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칼협 시대에 불시착한 '젠틀맨'
누칼협 시대에 불시착한 '젠틀맨'
  • 김경수
  • 승인 2023.01.0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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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로 움직이는 보통 사람은 픽션에 가까울 수 있다"

김경원 감독의 <젠틀맨>(2022)을 보고는 심경이 복잡미묘했다. 감히 웰메이드라고 할 수 있는 근래 보기 드문 연출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지만, 자칫하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매도당하기에 적합하다는 우려가 들어서다.

영화 <젠틀맨>의 설정은 익숙하다. 경찰도, 평범한 시민도 아닌 비범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실력은 있지만 악당에 의해서 좌천당한 검사(혹은 경찰)를 만나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백수의 외양을 가진 동네 은둔 고수를 모아서 정치권과 결탁한 거대 재벌과 대립한다는 내용은 10년 가까이 반복되어온 장르적인 설정이다. 이는 커뮤니티에서 종종 "영화 <00> 각본 유출.txt" 등의 제목을 지니고 올라오는 글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장르적 설정이 대중에게 플롯의 패턴이 쉬이 읽히고 패러디되기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장르의 유행이 끝물에 다다르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러할수록 관객은 장르의 전복적인 재해석과 플롯 외연의 확장을 바라게 된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젠틀맨>에 대한 비판 중 대다수가 각본의 전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앞선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더라도 이 영화에 연신 쏟아지는 혹평 일색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련된 어법'과 '장르적 쾌감'이다. 무엇보다도 너무도 늦게 도착한 영화의 윤리적 태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윤리적 태도는 흔히들 '사이다'라고 부르는 '동시대의 클리셰'를 넘어선다.

<젠틀맨>은 화진(최성은)이 흥신소 사장 현수(주지훈)로부터 주영(권한솔)의 실종에 뒤엉킨 진실을 알아내고자 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현수의 진술은 거짓말 탐지기에서 거짓으로 탐지되고, 화진은 심문으로 그의 진술에서 허점을 파고들고자 한다. 곧장 현수의 시점으로 플래시백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현수는 헤어진 남자친구로부터 개를 되돌려 받고자 한다는 주영의 의뢰로 정체불명의 펜션으로 동행한다. 주영은 사라지고 현수는 괴한에게 습격당하면서 사건이 꼬이기 시작한다. 현수는 누명을 벗고자 죽은 검사의 신분을 위장해 주영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미친년"이라고 불리는 화진을 만나게 된다. 현수와 화진은 흥신소 직원들과 의기투합해 주영의 실종에 연루된 로펌 재벌 권도훈(박성웅)을 검거하려는 목적으로 그의 내막을 파고든다. 소시오패스로 그려지는 권도훈은 자본과 정치를 등에 업고 현수와 화진을 온갖 수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둘의 수사는 난항에 휘말리기 시작하고, 화진은 현수가 신분을 위조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반전이 시작된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젠틀맨>은 모든 전형적인 요소를 유려한 스토리텔링과 세밀하고 절제된 연출로 가공한다. 비록 설정은 익숙할지라도 프레임마다 관습적인 틀을 깨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두드러진다. 연출에서는 '가이 리치'(Guy Ritchie)의 몽타주와 리듬, '장 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의 음영 연출, '브라이언 싱어'(Bryan Singer)의 추리극, '데이빗 핀처'(David Fincher)의 강박적 편집 등 90년대 장르 영화의 정수를 담아낸다. 특히,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든지, 유행어가 되기를 바라고 쓴 상투적인 대사를 삽입하는 등 배우 이미지에 의존해서 연출하기보다 미장센을 다듬어 화면에 새겨진 정서를 보게끔 한다. 또한, 소재에 따라서 감독은 남성이 극을 지배하게 두지 않는다. 이는 극 속 화진 등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이유다.(화진을 연기한 최성은의 안정된 연기는 주지훈이 극을 압도하도록 하지 않고, 팽팽한 균형감을 자아낸다)

감독의 연출력은 연기 지도만큼이나 카메라가 공간을 프레임에 포착하는 데에서 두드러진다. 카메라는 언제든지 해당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 영화는 사건이 발생할 장소를 한 번에 드러내는 마스터 숏을 생략하고, 인물이 있는 풍경을 드러낸다. 이때 공간을 연출할 때 인물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연출이 배제되며, 이 공간은 편집을 통해서 이어진다. 몽타주를 통해서 형성된 영화적 공간은 가상의 것으로 창조된다. 동시에 강남 등 특정 장소를 지시하지 않기에 손명호(박지훈)의 파티룸, 현수가 서 있는 골목 등은 한국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간으로 창조된다. 네온사인 등을 전면으로 쓴 조명을 통해서 공간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지기는 해도 이러한 공간은 어디에나 실재해 있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버닝썬과 성접대 의혹 등 영화의 모티프가 된 여러 사건이 공간에 서서히 녹아들고, 그것이 언제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상화된 현실을 풍경으로 그려내고 곳곳에 침투하게 하는 연출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감독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현실과 환상의 삼투를 잘 그려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여기에 영화는 감독의 전작인 <아티스트-다시 태어나다>(2017)에서 보여준 코엔 풍의 블랙코미디와 능수능란한 극작술까지 더해져 있다. 자칫 어지러울 수 있는 두 차례의 반전을 쓰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느껴진 것은 감독의 공력 때문이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현수의 진술이 거짓이라는 장치를 기반으로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형성해 낸다. 문학에서의 신뢰할 수 없는 화자는 거짓과 현실의 경계를 흩뜨리기도 한다. 돈키호테가 그러하듯 그에게는 현실이 외부에게는 거짓일 수도 있는 진술의 격차가 발생해서다. 현수의 첫 진술이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것으로 감독은, 익숙한 장르적 설정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까지 나아간다. 현수가 끝에는 결국 진실을 드러내는 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이 판타지로 남는 것은 현수가 돈키호테형 인물 이어서다.

이는 영화 전체의 톤과도 이어진다. 영화 초반에 차량이 전복되는 큰 사고를 경험했는데도, 현수가 살아남아 있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이때 감독은 슬로모션을 기반으로 하는 만화적 연출 기법으로 이를 찍고, 현수가 살아남은 것 자체가 일종의 부활이자 환상이라는 것을 의심하게 한다. 이는 <아티스트-다시 태어나다>에서 부활하는 지젤의 형상과도 비슷하다. 픽션이 현실을 만든다는 주제의식은 <아티스트-다시 태어나다>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며, 이는 포스트-트루스라는 동시대 상황과 맞물린다. 현수는 그의 말에 따라서 스토리를 창조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보이기까지 한다. 픽션으로 진실을 덮는 현실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 다시 픽션이라는 듯이 말이다.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젠틀맨>이 도착한 2023년은 이른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라는 단어로 시대정신이 구성된 시기다. 개인이 어떠한 행위를 저지를 때에 그 행위의 책임이 오직 개인에게만 있다는 데에서 탄생한 이 신조어는 시스템의 하자를 외면할뿐더러, 정치의 대의적 책임을 면피하는 데에 쓰인다. 비트코인과 부동산 등 투기에 가까운 행위에 전 재산을 투자한 이들을 조롱하고자 쓰인 단어는 어느덧 경제를 넘어서 사회문화적 범주까지 확장되었다. 현수는 처음에는 누명을 벗어야겠다는 이유로, 첫 번째 반전이 드러날 때는 아내가 권도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로 수사에 동참한다. 여기까지는 그간의 한국 범죄 영화에서 흔히들 쓰인 캐릭터다. 사법의 한계를 복수의 정념에 기반한 개인의 초월적인 힘으로 극복하려는 설정은 이른바 사이다라고 불리는 클리셰를 생산했다. 복잡다단한 시스템의 문제를 물리적 폭력으로 해결하고, 속된 말로 참교육할 수 있다는 정서는 마동석을 포함한 초월적 힘을 지닌 배우로 인해서 재현된다.

다만, 정치적 힘의 문제를 신체적인 힘에 기반해 해결하고자 하는 영화적 장치에는 두 가지 문제가 개입한다. 정치적 힘이 진영논리, 자본의 힘이 자본력과 같은 추상화된 것인 데에 비해서 물리적 폭력은 눈으로 선명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서 사이다는 가상에 육체라는 현실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이어지는 두 번째 문제는 이 육체성의 극한이 1980년대 할리우드에서의 하드 바디(hard body)에서 드러나는 우익적 이데올로기로도 드러난다는 점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실베스타 스탤론의 근육이 정치를 압도하는 실재(Reality)로 드러나듯이, 마동석의 근육은 법적 절차를 압도한다. 진실의 방이라는 마동석의 밈 이미지는 이를 잘 드러낸다. 법적인 처벌이 무효화된 사회에서 진실은 <범죄도시> 속 정념에 사로잡힌 마동석의 근육 안에서 존재한다.

<젠틀맨>은 개개인이 법적 권한에서 악을 처벌하게끔 이끈다. 두 차례의 반전은 한국 영화의 디폴트 값이 된 장르적 설정을 한 차례씩 벗겨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마지막에 이르러 현수가 어떤 이유도 아닌 선의에서 숱한 피해자의 연대를 이끌고 함께 행동하려 한다는 설정이 너무도 뒤늦게 드러난다. 현수가 보통 사람을 자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드바디를 지닐 수 없는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저항이 연대라는 듯이 그걸 이끌고 있어서다. 감독은 버닝썬 등의 사건을 경유하되 그 피해자를 소모하지 않으려 애쓴다. 피해자의 이미지를 재현하지 않으려 애쓰며, 그들의 증언을 통해서 분노를 자아내지도 않는다. 또한 그들이 막 자라나는 청년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신파를 자극하지도 않는다. 다만 피해자가 모여서 범죄를 재구성하는 데에 집중한다. 가짜 뉴스와 사이버 렉카 등 픽션에 맞서서 피해자가 재구성한 픽션으로 그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의로 움직이는 보통 사람은 픽션에 가까울 수 있다.

<젠틀맨>은 그 선의의 활동가가 픽션으로 느껴질지라도 언제 어디서나 존재할 수 있는 젠틀맨이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 해야만 하는 선의의 행동, 그리고 육체가 아니라 적법한 방식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는 근래 한국 영화에서 드문 윤리적 태도다. 윤리적 태도와 스타일, 그리고 감독의 인장이 이토록 황금비율을 이루는 상업 영화는 이에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글 김경수, rohmereric123@ccoart.com]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젠틀맨 
Gentleman

감독
김경원

 

출연
주지훈
박성웅
최성은
김홍석
이달
박혜은
권한솔
이서환

 

제작 트리스터
배급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작연도 2021
상영시간 123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12.28

김경수
김경수
 어릴 적에는 영화와는 거리가 먼 싸구려 이미지를 접하고 살았다. 인터넷 밈부터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등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되 동시에 부끄러워하는 중이다. 코아르에 연재 중인 『싸구려 이미지의 시대』는 그 기록이다. 해로운 이미지를 탐하는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영화와 인터넷 밈을 중심으로 매체를 횡단하는 비평을 쓰는 중이다. 어울리지 않게 소설도 사랑한 나머지 문학과 영화의 상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인터넷에서의 이미지가 하나하나의 생명이라는 생각에 따라 생태학과 인류세 관련된 공부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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