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마 신지] 유전되고 회전하는 형상들
[아오야마 신지] 유전되고 회전하는 형상들
  • 이현동
  • 승인 2023.01.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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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하는 이미지와 그 의식"

아오야마 신지가 타계한 지도 어느덧 수개월이 지났다. 그가 영화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장 뤽 고다르가 조력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기 6개월 전에 일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추모의 명목으로 쓴 이 기록이 결국 어떤 주제와 목적을 간직한 채 독자들에게 전달될지를 예상하기 어렵다. 

아오야마 신지를 추모하는 행렬 중 대표적으로 릿쿄 대학 시절부터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오던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아오야마 신지를 함부로 추모하지 않기 위해서」)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건, 그를 직접 마주하고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도 없이 애통함을 논구하는 건 나의 영역은 아닐지언정 일본 영화계에서 그의 이름이 소멸한다는 사실만은 안타깝게 느껴진다. 우선 그를 가까이서 애정했던 이들 앞에서 본 글이 무위하게 펼쳐지지 않도록 '함부로 추모하는 일'을 금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말해 그의 영화를 부정하기보다 긍정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 글은 한 영화 팬이 그의 영화를 탐색하며 발견했던 그의 의식과 기록에 관한 짤막한 각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오야마 신지의 죽음 뒤에 발표된 여러 평론가들의 글에서 그의 영화 언어, 더 나아가 규칙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와 캐릭터를 잘 분석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아오야마 신지의 정신(시대적일 수 있는)과 이에 따라 차츰 변용되는 영화의 궤적들을 조망하는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아오야마 신지 감독 ⓒ 2020 Living in the Sky Film Partners

아오야마 신지와 누벨바그

먼저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를 정의할 때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누벨바그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규명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가 90년대에 창간된 일본 판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발표한 글인 「누벨바그 선언, 또는 나는 어떻게 해서 필립 가렐의 사도가 되었는가?(Nouvelle Vague Manifesto, How I Became a Disciple of Philippe Garrel)에서 그가 총체하려는 이미지와 주제, 그리고 그가 강조하는 누벨바그가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데 도움이 되는데, 다음 구절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사고방식으로서의 누벨바그는 결국 투쟁의 주체가 개인인 상황에서 정치적인 관점에서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담론일 뿐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담론은 정확히 개인과 타자의 연대에 관한 것이고, 그 영향은 시대라는 층위에서 우발적으로 발굴되는 고고학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후에 서술하겠지만,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가 초기와 중기, 후기를 나눌 수 있는 지점은 바로 '타자에 대한 태도'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곤혹스럽게도 해석이 불능한 이미지를 마주하는 대중의 시선을 넘어서 의식적으로도 읽히지 않는 감각으로 충동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어떠한 이미지를 비관적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낙관적인 방식으로 그리기도 한다. 여러 평론가들이 동일하게 논구했던 '원'의 이미지가 일본이라는 국가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오야마 신지의 대다수의 은유는 국가 혹은 공동체를 잇는 범용적인 의미, 그리고 특유의 개인적인 정서와도 그 의미를 공유한다. 초기 영화 <헬프리스>(1996), <차가운 피>(1997), <유레카>(2000)에서 초반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살인의 도구가 총인데, 그 총구가 '원'인 것도, '터널'을 통과하는 인물을 각각 다른 앵글로 프레임에 담는 것도 일본이란 국가에 종속된 그들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투영하는 키워드와 같다.

아오야마 신지는 이어서 '타자를 어떻게 다루는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누벨바그'임을 밝히는 동시에 작가주의가 보편적인 이미지를 말살하고, 개인을 보호하려는 운동이자 주체를 강화하는 시도임을 이야기한다. 이 글이 그의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난 시기(1997년 8월)임을 유념할 때 <헬프리스>, <차가운 피>가 표방하는 것이 단순히 야쿠자를 다룬 휴먼 드라마, 범죄 스릴러와 같은 장르 영화의 범주로 치환되지 않고 보편이라는 이미지를 수정하려는 의도에 진척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필자는 아오야마 신지를 다른 표현인 작가주의 감독의 한 부류로도 소개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인데, 여기서 하스미 시게히코의 평론집인 『영화의 맨살』의 한 대목을 인용함으로 이를 보완하고자 한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작가를 중심에 두고 영화를 논하는 것이 작가주의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그것은 전혀 틀린 것이다. 작가주의라는 것은 1950년대에 프랑스의 젊은 비평가들이 그때까지 예술적으로는 전혀 평가받지 않고 있던 히치콕과 하워드 혹스의 훌륭함을 단지 무지한 프랑스인만이 아니라 무지한 미국인에 대해 가르쳐주겠다는 패기로부터 생겨난 비평의 입장으로 그와 같은 자세 (중략) 충분히 평가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건 중요한 작가라고 강하게 의식한다고 하는 의미가, 작가주의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 영화 <헬프리스>(1996)
ⓒ 영화 <새드 베케이션>(2007)

이는 아오야마 신지의 에세이 영화인 <이미 늙어버린 그녀의 모든 것에 대해 말하지 않기 위하여>(2001)의 후반부에서 나열되는 감독들의 사진을 통해 그의 작가주의적 관심을 유추할 수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 사카모토 준지, 스와 노부히로와 같은 감독, 즉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감독이 아닌 일본의 주변부를 배회하고 있는 감독을 복권하려는 시도는, 분명 그가 강조하고 싶은 이미지의 현현인 셈일 테다. 그들이 결코 주류 영화로 편승하지 않기 위한 고군분투는 결국 영화란 존재에 대한 물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화에서 이미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결부된다.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편집위원으로 근무했던 영화 평론가 오기노 요이치(荻野洋一)는 아오야마 신지의 장편 데뷔작이라 알려진 <헬프리스>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도쿄를 중심으로 고조된 누벨바그 재소화의 움직임은 장면의 화려함에 비해 비평적인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아오야마 신지가 <헬프리스>에서 실현한 것은 그 날카로운 욕망을 하나하나의 샷에 새기는 것이었다."

야쿠자를 다룬 이 이야기는 폭력을 미학의 부류로 승격시켰던 <그 남자 흉폭하다>(1989), <하나비>(1997)의 기타노 다케시나 그전으로 보자면 <살인의 낙인>(1967)의 스즈키 세이준과 같은 감독을 떠올리게 한다. 우연하게도 오기노 요이치가 언급한 1970년 후반과 90년대는 정확히 일본의 대표적인 누벨바그 작가 오시마 나기사가 <의식>(1971), <여름의 여동생>(1972)을 끝으로 제작사와 작별한 시기와 겹친다. 오시마 나기사는 이후 외국과의 합작 영화를 만들며 정치적 메시지와 아방가르드의 도전이 사라졌고, 이 지점에서 아오야마 신지의 등장은 이미지의 정체, 그리고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숙고하며 다시금 갱신하는 시네마의 부활을 예고한 것이었다.

 

 

아오야마 신지의 시류들

아오야마 신지의 흑역사로 알려진 첫 번째 작품 <교과서엔 없어>(1995)는 앞으로 그가 전개할 주제와는 전혀 무관한 작품처럼 보이지만, 애초에 그가 품고 있는 장대한 선언처럼 들려지기도 한다.(교과서가 보편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지점에서) 필자는 중학교 시절에 원작인 만화책을 빌려 본 기억이 있는데, 그림체는 다르지만, 성인용 괴짜 가족처럼 느껴지는 기괴함 같은 요소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고교 교사와 야쿠자의 딸과의 동거를 다룬 이야기인데, 마치 이런 배경을 연결하고 싶다는 듯이 다음 작품 <헬프리스>에서는 야쿠자의 동생이 나온다. 비교하기엔 뭐 하지만 그가 존경하는 고다르의 첫 작품인 <네 멋대로 해라>가 불러온 파란에 비해 초라한 작품이지만, 분명 이는 일본의 사회 풍경을 희화화하고 보편의 이미지를 탈각하기 위한 초기의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 영화 <유레카>(2000)
ⓒ 영화 <도모구이>(2013)

위에서 말했듯이 아오야마 신지는 90년 중 후반(<헬프리스>, <차가운 피>)과 세기말(<유레카>), 그리고 그 낙관주의가 펼쳐지기 시작하는 <새드 베케이션>(2007) 이후로 분류할 수 있다. <유레카>가 등장하는 세기말에서 왜 그전까지 <헬프리스>, <차가운 피>에서 희망이 아닌 계속 전진해나갈 일본의 음영만을 다루고 있는지의 물음은 그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반영하는 몇몇 사건에서 비롯된다. '고베대지진'과 '옴진리교 가스테러사건'과도 같은 사회의 어둠을 드러내려는 사건이 그 사례이다. 아오야마 신지 초기 영화는 정치적인 것과 영화는 근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도 국가의 생활환경 속에 종속되어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시네마로 표출하려는 욕구에서 출발한다. <헬프리스>에서 변기로 흘려보내는 마약은 결국 하천을 통해 일본 전역에 퍼지게 하는 환각으로서의 또 다른 유전의 오브제이며, <차가운 피>에서 주인공인 형사는 굳이 자신이 총을 가져야 할 명목이 없음에도 자결을 선택한 커플의 총을 습득하는 그 과정은 폭력의 유전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헬프리스>와 겹치는 장면이 비교적 후기 영화인 <도모구이>에서 드러나는데, 아버지가 성관계할 때 사용하는 폭력을 상상하며 정액을 하수구로 배출하는 행위는 지극히 유전의 고리가 잠식하고 있음을 매개한다.

초기 영화에선 그것이 종결되지 않을 것처럼 잔혹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완결성이 보이지 않고 시간의 지대 속에 앞으로도 영원히 진행될 것 같은 프레임들, 무성의한 연대가 진행형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세기말에 등장한 <유레카>라는 작품은 마치 아오야마 신지가 고리를 끊어 낼 해답을 찾은 것처럼 그것을 일종의 가족주의를 통해 발견한다. <헬프리스>에서 아버지의 형상을 찾을 수 없었고, <차가운 피>에선 총구의 대상을 지목하지 못하는, 상실된 영화에서 세기말의 혼란을 뚫어낸 <유레카>는 아오야마 신지의 윤리적 가능성을 선언하며 재생과 회복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 같은 채도로 채색된 우울한 세계에서 오빠 타무라 나오키(미야자키 마사루)는 살인 현장의 목격자로 그 유전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특정한 이유도 없이 습관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 속박을 끊어내는 건 같은 살해 현장을 목격했지만, 마치 아버지로 대체되는 것 같은 인물인 사와이 마코토(야쿠쇼 쇼지)다. 나오키가 살인을 저지르려는 것을 저지한 채 그의 칼을 뺏는 과정에서 마코토는 그에게 본보기로 상처를 입히고 자기 손에 흐르는 피를 나오키의 얼굴에 갖다 댄다. 그리고 곧바로 자전거에 그를 태우고 그 주변을 원 모양으로 돌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이전까지 해결하지 못한 윤리적인 딜레마가 해소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종교적 의미와도 접합할 수 있는 이 장면은 동일하게 피의 희생으로 인해 그 유전을 끊어낼 수 있다고 믿는 일본을 향한 낙관주의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아오야마 신지의 기타큐슈 3부작 마지막이자 후기를 알리는 <새드 베케이션>은 <유레카>라는 세기말을 지나 주체이자 개인이었던 남성이 여성을 객체에서 주체로 인식하는 반향을 선보인다. <헬프리스>의 10년 후 이야기인 이 배경에서 이전에 말하지 못했던 여성이 등장한다. 일종의 장애와 침묵으로 일관된 모습이었던 <헬프리스>의 유리(마츠무라 유리)와 <유레카>의 코즈에(미야자키 아오이)는 영화 안에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고, 그리고 <헬프리스>의 주인공인 켄지(아사노 타다노부)의 어머니 차요코(이시다 에리)는 영화에서 주제의식을 담당하는 주요 축으로 등장한다. 켄지는 자신을 버렸던 차요코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우고, 그는 현재의 아들인 유스케를 살해하지만 차요코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낳으면 된다는 말한다. 그리고 차요코는 유리가 켄지의 아버지와 야스오의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서 낳은 아이라며 자신이 도망친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납득하지 않지만 차요코는 너는 꼭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며 확신에 찬 웃음으로 켄지를 쳐다본다. 그녀가 말한 '다시', '돌아온다'라는 건 결국 남성이 부성이 아닌 모성으로 돌아올 것임을 의연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영화 평론가 후지이 진시는 글 「아오야마 신지, 미완의 사가」에서 <새드 베케이션>을 이렇게 요약했다.

"<새드 베케이션>에서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아무리 아이가 발버둥질해도 모든 것을 미소와 함께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사랑임에 틀림없다. 온갖 저항이 모성으로 인해 무력화되는 개미지옥 같은 나라, 일본――절망적으로 여겨지는 한편, 그 끝없는 포용력에 희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 서게 되는 그 지점에서 '기타큐슈 사가'는 닫히는 것이다."

아오야마 신지가 말하는 기타큐슈 사가의 종결은 여성, 모성이 갖고 있는 창조적 역량에 관한 회귀적 에너지를 의미한다. 오로지 여성의 몸이 생명을 잉태하는 프레임이 된다는 지점에서 후기 영화는 직설적으로 말해 '일본'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새롭게 갱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영화 <구름 위에 살다>(2020)

남성이 아닌 여성이 가진 포용력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는 것은 다음 영화인 <도쿄공원>(2011)과 <도모구이>(2013)에서도 강조된다. 다른 영화에 비해 비교적 덜 언급되는 <도쿄공원>은 일본의 이미지를 잘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오즈 야스지로를 떠올리게 하는 몇몇의 쇼트가 등장한다. 로우 앵글로 찍은 정면 쇼트와 그가 찍는 사진이 흑백이라는 점과 사물과 빈 공간을 비추는 필로우 숏(pillow shot) 등의 아날로그적 모티브에 기인한 촬영방식은 그가 오즈라는 일본적인 이미지를 수용하고 그 상징을 복권하려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누벨바그를 논구했던 그가 가장 일본적인 형식을 수긍하고 반영하는 것은 마치 야생성이 강한 남성상에서 벗어나 모성이란 포용력으로 회귀한 것은 아닐까.

유전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건 단순히 주제 의식뿐만 아니라 이런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도쿄공원>은 사진 기사와 건축가를 꿈꾸는 코지가 자기 아내를 도촬해 달라는 남편의 부탁을 받고 시작되는 이야기다. 바람을 피운다고 생각하는 남편의 의심이 종식되는 과정은 일본을 상징하는 도쿄공원에서 남편과의 추억인 암모나이트를 떠올리는 것뿐이었다.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결과로 보이지만, 이것 역시 일상을 내포하는 회귀적 형상으로써 일본을 조망한다. 코지의 가족 관계는 굉장히 흥미로운데, 재혼한 아버지가 있고, 그 아버지의 아내의 딸이 코지를 흠모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 작품은 이뤄질 수 없는 남녀 관계를 다룬 <흐트러지다>(1964)와 같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가 떠오르는 게 하는데, 영화사적 맥락 안에서 볼 때 이질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일본 영화의 고전 이미지를 복권하려는 제법 특수한 구석이 있는 영화다. 이런 윤리적인 딜레마는 전 작품에 비해서 평이하지만,

낙관주의로 변용하고 있는 것을 유추할 때 아오야하 신지는 자신의 영화와 태도 또한 갱신할 수 있는 유기적인 아티스트임에 분명하다.

한편으로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로망 포르노 장르로 기획되었던 <도모구이>도 일본 남성의 성장기로 추후에 아빠의 폭력을 유전으로 받지 않고, 도리어 그 대상이었던 여성으로부터 해결되는 메시지는 초기 작품에서 그가 나열했던 의뭉스러운 종결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어구가 "그리고 새해가 밝고 쇼와시대가 끝났다. 만조가 시작될 시간이었다"라는 것은 해수면이 올라오는 만조의 시기, 즉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암시한다. 이전 장면이 손이 묶여 있는 남성 투마(스다 마사키)가 반대로 당하는 주체가 되고, 곧 타자였던 여성이 적극적인 주체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형태 또한 아오야마 신지가 이전에 바라보았던 일본에 대한 시각과 타자 인식이 점차 수정되고 있음을 내포하는 것이다.

아오야마 신지가 남성주의 감독은 아닐지언정 이러한 모든 관찰의 밑바닥엔 모두 일본이란 토양 아래 은유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주요하다. 초기와 중기, 후기를 통해 좀 더 직설적인 방식으로 타자를 보려는 그의 이미지는 결코 그 초기의 비범함과는 속성이 또 다르다. 모두 한 국가와 가족이란 유전을 상징하는 고리에 연결된 그의 영화는 의식 속에서 소거되거나 다시금 재소환된다. 마지막 영화인 <구름 위에 살다>(2020)는 이제는 가족 이야기뿐만 아니라 계층 간의 연대로 그 주제를 확장하는 데에 이르며, 남성보다 여성을 주연으로 하여 영화를 이어 나간다는 것에서 또 한 번 아오야마 신지는 색다른 시도를 한 셈이다.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에서 모순적으로 보이는 도덕률도 구조의 범위 아래서 그 지대를 피격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결국 이러한 끊을 수 없는 연대의 문제로 귀결된다. 피의 문제, 유전의 문제, 더 나아가 일본이란 국가의 사회구조의 문제를 포획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그가 만드는 '원'의 문제, 계속해서 운동하고 있는 삶의 고리를 포착하려는 무언의 시도로 점철된다. 아오야마 신지의 등장과 더불어 영화사적인 내용을 탐색하는 것도, 점차 변용되는 영화의 양상도, 모두 그를 추억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미지들이다. 그의 영화는 그런 연속되고 과거와 현대의 각기 다른 층위의 연결고리를 끝까지 탐구했다. 비록 그가 이 땅에선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헬프리스>에서처럼 일본으로 뿌려진 재는 어디선가 이미지로 다시금 회귀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이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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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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