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루카 구아다니노의 '피와 뼈'
[Critique] 루카 구아다니노의 '피와 뼈'
  • 이상용
  • 승인 2022.12.28 11: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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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즈 앤 올>의 새로운 여정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재일 한국인 최양일 감독의 대표작 <피와 뼈>(2005)는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서 오사카로 건너간 김준평(기타노 다케시)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그는 분명 나쁜 아버지이지만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친 인물이기도 하다. 최양일 감독은 김준평 역에 기타노 다케시(그가 연기하는 한국말은 매우 드물다)를 캐스팅했을 뿐만 아니라 오다기리 죠, 쿠니무라 준, <고독한 미식가>로 친숙한 마츠시케 유타카 등 재일 한국인 역에 여러 일본 배우를 활용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것은 이미지, 언어, 역사가 뒤엉켜 착종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일 수 있다. 아무려나 재일 한국인 양석일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과 최양일의 영화가 어떤 의미로든 지나간 시대의 아버지를 기리고 있듯이, '피와 뼈'라는 단어는 혈통과 정체성 그리고 생존을 위한 모든 것을 함축하는 단어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 수상작 <본즈 앤 올>(2022)을 보며 떠올리게 된 단어 역시 '피와 뼈'였다. 비록, 이 작품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 세대의 로드무비를 보여주고 있지만, 부모 세대이든 자식 세대이든 인생의 한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를 찾거나 부정하며 끝내 자신의 '뼈'를 드러내야 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피'의 세계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피는 구아다니노의 영화가 주요하게 다뤄온 혈통과 가문 그리고 정체성을 향한 본질을 함축한다. 욕망 3부작이든, 리메이크로 시도한 <서스페리아>(2018) 같은 작품이든 피는 주인공의 정체성과 파문을 둘러싼 세계의 핵심을 이룬다. <본즈 앤 올> 역시 가족을 찾는, 사랑하는 이를 기억해야 하는 여정의 로드 무비다. 그것은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이 글을 통해 구아다니노의 전작들을 경유하면서 <본즈 앤 올>이 보여주는 피의 세계와 변화되는 지점을 읽고자 한다.

 

피의 세계 1

욕망 3부작으로 불리는 첫 작품이자 구아다니노의 페르소나로 불릴 수 있는 '틸다 스윈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이 엠 러브>(2009)는 밀라노 대저택을 배경으로 엠마(틸다 스윈턴)가 겪는 변화를 그려낸다. 영화의 첫 장면은 레키 가문을 이끄는 할아버지의 생일 파티다. 온 가족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할아버지는 아들과 손자, 즉 엠마의 남편과 아들 에두를 사업의 공동 후계자로 지목한다. 이 장면은 어둡고 은밀하다.(영화는 부자간의 갈등을 노골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은밀하게 다른 세대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식사가 끝날 무렵 에두와 경기를 벌였던 요리사 안토니오가 저택을 찾아온다.(두 사람이 무슨 경기를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에두에게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선물로 들고 찾아온다. 에두는 엄마를 불러 세워 자연스럽게 안토니오를 소개한다.

 

영화 <아이 엠 러브>(2009) ⓒ 영화사 진진

이들의 만남은 에두가 연인을 선보이는 가족 모임으로 이어지고, 안토니오가 이 모임의 요리사가 될 것을 의뢰받는다. 그의 재능을 확인한 엠마는 집 안 여성 모임 장소로 안토니오가 일하는 식당을 선택한다. 급기야 엠마는 산레모에 있는 안토니오의 식당을 찾기에 이른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

<아이 엠 러브>는 불륜의 서사지만, 산레모에서 나누는 대화를 통해 엠마의 과거와 숨겨진 그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남편을 따라 러시아에서 무작정 왔던, 러시아 이름인 키티쉬를 버리고 남편이 지어준 '엠마'로 살아갔던 여자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찾는 모험을 감행한다. 영화의 절정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에두가 화를 내는 장면이다. 에두는 엄마가 거짓말을 한다며 화를 내고, 안토니오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져갔다며 분통을 터트린다. 그런데 엠마와 다툼을 벌이던 에두에게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난다. 에두는 뇌진탕으로 죽음을 맞는다. 통상적인 멜로드라마였다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라도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대가를 치르는 어머니를 보여주었을 것이다. 도덕적 단죄는 대다수의 (불륜)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오래된 관습이었다. 

그런데 <아이 엠 러브>의 엠마는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단죄하지 않는다. 장례식이 끝난 후 자신을 위로하는 남편을 향해 엠마는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이상 몰라"라고 말한다. 우리까지 이러면 안 된다면서 함께 극복해야 한다는 남편을 향해 엠마는 "나는 안토니오를 사랑해"라며 단호하게 말한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엠마는 죄의식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각성'을 선언한다. 남편은 엠마에게 걸쳐주었던 재킷을 벗기면서 "당신은 이제 여기에 없는 거야"라며 야멸차게 돌아선다. 집으로 뛰어 들어온 엠마는 상복을 벗어던지고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후 집 밖으로 나선다. 저택의 문은 열려 있고, 문의 바깥은 환하다. 영화는 집을 나서는 엠마를 보여주며, 그녀를 바라보는 집 안 사람들과 엄마의 모습을 애정으로 바라보는 딸을 시선과 함께 끝이 난다.

그 후 엠마가 안토니오와 만났는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아이 엠 러브>가 뜻밖의 사고로 인해 엠마의 삶과 사랑을 멈추는 영화가 아니라 가문, 저택, 가족, 엄마를 모두 던져버리고 떠나는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새롭게 시작하는 엠마의 이야기인 셈이다.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 디스테이션

이처럼 '존재의 각성', '정체성의 확인'은 구아다니노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욕망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콜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존재를 깨우는 마지막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오가 이렇게 되기까지 번민의 시간이 있었다. 

올리버와 단 둘이 여행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던 엘리오에게 아버지는 진심 어린 충고를 보낸다. 엘리오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세상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날 사랑하는지도 혼란스럽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한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들다니 그런 낭비가 어디 있니? 우리에게는 몸과 마음이 단 한 번 주어지지. 마음은 갈수록 닳아 해지고 몸도 똑같아. 시간이 흐를수록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져. 지금 너의 그 슬픔, 그 괴로움을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이보다 더 명백히 정체성의 문제를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괴로움과 기쁨을 함께 지니고 있고, 그것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이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게 이끈다. 이러한 존재론적 태도는 구아다니노 영화 전반을 통해 다뤄진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걸작을 리메이크한 <서스페리아>(2018)의 절정은 미국에서 건너온 무용수 수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장면이다. 새로운 육체를 통해 부활을 꿈꾸는 마녀 마르코스는 수지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라면서, 널 낳은 여자를 밀어내야 한다며 가짜 어머니를 떠올리라고 말한다. 수지는 미국 시골에 있는 어머니를 회상한다. 이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지하에서 한 존재가 올라오고, 좌중을 압도한다. 마르코스는 당혹하여 수지에게 "넌 누구지?"라고 묻는다. 수지는 의연하게 마르코스를 보며 "넌 누구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 세 마녀 중 누구에게?"라고 질문을 한다. 이때 '마녀'로 번역된 단어가 'mother'이다. 마르코스가 답한다.

"마녀, 마녀 서스피로룸!"

수지가 답한다.

"내가 그녀다."(I am She!)

"아이 엠 러브"나, "아이 엠 쉬"는 존재의 각성을 드러내는 구아다니노식 문장이다. 자신이 원조 마녀 중 하나라는 사실을 각성한 수지는 무용단의 구세대를 정리하고, 과거의 죄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클렘페러 박사에게 진실을 들려준다. 이로써 과거의 죄의식은 청산된다. 이 영화를 카니발리즘이나 공포 영화의 산물로도 읽을 수 있지만, 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정체성'에 대한 각성, 즉 자신이 마녀 서스피로룸의 현현임을 자각하는 모습이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본즈 앤 올> 역시 정체성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 매런은 자신이 식인을 해야 하는 '이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전작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구아다니노 영화의 대부분은 정체성을 깨닫는 장면이 영화의 후반이나 절정에 등장한다. 하지만 매런이 이터라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한다.

학교 친구의 초대로 한밤 중에 몰래 친구 집을 나간 매런은 친구의 집을 방문한다. 매런은 또래 소녀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이 서로의 손에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테이블 아래 함께 누워있던 친구가 손가락을 내밀며 보여줄 때, 매런은 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가져간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이었다면 이 장면을 에로틱하게 상상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손가락을 빨던 중 친구가 비명을 지르고, 매런의 입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전복해 버리는 영화의 초반부는 매런의 각성과 정체성을 일찌감치 선언한다. <본즈 앤 올>은 정체성을 깨닫고 이를 확인하는 과정을 로드 무비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온 매런은 아빠에게 도움을 청하고, 아빠는 서둘러 짐을 챙기며 차에 오른다. 하지만 버지니아(VA)에서 메릴랜드(MD)로 옮겨간 다음 날 모텔에서 깨어났을 때 매런은 아빠가 자신을 버린 채 도망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빠는 도저히 매런을 감당할 수 없다며, 약간의 돈과 매런의 출생증명서 그리고 녹음한 테이프를 남겨 둔 채 사라져 버렸다. 매런은 테이프에 담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출생증명서를 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어릴 적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엄마를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매런의 엄마를 찾는 여정은 영화 중반 내내 지속된다. 테이프에 담긴 아버지의 목소리는 매런의 기억에 없는 과거의 일화들―베이비 시어터를 먹었던 일, 어머니하고의 일화,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회상―을 수록하고 있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어머니를 찾아가는 여정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이터들을 만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매런은 이터의 본성과 냄새 맡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설리마크 라이런스), 이터와 인간이 함께 지내는 수상한 두 남자 그리고 자신을 엄마가 있는 곳까지 차로 데려다주는 리(티모시 샬라메)를 만난다. 매릴랜드에서 켄터키를 거쳐 미네소타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미국의 동북부를 가로지르는 과정이다. 새롭게 만나는 여러 이터들은 매런의 정체성을 강화해 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이터가 공존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매런은 가장 중요한 이터이자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엄마를 만나기에 이른다. 그런데 퍼거스 폭스 보호 시설에 있는 엄마를 만났을 때 매런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을 겪는다. 간호사는 매런에게 엄마가 15년 전에 시설에 들어오며 찾아올지 모르는 딸을 위해 썼다는 편지를 건네받는다. 편지에는 그녀가 이곳에 오기까지의 결심이 들어 있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에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내가 벗어나게 해 줄게"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두 팔을 먹어치워 거동이 불편했던 엄마가 매런을 향해 갑자기 달려든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시설에 들어온 초기를 제외하고는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았던 엄마이지만, 편지를 읽어가는 매런을 지켜보던 그녀는 자신과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딸을 공격한다.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매런의 엄마가 선택한 것은 자신과 같은 끔찍한 삶이 자신에게서 끝나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자신을 알고 싶다는 매런의 욕망과 딸을 자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엄마의 욕망이 충돌한다. 그것이야 말로 이터의 정체성이, 가족 안에서 가장 극렬하게 충돌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매런의 여정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터가 있다. 티모시 샬라메가 연기한 '리'다. 그는 매런보다 한 살 많은 청년으로, 매런의 엄마를 찾는 여정을 함께 한다. 하지만 매런은 할머니를 만날 때에도, 엄마를 만나러 들어갈 때에도 리가 함께 들어가겠다는 요청을 거부한다. 이 점은 리 역시 마찬가지다. 리의 과거, 즉, 리가 집을 나와 떠돌며 살게 된 원인인 아빠의 죽음 역시 시종일관 언급되지만 리의 입을 통해 발설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이 연인이 되는 순간은 각자의 비밀을 공유(교환)하면서 생물학적인 가족과 결별하고, 두 사람만의 가족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본즈 앤 올>에서 매런의 시선이 자주 다른 가족 혹은 가족사진에 눈길을 보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설리를 만나 따라간 집에서 쓰러져 있던 할머니를 본 매런은 주변에 있는 가족 사잔들을 둘러본다. 또한 리가 지역 축제에서 유혹한 남자를 죽인 후 주소지에 적힌 남자의 집으로 갔을 때, 남자의 가족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은 매런이다. 매런과 리는 자동차에 있던 가족사진을 뒤늦게 발견한다.

어쩌면 매런의 여정은 수많은 인간 가족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버려지고, 엄마와 일찌감치 결별한 매런이 '과연 가족을 이를 수 있을까' 하는 충돌의 이미지를 반복하여 다루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함께 사는 가족의 삶을 선택을 했던 두 사람 혹은 매런이 예측하지 못했던 또 다른 결과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묘사들을 통해 루카 구아다니노의 <본즈 앤 올>은 전작들과는 다른, 변화하는 선택과 비극성을 드러낸다.

 

피의 세계 2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피'는 정체성이자 혈육이며, 더 직접적으로는 가족(혹은 가족 관계)을 가리킨다. 동시에 '피'라는 것이 지닌 공포와 파문의 세계가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비거 스플래쉬>(2015)이다. '거대한 파문'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작품은 구아다니노가 다루는 정체성의 피와는 또 다른 피의 형상을 보여준다. 프랑스 감독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La Piscine, 1969)을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록스타 마리아 앞에 여름 손님이 등장하면서 시작한다. 

 

영화 <비거 스플래쉬>(2015) ⓒ 찬란

<비거 스플래쉬>는 이탈리아 남부 판탈레리아 섬으로 무대를 제시한다. 록스타 마리안은 어째서 이 섬을 휴양지로 선택한 것일까. 다큐멘터리 감독 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의 관계와 선택이 모호한 가운데 여름 손님으로 찾아온 전직 프로듀서이자 마리안의 연인이었던 해리는 마리안에게 끊임없는 구애를 펼친다. 반전 중의 하나는 20대라고 소개된 해리의 딸 페넬로페다. 사실 해리와 페넬로페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년 전에 불과했고, 여권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나이는 17세다. 페넬로페가 해리의 진짜 딸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무엇보다 그녀는 해리가 죽은 날 밤 깨어 있었다. 하지만 페넬로페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그 누구에게도 증언하지 않는다.

네 명의 인물은 저택에서 매일 같이 먹고 마시며 수영을 하고 산책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서로를 유혹하고, 거짓말을 하며, 지켜보고, 탐욕하며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다시 찾아온 해리는 마리안에게 록스타로 부활시키겠다며 허세를 떤다. 섬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해리는 새로운 사람을 마리안에게 소개해 주거나 가라오케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이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된 것은 한 밤중의 수영장에서 폴과 해리가 다툼을 벌이면서이다. 안하무인의 행동을 하는 해리와 현재의 마리안의 연인 폴은 시한 폭탄과도 같은 사이였다. 결국 폴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마리안도, 이 장면을 목격한 페넬로페도 침묵한다. 수영장의 피는 씻겨 나가 버리고, 경찰은 이 섬에서 골치를 앓고 있는 이민자들의 짓이라고 치부하며 마무리된다. 이 영화의 진정한 파문은 살인이 아니라 '침묵'의 결과다. 

 

영화 <서스페리아> ⓒ 씨나몬(주)홈초이스

<서스페리아> 또한 파문의 세계를 다룬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르코스의 부활을 위해 마련된 지하실에서(무용과 결합된 이 장면은 그 자체라 카니발리즘적인 축제의 현장이기도 하다) 마르코스는 수지를 보호하려고 했던 블랑의 목에 피를 솟구치게 하며 죽여 버린다. 급기야 자신이 마녀 서스피로룸임을 각성한 수지는 마르코스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피의 파문은 지알로 장르의 관습 속에서 노골적으로 구현되며, 1970년대 베를린을 배경으로 역사성까지 끌어안고자 한다. 적군파를 둘러싼 1970년대를 묘사하는 데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거 스플래쉬>에서 은근히 다뤄졌던 역사와 현실의 파문을 보다 노골적으로 건드리면서 피의 파문을 통한 과거의 청산을 시도하고 있다.

<본즈 앤 올>의 피가 파문의 세계와 관련 맺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친구의 손가락을 무는 장면에서부터, 리가 슈퍼에서 마주친 독신남을 살해하고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나타나는 장면, 놀이동산에서 리가 유혹하는 남자를 옥수수밭으로 불러내어 살해하고 매런과 함께 뜯어먹는 장면, 설리가 낯선 집에서 죽어가는 여자를 아침 식사로 뜯어먹는 장면과 매런을 다시 찾아와 공격을 하다 심장을 먹히는 장면 등 이 작품은 도처에서 이터들이 벌이는 '피의 파문'을 보여준다. 이러한 피의 파문은 이터들의 식성이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소수자의 것임을 드러내면서, 무리를 지어 살 없는 존재들의 외로움을 대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매런은 피의 파문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규칙으로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리와 함께 하는 단란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이들의 소수성은 언제든지 새로운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 근원적 성격의 것이기도 하다.(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소수와 집단이 부딪혀 일어나는 파국은 자주 반복된다. 현재 한국의 정치는 이 사이를 중재하는 것(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다)이 아니라 편 가르기에 앞장서며 일방적인 힘의 논리를 과시한다.)

소수자 이터에게 피의 파문이 일어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체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리의 죽음 앞에서 911에 연락할 수 없는 매런은 평화로운 바깥을 향해 침묵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자신이 처한 현실과 존재성을 드러낼 수 없기에, 리의 피와 뼈를 먹어야 하는 상황은 지독한 외로움이고, 죽음을 향한 몸부림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피의 파문보다 더 근원적인 '뼈'의 고통이다.

 

뼈의 세계

<본즈 앤 올>에서 뼈와 관련된 장면은 매런과 리가 길을 가던 중 찾게 된 곳에서 두 남자를 만날 때 등장한다. 한 사람은 이터 제이크(jake)고, 다른 사람은 이터를 희망하며 이터를 흉내 내는 인간 브레드(brad)이다. 매런은 이 두 남자를 경계한다. 맥주를 나눠마시며 대화를 하던 이들은 '풀 본'의 경험이 있는지를 묻는다. '풀 본'은 살만이 아니라 뼈까지 씹어먹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들은 풀 본이 이터가 첫 경험하는 것에 비견될 만한 황홀경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게걸스럽게 식성을 과시하는 이터와 이터를 흉내 내는 남자는 탐욕스러운 이터의 본성을 대변한다. 이전에 알게 된 설리나 함께 하고 있는 리와는 다른 이들의 규칙은, 저마다의 규칙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규칙이 인간은 물론이고 이터 자체를 위협할 수 있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매런이 자신 이외의 이터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쉴 곳을 찾고 있을 때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남자를 통해서다. 8백 미터나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의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는 나이 든 남자가 바로 '설리'다. 그는 거리를 두고 경계하는 매런에게 자신은 동족(이터)을 먹지 않으며, 살아있는 인간을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설파한다. 설리의 초대로 방문한 집에는 나이 든 여자가 이층에 쓰러져 있었고, 설리는 그녀가 곧 죽을 거라는 냄새를 맡고 찾아왔다고 말한다. 다음 날 아침 매런이 깨어났을 때 설리는 그녀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다. 매런이 합세한다. 하지만 어떤 불안과 공포가 밀려온 탓인지 매런은 얼마 후 설리로 부터 도망을 친다.

다음에 만난 이터는 리다. 그의 규칙은 독신 남자를 선택하는 것이다. 매런과 함께 간 시골축제 현장에서 리는 게임장에서 일하는 한 남자를 유혹한다. 리는 그를 옥수수밭으로 유인하여 살해한다. 그런데 매런과 리가 남자의 차를 끌고 지갑에서 확인한 주소지로 찾아갔을 때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의 집으로 짐작되는 곳에는 여자와 아이가 있었다. 매런은 이 모습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낸다. 그제야 차 안을 찾아보자 가족사진이 나타난다. 리는 모르고 그랬다고 항변하지만, 매런은 리가 지키지 못한 규칙에 분통을 터트린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뼈'란 무엇일까? 먼저 피와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신체를 이루는 기초인 피와 뼈는 근육과 함께 신체의 형태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물리적 기초들이다. 그런데 피의 액체성은 몸전체를 흐르며 연결하고 재조직하는 관계적인 기능을 한다면, 뼈는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는 구조물에 해당한다. 아빠로부터 버려진, 이터로 살아가야 함을 자각해야 하는 매런 앞에 등장한 이터들은 저마다의 규칙을 보여준다. 그것은 가족과 혈연으로부터 멀어졌지만,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규칙들이다. 이러한 규칙이 없다면, 이터는 항상 괴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소한 인간 사회에서 어울리기 위해 이들은 살육을 최소화해야 하며, 그것은 지구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자 최소한의 윤리성을 갖고자 하는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이터에 따라 규칙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살육할 수 있는 권리로도 사용된다. 피가 자신을 둘러싼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면, 뼈는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규칙으로 번역된 'Rule'은, '원칙'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룰은 피를 버린 자들이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며, 이러한 원칙을 둘러싼 세계의 갈등이 매런의 삶에서 보여지는 성장 과정이다.

그렇다면 매런의 원칙은 무엇일까?

<본즈 앤 올>을 다룬 많은 글이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이 지점이다. 보호 시설에서 엄마를 만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엄마의 공격을 받는다. 황급히 요양원을 빠져나온 매런은 기다리던 리에게 화를 내며 "내 편 한 명만 있어도 세상이 달라졌을 텐데."라고 한탄한다. 그러자 리는 엄마에게도 나름의 원칙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리는 "You're wrong!"이라며 엄마에게는 세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음을 강조한다. "먹거나, 자살하거나, 네 엄마처럼 갇혀 살거나."

하지만 매런은 이 말을 듣고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엄마처럼 안 살거야." 이 장면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흔한 말 일지 모르겠지만, <본즈 앤 올>에서 매런이 자신의 원칙을 선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매런은 이터인 엄마처럼 스스로의 팔을 먹고 자발적으로 갇혀서 살지 않겠다는 결심, 가족들을 잡아먹을까 두려워하면서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드러낸다. "엄마처럼 안 살거야."

이를 위해서는 정리의 시간이 필요했다. 매런은 엄마를 만난 후 자신에게 돈을 맡겨둔 채 잠이 든 리를 차에 남겨 두고, 돈을 놓아둔 채 떠나버린다. 이후 매런은 자신을 추격하는 설리를 다시 만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자신의 결심을 다지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최소한 자신과 함께 하자는 설리의 청을 거절함으로써 그녀가 자립할 수 있는 가능성과 삶의 원칙을 정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매런은 리에게 스스로 돌아온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나온 리의 동생을 만나 그가 어디 있는지를 묻고, 마을의 외곽에서 홀로 지내는 리를 찾아 함께 살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엄마는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 자신의 팔을 삼키고 자발적으로 보호시설에 유폐되었지만, 매런은 리와 함께 대학가 근처 서점에서 일자리를 얻고 일상의 삶을 살아간다. 짧은 장면들이지만 그 모습은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심지어 행복해 보인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의 집에 설리가 찾아온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매런을 쫓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이 비출 때 설리는 칼을 들고 나타나 매런을 겁박하고 위협한다. 이 폭력적인 세계의 충격은 이터들이 식인을 하는 장면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 어떤 폭력보다 강렬하다. 왜냐하면 매런이 꾸려낸 원칙들이 깨어지는 파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매런을 조여 오는 설리의 뒤로 리가 다가와 비닐봉지를 뒤집어 씌우고 압박한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발버둥 치는 설리가 몸을 휘두른다. 매런은 비닐봉지를 찢어버리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설리를 죽여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기 위해 설리의 심장을 꺼내어 든다.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하는 설리의 최후는 강렬하고 끔찍하다. 이터들에게 원칙이라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살기 위해 인간을 먹어야 하는 존재들의 이기심은 언제든지 자신의 원칙을 배반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설리는 매런에게 자신은 살인하지 않고, 죽은 자를 먹는다고 했지만, 이 또한 거짓이었다. 죽은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지니고 다닌다는 머리카락 밧줄에는 리의 여동생의 것이 엮여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원칙이 깨어지는 것은 약과다. 설리가 휘두르는 칼에 폐를 찔린 탓에 리는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매런은 이 상황을 어찌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911을 불러 피가 난무하는 현장을 보여줄 수도, 죽어가는 리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할 수도 없다. 리는 매런을 응시하며 자신을 먹어달라고 요청한다. 매런은 끝내 거부하기가 어렵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 가족(사랑하는 이를)을 먹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며 살지 않겠다고 했던 매런은, 끝내 사랑의 대상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녀가 세운 뼈의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원칙'이며, 사랑하는 이의 뼈까지 먹는 것이다.

피의 세계에서 뼈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더 많은 타자들, 더 많은 폭력들과 관계를 맺으며 나아감을 의미하고, '그 세계에서 자신의 뼈와 사랑하는 이의 뼈를 지킬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순간 매런은 사랑하는 이의 뼈를 먹음으로써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다는 역설을 받아들인다. 매런이 리의 몸을 먹는 장면은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매런과 리가 길을 가던 중 어딘가에서 들판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눴던 장면의 인상으로 전환된다. 이때 리는 그토록 금기시하던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매런에게 들려준다. 매런의 "나에게는 말할 수 있어"라는 말에 격려를 받아, 어떻게 아빠를 죽였는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매런이 엄마를 만난 이후의 일이고, 다시 리를 찾아와 만난 이후의 모습이다.

두 사람은 각자의 엄마와 아빠를 보내준 후(일종의 교환이기도 하다), 이터의 연인으로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피와 뼈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이터의 행복은 영원할 수가 없다. 리는 죽음을 맞이하고, 리의 몸을 먹으며 매런의 기억 속에서 떠올려지는 것은 두 이터가 언덕 위에 앉아 서로를 받아들이고 확인했던 그 순간이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고 올리버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며 서로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존재의 교환은 이별의 고통 속에서, 뼛속 깊은 헤어짐의 시간으로 찾아온다. <본즈 앤 올>은 여전히 서로의 존재를 기억하는(먹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름을 불러주거나 기억을 재생하거나 뼈를 씹어 먹는다. 그것은 사랑의 충만함인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끝으로, 이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만나 '풀 본'의 경험을 알려줬던 이터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처음으로 식인을 하는 것만큼의 강렬한 경험이다. 매런은 리의 뼈를 먹음으로써 첫 식인에 이어, 또다시 어떤 황홀경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 황홀경은 사랑하는 이를 먹어야 하는 고통으로 인해, 가장 역설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이터의 특성으로도, 리와의 사랑으로도 매런은 리를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터라는 캐릭터를 통해 루카 구아다니노가 끝내 도달한 지점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랑 혹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피를 벗어나 뼈를 세우고 먹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근원적 체험이다.

 

※ 추신.

1.

이현동 기자의 「'본즈 앤 올' 자연에서 뼈와 모든 것을 발굴하기」에서 구아다니노 영화의 자연에 대한 의존적 이미지를 설명하는 대목들에 공감하면서도 보충이 필요하다 여겨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자연에 대한 매혹'은 구아다니노 영화 전반에서 드러난다. <아이 엠 러브>의 산레모 장면은 주인공 엠마와 안토니오가 도시와 단절된 채 서로의 욕망에 충실한 순간을 보여준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버스를 타고 여행을 시작한 엘리오와 올리버는 자연 속에서 서로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자연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런데 <서스페리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영화에는 자연이 등장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세계와 단절되어 드러나는 것은 무용단의 지하 세계다. 카니발적인 축제, 마르코스의 부활과 처단은 마녀들의 욕망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향연의 세계다. 그런 점에서 자연은 두 인물의 욕망을 해방하는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인간들의 시선으로부터 단절된 장소라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현동 기자의 글에서 주요하게 다뤄지는 마지막 장면을 읽어보자. "자연은 인간과의 상호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이면서 그 간격과 공백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사유는 가동되어야 한다. 그의 영화에서 채취되는 풍광은 영원히 공존할 인류의 형상이면서 원초적으로 탐닉하는 남녀 관계를 포함한 모든 연대가 자연으로부터 확립되고 있음을 정의한다. <본즈 앤 올>을 한정해서 본다면, 마지막 장면이 그 사례일 것이다. 매런과 리가 왜 자연이라 프레임 정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가. 지속되는 푸티지에서 현대적 질감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주체성이 자연적이라는 것을 이미지를 통해 호소하려는 것은 아닌가."라고 언급한 후 바로 "이것은 또한 '언어'와도 관련이 있다."며 언어의 문제로 넘어가 버린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연에 대한 경도가 있다는 사실에는 동의가 되지만, "그의 영화에서 채취되는 풍광은 영원히 공존할 인류의 형상이면서 원초적으로 탐닉하는 남녀 관계를 포함한 모든 연대가 자연으로부터 확립되고 있음을 정의한다."는 견해는 자연에 대해 너무 큰 의미를 부과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자연이 자주 등장한다고 해도, 이곳이 영원히 공존할 인류의 형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다. 오히려 자연의 일차적 기능은 구별과 공존에 있다. <서스페리아>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무용단의 지하실은 분명 자연이 아니다. 하지만 자연과 마찬가지로 단절된 공간이 인물의 정체성을 해방시키거나 욕망을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자연이나 다른 공간―푸코라면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을 법한―은 기존의 억압된 시선으로부터 인물들을 일정하게 해방시키도록 돕는다. 하지만 그 자연이 영원히 공존할 인류의 형상으로까지 묘사되지는 않는다. 일시적인 해방의 차원으로 구별될 다름이다.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본즈 앤 올>의 마지막 장면에서 리의 뼈를 먹던 매런의 모습이 영화 후반에 등장했던 언덕을 내려다보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도 자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장면은 리와 매런이 대화를 나누는 대목인데 리는 매런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던, 억압되어 있던 아빠에 대한 살인을 떠올린다. 이 장면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상처의 공유, 사랑의 공유가 이 순간에 이뤄진다. 리의 몸을 먹는 순간에 이 장면이 삽입된 것은 두 사람의 의지가 자연으로 향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완전히 나눈 순간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이러한 것을 가능케 하는 장소로서 활용된다. 그런 점에서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락방이나 지하실이라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아다니노의 장면 전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예시가 있다. <본즈 앤 올>의 마지막 씬에서 중요한 전환은 두 사람이 언덕에서 광야를 내려다보는 장면만이 아니라 매런의 집 안에서 피가 튀고 온갖 비명소리가 난무할 때 전환되는 쇼트에 있다. 카메라는 셜리가 등장하기 이전에 보여주었던 집 바깥의 풍경으로 갑작스럽게 전환된다.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고 바깥은 고요하다. 그것을 잠시 보여준 후 다시 집 안으로 장면이 전환되면 끔찍한 소리들과 집 안 곳곳에 뿌려진 피들이 보인다.

그것은 같은 시간에 속해 있지만, 전혀 다른 현실을 살고 있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형태다. 이터 매런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다.(우리는 이를 소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공간의 전환은 일차적으로 안과 밖이, 마을과 자연이 다름을 대비시킨다. 세계 안에 또 다른 현실이 공존하고 있음을 직시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대비 속에서 자연은 영구하지 않다. 일시적으로 달아나는 가능성의 공간일 따름이다. 산레모가 그렇고, 엘리오와 올리버의 여행지가 그러하다.

이 자연은 영원성을 지향하기보다는 일시적이다. 왜냐하면 구아다니노의 영화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적 외침이 아니라, '도시 속에서 어떻게 거주할 것인가'의 문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본즈 앤 올>의 마지막 장면이 다루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도시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공존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 해졌을 때, 자연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찾아와 상실감과 공허함을 채워준다. 그러한 대비 속에서 자연은 다른 가능성을 꿈꾸는 일시적 차원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2.

<본즈 앤 올>에는 흥미로운 캐스팅이 있다. 리와 매런에게 다가온 이터와 이터 흉내를 내는 제이크와 브레드 남성 커플이다. 제이크 역에는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 나왔던 엘리오의 아버지이자 펄만 교수로 나왔던 '마이클 스툴바그'가 맡았고(아버지의 부드러운 인상은 온데간데 없이 능글맞은 탐식가 이터로 나온다), 그를 따라다니는 이터 흉내를 내는 인간 브레드 역에는 '데이비드 고드 그린'이 맡았다. 두 남자의 이질적인 모습에 놀라는 것은 당연한다. 마이클 스툴바그도 그렇지만, 최근 제이슨 블룸하우스와 함께 하는 작업하며 <할로윈> 속편 시리즈를 통해 공포영화 감독으로 알 수도 있는 '데이비드 고드 그린'은 주목할 만한 미국의 감독 중 하나다.

특히, 2013년에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프린스 아발란체>(2013)의 데이비드 고드 그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본즈 앤 올>에 제이크와 함께 나타난 두 남자들처럼, <프린스 아발란체> 역시 두 남자가 산길을 걸으며 일어나는 상황만으로 영화를 이끌고 간다. 같은 해에 제작된 <조>(2013) 역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두 남자의 이야기로 계급과 정체성의 문제를 이끌어 낸다. 이 시기의 데이비드 고든 그린은 미국식 농담으로 무장한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미국의 새로운 작가였다.

 

3.

영화 <본즈 앤 올> 강연 현장 ⓒ 더숲 아트시네마

이 글의 기초는 12월 17일 '더숲 아트시네마'에서 열린 <본즈 앤 올>의 강연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국내에 개봉된 외화 중 최고로 꼽을 만한 작품은 <본즈 앤 올>이다. 구아다니노의 필모 전체를 통해서도 현재까지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글 이상용 영화평론가, poema@ccoart.com]

 

ⓒ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본즈 앤 올
BONES AND ALL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Luca Guadagnino

 

출연
티모시 샬라메
Timothee Chalamet
테일러 러셀Taylor Russell
마크 라이런스Mark Rylance
안드레 홀랜드Andre Holland
클로에 세비니Chloe Sevigny
제시카 하퍼Jessica Harper
마이클 스털버그Michael Stuhlbarg
데이빗 고든 그린David Gordon Green

 

배급|수입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작연도 2022
상영시간 130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22.11.30

이상용
이상용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공저로 『씨네쌍떼』 『30금 쌍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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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2023-01-01 13:03:39
안녕하세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코아르에 다양한 글이 실리기도 하고, 더 숲의 프로그램으로만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강연 내용과 글이 많이 다를 때도 있습니다. 공식적인 연계나 연재는 아닙니다. 상호 느슨한 연대로 이해하시면 될 듯 합니다.

ㄱㄱㄱ 2022-12-31 17:19:02
더숲에 종종 가면서 평론가님 강연을 놓칠 때가 있어 아쉽기도 했는데 여기 사이트랑 연게가 되었다는 걸 오늘 알았네요. 개인적으로 놓친 강연들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근데 이건 계속 진행되는 걸까요? 연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