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불가해한 사랑(상처)의 회복
[Critique] 불가해한 사랑(상처)의 회복
  • 이상용
  • 승인 2023.01.1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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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레터>의 시간을 찾아서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는 국내에 여러 번 재개봉을 하며, 겨울 극장가를 알리는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장면을 보기 위해 걸음을 잇는다. <러브레터>가 영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을 만한 성취나 멜로 장르의 새로운 길을 열었는가를 묻는다면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속적인 열광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동시에 이러한 현상은 본질을 망각하기에 가능한 어떤 유행이나 부분을 전체로 오인한 결과일 수도 있다.

새삼스럽게 <러브레터>를 읽는 것은 이 영화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을 인생영화라고 꼽는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가 인생영화인지 아닌지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수용자의 자세에 따른 문제에 국한될 때가 많다. 

본질은 이 작품이 전달하는 것과 전달하고자 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작용이다. 공교롭게도 <러브레터>는 한 통의 편지를 둘러싼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오해로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이 영화가 한 통의 편지가 되어(제목이 '러브레터' 아닌가) 영화와 관객 사이에 어떤 오해를 일으키는 탓인지도 모른다. 놀라운 것은 영화가 쏘아올린 불꽃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지만 설원에서 외치는 여주인공의 절규는 여전한 사랑의 외침으로 수용된다. 그것은 영화가 시간을 초월하여 관객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얼음 속에 갇힌 잠자리처럼 어떤 박제된 기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텍스트)가 지닌 어떤 구조와 힘이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겨울이라는 시간을 회귀하여 매번 같은 겨울로 이끄는 방식은 무엇일까. 이 글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제대로 묻지 않았던, 영화에 대한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해 점점 더 복잡한 기억의 미로를 파고드는 의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 이는 겨울마다 반복되는 '러브레터 현상'을 이해하고, 그 토대 위에 세워진 영화 수용의 단면을 이해하고 확장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다시 읽기를 통한 새로운 읽기로의 전환이다.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사랑의 상실을 타인의 첫사랑으로 대체하다

<러브레터>의 시작은 사고로 연인을 잃은 와타나베 히로코(나카야마 미호)가 3주기 추모식(제사)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집으로 가려던 히로코는 현장에서 꾀병을 부린 '연인의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다 드리는 상황에 처한다. 히로코는 연인의 방 안을 둘러본다. 그녀는 중학교 시절의 앨범을 들여다보던 중 적혀 있는 옛 주소를 몰래 적는다. 어머니에 말에 따르면 오타루에 살던 옛집은 도로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사건의 시작은 '편지'를 보내면서다. 카메라는 오타루를 향해 날아가는 편지를 전지적 시점으로 보여준다. 항구를 가르고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우체부를 보여준 후 그가 집 앞에 놓인 빨간 우체통 앞에 멈춰 서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와타나베 히로코와 똑같이 닮은 여자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가 있었다. 우체부의 구애를 외면하며 황급히 집으로 들어가던 여자 이츠키가 편지를 떨어트린다. 우체부가 편지를 주워 문을 두드린다. 편지를 건네며 "러브레터?"라고 농담처럼 던진 우체부의 말은 영화의 제목이자 앞으로 전개될 두 사람의 편지를 향한 예언이 된다. 

히로코가 편지를 보낸 이유는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괴로움(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통상적인 멜로 영화라면, 더군다나 죽은 연인을 2년이 지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한 여성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영화라면, 다음에 전개될 내용은 죽은 후지이 이츠키와 와타나베 히로코가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사랑을 하게 되었고, 어떤 사연으로 죽음을 맞이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이 과정은 홀로 남은 여주인공의 '상실감'을 관객들에게 설득하는 작업이 되고, 그녀의 애도에 공감을 일으키면서 죽은 이를 향해 편지를 보내야만 했던 절실함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이러한 형식을 갖춘 대표적인 러브스토리가 <아바타> 시리즈로 잘 알려진 제임슨 카메론의 <타이타닉>(1998)이다. 이 영화가 '회상의 형식'이라는 사실은 종종 잊혀지는데, 영화의 시작은 대양의 심장이라 불리는 다이아몬드가 타이타닉호에 실려 있었다는 기록을 발견하면서다. 탐사팀은 타이타닉의 잔해에서 보석을 찾는 데는 실패하지만, 보석을 착용하고 있는 여인의 누드 크로키를 발견한다. 이 사실은 언론에 보도가 되고, 노년의 로즈가 자신이 그림 속 인물이라고 나선다. 자신의 그림 앞에 나타난 로즈는 잭 도슨이라는 화가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어떤 사랑을 하였으며, 어떻게 이별했는지를 회상한다.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그런데 <러브레터>는 와타나베 히로코와 후지이 이츠키가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어떤 이별을 경험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간혹 히로코의 남자 친구인 아키바 시게루(토요카와 에츠시)와의 대화 속에서, 히로코의 말을 통한 회상 속에서 한 두 대목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단편적인 차원에 머물 뿐이다. 산장에서 히로코는 이츠키와의 프러포즈를 떠올린다. 이츠키는 손에 반지 케이스를 들고 왔지만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밖을 보고만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히로코가 "결혼해 주세요"라고 먼저 말한다. 꽤나 담담하고 진솔한 진술이지만 불쑥 튀어나오는 정보들이 히로코의 애절함을 설명하는데 충분하지는 않다.

<러브레터>가 와타나베 히로코의 '러브스토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관객이 영화에서 보는 것은 무엇일까.

와타나베 히로코와 여자 후지이 이츠키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죽은 이에 관한 정보를 공유한다. 주요한 정보 제공자는 여자 이츠키다. 히로코는 자신의 연애담을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 덕에 실컷 접하게 되는 것은 동명이인이었던 중학생 이츠키들의 러브 스토리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가능한 일일까.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하는 히로코의 상처를 중학생들의 첫사랑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또한, 히로코는 단순히 질문을 하고, 여자 이츠키가 이토록 충실히 답해야 할 의무는 어디에 있는가. 두 사람의 편지는 일방적이다. 

더군다나 그토록 히로코가 그리워하는 죽은 후지이 이츠키는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히로코가 보았던 이츠키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중학생 이츠키 만이 등장한다. 죽은 연인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과거의 남자를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히로코와 이츠키의 '러브스토리'는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 설원을 향해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그녀의 외침에 대해 관객은 어떠한 감정을 전달받는 것일까.

 

누빔점(point de capition, quilting point)의 영화

와타나베 히로코의 상실감을 후지이 이츠키의 첫사랑으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하다. 두 세계는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제 아무리 가상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두 허구는 하나의 개연성으로 묶이지 못한다. 두 이야기, 두 감정, 두 인물, 두 경험과 지식을 하나로 묶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든 균열과 파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러브레터>는 이러한 균열을 최소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먼저, 편지가 등장한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편지는 오해에서 출발한다는 개연성을 얻은 뒤 각 인물의 의혹을 해결한 후 점점 더 하나의 이야기로 초점을 모은다. 하지만 제 아무리 편지의 자유롭게 시공간을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을 허락한다 해도 편지만으로 두 인물의 거리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러브레터>는 편지뿐만이 아니라 사랑의 상실감과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의 충만함을 봉합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고안해 낸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과 동시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누빔점(point de capition, quilting point)'은 바느질에서 가져온 용어다. 소파나 쿠션의 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정시켜 주는 단추 또는 바느질된 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라캉은 상징체계 안에서 기표와 기의가 일시적으로 만나 기호를 확정하는 것을 누빔점으로 설명했다. 지젝은 이 용어를 프랑스의 철학자 알튀세르를 경유하면서 그의 호명 이론을 새롭게 정리하려고 시도한다. 근본 개념은 같지만, 지젝을 따라서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으로 누빔점을 살피고자 한다.

알튀세르는 각각의 개인(철학적으로는 주체라고 부르는 게 더 적합하다)이 상징적 질서나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해 어떻게 상징적 동일성을 부여받는지(상징계로 편입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이데올로기 혹은 장치가 개인(주체)을 부르는 것이 '호명'이며, 이때 개인과 이데올로기(장치, 시스템)가 만나는 자리가 '누빔점'이다.

그런데 누빔점은 알튀세르가 관심을 둔 국가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한 장치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개인)과 영화(라는 장치)가 만나는 순간에도 충분히 일어난다. <러브레터> 자체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기표들은 대략 사랑의 상처, 첫사랑의 충만함 등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표가 단지 떠돌아다니기만 한다면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가 '상징적 동일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품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탓일 수도 있고, 수용자의 개인적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아무려나 <러브레터>의 기표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수용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상징 체계를 형성하는가. 반복적으로 말한 것처럼 사랑의 상실과 첫사랑의 충만함을 연결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히로코는 고베에 살고, 이즈키는 오타루에 산다. 두 인물의 성격도 달라 보인다. 히로코는 수동적으로 보인다. 이츠키는 상대적으로 선머슴의 느낌을 풍긴다. 물론, 두 인물 모두 다른 태도를 보일 때도 있다. 영화 속에 나타나는 행동 반경을 보면 오히려 히로코가 여러 곳을 다니며 적극적이다. 반면 여자 이츠키는 집과 도서관(직장)만을 오간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탓도 있겠지만 행동 반경으로만 보면 이츠키가 더 수동적이다. 그것은 이야기의 설정상 이츠키의 집을 자주 보여주는 탓도 있을 것이다. 히로코의 집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는 두 인물의 감정은 물론이고, 두 인물의 사연을 봉합해야만 한다.

 

그래서 영화가 선택한 첫 번째 누빔점이 바로 '1인 2역'이다. 그것은 오타루에 사는 이츠키가 등장해 편지를 받을 때 혼란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다. 과감한 1인 2역의 활용은 '동일화' 될 수 없는 두 인물 혹은 두 이야기를 하나로 잇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다. 와타나베 히로코와 남자 후지이 이츠키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학교 시절 남녀 이츠키의 일화를 보면서 위안을 얻는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속해 있지만 '1인 2역이라는 누빔점'은 시공을 초월하여 한 명의 여자가 한 명의 남자와 사랑을 한 것 같은 착시 효과를 일으킨다.

이를 강조해 설명하는 장면들이 있다. 남자 친구의 제안으로 오타루에 온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의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편지를 남겨둔 채 돌아선다. 그런데 여자 이츠키를 태우고 갔던 택시가 돌아 나오면서 히로코 일행이 탑승을 하게 된다. 택시 기사는 히로코에게 조금 전에 내려준 여성과 닮았다고 말한다. 1인 2역을 둘러싼 호기심과 의혹은 영화 밖의 관객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도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출은 1인 2역의 장치를 보다 정교화하는 작업이다. 

택시의 등장은 1인 2역을 하는 두 인물이 처음으로 겹치는 순간이다. 택시를 잡으려는 히로코 일행과 택시에 타고 있는 이츠키의 모습을 각각의 프레임으로 연결하여 등장시킨다. 이들의 본격적인 겹침의 오타루 시내 장면으로 이어져 제시된다. 히로코가 남기고 간 편지에 답장을 쓴 이츠키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나가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이때 흰 옷을 입고 자동차 옆에 서 있는 히로코와 자전거를 타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이츠키의 모습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담긴다.

두 사람의 동일성은 단순한 설정이나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각적 프레임을 통해 완성된다. 심지어 편지를 부친 후 자전거를 탄 이츠키가 히로코의 남자 친구와 히로코의 옆을 지나가기도 한다. 이때 "후지이 상"이라고 부르는 히로코의 모습과 소리에 반응하여 돌아보는 여자 이츠키가 연결된다. 영화의 기본적인 연결인 쇼트, 리버스 쇼트다. 잠시 후 이츠키가 환청을 들은 것처럼 처리되지만(히로코는 사라지고 사람들이 거리에 밀려 나온다) 편지를 부치는 행위와 함께 두 사람의 동일성을 형성하면서 누빔점을 완성한다.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무엇보다 겹침의 장면 후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전까지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한 편지 교환이 주된 내용이었다면, 집 앞에 손으로 쓴 편지를 통해 히로코는 편지를 재개하는 동시에 자신의 사연 일부를 알려주고, 이름 때문에 생긴 혼란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여자 이츠키는 비로소 자기와 이름이 같은 남학생이 있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1인 2역의 누빔점은 단순히 두 사람의 닮음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중학교 시절로 들어가는 결절점이기도 하다.

오타루 여행을 마치고 고베로 돌아온 히로코는 다시금 연인의 집을 찾는다. 주소를 적었던 앨범을 펼치면서 중학생 여자 후지이 이츠키의 얼굴을 확인한다. 히로코는 여자 이츠키의 중학교 앨범 사진을 연인의 어머니에게 보여주며 자신과 닮았는지를 묻는다.

"닮으면 안 되는 거니?"

"닮아서라면 용서할 수 없어요. 그게 절 선택한 이유라면 전 뭐가 되는 거죠? 첫눈에 반했다고 했어요. 전 그걸 믿었고요. 첫눈에 반한 것도 따로 이유가 있었군요. 전 속은 거에요."

"히로코 상. 중학생을 질투하는 거야?"

"그래요. 이상한가요?"

"이상하지!"

"이상한 거군요."

정말로 이상하다. 이와이 슌지는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두 인물을 하나의 프레임에 겹치는 미장센에도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닮음을 재차 확인한다. 어쩌면 이 장면은 불필요하다. 과잉이나 잉여에 가까워 보이는 이 연출은 두 사람의 닮음이 일으킬 균열에 대해 꿰매고, 꿰매고, 단단히 묶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장면의 귀결점은 재차 봉합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지점을 건드린다. 이츠키의 어머니는 히로코와 대화를 나누면서 행복감을 드러낸다. 

"이츠키는 행복하네. 히로코가 그런 질투를 해주고. 히로코도 아직 그 애를 좋아하나 봐." 

그러자 히로코는 "자꾸 그러시면 슬퍼지잖아요."라면서 눈물을 터트린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이어서 눈물을 터트린다. 두 인물의 닮음이 가리키는 곳은 결국 죽은 이츠키이다. 여자 이츠키는 편지를 통해 중학교 시절 동명이인의 남자 이츠키가 있음을 떠올리지만, 히로코는 앨범 속 인물과의 닮음에서 출발해 남자 이츠키를 기억하는 어머니와 함께 앨범 속의 남자를 애도하는 결과로 향해간다.

죽은 이를 떠올리는 기억을 향한 눈물의 호소. 이것은 분명 과잉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끌지만 동시에 모든 상황을 일시에 정리하는 <러브레터>의 강력한 누빔점이자, 1인 2역으로 일어날 수 있는 서사의 교란을 눈물의 정서로 재봉합하는 과정이다. 눈물은 바느질이 아니라 강력한 접착제의 수준이다.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1인 2역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편지'다. 죽은 이츠키를 너무나 그리워하는 히로코가 옛 집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하여, 자신이 왜 편지를 보냈는가에 대한 사연과 절절함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중학교 시절이 등장하면서부터 히로코는 전면에서 물러난다. 동명이인이자 1인 2역의 여자 이츠키를 중심으로 중학생 시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중학교 시절과 함께 1인 2역을 하는 나카야마 미호가 아니라 중학생이 된 후지이 이츠키(사카이 미키)가 전면에 나서게 되며, 비로소 남자 후지이 이츠키(카시와바라 다카시)도 등장한다. 남자 이츠키는 현실에서는 부재하는 존재이자 부재하는 이미지였지만, 주고받는 편지 속에서 중학생의 이미지로 부활한다. 중학교 에피소드의 시작에서 이름이 같은 탓에 출석을 부를 때 동시에 대답해 버리는 에피소드를 통해 기억 속에서 부활된 두 인물의 등장은 <러브레터>가 상실과 부재로 시작했다는 것을 백팔십도 뒤집어 버리면서 기억 속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주제로 나아가도록 이끈다.

편지는 사건의 시작과 끝을 형성한다. 그런데 두 편지 모두 일정한 불능의 상태를 가리키면서 시작과 끝을 형성한다. 사건의 시작은 와타나베 히로코가 죽은 이에게 쓴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쓴 것이었고, 사건의 끝은 중학생 후배들이 이츠키를 찾아와 책 속에 꽂힌 도서카드를 알려주면서 끝난다. 이츠키는 자신의 연필 초상화를 본 후 부끄러워하며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 이츠키가 뒤늦게 첫사랑을 확인한 순간이다. 화면에는 이츠키의 내레이션으로 "와타나베 히로코님. 역시 부끄러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하겠습니다."는 내용이 흘러나온다. 한마디로 '부치지 못하는 편지'다.

 

<러브레터>는 '부칠 수 없는 편지'로 시작하여 '부치지 못하는 편지'로 끝난다. 두 편지 모두 간절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편지의 기본인 송신을 할 수는 없는 편지다.

 

하지만 이 편지들이 지닌 송신의 불가능성은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정확히 발송된다. 그것은 부칠 수 없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이기에 더 강력하게 영화 밖의 존재들, 부재하는 존재들을 향해 도달한다.

 

'편지'는 영화 전체의 의미를 아우르면서 송신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통해 정서와 기억 그리고 불가능성에 담긴 사랑의 생명력을 강력하게 재생시키는 장치다. 

후지이 이츠키의 추모식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죽음'을 또 하나의 누빔점으로 제시한다. 여자 이츠키에게 환상처럼 등장하는 장면 중의 하나가 중학교 시절 아빠의 죽음이다. 이츠키는 감기에 시달리고 있으며, 집을 보러 간다고 따라나섰다가 병원에 홀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런데 병원 복도에서 졸고 있는 이츠키는 아빠가 수술실로 들어가던 '그날'의 장면을 환상처럼 경험한다. 이츠키의 아빠는 폐렴으로 죽었다. 

이츠키는 동일한 응급 상황을 영화의 절정에서 경험한다. 고열로 쓰러진 이츠키를 두고 엄마와 할아버지가 실랑이를 벌인다. 할아버지는 과거와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다며 40분 안에 병원에 도착할 거라고 말한다. 후지이 이츠키는 위기를 넘긴다. 이사를 결심했던 이츠키의 엄마는 딸과 함께 병상에 누워있는 시아버지를 생각하며 이사를 포기한다.

죽음은 영화의 출발점이었고, 두 명의 이츠키를 연결하는 고리이자 편지의 시작이었며, 편지를 지속하는 사유가 된다. 그 결과 죽음을 반복하지 않는 또 다른 이츠키를 보여준다. 죽음의 반복이 일어나지 않음은 죽음의 상처에서 출발한 이 영화가 다른 차원으로 전화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폭설을 뚫고 병원에 도착해 살아난 이츠키는 아빠의 죽음을 반복하지 않으며.(10년 전에 아빠는 폭설 속에서 뒤늦게 병원에 도착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설원의 산에서 죽은 이즈키의 죽음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녀는 두 이츠키의 삶을 이어받는다. 

<러브레터>에는 죽음의 시퀀스라 불린 만한 장면이 있다. 교정에서 만난 중학교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이즈키의 죽음을 듣게 된 여자 이츠키는 오래전 아빠의 장례식장에 돌아오면서 얼음 속에 잠자리가 죽어있는 것을 보던 장면을 떠올린다. 얼음 속의 잠자리와 죽은 이츠키는 또렷하게 연결되는 누빔점이다. 그리고 죽은 두 사람의 성은 동일하다. 모두 '이츠키'다. 또한 할아버지가 이츠키의 탄생을 기념해 심은 나무의 이름 역시 이츠키다. 이츠키라는 성은 죽음과 재생이라는 꽤나 동양적이라 할 수 있는 반복의 사슬로 이뤄져 있다. 여자 이츠키는 죽은 아빠 이츠키와 2년 전에 사고로 죽은 이츠키를 대신해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다. 이 영화가 상실감으로 끝나지 않고 어떤 생명력이나 부활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처럼 이어져 있는 이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1인 2역을 통해 사랑의 상실을 첫사랑의 충만함으로 채워야 하는 것처럼, 동명이인을 통해 죽음의 부재를 살아있음의 충만함으로 채운다.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죽음의 부재를 살아있음으로 채운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편지를 다르게도 읽어볼 수가 있다. 어쩌면 상징적인 차원에서 편지를 보낸 것은 와타나베 히로코가 아니라 죽은 후지이 이츠키일지도 모른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부재를 살아있는 후지이 이츠키에게 알려주는 셈이다. 그의 죽음은 편지가 교환되면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듣게 되는 것이었고, 그리고 중학교 시절 남자 이츠키의 첫사랑이 바로 여자 이츠키였다는 것도 뒤늦게 전달하는 계기를 이룬다. 자신이 사랑과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서신 교환이 시작되었다면 너무 상징적인 차원의 독해가 될까. 오타루로 향하는 첫 번째 편지가 여자 이츠키에게 전달될 때 마치 날개를 단 것처럼 전지적으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도달한 편지와 이어지는 교환된 편지를 통해 기억의 미로를 헤집으며 중학교 시절이 떠오르게 될 때, 그것이 이름과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룰 때 이름 혹은 동명이인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요한 누빔점이 된다. 여자 이츠키는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의 대부분이 이름과 관련된 것이라 말한다. 히로코는 이름 때문에 행여 그에게 운명적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여자 이츠키는 이 질문을 부정하지만 마지막 편지는 끝내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남자 이츠키가 빌린 책들의 도서 카드에는 자신과 동일한 이름이 적혀 있었고, 다시금 등장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서 카드에는 자신의 이름은 물론이고 자신을 그린 연필 초상화가 있었다. 그림은 곧 이름을 가리키고, 이 이름은 오래전 한 남자가 쓴 자신의 이름이었다.

 

풍경의 발견

<러브레터>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죽은 이츠키를 향해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설원의 모습이다. 아무리 사랑의 상실을 과거의 첫사랑으로 채우려고 해도,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와타나베 히로코의 애도(마음)를 해소해 주지 않는다면 공감을 일으키기 어렵다.

그런데 이 장면은 히로코가 남자 친구 아키바와 함께 간 설원으로 향하는 단독적인 장면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 여자 이츠키가 고열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는 장면과 교차 편집이 되어 있다. 한 사람은 죽은 이를 애도하기 위해 설원으로 향하고, 한 사람은 폭설로 구급차가 제때 오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할아버지가 이츠키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같은 눈이지만 한쪽은 애도이고, 다른 쪽은 위기다. 

이러한 교차 편집은 아침에 일어난 히로코가 설원에서 "오겡끼데스까?(おげんきですか) 와따시와 겡끼데스!(はたしは げんきです)"를 외칠 때에도 일어난다. 병실에 누운 채로 깨어난 이츠키는 이 말을 반복한다. 마치 교신하는 것처럼, 히로코의 외침을 이츠키가 수신하는 것처럼 반응한다. 어쩌면 히로코의 외침에 답을 할 수 없는 남자 이츠키를 대신하여 살아있는 이츠키가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잘 지내냐"는 메시지의 내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메시지의 형식이다. 히로코의 외침은 자문자답이다. 잘 지내는지를 묻고, 상대방의 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은 자신을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한다. 죽은 이는 답을 할 수 없다. 그런데 히로코의 자문자답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오타루에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을 때, 편지의 내용 또한 "오겡끼데스까 (おげんきですか)? 와따시와 겡끼데스 (はたしは げんきです)!"였다.

<러브레터>는 편지를 보내는 시작부터 사건의 절정에 이르기까지 자문자답을 반복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편지의 진정한 수신자는 히로코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연인을 애도하는 과정, 떠나보내는 과정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고, 편지를 보내고 자문자답의 내용을 적은 것은 스스로를 향한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히로코는 애써 찾아간 여자 이츠키의 집 앞에서 편지를 쓰면서 애당초 자신의 편지를 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달리 보자면, 히로코가 편지를 보낸 것은 답을 기대했던 것이 야니라 스스로 위안을 찾고, 정리할 계기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오배송된 편지로 인해 사연은 길어지고, 히로코는 결국 그곳을 향해 간다. 그곳은 죽은 이츠키와 거대한 설원의 풍경과 히로코의 외침이 어우러진 장소다. 이곳에서 그녀가 보내는 메시지는 다르지 않다. 그녀는 죽은 이가 있는 곳을 향해 외치지만 실상 자신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상실감, 기묘한 죄의식 그리고 스스로 구하는 위로를 향해 자문자답을 한다. 

 

영화 <환상의 빛>(1995) ⓒ 씨네룩스
ⓒ 영화 <러브레터>

1990대 중반 <러브레터>를 비롯하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1995)과 같은 영화들이 새로운 감독들과 함께 등장했을 때, 일본의 평단이 비평적 용어로 내놓은 것 중의 '신서정주의'다. 이 영화들은 여주인공 내부에 일어난 상실감(남자의 죽음)으로 거대한 공백이 일어났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물'이나 '풍경'에 의탁하여 표현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거대한 자연을 응시하는 여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상실의 마음을 호소한다. 파도가 치는 거대한 바다, 눈에 덮인 거대한 산과 같은 자연물은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설명할 수 없는 심상을 형형하면서 시각적 압도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물과 일치하는 마음의 상태는 단순한 의존이나 물아일체의 경지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발화하는 내면의 발견이기도 하다.  

일본의 현존하는 최고의 비평가 중 하나로 꼽히는 가라타니 고진―그의 전집이 국내에 출간된 정도다―의 초기작 중 하나인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첫 장은 '풍경의 발견'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초석삼아 전개되는 일본 근대 문학론은 단순히 문학 이론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역사에 따라 인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전통적인 예술에서의 풍경은 관념으로서의 자연이나 원래 있는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근대로 넘어가면서 보는 이가 보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인상파 이전의 풍경화들은 화가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자연이라는 것을 객관화하거나 관념으로의 자연을 그리려고 했다. 그런데 모네가 그린 루앙 대성당의 그림들은 빛과 날씨에 따라 각기 다른 색으로 보이는 성당을 보여준다. 인상파의 풍경화는 객관적인 자연이 아니라 보는 이의 주관적인 자연이다. 이것이 근대의 발견이다. 풍경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라 내가 보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 되며, 풍경은 내(주체)가 새롭게 발견한 대상이 된다.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은 서구 문학에 대항하여 일본 근대 문학을 세우려는 시도를 설명하는 과정이지만 '풍경의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러브레터>의 히로코가 어떻게 설원이라는 풍경과 마주 하는가를 사유할 근거를 제시한다. 

영화의 절정인 "오겡끼데스까"는 풍경을 향한 외침이다. 관객들은 마치 죽은 후지이 이츠키가 거기에 있는 것처럼, 그를 향해 외치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산 어딘가에 찾지 못한 이츠키의 시체의 위치나 행방을 객관적으로 알 수는 없다. 영화 어디에도 이츠키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산에서 추락했는지, 그곳에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단지 히로코의 마음속에 '산=이츠키'라는 주관을 통해 절규하는 히로코를 목격한다.  

고진은 "풍경은 오히려 외부를 보지 않으려는 자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고 말한다. <러브레터>의 풍경이 여기에 부합한다. 설원은 사실성이나 외부성을 지니고 있는 풍경이 아니라 히로코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던 거대한 마음의 풍경이다. 주관성의 문제를 조금 더 파고들 수 있다. 거대한 산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본 것은 히로코가 죽은 이츠키의 집에 갔을 때다. 그의 방에 걸린 그림들을 본다. 어쩌면 히로코의 마음에 풍경이 자리 잡은 것은 이때쯤 인지도 모른다. 산을 좋아한, 산을 그린 이츠키의 그림은 고스란히 히로코의 주관적 풍경이 된다. 

풍경은 자신의 감정을 목놓아 외쳐야 하는, 억압받는 여주인공의 마음을 풀어놓아야 하는 장소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 장소가 외면화 되는 순간(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마음을 향해 목놓아 외치는 순간이 된다. 이전까지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기떼스"가 편지에 적는 고요한 외침이었다면 마음을 끄집어낸 풍경 앞에서는 목놓아 소리친다. 

그 산으로 향하는 길은 끝내 감추려고 했던 자신의 마음을 향해 걸어가는 길이었고(그래서 산장으로 가던 도중 히로코는 연인에게 돌아가자고 말하기도 한다), 아침에 갑작스럽게 드러난 풍경 앞에서 목놓아 외치기 시작한다. 그것은 스스로가 되찾은 시간이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고 외치는 시간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역시 '풍경의 발견'에 이어 '내면의 발견'을 다음 장으로 제시한다.

풍경이 발견이 곧 내면의 발견이며, 그 형식이 자문자답과 관련을 맺는다는 것은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편지와 관련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살짝 언급하기는 했지만 히로코의 편지는 자신의 사연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부탁이나 질문으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여자 이츠키의 집 앞에 남겨두고 간 편지에서도 남자 이츠키의 죽음을 쓰다가 지워버린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여자 이츠키는 질문에 충실히 답을 한다. 두 인물을 잇는 1인 2역과 서신의 교환은 어쩌면 자문자답의 형식을 외면화 한 방식일 수 있다. 즉, 나카야마 미호가 묻고 나카야마 미호가 답하는, 자문자답의 편지를 통해 두 인물은 각자에게 속한 내면의 기억과 길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편지 또한 일종의 풍경이다. 

 

되찾은 시간

중학교 시절을 대변하는 '책'도 누빔점이다. 여러 도서 목록 중에 가장 강력하게 등장하는 도서는 중학교 시절 이야기의 마지막에 등장하고(남자 이츠키는 여자 이츠키의 집으로 책을 돌려주기 위해 찾아온다.),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영화에 등장하는 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7권인 『되찾은 시간』이다. 어째서 '스완네 집 쪽으로(1권)'나 '갇힌 여인(5권)'이 아니라 '되찾은 시간'이어야만 하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 이츠키의 입장에서 <러브레터>는 상실한 과거를 되찾는 과정이다. 10년 뒤에 중학생 후배들에 의해 다시 들어온 책을 통해, 이즈키는 끊임없이 부인했던 과거의 의미를 확인한다.

히로코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추신에는 "도서 카드에 쓴 이름이 정말 그의 이름일까요? 그가 쓴 이름들이 당신 이름인 것만 같군요."라고 적혀 있는 것을 이츠키는 유심히 읽는다. 하지만 이츠키는 곧바로 이러한 말을 부정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그녀 앞에 펼쳐진다. 이츠키는 편지로 이 경험을 전한다. 

중학교에서 만난 후배들이 찾아와 이츠키에게 책을 건네고, 이구동성으로 책이 아니라 책 속의 도서카드를 보라고 한다. 도서카드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고, 뒷장을 펼치면 자신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여러 차례 중학교 시절에 관한 편지를 쓰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과거의 의미, 되찾은 시간이 발견되는 순간이다.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프루스트적 모티브는 <러브레터>를 연결하는 거대한 고리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권 『스완네집 쪽으로』에는 여러 유명한 문장이 존재하지만, <러브레터>와 관련하여 음미해 볼만한 대목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콩브레의 기억을 떠올리는 첫 챕터에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으므로, 처음엔 내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다. 내겐 동물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생존에 대한 지극히 단순한 감정만 있었을 뿐, 아니, 동굴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보다도 더 헐벗은 존재였다. 그러자, 추억이, 현재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내가 살았던 곳, 혹은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곳에 대한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도저히 내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 주었다."(민음사, 김화영 역, 19쪽)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 문장이야말로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이자 형식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러브레터>가 사랑의 신화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인물들이 부재하는 이츠키를 둘러싼 자신의 시간을 되찾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억 속을 방황하도록 이끌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허무로부터 구원해 준다. 그러니까 사랑의 상실이나 첫사랑의 깨달음은 일종의 맥거핀일지 모른다. 더욱더 근본적인 것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시간을 되찾게 되고(regained time), 끊임없이 현재의 시간을 새로운 의미로 구원해 내고 있다. 그것은 상실이나 잃어버린 첫사랑의 기억을 넘어서 삶의 긍정성으로 향한다.

<러브레터>는 무척이나 프루스트적이다. 무의지적 기억에 의해 침범해온 과거의 추억은 부재한, 상처 입은, 병든 일상을 회복시키고, 이름을 되찾아 주며, 기억을 복원시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를 느꼈기에 많은 관객들이 겨울이 되면 이 영화를 다시 보러 극장으로 향한다. 그것은 개인을 헐벗은 존재를 현재가 아니라 다른 장소와 시간 속으로 이동시켜, 새롭게 채우고, 다른 삶으로의 전환을 열어준다. 

<러브레터>는 영화를 통해 시간을 되찾는, 일종의 제의적 경험이자 추억의 충만함으로 안내하는 기억의 관문이 된다. 이 영화에서 느꼈을 기분 좋은 슬픔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저 멀리 있는 추억이, "내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 주"는 경험을 열어준다. 그것은 추억을 통한, 영화를 통한, 열림(open)이다. 

 

※ 추신

1.

OTT 플랫폼 왓챠에 등장하는 <러브레터> 번역 자막 중 동의할 수 없는 명사가 하나 있다. 이츠키가 마지막 편지를 쓸 때 펜이 아니라 '컴퓨터'로 쓴다는 자막이 달리는데, 나카야마 미호의 발음은 컴퓨터가 아니다. 편지를 쓰는 기계 역시 컴퓨터가 아니다. 전동타자기와 컴퓨터 사이에 잠시 등장했었던 '워드 프로세서'다. 워드프로세서는 10줄 정도의 문장을 볼 수 있는 액정 화면이 있었고, 열전사 용지(영수증이 종종 쓰이는)나 리본을 사용해 직접 프린트를 할 수 있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일본 워드프로세서 제품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국내에서도 1995년도를 전후로 반짝 유행을 했다. 컴퓨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워드프로세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워드프로세서는 영화의 시대성을 드러내는, 편지를 쓰는 중요한 사물이다. 

 

2.

'에릭 로메르'와 '이와이 슌지'를 비교해 볼 수 있다. 47분 길이의 장편 데뷔작 <언두>(1994)는 작가 유키오와 연인 모에미의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모에미는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유키오가 선물한 거북이를 필두로 유키오의 물건들을 꽁꽁 묶기 시작한다. 제목 그대로 '언두(undo)'다. 연인이 걱정된 유키오는 모에미를 데리고 의사를 찾지만 진단은 사랑에 의한 집착으로 이렇게 되었다는 것. 죄책감에 사로잡힌 유키오는 며칠 후 끈으로 모에이를 묶기 시작한다. 이 작품뿐만이 아니다. <피크닉>(1996),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1996), <릴리슈슈의 모든 것>(2001) 등은 폭력과 성적인 세계로 점철되어 있다. 그에 반해 <러브레터>나 <4월 이야기>(1998)와 같은 작품은 여주인공의 욕망이 성취되는 결말을 보여준다. 이를 두고 두 가지의 이와이 슌지의 세계가 있다고 말하지만, <러브레터>나 <4월 이야기>의 여주인공도 자세히 보면 다른 영화 못지않은 집착적 욕망의 소유자다. 또한 <언두>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것을 묶어 두는 것은 이와이 슌지 초기 영화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다. 

에릭 로메르의 경우 영화의 대부분이 주인공의 욕망이 좌절된 채 끝이 난다. 자만심에 의해 스스로 배신을 당하는 <모드집에서의 하룻밤>(1967), 세 여자를 오가다 끝내 아무도 선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여름이야기>(1996) 등 욕망이 좌절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에릭 로메르의 영화 중에도 주인공의 고집스러움이 은총과 축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녹색광선>(1986)의 델핀은 휴양지를 오가는 여름을 반복하지만 한 휴양지에서 그토록 원하던 남자를 만나 함께 녹색광선을 보게 된다. <겨울 이야기>(1992)의 주인공 펠리시는 여름 날 만났던 남자를 홀로 아이를 낳은 후에도 하염없이 기다리며 다른 구혼자들을 물리친다. 그런데 펠리시의 고집은 기적적으로 이뤄져 우연히 버스 안에서 남자와 재회를 한다. 

두 감독이 나란히 비교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상 속의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두 감독들의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좌절과 어두움으로 향해 간다. 그런데 종종 기적적인 은총을 경험하는 이야기를 만든다. 그 순간들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종종 경이롭다. 

 

3.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의 기초는 12월 31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강연을 바탕에 두고 있다. 지난해 마지막 날인지라 이론적 설명을 길게 하지는 않았다. 이 글을 통해 빠르게 지나갔던 개념의 토대를 헤아려볼 수 있다.

[글 이상용, poema@ccoart.com]

 

ⓒ 제이앤씨미디어그룹

러브레터
Love Letter
감독
이와이 슌지lwai Shunji

 

출연
나카야마 미호
Miho Nakayama
토요카와 에츠시Etsushi Toyokawa
한 분샤쿠Bunjaku Han
시노하라 카츠유키Katsuyuki Shinohara
사카이 미키Sakai Miki
카시와바라 타카시Takashi Kashiwabara
스즈키 란란Ranran Suzuki

 

수입 조이앤시네마
배급 제이앤씨미디어그룹
제작연도 1995
상영시간 117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1999.11.20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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