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간극의 스크린 광장
[Critique] 간극의 스크린 광장
  • 변해빈
  • 승인 2023.01.22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실패가 남긴 것

극 속 영화감독 롤라(페넬로페 크루즈)가 기자회견에서 어느 기자의 질문에 진저리 내며 답한다. "영화는 그 자체로 무언가일 뿐 모든 부분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글은 한심하다는 듯 구는 그녀의 어투에 동감과 반발심을 동시에 품으면서 썼다.

 

ⓒ 왓챠, 진진

느낌들의 극단, 간극의 착시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극단의 두 자극 요소가 부딪히면서 발생하는 감각적 반응으로서 모종의 착시를 유발하는 작품이다.

영화가 초당 여러 개의 이미지가 잇따라 제시될 때, 정지와 연속성이 충돌하며 발생하는 움직임의 착시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때의 초당 이미지와 그것의 움직임이 영화의 스크린 면적 자체로 감각된다면,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스크린의 전체 면적을 그야말로 광장처럼 응용하면서 스크린 내부에 또 다른 스크린을 설치미술처럼 디자인한다. 영화의 스크린과 설치 스크린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존재하고, 그러한 대극적 자극과 감각의 충돌이 이 영화의 느낌들의 상호작용을 만들어낸다.

가령 영화 속 공간의 성격을 빌리자면, 각 시퀀스는 공간의 물리적 이동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에서 사방을 대리석, 시멘트, 유리창, (무대의) 붉은 커튼으로 건축한 어느 공간 내부에서 방향만 바꿔가며 전개된다. 쉽게 말해 사방의 다른 재질의 벽 중 무엇을 뒷배경으로 삼아 인물을 배치하는가의 차이다. 이 벽들은 앞서 말한 스크린 내부의 스크린으로 작동하면서 그 속성에 따라 여러 개의 상이 포개어지기도, 동일한 하나를 조각내기도, 실제와 상반되는 인상을 조성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파도의 물결을 닮은 무늬가 그려진 푸른 대리석 타일 벽을 배경으로 촬영된 장면은 정지되고 차가운 평면 속에서 발생하는 파도의 율동감, 곧 허구적이고 납작한 움직임을 발생시킨다. 그 앞에 선 인물 역시 정적인 몸짓으로 말 그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대리석 타일과 이를 포함한 영화의 스크린을 동시적으로 시감각 하면서 인물의 내면이 더없이 혼란스러운 상황임을 유추하게 된다.

요컨대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이러한 정지와 움직임, 실재와 허구, 인위적인 해석과 자연적인 현상을 비롯해 텅 빔과 가득 참, 삼엄함과 헐거움, 흘러넘침과 가두어짐 등의 간극이 벌어지는 광장으로서 스크린을 다룬다.

 

ⓒ 왓챠, 진진

무해하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스크린 속 간극을 말하기 이전에, 인물들이 지닌 간극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망을 얻고 싶은 억만장자 움베르토(호세 루이스 고메즈)가 제작하는 영화에 투입된 감독 롤라, 그리고 두 배우 펠릭스(안토니오 반데라스)와 이반(오스카 마르티네즈)은 천재 아니면 괴짜로 불린다. 극단적인 두 표현의 동일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보이지 않는 미묘한 차이에 대한 강박적 집착, 말초적 감각의 과도한 증폭. '천재 아니면 괴짜' 캐릭터에게서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속성이다. 그러한 간극이 이 영화의 블랙 유머를 위한 장치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보다 여기서는 세 인물을 에워싼 간극을 지켜보며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이 역설적으로 무해함을 강조하고 싶다. (극의 후반부 죽음의 기운을 고려하면 다소 의아할 수 있겠으나) 행위 목적과 결과 자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영화 속 블랙 유머가 드러내는 본질이 인간의 이면을 직설적으로 간파하는 부분이 그렇다.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영화 《라이벌》을 찍기 위해 리허설하는 과정(이자 롤라의 표현으로는 훈련)으로 엮어지는데, 각 시퀀스는 불안, 위태로움, 분노, 희열, 욕망, 허무 등으로 칭할 수 있을 정도로 세 인물의 정념의 폭발적인 고조와 저조, 그걸 자극하고, 억제하는 진폭의 거대한 운동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는 이반이 배우 지망생 제자들에게 말하듯, "기껏해야 한 명"이 자기 선택을 결과로 증명할 수 있는 소위 '그 세계'의 암묵적인 룰 속에서 되려 그들의 고조와 저조, 자극과 억제의 기묘한 혼합은 더할 나위 없이 순진하고 꾸밈없는 반응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투명성을 다른 축에서 말하면, 그로 인해서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따분하거나 빈약하게 느껴질 수 있다.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블랙 유머는 일부분 예상 가능하거나 그 돌발성의 패턴이 점차 투명하게 읽히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반영성이 내포된 '라이벌'이라는 영화 제목과 그 내용만 해도 펠릭스와 이반의 극명하게 다른 성향과 경쟁의식, 욕망의 충돌로 인해 낱낱이 부딪히고 어긋나는 균열을 게으를 만큼 직접적으로, 지루할 만큼 반복적으로 설명해낸다(우습게 들리겠지만 개인적으로 《라이벌》보단 차라리 간소한 언급에 그친 롤라의 전작 <거꾸로 내리는 비>, <공허>, <연무>가 더 궁금했다).

타인(캐릭터와 관객)을 속이고 또 속아 넘어가기를 거듭하다 "어떤 영화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라는 관념적으로 굳어버린 속임수로 '끝내는'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결말은 그저 예술적 사유와 품위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내실 없는 기표와 맥거핀의 나열은 상징투쟁이 되기에는 영화적 허세와 허위적 의미망 속에서 관객의 관습적인 수용을 기대한다. 더군다나 이는 단순한 개성으로 오인되기 쉽다.

 

ⓒ 왓챠, 진진

간극의 평면적 겹침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던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각 시퀀스를 채우는 운동감, 다시 말해 영화의 몸체, 스크린의 몸짓으로서의 공간을 둘러싼 느낌들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두고 싶다. 개별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보다 시야각을 넓혀서 자신 스스로를 어찌할 줄 몰라하는 인물들이 벌이는 괴이한 행위가 삼엄한 공간적 규격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말이다. 대리석 타일에 의한 허구적 운동감으로 짧게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정해진 범주를 초과해 흘러넘칠 것 같지만 흘러넘치지 않는다. 혹은 가두어져 있지만 범람하는 듯한 율동감이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운동하지 않는 흘러넘침과 가두어짐의 느낌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크레이지 컴페티션>에는 (극단적인) 롱 쇼트와 (극단적인) 클로즈업 쇼트가 자주 쓰인다. 아니, 그렇게 구성되었다는 것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대개 롱 쇼트와 고정 카메라를 활용해 시야가 미치는 범주를 확장하는 영화들은 시선을 화면 전반에 고르게 분산시키면서 각 관객의 능동성을 추구하나 이 영화는 오히려 무엇인가 규격화되어 있다. 물론 절대적으로 시선을 통제하기란 불가하지만, 넓고 적막한 스크린 내부에서 격렬하게 운동하는 협소한 한 부분에 유혹되게 만들고서, 그 강렬한 격차로 인해 마치 영화가 어수선하고 역동적이라는 착시·착각을 일으키는 식이다. 이는 단지 시감각의 차원만이 아닌데, '키스신 훈련' 장면에서처럼 거대한 정적 안에서 미세한 마찰음을 증폭해 들려줄 때 느껴지는 고조와 저조의 극명한 간극, 그 차이가 무언가를 흘러넘치게 하면서 동시에 엄격하게 가두는 느낌들의 상호작용을 일으킨다.

구체적인 장면 하나를 이야기해보자. 때는 롤라와 두 배우가 카메라 테스트 중인 영화의 중반부이다. 롤라의 거듭된 요구에 자존심 구긴 펠릭스가 우발적으로 욕설을 내뱉고선 이를 무마하고자 시한부를 앞뒀다며 거짓으로 호소한다. 펠릭스를 제외하고 모든 인물(캐릭터와 관객)은 거짓을 의심할 수조차 없는 가운데, 롤라와 이반은 크게 동요하며 펠릭스를 부둥켜안는다. 이 장면을 구성하는 쇼트들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우선 그 광경이 두 개의 스크린을 통해 보여진다는 것이다. (1) 넓은 화각(극단적 롱 쇼트)으로 촬영된 영화 자체의 면적으로서 스크린 (2) 롤라의 카메라를 경유해 펠릭스의 거대한 얼굴(극단적 클로즈업 쇼트)을 송출하는 스크린 내부에 설치된 또 다른 스크린이다. 영화는 멀리서 인물들의 절제된 전신의 움직임, 동선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서,(1) 동시에 설치된 스크린에 비친 거대한 얼굴상을 통해 인물의 눈동자와 얼굴 근육 따위의 미세한 움직임을 격렬하게 포착한다.(2)

 

ⓒ 왓챠, 진진

위의 장면에서는 스크린이라는 사물 자체를 전면화했지만 이를 대신해 스크린의 기능을 대체하는 도상 개념으로 간접 제시되기도 한다. 바로 거울과 얼굴이다.

영화는 인물이 굳이 우리를 등지게 한 뒤, 반대편에 설치된 여러 개의 거울 속 반사된 상으로 이들의 얼굴(넓게는 앞모습)을 보게 한다. 이 거울들은 한 프레임에 담긴 이중 스크린의 차이처럼 동일한 몸짓과 상황을 교묘하게 비튼 각도, 저마다 다른 높낮이와 크기로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우리는 시작에서 롤라가 두 배우의 얼굴 사진을 콜라주하던 행위도 떠올려볼 수 있다. 이반의 얼굴 면적(하나의 스크린) 위로 조각낸 펠릭스의 눈과 입의 사진(또 다른 스크린)을 겹쳐 올리는 차원이다. 형제간의 존속살인을 매개한 《라이벌》에 따라 실제 펠릭스가 이반을 음해하고 1인 2역을 차지하는 전개에 대한 이보다 노골적인 복선이 또 있겠냐마는, 거울과 얼굴과 스크린은 일련의 다중 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동형적이다. 얼굴과 전신, 오른쪽과 왼쪽, 앞과 뒤, 심지어 펠릭스와 이반처럼 다르다고 여기게 하는 간극이 실은 근접하게 붙어있기 때문임은 《라이벌》과 <크레이지 컴페티션>이 공통적으로 힘주어 말하는 접점이기도 하다. 우발적으로 살인한 펠릭스가 거울면을 통해 (허황되기 짝이 없게) 자기 최면에 성공하고 마는 것은 욕망과 금기가, 죽음과 삶이 하나의 공간 속 서로 다른 벽면처럼 근접하게 붙어있기 때문이다.

다중 창은 영화뿐 아니라 설치미술, 명화, 사진 등에서 도상적으로 풀이될 만큼 흔하게 사용되는 기호이자 작법이다. 이미 지적한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한계의 맥을 잇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만, 이 다중의 창들이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공간과 차원을 무한대로 확장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좋게 말하면 '몰입'이고 직설하자면 폐쇄적으로 '고립'을 유도하는 쪽이다. 다중의 창들은 다면체와 같이 영화의 깊이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앞과 뒤, 우측과 좌측, 이쪽과 저쪽을 평면적으로 겹치고 또 납작하게 펼친다. 달리 말하면 이면은 있지만 내면은 없거나 유추에 그칠 뿐이다. 인물들이 꾸밈없이 밖으로 드러내는 정념의 폭발은 엄연하게는 외면이지, 사유된 내면은 아니다. 이 영화에 관해 "흘러넘치면서 가두어진다"는 역설은 서로를 침식시키지 못하는 외면의 서로 다른 이면들의 동시성 또는 척력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크레이지 컴페티션>이 주는 느낌들의 상호작용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겹'이다.

'카메라 테스트 훈련' 장면에서 눈여겨볼 또 다른 쇼트들도 떠올려본다. 설치된 내부 스크린 속 펠릭스의 얼굴(2)은 겹겹이 포개어지면서 겹겹이 분리된다. 펠릭스의 얼굴을 담은 스크린에서 반사된 (정확히는 빛의) 형상이 반대편의 대리석 타일 벽과 부딪히며 반투명하게 비친다. 그 흐릿한 상은 대리석 벽 앞에 위치한 롤라와 이반의 그림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화면 안에 실재 펠릭스는 없지만, 그는 롤라와 이반이 느끼는 심상의 그림자를 대체하면서 두 사람 주변으로 드리운다. 이 그림자의 내막에 존재하는 속임수를 현재로서는 알고 있기 때문일까? 여하간 앞으로 덮칠 미래의 잔상 같기도 하고, 지나온 과거의 지난한 여운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어진 컷에서 롤라와 이반은 펠릭스를 향해 걸어가 물리적으로 접촉한다. 그림자가 화면 너머에서 온 기운이라면 부둥켜안고 신체를 맞닿은 세 개의 몸의 겹침은 하나의 스크린 안으로 직접 침투하면서 성사된 것들이다.

 

ⓒ 왓챠, 진진

하지만 누군가 이 겹침을 두고 공백을 메우는 온기보다는 시지각적 불안과 착시에 시달렸다면, 이 몸체들 뒤에 설치된 스크린, 그 속에 교묘하게 각도가 비틀리고 형상을 똑바로 알아볼 수 없게 잘려나간, 그러나 동일한 인물들의 형상이 겹쳐 비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위 쇼트에 담긴 속임수를 몰랐을 때도 알고 난 뒤에도 음울하기는 마찬가지다.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겹침은 간극을 전제한다. (아마 롤라의 자기혐오 때문인듯한데) 하지만 속임수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가로막히는 자의 음울함은 극단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겹칠 수 없는, 깊이의 간극

한 쇼트에서 비롯된 의문이지만 영화의 전체 골격으로 확장해보자. 《라이벌》은 영화의 시작에서 롤라가 (움베르토와 관객에게) 결말을 제외하고 모조리 설명해버린 내용대로 정확하게 겹친다. 《라이벌》에서 형을 살해한 동생이 속임수를 써 형의 세상으로 들어가듯이,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동생을 연기한 펠릭스가 이반을 혼수상태에 빠트리고 1인 2역을 차지한다. 이대로 두 축은 나란히 겹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라이벌》과 <크레이지 컴페티션> 사이에 간극이 있어서다. 단지 이반이 죽지 않고 깨어나서? 드러난 결과를 반영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단 드러나지 않은 결과를 끄집어내고 싶다.

롤라가 《라이벌》을 설명하던 장면의 끄트머리, 결말이 채 설명되지 않았다. 여기서 영화는 돌연 건물 바깥으로 이동해서 인물과 관객 사이에 벽(유리창)을 만들고는 롤라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해 버린다. 롤라가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엔딩에서 말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영화'에 대한 복선일까? 거기에 동감하기엔 어딘지 반발심이 든다. 움베르토는 결말을 직전에 두고 두 형제가 끔찍하게 다투다가 끝내 사과하고 용서하는지 묻는다. 롤라가 답한다. "남자들은 우니까요." 나는 이 호응이 '사과하고 용서하면서 운다'라는 '동감'으로도 들렸고, '사과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운다'라는 '반발'로도 들렸다. 어느 쪽이든 리허설했던 《라이벌》의 엔딩에서나 <크레이지 컴페티션>의 엔딩에서 역시 사과나 용서는 딴 세상 이야기 같다. 그런데 울음(눈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개와 절망, 파멸의 눈물마저 제거되고 만 걸까?

 

ⓒ 왓챠, 진진

당연스럽게도 "<크레이지 컴페티션>이 울음보다 웃음과 어울린다"는 말은 거듭 돌이켜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울음이 불필요하거나 불가피하다는 연결과 들어맞는 사실도 아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영화를 억지로 슬프게 몰아넣을 생각은 없다. 다만 영화 속 웃음들이 어떤 간극 속에서 발생한 것이며, 그 간극에 자극과 억제의 상호작용이 관여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무언가를 참을 때 다른 이면이 촉발된다. 이때 인물들이 유독 실패하고 마는 것이 눈물 흘리기라면?

시한부를 운운하던 펠릭스의 가짜 흐느낌은 두말할 것도 없고, 리허설에서 굳이 진짜 눈물을 흘릴 필요가 있느냐는 이반에게 롤라는 그것이 진실을 꺼내는 일이라고 단언한다. 이들에게 눈물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호소와 요구가 필요한 일이다. 롤라의 울먹임은 어떤가. 살인 후 자기 최면에 성공한 펠릭스가 이반의 죽음에 대해 놀라운 기색을 띠며 반응(연기)할 때, 그 반대편에는 울먹이던 롤라가 있었다. 군중과 외따로 떨어진 롤라는 물리적으로 먼 거리(극단적 롱 샷)에서 펠릭스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응시한다. 시지각적 클로즈업, 그것이 이뤄낸 물리적 격차의 감소는 다름 아닌 직감과 예감이며 느낌이다. 그럼에도 살인 용의자로 의심할 따름이겠지만, 롤라는 불길한 진실을 '다 아는' 기색으로 펠릭스를 클로즈업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그다음, 기자회견에서 펠릭스와 이반의 관계를 묻는 질문 앞에서 그녀는 마구 웃어 보인다. 불길한 진실로 향하는 통로를 웃음이 가로막는다. 웃음이 흘러넘치려는 울음을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가로막는다.

<크레이지 컴페티션>과 《라이벌》 사이에는 롤라의 '웃음'이 있다. 웃음과 울음은 좌우와 앞뒤, 크고 작은 평면적인 겹침이 아니라 겉과 속,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깊이로 관계된다. 다시 롤라의 음울한 쇼트를 떠올리면, 그때의 음울함이 간극을 배제하는 건 깊이의 정서, 곧 인생의 심연이 개입되기 때문인 것 같다. 엔딩에서 클로즈업된 롤라는 잠시 스크린 벽을 넘어 빠져나와 페넬로페 크루즈가 되었다가 다시 스크린 너머로 들어간다. 둘 중 누구인지 또렷하게 구분하긴 어렵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한 비감이 느껴졌다면 이건 비약일까. 분명한 건 줄곧 드러내던 표정과는 달랐다.

어쩌면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영화이지만, 롤라에게 <크레이지 컴페티션>은 인생이고 《라이벌》은 영화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의미 찾기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고 인생이 무너질 리 없다. 하지만 영화가 누군가의 인생이라면 좀 암울하다. 이것이 롤라의 천재적 기질일 수 있겠지만 <크레이지 컴페티션>과 《라이벌》 사이에, 그러니까 롤라의 인생과 영화 사이엔 간극이 별로 없어 보인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 우울한 항변으로도 들린다. 그녀의 말처럼 영화가 매번 의미를 줄 리는 없다. 그 대척점의 인생이라고 매번 의미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로막힐 것을 전제하고서도 이 간극의 광장을 흘러넘치게 걷는 수밖에 없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왓챠, 진진

크레이지 컴페티션
Official Competition
감독
마리아노 콘
Mariano Cohn
가스톤 두프라트Gaston Duprat

 

출연
페넬로페 크루즈
Penelope Cruz
안토니오 반데라스Antonio Banderas
오스카 마르티네즈Oscar Martinez
호세 루이스 고메즈Jose Luis Gomez 
마놀로 솔로Manolo Solo

 

수입 왓챠
배급 왓챠|진진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15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12.28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