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사주' 복장의 이미지로 프레임의 두께 체크하기
'코르사주' 복장의 이미지로 프레임의 두께 체크하기
  • 이현동
  • 승인 2022.12.27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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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인되기 쉬운 전기 영화를 위한 특별한 매뉴얼"

<코르사주> 이전에 이와 동일한 배경을 다뤘던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 있다. 1955년도 처음 공개된 에른스트 마리슈카 감독의 <시씨> 3부작이다.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젊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 시씨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명랑하게 그려냈다. 요란했던 이 스캔들은 영화의 서사로 사용하기에 적합했고, 많은 오스트리아 국민을 넘어 세계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여전히 시씨는 빈의 기념품점에 진열될 정도로 그 이미지는 관광자원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 그린나래미디어

마리 크로이처 감독은 이러한 고착화된 이미지 소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당시 황후, 규율에 종속된 여성의 삶이란 문제의식을 재구성하기로 한다. 시씨의 쾌활한 이미지와는 무관하게 40살의 황후의 삶이 얼마나 비관적이었는지를 조사하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코르사주>라는 제목으로부터 그 암울한 상황에 정박한 한 여성을 포착한다. 코르사주가 어떠한 옷인가에 대해 수많은 기원과 정보를 매체와 기록을 통해 찾아볼 수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 이미지가 당시 얼마나 여성의 삶이 평면적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가 된다는 것이 주요하다.(푸코가 마치『감시와 처벌』에서 언급한 '규율권력'의 일환으로 축적되어 점차 관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권력화의 산물로 칭해지는 것임을 상기해 보자)

특히, "왜 영화 제목이 이름인 '엘리자베트'나 '시씨'가 될 수 없느냐"는 문제는 주인공의 위치가 황후라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별 시스템이 어떤 이미지로 소모되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여성주의 감독으로 알려진 마리 크로이처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캐릭터가 (직역한다면) 복잡성(complexity)이 떨어지는 것은 제작자의 책임"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아직 여성보다 '남성'을 주류로 묘사하고자 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음을 뜻한다.

 

<스펜서>와 <코르사주>: 이름과 복장으로부터

<코르사주>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공유하는 영화가 있는데, 그것은 파블로 라라인의 <스펜서>(2022)이다. 올해 개봉했던 두 작품이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한 전기 영화라는 점도 그렇지만, 스펜서나 엘리자베트가 억압된 구조 속에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것 또한 이를 매개한다.

앞서 코아르CoAR에 쓴 「'스펜서' 기억과 기적이 있는 집으로」에서 필자는 외부와 내부의 미장센과 카메라 프레임에 관해 이야기한 바 있는데, 먼저 옷차림새로 적용하자면 왕궁을 떠나는 엔딩 장면에서 이 복장은 두각을 나타낸다. <스펜서>에게선 청바지라는 캐주얼로써의 변용이 돋보이지만, <코르사주>에서 엘리자베트는 동일한 복장을 한 많은 여성의 무리에 속해 있다. 이런 차이를 온전히 개인의 서사를 다루는가 혹은 '사회'에 속한 개인인가 하는 감독의 영화 문법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도 이를 적용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스펜서'가 개인이라면, '코르사주'는 사회이다.

 

영화 <스펜서>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특별시 SMC
ⓒ 그린나래미디어

또 <스펜서>의 카메라의 앵글이나 초현실적으로 사용되었던 환상들이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직관적으로 동원이 되었다면, <코르사주>의 프레임은 그보다 주변부를 탐사하며 감정을 더욱 복잡하게 체감하도록 유도한다. <스펜서>에게선 주로 왕궁과 자신의 고향이었던 폐허가 된 생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코르사주>에선 공간의 이동이 잦다. 그뿐만 아니라 황후가 없는 공간, 그 빈 공간을 확대하거나 지연시켜 내밀하게 매설된 주제 의식을 덧칠한다. 후에 서술하겠지만 이는 영화의 강력한 이미지 시스템이자 리듬을 유려하게 조율하는 음표와 같다. 아울러 <스펜서>에서 'All I need is a Miracle'이란 엔딩곡이 주제와 형식을 포괄하며 클래식에서 캐주얼로 차용되었던 것과 동일하게 <코르사주>의 OST(Camille의 She was) 또한 이러한 영화 언어의 방식을 선택한다.

결론적으로, 이 두 작품이 극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부분은 개인과 사회라는 점(이것도 역시 너무도 단편적인 시각 같지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란 화자'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성을 다루는 다소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시선(상대적으로 많게 느껴지는 카메라 무빙과 숏 변화)인 <스펜서>와 달리 <코르사주>는,

코르사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냉담하고도 처연한 시선을 보여주는데, 이는 남성의 카메라 앵글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쇼트의 연결이 배우에게만 몰두하고 있지 않다는 있다는 점에서 이런 프레임 전개는 코르사주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코르사주를 벗기 위해서

"당신은 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면 되는 거요. 그래서 당신을 택했고, 그게 당신의 존재 이유요"라고 말하는 요제프 황제의 말은, 코르사주라는 옷의 특성이 공통으로 함의하는 발화가 무엇인지를 체크할 수 있는 요소다. 여성과 황후라는 사회화된 '대명사'는 이전에도 언급했듯 감독의 문제의식과 연결된 것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가족상이 있다"는 아들의 말도 '가족'의 정체성과도 결부되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아주 곤고하게 묻어 체화된 규범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의 주제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등장하는 건 욕조에서 옷을 입은 채 몸을 담그고 있는 황후의 모습인데, 여기서 그녀가 복장을 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자기 몸을 하인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암묵적인 룰임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욕조란 것은 하나의 '프레임'으로, '갇혀있는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에게도 드러난다. 이 장면 다음에 황후에게 황후로서의 '품위'를 강조하는 황제는 은연중에 규율이란 옷을 보정하는 디자이너로 위치하는 셈이다.

 

ⓒ 그린나래미디어
ⓒ 그린나래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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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체를 규정하는 건 이런 불온한 프레임과 대사들이 축적되고 있다는 그 불편함에 있지만, 단순히 여성이 남성을 대적할 수 없다는 시류가 공허하게 종결되지만은 않는다. 황제는 황후의 어긋나는 행위에 분노를 쏟아내지 않는다. 사촌과의 배덕하기 짝이 없는 육체적인 관계와 황후의 품위에서 벗어나는 담배를 틈만 나면 태우고, 심지어 부상을 입은 군인 옆에 누워 담배를 공유하는 그녀를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이는 규범에 저항하고 있는 황후만이 아니라 사회화의 구속된 황제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황후를 둘러싼 불편한 이미지가 중첩되어 등장하는 신이 있다. 문과 기둥, 그리고 창문의 틈 사이로 그녀를 관음하는 것 같은 시점 숏과 그녀의 방 외부에서 대기하는 황제와 하인들의 이미지가 그 예시다. 이것은 영화적이라기보다 보다 사실적인 거리에서 그 이미지를 바라봄으로 실제를 공상하게끔 유도한다. 이러한 공상은 영화적인 속임수로 대중에게 어떤 의미를 송신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황후를 배제한 숏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물음은 결국 이 또한 주변부를 포착하는 것인데, 그녀에게 착용된 코르사주(Corset)에 속박된 형상을 소묘하면서도 외부 환경과도 그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 설정된 숏들이다. 그녀의 탈주 소재로 사용되는 사물과 이미지는 코르사주의 둘레에 절대 포박되지 않으려 애쓴다. 예를 들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던 작가에게 왕궁에 배치된 것으로 따라 그리라고 말하거나, 머리카락을 단발로 잘라 품위를 손상하고, 자신의 생일에 코르사주를 입은 하녀를 대신 보낸다든지 하는 모든 행위는 코르사주에서 탈주하고자 하는 황후의 욕망을 표명한다.

특별히 영화에서 '활동사진'이라는 명칭으로 칭해지는 발명품은, 구조 너머에 있는 '새로운 것'으로 영화에서 탈주하여 또 다른 영화로 중첩되는 전복의 이미지다. 공식적으로 영화의 기원이 뤼미에르로 알려진 경우가 많지만, 그전에 초기 영화 카메라 발명가인 루이 르 프린스를 소환한다는 것은 이러한 정형화된 관습을 넘어서기 위해 투영된 장치인 셈이다. 황후와 프랑스에서 출생한 루이 르 프린스와 마주했던 기록은 없지만, 승마하기 위해 영국에 온 황후와 영국에서 활동한 둘의 만남은 실로 신비하게 이뤄진 영화 이미지라는 점에서 이 코르사주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건, 여성서사뿐만은 아니다.

연속으로 촬영된 활동사진 앞에서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자유롭고 생기가 가득하다. 유일하게 이 생기가 돋보이는 장면은 사촌 루트비히(마누엘 루비)와 수영을 하는 장면이라는 점은 이 영화의 연속성을 부각한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엘리자베트는 같은 옷을 입은 하녀들과 함께 배를 탄다. 카메라 앵글은 선미에서부터 뛰어내리려 하는 황후를 부감 숏에서 익스트림 롱 숏으로 감정이 포착되지 않은 채 클로즈업 없이 전망한다. 영화는 황후의 하강을 밀접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적이라기보다, 그녀를 보고 있는 관객인 우릴 강조하는 셈이 된다. 거칠고 투박하게 어떠한 앵글의 변화도 없이 떨어진 황후의 생사는 결국 규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곧바로 엔딩 크레딧과 함께 낡은 방 안에서 안정적인 표정과 함께 그녀의 춤이 시작된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그녀가 죽지 않고 부활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러한 이미지는 너그러운 태도로 시대의 구분 없이 보편적인 메시지가 되도록 용의주도하게 이미지를 분산한다. 그녀가 부활하든 부활하지 않던 그 코르사주로 벗어난 여성에게 오직 '자유'만이 남도록.

[글 이현동, Horizonte@ccoart.com]

 

ⓒ 그린나래미디어

코르사주 
Corsage
감독
마리 크로이처
Marie Kreutzer

 

출연
비키 크립스
Vicky Krieps
플로리안 테히트마이스터Florian Teichtmeister
카타리나 로렌츠Katharina Lorenz
마누엘 루비Manuel Rubey
아론 프리즈Aaron Friesz
로자 해야이Rosa Hajjaj
콜린 모건Colin Morgan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14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022.12.21

이현동
이현동
 영화는 무엇인가가 아닌 무엇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사람. 그 가운데서 영화의 종말의 조건을 찾는다. 이미지의 반역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영화 안에서 매몰된 담론의 유적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한다. 매일 스크린 앞에 앉아 희망과 절망 사이를 배회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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