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상상'

'태훈(임형국)은 왜 일본으로 갔을까.' 일본의 도시 고조라는 배경은 창작자인 태훈에게 단순히 새로운 영화 로케이션, 그 이상의 어떠한 특징적인 것으로 다가오는가. 먼저 타지라는 공간적 맥락에서, 태훈은 이전에 경험한 적 없는 낯선 세계에 도착한다. 그는 그 낯선 세계에서의 영화 촬영이라는 특수한 목적이 있기에 그 세계 안의 사람, 또는 그 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경유해서 그 세계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태훈은 고조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유스케(이와세 료)에게, 고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살아오고 있는 겐지에게 고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기에 태훈이 움직이는 경로는 곧 유스케와 겐지가 안내하는 경로가 된다.

또한 일본이라는 나라의 장소적 맥락에서,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태훈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연출 미정을 거쳐 소통할 수밖에 없어진다. 미정을 중심으로 통역이 오가는 소통의 과정은 '유스케-미정-태훈', '겐지-미정-태훈'의 도식으로 이루어지고, 잘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사는 시노하라에서는 '노인-겐지-미정-태훈'의 도식을 거치기도 한다. 이렇게 통상적인 소통을 방해하는 다양한 맥락이 있기에 태훈은 마을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대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주고받기 이전에 오롯이 그들이 말하는 것들을 듣고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 다큐멘터리의 인터뷰 형식을 연상시키는 카메라의 시선 또한 그들이 천천히 이어나가는 말을 응시하며 듣는다.

추후 미정과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태훈은 그들에게 쉽게 질문하지 않으며, 영화의 영감이 될 수 있는 흥미로운 순간이 나오기를 그저 기다리려 한다. 그가 기다림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것들은 고조라는 마을에 대한 표면적인 이야기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질문 없이 말해진다. 연고 없이 죽은 사람들을 함께 묻어 두는 묘지에 관한 이야기, 1959년에 일어난 태풍으로 강물이 불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이야기,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산골 마을 시노하라에 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들의 입에서 나온다. 그 말이 나오기까지는 특별한 용기나 결심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겐지와 노인들이 사적인 이야기들을 밝히기도 하지만, 그 말들은 어떠한 용기로부터 비롯되었다기 보가는 먼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회상으로부터 나온 것에 가깝다.

대답이 나오기까지 누군가의 망설임을 일으킬 태훈의 본질적인 질문은 단 한 가지이다. "로맨스'는 없었습니까." 미정을 닮은 한국 여자에 대해 말하던 유스케는 그 질문을 듣고 멋쩍게 웃으며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없었다'라고 답한다. 그 순간 유스케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삼키고 숨긴다. 또는 태훈은 유스케가 그러고 있다고 믿는다. 고조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기다리고 경청하던 태훈은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

영화라는 '만남'

'혜정은 왜 고조에 왔을까.' 이 질문은 여행자인 혜정을 안내하는 고조의 청년 유스케로부터 나온다. 이후에 스스로가 밝히듯이 혜정은 한국의 배우이다. 유스케와의 대화와 한국으로부터의 두 번의 통화로 짐작해 보았을 때, 혜정은 한국에서의 생활에 어떠한 권태를 느끼고 있고, 남자 친구와 다툼을 겪고 있으며, 배우로서의 꿈을 좇는 것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그래서 혜정은 홀로 조용히 거닐 수 있는 곳,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을 찾아 낯선 세계에 도착한다. 이런 스스로의 심정을 대변하듯이 혜정은 오사카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고조로, 고조에서 시노하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간다. 그 경로를 따라갈수록 혜정의 주변에 존재하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자취를 감춘다. 혜정은 자신이 바라던 조용한 곳으로, 오로지 스스로와 독대하고 홀로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곳으로 진입한다.

그런 혜정에게 유스케는 어쩌면 부적절한 인물이다. 자신을 따라다니고, 마을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이어나가며, 홀로 조용히 생각할 시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혜정은 고조에서의 첫째 날에 계속되는 유스케의 호의를 거절한다. 그러나 혜정은 결국 다시 유스케와 만난다. 유스케를 불러내 시노하라로 향하고 폐교에서 함께 실로폰을 연주한다. 그렇다면 혜정은 왜 유스케와 함께 하는가. 다시 유스케와 만나겠다는 결심은 무엇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혜정에게는 고조에 온 또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유스케가 하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혜정은 왜 고조에 왔을까.' 혜정은 자신이 하는 일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라고 소개하고 고조에 온 이유를 '재료를 찾기 위해'라고 답한다. 그런데 이 대답은 어딘가 이상하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설명으로는 어색하며, 그 설명에서 배우라는 직업을 연상시키기 위해서는 몇 차례의 은유와 임의적인 가정이 필요해진다. 오히려 이 설명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1부에서 등장한 영화감독 태훈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가정을 할 수 있게 된다. 혜정은 1부의 유스케가 고조에서 만났던 한국 여성, 겐지의 첫사랑인 요시코, 겐지가 오사카에서 만났던 한국인 유학생이 될 수도 있지만,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조에 도착한 태훈이 될 수는 없을까.

고조라는 낯선 곳에 도착한 혜정이 태훈이라면, 유스케는 태훈이 고조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를 증명하듯 유스케는 고조를 '이야기'하고 혜정은 그 이야기를 '듣는다'. 이 둘은 그 어색함을 견디려는 것처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하고 시노하라의 빈집에서 나란히 앉아 같은 곳을 응시한다. 영화는 이 낯섦과 어색함이 깨어지는 순간을 숨죽이고 기다린다. 결국 찾아온 헤어짐 앞에서 혜정과 유스케는 서로를 마주 본다. 그리고 껴안는다. 두 사람의 몸이 겹쳐진다. 태훈은 고조라는 낯선 곳에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혜정이 껴안는 것은 그 사람이며 그들로부터 나온 이야기이다.

영화라는 '작은 빛'

<한여름의 판타지아>에는 두 번의 실종이 있다. 1부 첫사랑 요시코에서, 이곳의 청년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2부 벚꽃 우물에서, 이곳의 노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첫 번째 질문의 답은 그곳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입을 통해 이야기된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떠나 그들만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곳은 곳곳에 공동묘지가 있는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이며 여름의 생기 있는 풍광이 아닌 온도를 상실한 서늘한 흑백의 빛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반면 두 번째 질문의 답은 영화 내에서 나오지 않는다. 2부의 주인공인 혜정과 유스케는 1부에서 이곳에 있었던, 이곳에서 만났던 노인들과 사람들이 전부 사라졌다는 것을 모른 체하는 것처럼 빈 공간을 서성인다. 물론 1부와 2부는 선형적인 순서로 연결되어있는 것도 아닐뿐더러, 두 세계는 직렬적으로 이어질 수 있기보다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세계에 가깝다.

그러나 짚어보고 싶은 점은 1부와 2부의 형식 위에 서 있는 이 영화에서 1부 뒤에 오는 2부가 앞선 1부를 잊어버린 채 나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편의 영화(1부와 2부)가 시선을 갖고 있다면, 마치 1부는 2부를 바라보고, 2부는 1부를 등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부를 향한 1부의 시선은 동경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바람이자 소망일까.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형식으로 촬영된 1부를 하나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이를 등지고 있는 2부는 독립적인 세계 안의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2부라는 영화는 1부라는 현실 앞에서 어떤 각도로 그 형상을 드러내고 있을까. 1부와 2부, 현실과 영화가 서로 마주 볼 수는 없을까. 어쩌면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반짝이는 순간을 본다는 것, 2부의 이미지가 1부를 다시 기억하게 만들고 백일몽과 같았던 상상이 현실의 이미지 위에서 재현되는 순간을 본다는 것은 둘이 마주 볼 때의 눈 맞춤이 일으키는 마찰의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이렇게 말해볼 수는 없을까. 둘이 애초에 서로를 마주 볼 수 없다면, 같은 곳을 볼 수는 있지 않을까.

밤을 밝히는 작은 불꽃, 밤하늘이라는 스크린을 채우는 영화라는 불빛. 그리고 모두가 그것을 올려다본다는 것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은유이다. 우리의 삶에서 두 시간 남짓한 빛으로 남는, 그리고 시간이 끝나면 바로 휘발되는 영화라는 작은 빛. 우리는 그 빛의 힘을 믿기에 본다. 이때 <한여름의 판타지아>에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 불꽃의 이미지는 단지 대상으로서의 영화를 넘어설 것이다. 1부가 현실이고 2부가 영화라고 했을 때, 그 사이를 잇는 작은 빛은 영화이자, 현실과 영화가 꾸는 꿈이자, 영화를 올려다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같은 곳을 보면서 꾸는 꿈이다.

[글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김민세

minsemunji@ccoa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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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생 시절, 장건재, 박정범 등의 한국영화를 보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영화부에 재학하며 한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종종 학생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평론은 경기씨네 영화관 공모전 영화평론 부문에 수상하며 시작했다. 현재, 한국 독립영화 작가들에 대한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비평가의 자아와 창작자의 자아 사이를 부단하게 진동하며 영화를 보려 노력한다. 그럴 때마다 누벨바그를 이끌던 작가들의 이름을 하염없이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