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마더스' 느릿한 시간, 머무르는 몸짓
'트루 마더스' 느릿한 시간, 머무르는 몸짓
  • 변해빈
  • 승인 2023.01.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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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안에 내맡겨진 채 미스터리를 풀다"

한 중년 부부가 아이를 원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연 임신이 불가하다. 오랜 시술마저 포기하고 둘이 살아가기로 한 부부는 과거 그들의 데이트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돌로 만든 건축물이 보존된 자연공원에서 남편이 비경에 감탄하며 말한다. "이게 바로 지구의 기억이야." 자연이 쌓아 올린 기억의 자장 안에서 손을 맞잡던 부부는 잠시 후 입양 단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란히 생각한다. '아이가 있는 가족을 만들고 싶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들은 어느 중학생 소녀가 낳은 아이를 입양한다. 부부가 아이와 처음 만나던 날, 아이와 이별하게 된 어린 소녀는 편지 한 통을 건네고선 고개 숙인 채 운다. 그로부터 6년이 흐르면, 내가 영화를 향해 던지고픈 물음이 나올 차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구의 광활한 기억의 지층을 알아보던 이들은 '왜 자신들의 기억의 한 부분을 차지한 그 소녀를 알아보지 못할까'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트루 마더스>를  처음 봤을 때, 이 영화가 내게 남긴 주요한 인상은 어떤 말의 무게감에 있었다. 미스터리 서사의 줄기를 이루는 하나의 물음, 그 물음을 닫는 무력한 대답. 아이를 입양한 사토코(나가사쿠 히루미)와 키요카츠(이유라 아라타) 부부는 자신이 아이의 생모라고 주장하는 한 여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시에 나는 이 물음을 강조해서 기록해 뒀는데, 그 이유는 어딘가 붕 떠 있고 이들에게 주어진 상황에 완전히 밀착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다. 묻고 싶은 많은 것을 통합하는 하나인 것 같으면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되묻고는 있지만 한편으론 자아 찾기의 여정이나 인간의 본질을 파고들기 위한 장치로 작동하곤 하는 이 물음이 과도하게 거창하기도, 일방적인 추궁에 가깝기도, 또한 절박하게 대답을 회피하는 유라서 도리어 가볍다는 인상도 있었다.

마땅히 부부의 입장을 고려하면 과잉 반응이든, 추궁이든, 회피든,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때 이 물음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로 받아넘긴다면 그 이유는 아이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거나 혹은 더 심오한 목적을 꾀하려는 생모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물음과 대답이 엮어지는 동안 위태롭고 위험해 보이는 이 젊은 여자가 실제 아이의 생모인지 알 수 없거니와 그녀의 대답은 계속해서 모호한 방향으로 우회하고 있다. 사실 대답이 어떠한가의 문제 이전에, 아이를 기른 엄마와 아이를 낳은 엄마가 예기치 않게 서로를 마주한 상황 자체가 믿음과 의심, 후회와 책임의 무게를 지고 오므로, 이 말들이 결백과 진실의 명쾌함을 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예외다. 서로를 마주함으로써 이미 감정의 충돌과 마음의 부서짐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 미디어 캐슬

그리고 다시 본 지금, 나는 그 물음을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쯤에서 젊은 여자의 정체가 부부의 의심과 달리 중학생이던 생모 히카리(마키타 아쥬)가 맞으며, 그녀가 고해의 의미에서 결국은 생모가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고 만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결말을 미리 밝히면 미스터리의 구조가 무너지는 것 아니냐고 질색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부부 앞에 나타난 의문스런운 여성의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영화는 여성의 정체를 치밀하게 감춘다기보다 극의 중반부터는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특히 이상한 건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난 뒤, 그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두고서도 부부가 동일한 물음을 던지면서 히카리의 대답을 막아 세우는 모습을 연신 보여주는 부분이다. 따라서 히카리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부부가 그토록 현재의 히카리와 과거의 히카리를 일치시키지 못하는 이유에 의문이 생긴다. 아니, 영화가 특정 캐릭터의 개인적인 선택보다는 그 맥락을 더 중시하고 있으니,

<트루 마더스>가 미스터리의 판단을 지연하는 이유를 묻는 게 적합하다.

 

머무르고 기다리기

<트루 마더스>의 지연은 구조가 열려 있어서가 아니라 닫혀 있어서 발생한다. 미스터리의 단서가 던져진 후에도 그 이전의 상황 속을 맴돌며 반복하는 영화의 구조. 이를 위해 이 영화의 서사적 배열과 시간의 흐름을 말해야 한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대과거로, 다시 현재에서 과거로..., 히카리의 삶에서 부부의 삶으로, 부부의 삶에서 다시 히카리의 삶으로..., 그 뒤로도 영화는 히카리와 부부의 과거와 현재, 각각의 삶의 영역을 교차해 나열한다. 히카리에게는 준비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아이를 떠나보낸 전후의 시간이고, 부부에게는 자연 임신이 불가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입양 기관을 통해 아이를 만나는 전후의 시간이다. 이별과 만남, 원인과 결과처럼 이 두 시간의 축은 선후 관계로 이어져 있을 뿐 쉽게 맞물리지 않는다.

다만, 히카리와 부부가 하나의 시공간에 공존하는 두 순간이 존재하는데, <트루 마더스>는 이를 각각의 시점에서 동등하게 두 번 반복한다. 하나는 선의를 가진 세 사람이 인연의 끈을 붙잡으며 만나고 헤어진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현재로, 악의와 고의로 성사된 재회의 순간이다. 인물들의 인생을 기준으로 개념화해서 표현하면, (영화에 포함된 생애의 토막은) 시간의 수평축 한 지점에서 뻗어 나온 수직 축을 기준으로 회전하는 아이온(Aion)의 차원인데,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를 위와 같이 정리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과거가 현재를 푸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지도, 지배해서 반전을 일으키지도, 불쑥 개입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심스럽지만 <트루 마더스>의 과거와 현재는 그야말로 뒤죽박죽 섞인다. 사실 뒤죽박죽 섞이면, 영화의 짜임새가 느슨해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런 터무니없는 영화가 아닌 데에는 아마 동일한 하나가 반복되는 원칙의 '그 중심을 잡고 있는 다른 질서'가 겹쳐 있기 때문일 테다.

 

ⓒ 미디어 캐슬
ⓒ 미디어 캐슬

반복되는 장면들은 우리에게 분명 전과 후의 달라진 시선을 요구하지만, 정작 그 안의 숏의 크기와 앵글의 각도, 컷의 배치는 같다.(일부 컷이 추가되긴 했지만, 중간에 밝혀진 정보를 포함하는 정도지 그것이 인물별 관점을 구분하고 차이를 강조하는 식은 아니다) 동일한 촬영물을 복사해 붙여 넣는 편집 개념과도 다른데, "노을은 비슷해 보여도 다 다르다"라는 인물의 대사가 의미를 더해줄 듯싶다.(동일한 피사체를 같은 숏 크기와 앵글로 여러 번 촬영한 셈) 그렇다고 유사하게 짜여진 두 장면이 사이 장면들의 영향을 받았을 때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래서 알고 보니 어떤 편견이 씌워졌었더라는 식으로 수렴하는 건 그저 간편할 뿐이다. 그보다 '<트루 마더스>의 반복'은 정해진 정보의 양과 이야기를 길게 늘어트리는 면이 있다. 이것이 가와세 나오미의 '다큐멘터리식' 영화의 질감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반응이 쉽게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영화는 관객에게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유도하지 않고 머무르면서 기다린다.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인위적이고 부차적인 가설을 제기하고 무산하는 과정 대신, 같은 상황을 반복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안에 내맡겨진 채로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영화 속을 거닐다 보면 기다림 또는 머무름의 분위기가 미스터리 뒤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의도, 그 은밀한 기운을 조성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신중하다는 표현이 문제 해결을 우회하는 경로, 그로 인해 느려지는 영화의 속도를 대변하기에 적합할 것도 같다. 알려졌다시피 가와세 나오미의 카메라가 신중하게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감정과 마음의 인출은 언어의 일종인 어떤 몸짓, 곧 어떤 위치에서, 어떤 자세로, 어떤 순서로 말하는지를 '보여주는가'와 연관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트루 마더스>의 대화법은 영화가 서사를 풀어내는 방법처럼 화자-청자의 주고받기의 율동감보다, 화자-관찰자로 관계되어지고, 거기서 말을 기다리는 관찰자가 체득하는 시간의 흐름이 대화의 두께를 만든다. 관찰자는 듣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화자와 거리를 두거나 서로 다른 공간에 놓인 사람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허공을 무심히 가로지르며 응시하는 몸짓은 상대의 머릿속 어딘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 어딘가의 감정, 마음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기보다 주체의 안에서 머무르도록 놓아두고서 기다린다. 그리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기다림 끝에 어떤 말도 필요 없는 '몸짓의 접촉'이 일어난다.

 

ⓒ 미디어 캐슬

그 얼굴,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

서로를 부둥켜안고, 손을 맞잡은 몸짓이 주는 감흥만으로도 <트루 마더스>의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지만, 관찰자로서 '보는' 몸짓 간의 접촉이 좁히는 거리감은 차마 말로는 다 옮겨지지 않는다. 히카리는 준비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출산과 입양을 기다리는 기관(베이비 배턴)에서 머무르는 동안 카메라를 든다. 어떤 연유로 카메라를 들었는지 알 수 없고, 심지어 한동안은 그 카메라가 누구에 의해 돌아가는지조차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촬영 프레임은 여성들의 얼굴을 근접한 거리에서 담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프레임에 담긴 여성들이 몸 바깥으로 드러내는 감정, 마음, 생각, 그리고 말과 말 사이의 틈새, 공백, 말 없음의 모든 순간들의 존엄함을 말하는 데에 한참 모자라지만, 카메라는 그저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다리기 위한 장치로서만 작동한다.

시간이 지난 뒤 이것이 히카리의 카메라임이 드러나면, 그 얼굴들과의 거리감(클로즈업)이나 캐릭터-촬영자의 거리를 그토록 좁혀야만 했던 것이 그 안에 소속되어 자연스럽게 교감할 수 있는 존재가 카메라를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와세 나오미의 숭고한 철칙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말이 나왔으니, 가와세 나오미의 영화에서 친근한 빛(렌즈 플레어)은 기다리고 머무르는 시간을 체험하는 일이 아닐까. 정오의 태양이 아니라 그림자가 길어지는 노을빛을 기다리는 시간. 히카리가 든 카메라 속에 정작 그녀의 모습은 없지만 바닥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촬영한 컷은 있다. 다리가 길게 늘어진 해 질 무렵의 그림자. 히카리의 그림자 숏이 삽입된 구간은 공교롭게도 예정된 이별을 되풀이되는 때이다. 그런 예감 속에서 그림자는 단지 미세하게 손을 흔들어 보이거나 그런 인상을 남길 뿐인데, 그 땅을 딛고 선 그림자처럼 히카리를 자연스럽게 알아볼 누군가의 시선이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란 믿음을 준다.

그러니 다시 묻게 된다. 영화는 히카리를 왜 그토록 뒤늦게 알아보게 만드는 걸까. 히카리의 얼굴을 부부가 못 알아보는 이유를 설명하는 건 어쩌면 지루하다. 그들은 그녀의 겉모습보단 협박을 자행한 의도, 마음을 불신하고 있다. 그런데 부부뿐 아니라 영화 속 전반에서 우리마저 히카리의 얼굴을 보기 힘든 건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오프닝에서 히카리의 고통스러운 신음, 아기의 울음소리, 아기를 부르는 히카리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짧게 들은 후,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로부터 6년 후인 현재, 부부의 시점이 곧바로 이어지고 그들이 아이를 만난 다음에야 히카리를 처음 마주하게 된다.

카메라는 앞의 그림자를 포함해서 대체로 비스듬히 각도를 비틀어 그녀의 뒷모습을 담거나 그마저 프레임 가장자리에 겨우 걸려있다는 인상을 준다. (다행스러운 건) 출산에 대한 묘사나 임신한 몸을 고통스럽게 포획하면서 전면에 내세울 생각도 없다. 외려 히카리가 자신의 얼굴과 정체를 가리기보다 영화가 그녀를 제대로 못 본다. 히카리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보이는가'의 문제보다 그녀가 '보는 몸짓', '보는 얼굴', '보는 시선'을, 두려워한다. 강압이 반쯤 섞인 가족의 권유에 따라 아기를 입양 보낸 후, 히카리의 엄마가 지레 그녀에게 윽박지른다. "왜 그런 눈으로 봐?" 그런데 스쳐 지나간 히카리의 얼굴에는 분노도, 반항심도, 원망도, 슬픔도 읽히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외로움의 농도가 옅게 남아있달까, 실은 그보다도 거의 모든 감정이 메말라서 차라리 평온하다.

한편으론 무섭다.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불길하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히카리가 현재까지도 자기 삶의 탈출구로 아이를 붙잡는 까닭이 정말 그녀가 모성을 느껴'서'라기보단, (엄마로부터) 모성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닐까. 좀 더 넓게 말하면 인간적인 마음이고, 그것의 통로는 단지 바라봐주는 것. 결국 '보는 몸짓'의 호응이 벌어진 유일한 순간만이 히카리의 진짜 얼굴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는 영화에서 아주 찰나 동안, 단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진다. 히카리가 태어난 아기를 내려다볼 때, 아기의 시선에 비친 윤곽이 흐릿하게 무너진 흑백의 얼굴. 가장 무너져있지만 6년이 흐른 현재, 아이가 회상하는 기억 너머에서 선명하게 도달하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다. 돌이키면 아기와의 접촉 안에서 고개 숙인 히카리의 몸짓은 자연스럽다. 그 몸짓은 죄책감도 불신도 두려움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서로의 얼굴 위에 머무르는 몸짓일 뿐이다.

 

ⓒ 미디어 캐슬

한발 물러서서 시간의 흐름을 버티기

그리고 기다림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아이와 히카리는 다시금 마주 본다. 아니, 영화는 아이의 시선을 경유해 그동안 가려졌던 히카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뜬금없이 아이의 촉이 발동한 게 아니라면, 이들의 접촉을 가능케 한 영화는, 부부는, 어떻게 히카리를 알아본 걸까. 다시 말하면, 사토코는 그녀가 친모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게 되었을까.

영화는 한동안 두 여성이 처음 만난 날, 주고받은 한 통의 편지를 미스터리의 실마리처럼 내세우지만, 실제 사토코가 진실을 깨닫는 경위는 히카리의 행방을 찾던 경찰이 그녀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조금은 급진적이고 작위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편지가 끌어내는 감흥은 히카리의 결백을 강화하기보다 사토코의 후회를 자극하는 쪽에 힘이 실려있다. 이미 경찰을 통해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펼친 편지에서 히카리가 감춰 둔 메시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서도 최소한 하루 반나절이 지난 다음에야 사코토는 히카리를 '문득' 찾아낸다. 숨겨진 메시지를 찾고, 히카리를 찾는 장면 사이에 개입된 밤의 풍경이 실제 시간의 흐름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호하지만, 어쨌든 여기서 '찾은' 두 가지는 여태 기다리고 머무르면서 지속한 현실의 흐름을 우연과 필연, 기적과 운명 같은 초월적인 연결로 무산시킨다.

물론, 아이를 낳은 엄마와 기른 엄마, 이 둘을 '연결'해주는 입양기관의 엄마(감독은 입양기관의 사람을 또 다른 '엄마'로 칭한다)의 만남을 그린 <트루 마더스>에서 그 이유를 묻는 건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뒤늦게 발견한 편지의 숨겨진 메시지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노골적으로 눈물을 자극한다는 위험까지 무릅쓰고서도 왜 필요했던 것인지 물어야겠다.

 

영화 <브로커> 속 수진(배두나) ⓒ CJ ENM

이를 위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를 잠시 떠올려본다. 대개 이 영화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와 함께 언급되는 듯한데, 그보다는 <브로커>(2022)를 말하고 싶다. 이 또한 입양제도나 혈연을 넘어선 가족관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고레에다의 이전 영화들에 비해 <브로커>의 세계에 겉도는 기분을 느끼면서 그 안에 들어가려고 애썼던 경험에 대해서다. 단 하나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내는 데 한계를 실감하지만, 그때의 겉도는 기분은 자막 유무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한 장면, 형사 수진(배두나)이 브로커 조직을 미행하다 아이의 생모 소영(이지은)과 만난 후 차 안에서 홀로 남편과 통화하는 때다. 글쎄, 수진은 지금 브로커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사명이나 신념이 흔들리는 것도 같고, 몰려오는 회의감과 무력감을 견디면서 눈물도 몰래 흘린다. 휴대폰 너머 남편의 목소리뿐 아니라 수진의 목소리마저 차 바깥의 음악 소리, 빗소리 등 소음에 가려진다. 그들이 정확히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고 배우도 영화도 그걸 힘주어 전달할 의도가 없다.

그런데 이 장면을 (원래 없던 자막이 켜진 채로) 다시 보면서 나는 어렴풋이 고레에다 영화에서 감동받았던 순간들이, 바로 이런 뭉개지고 묻히고 흩어지는 대화와 언어의 조각, 그것들의 연결에 있었다고 추억했다. 예컨대 수진의 경우, "음, 있잖아, 음….", "아니, 아닌데, 그런 거?", "그냥" 같은 어슴푸레하고 반쯤 지워진, 독백과 같은 가벼운 호응과 추임새가 특정 장면, 대화, 프레임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선명하게 상기될 때, 이상한 울렁임을 느낀 것이다. 음..., 그 이상한 울렁임은 뭘까? 단순히 자막의 유무 때문이라는 뜻은 아니고, 그보단 소리로는 흘려 넘겼던 작은 것이 다른 감각 기관을 통해 인식되었을 때의, 속도의 느릿함이 안긴 안도감 때문 같다.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미세한 틈새, 이것이 찰나면 찰나일수록 살아남아 '머무름'의 차원에서 시간의 흐름을 버틸 때, 그나마 영화의 세계 안에 속한 기분이 들었다.

 

ⓒ Kino FIlms

다시 <트루 마더스>로 돌아가서 마저 풀어가면, 이 영화에도 힘주지 않은 틈새가 시간을 버티는 순간이 있다. 경찰이 히카리의 행방을 묻고, 자신이 저지른 오류를 깨달은 사코토가 잠시 감정을 고른 뒤에 나직하게 답한다. "단지... 저는 이 사람을 알아요." 낱말들 사이, 찰나의 머뭇거림의 순간은 차분하고 신중하다. 찰나의 머뭇거림이 무력하고 허탈한 감회를 유발하는 낱말들의 결을 정교한 믿음으로 바꿔놓는다.

히카리가 편지에 숨겨둔 메시지, 그리고 부부의 삶과 넓게는 세상에서, 현재의 히카리는 뭉개지고 묻히고 흩어지기 쉽거나 그렇게 취급되는 존재다. 그 메시지만 해도 노골적으로 "부디 나를 지우지 말아줘"인데, 이것이 극 중에서 밝혀지는 시점이 격렬한 감정적 파동이 한차례 지나간 다음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영화의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던 편지의 숨겨진 메시지가 격정적인 파토스의 자리를 한발 물러서게 하는 것도, 기적적인 연결을 만들어내는 머뭇거림과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던가.

동일한 장면의 반복이든, 돌이키기 힘든 실수든,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든, 그 모든 것을 체득하고 견디는 '기다림의 시간'은 그런 시간이 흐른 '뒤', '비로소' 온다기보다 그 과정의 흐름 안에서 만들어진다. 마음과 감정, 보이지 않는 것을 흩트리지 않고 단단하게 뭉치는 힘은 <트루 마더스>의 기다림의 시간에 있다. 그 끈질긴 기다림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자리도 없었을 것이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

 

ⓒ 미디어 캐슬

트루 마더스
True Mothers
감독
가와세 나오미
Naomi Kawase

 

출연
나가사쿠 히로미
Nagasaku Hiromi
이우라 아라타Iura Arata
마키타 아쥬Makita Ajiu
이우라 아라타Iura Arata

 

수입|배급 미디어캐슬
제작연도 2020
상영시간 140분
등급 12세 관람가
개봉 2023.01.01

변해빈
변해빈
 몸과 영화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 고민한다. 면밀하게 구성된 언어를 해체해서 겉면에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알아내고 싶다. 2020 제1회 박인환상 영화평론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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