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 MAX] '이마 베프' 헤일, 카오스! (Hail, Chaos!)
[HBO MAX] '이마 베프' 헤일, 카오스! (Hail, Chaos!)
  • 이지영
  • 승인 2023.01.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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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왜 시리즈로 다시 태어나야 했나"

올리비에 아사야스(Olivier Assayas)의 96년작 <이마 베프>는 루이 푀이야드(Louis Feuillade)가 1915년에 만든 무성영화 <뱀파이어>를 리메이크하려는 프랑스의 중견 예술영화감독과 그를 둘러싼 카오스적인 영화 제작 풍경을 그린 메타 영화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홍콩의 스타 장만옥은 이 영화에서 라텍스로 된 캣슈트를 입고 무시도라의 전설적인 '이마 베프'를 재해석했다. 당시 마니아층에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하고, 칸 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에 오르며 이후 아사야스 커리어의 중요한 기점이 된 이 영화는, 26년 만에 HBO라는 미국 거대 자본의 지원을 받아 알리시아 비칸데르 주연의 8시간짜리 시리즈로 제작됐다.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시리즈 《이마 베프》(2022)는 리메이크에 대한 재리메이크이자, 감독과 배우들의 자전적인 요소까지 모두 섞여 있는 인공복합물과 같은 작품이다.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자기 반영적인 캐릭터인, 유럽국가 출신의 성공한 할리우드 여배우 '미라 하버그'를 연기한다. 커리어의 정점에 서 있는 그녀는 배우로서 연기의 전환점을 맞이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한물갔다고 하지만, 여전히 명망 있는 작가주의 감독 르네 비달(뱅상 맥케인)의 새 프로젝트에 합류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 입성한다.

신경증과 불안에 시달리다가 자주 현실에서 도피해버리는 르네 비달, LA에서 갓 영화학교를 졸업한 씨네필 어시스턴트 레지나(데본 로스), 마약 중독에 온갖 기행을 벌이지만 현장에서는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독일의 연기파 배우 고트프리트(라르스 아이딩거), 미라와 이전 연인들의 복잡하게 얽힌 사생활까지… <클라우즈 오브 실즈 마리아>(2014), <퍼스널 쇼퍼>(2016), 그리고 <논픽션>(2018)에서 배우와 영화 업계에 대한 메타적인 글쓰기에 능했던 아사야스는 이번에도 파리와 할리우드의 인간 군상을 재치 있게 그리는 한 편의 드라마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아사야스는 왜 수십 년 만에 <이마 베프>를 다시 소환했나?

《이마 베프》의 8화가 끝났을 때, "96년의 <이마 베프>는 숙명적으로 TV시리즈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진성 씨네필인 레지나가 알려주듯, 푀이야드가 만든 <뱀파이어>는 시리즈로 된 영화(Serial Film)였기에 시리즈로 만들어졌을 때 《이마 베프》는 원전과 같은 속도로 호흡할 수 있다. 즉, 런닝 타임이 98분 밖에 안 되는 아사야스의 전작인 영화 <이마 베프>에서 <뱀파이어>의 시퀀스들은 파편적으로 삽입되어 원작을 환기하는 제한적인 역할을 했던 반면, 2022년작 시리즈 《이마 베프》에서는 오리지널의 서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히 따라간다.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캐릭터 또한 주연부터 조연들까지 풍성하게 확장되고 여러 조합의 앙상블을 이룬다. 미라, 이마 베프, 무시도라라는 세 캐릭터를 연기하는 비칸데르 캐릭터가 더 입체적으로 진화했음은 물론이고, 뱀파이어 수장과 대결하는 모레노를 연기하는 고트프리트 캐릭터의 비중이 높아졌다. 96년작의 의상 담당 조에(나탈리 리샤르)가 두 인물로 분화된 듯한 레지나(데본 로스)와 조에(잔 발리바르), 그리고 로리(아드리아 아르호나)가 미라와 서로를 유혹하는 게임도 미묘하고 긴 호흡으로 묘사된다. 그저 장만옥의 그림자 때문에 중국계 여배우를 기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쉬움이 컸던 신시아 켕(천파라)마저, 마지막 뱀파이어의 연회에서는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테이블 위에 올라가 독보적인 춤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특히, 《이마 베프》는 캐릭터의 조형뿐만 아니라 메타 영화적인 측면에서 현시대의 감독들이 원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영화적인 순간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미끄러지고 실패를 반복하는 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고전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들, 예컨대 모레노가 이마 베프를 납치하는 씬을 수십 번 돌려 찍는 작가주의 감독의 예술혼, 혹은, 모두를 고문하는 아집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극장에서 우리는 완성된 단 하나의 버전을 보지만, 이 메타-(시리즈)-영화에서는 활용되지 않은 수많은 B컷을 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시리즈의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 <뱀파이어>, <이마 베프> 그리고 시리즈 《이마 베프》는 서로 교감하고 접합되고 서로 섞여 든다. 예컨대 시리즈 《이마 베프》의 한 챕터가 시작되면, 푀이야드의 고전영화 시퀀스로 시작하다가, 르네 비달이 연출한 시퀀스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여기에 96년의 <이마 베프>에서 매기가 호텔로 잠입하여 목걸이를 훔치고, 비 내리는 옥상에서 목걸이를 떨어트리는 분절된 쇼트들은 미라가 같은 장소에서 오마주로 연기하는 시퀀스와 투명하게 오버랩된다.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마지막으로, 《이마 베프》에는 수십 년 동안 감독과 배우들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자전적인 요소까지 한 데 녹아 있다. 미라 하버그와 르네 비달이라는 듀오는, 이미 기존의 분석에서 지적했듯이, 마지막 화에 등장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관계를 암시한다. 실제 스웨덴 출신으로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이 언제부터인지 미국 배우가 된 것 같다고 고백한다.

르네는 제이드(원조 '이마 베프'를 연기하고 르네 비달과 결혼 후 이혼한 중국계 여배우고, 이는 곧 장만옥에 대한 오마주이다. 아사야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 오마주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의 유령을 보게 되고, 나중에 미라와 셋이 조우한다. 매기에 대한 개인적인 상실감, 그녀 없이 <이마 베프>를 다시 만든다는 죄책감, 그러면서도 새로운 뮤즈에게서 다시 구원을 찾는, 일련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반영한다.

원전과의 더 긴밀한 교감, 메타 영화적인 고찰, 개인적인 애도와 커리어의 반추, 이 모든 조건 속에서 시리즈의 <이마 베프>는 결국 완성된다. 96년작에서 트뤼포의 페르소나였던 장 피에르 레오(Jean-Pierre Léaud)가 연기한 르네 비달은, 아직까지 작가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은 푀이야드의 현신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감독은 끝내 자기 확신을 갖지 못하고, 현장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영화 속 영화는 감독의 비전을 실현하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는다.

관객이 그 대신에 보는 것은, 촬영장 밖에서도 이마 베프 자체가 되어보고자 했던 매기의 우아한 움직임, 그리고 가편집본에 등장하는 그녀의 빛나는 눈과, 미디어 아트 같은 거친 선들이다. 장 피에르 레오에 비하면 너무도 인간적인 캐릭터인 뱅상 맥케인의 르네 비달(그가 이탈리아 씨네마테크에서 받은 듯한 에코백을 어깨에 걸치고 한 손으로 꼭 쥔 모습은 얼마나 겁에 질려 있는지!)은 결국, 미라의 도움으로 현장에 돌아와 자신의 작품을 완성한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다시 원전으로

올해 리마스터링으로 국내 재개봉한 <이마 베프>(1996)를 보면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진 것은 장만옥이 입은 캣슈트의 시각, 청각, 촉각적인 질감이었다. 의상 담당인 조에는, 매기를 섹스용품 샵으로 데려가서 라텍스 재질의 캣슈트를 입힌다. 르네 비달이 팀 버튼의 <배트맨 2>에서 미셸 파이퍼(가 연기하는 캣우먼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사실은 본인의 성적인 판타지 일수도 있겠다.) 감독은 코스튬 안에서 자신이 아닌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얘기하지만, 옷은 매기의 숨을 조이고, 마찰되는 소리 때문에 은밀한 행동을 제약하며, '예쁜 플라스틱 인형 같지 않아?' 라는 속삭임까지 나오게 한다.

 

영화 <이마 베프>(1996) ⓒ 무비다이브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반면 벨벳으로 만든 비칸데르의 캣슈트는 무시도라가 입었던 코스튬의 원형에 다가간 듯한 인상을 준다. 부드럽고, 배우 본연의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무엇보다 무성 영화처럼 조용하다. <둠스데이>의 하얀 플라스틱 재질의 코스튬에서 이마 베프의 코스튬으로 바뀌는 것은, 그녀가 다른 세계에 편입되었음을 상징한다.

미라는 매기보다 훨씬 자유롭게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여러 번에 걸쳐 실현하며, 끝내는 벽과 벽 사이를 통과하고 지붕까지 뚫고 올라가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다. 이 상징적인 코스튬을 루이비통(Louis Vutton)의 디자이너, 니콜라 게스키에르(Nicola Ghesquière)가 디자인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독립영화 시절에는(영화 <이마 베프>) DC코믹스를 상기하는 캣우먼 슈트를 입고, HBO의 제약없는 서포트를 받게 된 지금은(시리즈 《이마 베프》) 프랑스의 대표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적인 원형을 보존한다는 것은 시대 차에서 오는 재미있는 아이러니일 테다.

파리 영화계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인 것은 매기와 미라가 같은 처지이지만, 미라는 자신의 이방인됨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서도 더 주체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여자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매기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대답하는 반면, 미라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조에에게, 로리를 좋아하지만 자신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녀는 (고트프리트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을 유혹하지만, 누구에게도 끝까지 종속되지 않는다.

미라를 통해 우리는 21세기에 현현한 무시도라를 상상할 수 있다. 무시도라는, 이마 베프는 곧 매혹이며, 자유이다. 그녀는 감독의 정신적인 지주나 상담 치료사 같은 역할을 하고, 영화의 최대 물주인 고티에(파스칼 그레고리)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녀는 자본주의조차 매수하기를 욕망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녀는 이마 베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지만, 본인은 파리뿐만 아니라 이마 베프라는 세계에 속해 있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미라가 지붕 위에 올라가 파리의 빛나는 전경을 조망하는 8화의 엔딩 씬은, 미라가 파리라는 세계로부터 홀로 소외되지 않고, 일대일로 마주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영화라는 미몽에서 깨어날 때

《이마 베프》의 마지막 화에서 르네 비달은 신비주의적인 화법으로, 영화가 마치 흑마법처럼 이마 베프의 영혼을 깨우자, 이마 베프의 영혼이 새로운 숙주를 찾았다고 미라에게 이야기한다. 영화라는 그들만의 종교에 경도된 것 같기도, 망상증 같기도 한 이런 모습은 대형 플랫폼과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프랑스 예술영화계의 강박증을 보여줌에 다름없다.

지금도 마블과 DC에서는 새로운 슈트를 입은 히어로들이 양산된다. 이에 비해 이마 베프의 검은 캣슈트를 입을 수 있는 배우는 이마 베프의 영혼에게 선택을 받고, 그녀를 그저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배우가 캐릭터 그 자체가 된다는 환상이다. 실제로도 비칸데르의 연기는, 그녀의 발레리나 경력과 어우러지며 너무나도 고혹적이어서, 그녀 외에 다른 이마 베프를 상상하기 힘들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이마 베프>는 비칸데르 커리어 중 최고의 연기다.)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하지만 작품이 끝나거나, 채 끝나기도 전에, 영화와 감독과 배우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미라는 촬영기간에 빙의에 가까운 체험을 하고, 이마 베프와 완전한 합일을 이룬 듯 하지만, 이내 <킹덤 컴>이라는 더 대단한 프로젝트의 주요 역할을 맡게 된다. 이제 이마 베프의 어둠의 세계는 끝나고, 그녀는 메레디스라는 빛의 세계로 편입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가 떠나면,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여배우가 연기하는 '이마 베프'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작품이 끝난 뒤의 상실감을 심리 상담가에게 털어놓는다. 이는 마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자기 고백처럼 들린다. 영화란 세계는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권태로운 일상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지켜주는 이들이 있다. 르네 비달은 그토록 애쓰고 매달려온 영화보다, 사실은 가족을 더 사랑한다고 남몰래 고백하며, 이 속내를 이마 베프로 분한 미라에게 들키고 만다.

그렇다면, 르네 비달과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루이 푀이야드가 되고,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장만옥이자 무시도라가 되었던 순간들은 그저 환영일 뿐이었나? 환영 그 이상의 무엇이었나?

이들은 영화라는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영화는 이들의 내면에 어떤 인장을 남긴 채, 서로 헤어진다. 감독도, 배우도, 영화조차도 각자가 지루하고 반복되는 삶을 이어간다. 고트프리트의 연설에 따르면, 이 일상을 다시 깨어줄 유일한 대상은 예술이며 영화이다. 정확히는 모두가 우연히 모여서 또 다른 영화가 태어나는 찰나의 순간이다. 무질서와 예술적 충동을 찬양하는 고트프리트는, 그의 고별사에서, 삶의 질서를 잠시나마 흐트러트리는 영화라는 카오스를 경배한다. "헤일, 카오스!"(Hail, Chaos!)

[글 이지영, karenine@ccoart.com]

 

시리즈 《이마 베프》 ⓒ HBO

이마 베프
Irma Vep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Olivier Assayas

 

출연
알리시아 비칸데르
Alicia Vikander
빈센트 맥케인Vincent Macaigne
노라 함자위Nora Hamzawi
앙투안 라이나르츠Antoine Reinartz
잔느 발리바Jeanne Balibar

 

제공 HBO MAX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8부작
등급 19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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