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당신의 아이돌은 결코 모에(燃え)하지 않다
'그 시절' 당신의 아이돌은 결코 모에(燃え)하지 않다
  • 김경수
  • 승인 2023.01.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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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영영 해결되지 않을 질병"

<그 시절>(2020)을 보고는 '이마이즈미 리키야'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조금 더 알려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비교적 한국에 덜 알려진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은 이따금 일본의 홍상수란 명칭으로 소개되는 것이 전부다. 여태껏 <좋아해, 너를>(2014), <사랑이 뭘까>(2018) 등 그의 영화가 드문드문 국내에 개봉했지만 큰 인기를 끈 적도 없을뿐더러, 대체로 사랑을 다루는 일본 청춘 로맨스의 틀 안에서 소비된 감이 없지 않다.

 

다만, 지금껏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이 찍은 영화를 단순 청춘 로맨스로 보기에는 기이하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만화적인 연출, 감상적인 대사와 거기서 오는 낭만, 오해와 다툼 끝에 불현듯 느끼는 깨달음, 극적인 재회 등의 전형적인 요소가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 그의 영화는 건조한 연출, 일상에서나 쓸 법한 대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흔한 교훈을 전달하려 하지도 않고, 판타지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다. 또 인물은 죄다 마음이 병들어 있기 일쑤이며, 배경은 하나같이 '도쿄'다. 물론, 이것이 소재 차원에만 그치지 않는다. 감독은 이를 태도이면서도 영화 문법으로까지 확장한다. <그 시절>은 헬로!프로젝트의 마츠우라 아야의 오타쿠가 되기 시작한 시작한 츠루기(마츠자카 토리)의 회고록을 각색한 영화로, 이마이즈미 리키야의 영화적인 개성이 한껏 드러난 작품이다. 그는 다작을 이어가면서도, 각본을 자신이 쓰지 않지만 상업 영화에다가 고유한 인장을 영화에 남길 수가 있는 드문 재능을 지닌 감독이며, 이 작품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은 '츠루기'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를 주인공으로 두지 않는다. 되려 헬로!프로젝트의 팬이었던 일곱 남자, 그중에서도 코즈민(나가노 타이가)을 중심으로 한다. 츠루기는 대학원 입시에도 실패하고, 활동하고 있는 인디밴드에서도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탈퇴한다. 그때 츠루기의 친구 사에키가 힘내라며 마츠우라 아야의 뮤직비디오가 담긴 CD를 선물한다. 츠루기는 그 뮤직비디오를 보고는 울더니 급작스레 헬로!프로젝트의 앨범을 사러 달려 나간다. 거기에서 그는 헬로!프로젝트 덕질을 공유하는 여섯 명의 팬과 만난다. 츠루기는 그들과 어울려 다니며 좌절을 달래지만, 그 시절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열등감에 절어 있는 호색한이자 문제아인 코즈민으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로 인해서다. 코즈민은 츠루기의 대학 후배에게 접근하고, 같은 멤버의 여자친구를 건드린다든지 하는 문제를 일으키고 다닌다. 나머지는 그를 팬이라는 동지애 하나로 감싸려 하지만 버거워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2005년 모닝구무스메의 이시카와 리카의 졸업을 필두로 해서 모든 멤버는 각자의 생업에 집중한다. 2008년, 코즈민이 폐암에 걸리며 그들은 다시금 뭉치게 된다.

 

극 중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다. 츠루기가 마츠우라 아야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장면은 어쩐지 이상하다. 츠루기가 아야를 보는 순간에 카메라는 어떠한 제스처도 없이 멀뚱히 보고만 있다. 카메라는 츠루기가 기어이 눈물을 흘릴 때까지 거리감을 유지하고, 아야가 춤을 추는 영상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도 쭉 아야의 팬이 될 이에게는 운명적인 첫 만남으로 보인다. 감독은 이러한 순간에 있는 낭만을 카메라로 벗겨낸다. 이때 아야가 춤추는 영상과 츠루기가 처음 감탄에 잠기는 장면은 가상의 숏 교환으로도 볼 수 있다. TV에 있는 대상과 TV 밖 시청자는 대화는커녕 감정조차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TV와 그것을 보는 시청자의 숏 교환은 어떠한 감정을 매개하는 듯하다. 시청자는 TV를 보고는 감동받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한다. 보통 카메라는 이를 해명하고자 둘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착시를 만든다. 츠루기가 아야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우는 장면이 인상 깊은 것은, 감독의 카메라가 보통 사람이 외면하는 착시를 폭로해서다.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은 사랑에 열광하는 연인을 그리되 그들을 보고 있는 '응시'를 드러낸다.

<사랑이 뭘까>에서 야마다 테루코(키시이 유키노)는 타나카 마모루(나리타 료)에게 매달린다. 그러나 모든 인물이 저마다 다른 이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부터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은 이들을 롱테이크로 찍는다. 응시는 영화의 엔딩에서 드러난다. 야먀다 테루코(키시이 유키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서 떠나고 엔딩에 이르러서 코끼리에게 먹이를 준다. 이때 테루코는 코끼리를 보고서는 스스로의 사랑을 되돌아보게 된다. 감독은 이 순간을 음악도 없이 롱테이크로 이어나간다. 그는 마법화라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영화에 차단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메마르게 탐구한다. 아이돌 덕질도, 짝사랑도 그에게는 그러한 사랑에 빠지는 이들만이 매몰되는 판타지에 가깝다.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영영 해결되지 않을 질병으로 그려진다. 감독의 냉소 어린 태도는 영화 전반에 드러나며, 감정의 인과가 잘 연결되지 않는 지점을 파고든다.

 

영화 <사랑이 뭘까> ⓒ 엣나인필름

<사랑이 뭘까>는 개인의 차원에서, <그 시절>은 사회의 차원에서 사랑이 왜 병적인가 그려낸다. 대신 <사랑이 뭘까>에서는 동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하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사토리 세대 이후 청년의 풍속도가 배경으로 그려지는 데에 비해서, <그 시절>은 그보다 더 사회적인 맥락과 이어진다. 에반게리온에 이르기까지, 일본 하위문화의 중심은 '아니메'다. 1980년대 중반부터 마츠다 세이코를 중심으로 한 아이돌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대중문화의 테두리 안에서만 소비되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모닝구무스메 등의 성장형 아이돌이 등장했다. (3대 대형 기획사가 틀을 만든) 한국의 여성 아이돌이 완성형으로 등장하는 데에 비해서, 일본 아이돌은 어떠한 시절을 함께 거쳐 간다는 동질감에 의해 팬이 형성된다. 성장형 아이돌과 함께 그들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어렴풋한 소망은 멤버의 졸업이라는 이벤트로 완성된다.

<그 시절>은 성장이 아예 불가능한 시대에 아이돌을 통해서나마 성장을 꿈꾸던 시대의 이면을 드러낸다.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은 츠루기가 아니라 코즈민이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두쇠에 변태에 못돼 먹은 쫄보에 키보드워리어이기까지 한 코즈민은 일본 하위문화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한 데에 압축한다. 츠루기와 친구들이 아야를 덕질하는 것은 성적인 대상이 아니라 성장에 좌절한 그들의 안식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코즈민은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이해하고 있고, 이윽고 폐암이라는 육체의 제약으로 인해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하츠네미쿠 등의 피규어를 병실에다가 두고 자위한다. 코즈민은 2D를 사랑하는 데에 이르러서야 육체적인 자격지심에서 벗어나 편안해진다. 그는 죽을 때도 병상 옆 피규어에 둘러싸여 죽어간다. 감독은 이를 롱테이크로 포착하며 그가 숨을 거두는 과정을 그대로 비춘다. 이때 모닝구무스메의 '연애중恋ING'이라는 노래를 삽입한다. 이는 모닝구무스메가 되돌아가야 하는 완전한 세계로 가정하는 것이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사는 코즈민의 시대착오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성매매범 코즈민의 최후는 상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모에(燃え)화한 것에 대한 징벌로도 보인다.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는 사회의 응시를 매개한다. <사랑이 뭘까>가 개인의 차원에서 짝사랑이 만드는 병증과 관계에서의 불안을 설명하고자 했다면, <그 시절>은 아이돌 팬덤을 예로 사회적인 차원에서 짝사랑이 여성혐오를 생산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이는 여성 아이돌 그룹을 소비하는 남성 팬의 고유 하자를 담고 있다.

<그 시절>은 우리가 스스로 청춘이라 불렀던 시절의 잔여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때 얼마나 그것이 흉한지 드러낸다. 또한, 자라나지 못한 이들이 어떠한 최후를 맞이하는지를 설명하며, 그 시절로 남아야만 하는 어떤 시기를 이야기한다. 이 작품을 보고 '이마이즈미 리키야'의 이름을 감히 하마구치 류스케나 미야케 쇼 등 주목받고 있는 동시대 일본 감독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적고 싶어진 이유다. 이 감독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병적인 순간을 롱테이크로 포착하는 재능은 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 추신

아이돌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려 하는 이에게는 윤혜은의 에세이 『아무튼 아이돌』을 추천한다. 뉴진스는 물론 여러 여돌의 팬으로 이 책만큼이나 아이돌 팬의 마음을 잘 설명하는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돌을 보고자 일산에서 판교까지 가는 순간에 자신이 덕후라는 것을 자각했다"는 문장을 보고는 심장이 안 울린다면, 덕력을 더 충전해야 한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그 시절
In Those Days
감독
이마이즈미 리키야
Rikiya Imaizumi

 

출연
마츠자카 토리
Matsuzaka Tori
나가노 타이가Nagano Taiga
야마나카 타카시Yamanaka Takashi
와카바 류야Wakaba Ryuuya
세리자와 타테토Serizawa Tateto
오오시타 히로토Hiroto Oshita
키구치 켄타Kenta Kiguchi
나카타 세이나Seina Nakata
카타야마 유키Yuki Katayama
니시다 나오미Nishida Naomi

 

수입|배급 KT alpha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17분
등급 12세 관람가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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