웃으며 공감해주셨던 샷이라 애착이 많이 갑니다. 촬영현장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는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쿠도 마사아키 감독은 이 신을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으로 꼽았다. (C)allen
"사회 전체적으로 누구 하나 편할 사람이 없고, 당연히 본인들도 당장의 생계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인데 전혀 쓸데없는 내용으로 수다를 떨거든요. 이 자체 무척 영화적일뿐더러 관객들도 웃으며 공감해주셨던 샷이라 애착이 많이 갑니다. 촬영현장에서도 아무 거리낌 없는 두 사람의 대화가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쿠도 마사아키 감독은 이 신을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으로 꼽았다. (C) allen

"촬영 당시에는 진짜 쫓기는 기분으로 스케줄을 진행했습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기보다 그저 죽느니 영화라도 한 번 찍어보겠다고 모여든 캐스트, 스태프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뿐이었지요. 게다가 무척 내향적인 정서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라 한국(BIFAN)이나 에스토니아(탈린 블랙나이츠 영화제) 관객들에게 선보일 기회가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죠.

<미증유>는 코로나19 자체의 공포보다 그것을 계기로 드러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인데요. 아울러, 사람들의 추악한 모습을 해부하는 한편,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청년세대의 사정을 잘 모르는 기성세대 분들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사는 일본만 보더라도 평균연령 50세라는 통계수치가 상징하듯 젊은이들이 대단히 적은 상황인데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기성세대 중에는 청년세대가 현실 속에서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런 분들로서는 보시기에 불편한 장면도 적잖이 나올지 모르지만 아무쪼록 세대 간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이 결국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점을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쿠도 감독의 입버릇이 하나 있다.

"저를 영화감독으로 키워주신 것도, 늘 따듯하게 맞아주고 격려해 주시는 것도 한국관객"이라는 말. 문득, 5년 전 눈에 들어오는 걸개그림부터 극찬을 하며 개막식 리셉션이 준비던 부천시청 로비에 들어서던 그를 떠올린다. 그렇게 마음껏 축제를 즐기던 쿠도 감독은 예정된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집으로 돌아가 서재에서 촬영된 넷팩상 수상소감을 보내왔다.

 

재회에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미증유>와 관련한 것 외에도 기쁜 소식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내놓은 또 한편의 신작 <파 쇼어>(2022)가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을 거쳐 작가성에 주목하는 방향성으로 유명한 도쿄필름엑스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것. 그 덕분인지 <파 쇼어>는 올봄, <미증유>도 올여름에는 극장에서 일반 관객을 만나게 된단다. (<아임 크레이지>는 BIFAN 초정 이후 개봉까지 1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일본에서 고정 칼럼을 연재하는 영화매체의 올해의 기대작 리스트에 그의 작품을 넣으며 생각했다.

작고 작은 극장에서라도 좋으니, 부디 올해에는 쿠도 감독이 그토록 사랑하는 한국관객들을 한국의 일반상영관에서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만날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고.

[인터뷰 홍상현, krpopper@ccoart.com]

홍상현
홍상현
 《코아르》 운영위원, 고토부키홈빌더 영화영상사업부 프로듀서.
정치학과 영상예술학 두 분야의 학위를 소지. 인문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으로 한일 양국 매체에 분석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연구실 출신.
 프로듀서를 맡은 장편 다큐멘터리영화 <포 디 아일랜더스>는 2008년 제주영화제 개막작이었다.
 2013년부터 월간 《게이자이》에서 담당하는 경제평론지면이 에히메대 와다 제미나르의 교재로 쓰인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지부인 일본영화펜클럽 회원.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 다수의 스테디셀러를 소개해온 번역가로도 유명하다.
 일본국제교류기금이 선정하는 “세계의 영화인 7인” 중 1인이며 일본 TBS(채널 6) 주최 디지콘 6 아시아 심사위원, 《마이니치신문》 영화웹진 《히토시네마》 필진 및 마이니치영화콩쿠르 심사위원, 다카사키영화제 시니어 프로듀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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