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성정(性情)이 그래서인지 엔딩 크레딧을 뒤로하고 봉합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작품을 만나는 기쁨이 유독 큰 해였다.
동결됐던 극장과 영화제가 붐비면서 기다렸던 작품들을 만나 반가우면서도, 호황 아닌 호황으로 VOD 서비스로 직행하거나 2주간의 상영 일정을 애증 어린 심정으로 보낸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영화사가 남긴 흔적을 따르고 기원으로 귀향해보려는 영화와 영화인들의 여정이 한해를 기념하지 않았던가. 좋은 영화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다소 뜬구름같이 들리는 말에 진심을 좀 더 묵직하게 실어 보내며, 올해 미처 만나지 못한 영화들과 곧 서둘러 만나자는 기약을 덧붙인다.
*가나다순
1.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The Apartment with Two Women> 김세인KIM Sein|2021
'신인의 발견'이라는 말은 진부하다. 김세인 앞에선 기존에 사용하던 단어의 의미를 재정비하게 된다. 섬세하고 난폭하게 모녀 사이를 찢어놓으면서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관계의 정립에서 감독의 확신이 묻어난다. 거기다 감정의 골이 겹겹이 지층을 이뤘는데도 미지의 얕은 과거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러닝타임 안에서 오롯하고 집요하게 설득력을 부여한다. 근래 독립영화에서 본 적 없던 배우들의 신선한 호흡만으로도 관람할 이유는 충분하다.
2. <벨파스트Belfast> 케네스 브래너Kenneth Branagh|2021
분쟁과 계급, 이념 갈등이 만연한 상실의 시대를 유년기의 여리고 천진한 시선으로, 때로는 저릿하게 때로는 꿋꿋한 투지를 담아 바라본다. 벽과 창틀, 골목과 건축물로 분리된 인물들을 얄궂게 봉합하는 구조적 배치가 뛰어나다. 스크린을 그야말로 도화지처럼 다루는데,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얼굴들이 삭막한 흑백 스크린을 붙들면서 늙고 빈궁하던 시대를 향해 그리움을 담아 작별을 고한다.
3. <실종Missing> 가타야마 신조Katayama Shinzo | 2021
『라쇼몽』의 골격을 교묘하게 비튼, 하나의 사건에 연루된 세 인물에게 교란당하는 희열을 준다. 인간의 육체를 다룰 때 타협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하면서도 '악은 악, 선은 필멸의 타락으로'의 규칙을 고수하는 흔치 않은 스릴러물. 미장센 뿐 아니라 윤리성에 대한 물음이 극단을 넘어서는데, 선혈 짙은 파멸의 농도를 희석하는 눈물 한 방울이 사멸하는 기억의 매듭을 움켜쥘 때의 불협화음은 극 내부에서 축적된 충돌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정념의 힘을 도전적으로 각인시킨다.
4,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다니엘 콴Daniel Kwan, 다니엘 쉐이너트Daniel Scheinert|2022
'다정한 히어로'의 탄생을 지켜보는 서스펜스적 유희뿐 아니라 이상한 방식으로 납득하게 되는 독보적으로 독창적인 영화. 혼잡하게 뒤섞인 세계 속에서 우스꽝스럽게 당혹을 일으키다가도 마음속 가장 내밀한 구석을 건드린다. 별 볼 일 없는 삶에서 사소한 특별함을 귀하게 톺아본다는, 한편으론 진부한 설정이 이토록 낯설고 진중한 메시지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5.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 | 2021
세 단락으로 구성된 영화는 타인을 대하듯 각 세계를 결코 침범하지 않으면서, 또한 한 인간의 자아가 부딪히고 맞물리듯 감정의 음역대를 폭넓게 진동한다. '우연'이나 '상상'처럼 공상적인 사건을 연달아 꿰어 놓았지만 어느 때보다 환상과는 멀어지고, '앎의 불가능성'을 통해 부수적이고 잉여적인 감정에 입체적인 그림자를 입히면서 집합적으로 체험하게까지 만든다.
6. <원 세컨드One Second> 장이머우Zhang Yimou|2020
거대한 정적, 느릿하게 나부끼는 필름, 천과 광장 사이를 부유하는 먼지 입자, 스크린 빛으로 밝힌 얼굴들. 그것만으로도 '기술이 변해도 감정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을 전하는 데 부족함 없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궁핍하고 비통한 시대의 정조가 장이머우의 절제된 연마술과 통해 헌신적으로 그려진다. '1초의 영원'과 황무지 너머로 사라진 필름 조각은 뭐랄까, 내내 가슴 졸이다가 어딘가 호젓한 마음을 안고 극장에서 귀가할 때의 도취를, 잃었지만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을 더듬는 인물들의 심정 위로 상연시켜볼 만하다.
7. <유코의 평형추A Balance> 유지로 하루모토Yujiro Harumoto|2020
다큐멘터리 감독인 주인공과 하루모토 유지로가 교차로 메가폰을 잡으면서 죽음과 부조리와 인간을 균형적인 시선으로 담는다. 인간성이 극의 기본 토대이지만 그 간극 사이 작용-반작용, 혹은 힘의 평형이 구조적으로도 명확히 축조된 작품. '카메라=인간의 눈'이란 관습에 빗대면서도 추월을 허용하지 않고 '카메라를 든 인간', '인간이 된 카메라'는 독립된 '인간' 또는 '카메라'가 될 수 없음을 서늘하고 서글프게 전한다.
8. <큐어Cure> 구로사와 기요시Kurosawa Kiyoshi|1997
몸에 난 X자 외상이 살인사건의 X좌표로 이어지다 내상의 봉인으로 느릿하고 헐겁게 귀결되는데 어느 때보다 시종 음울하고 잔혹하게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헤집는다. (최면에서 깬 것이 아니라) 망각하고픈 현실에서 깨어난 가수면 상태로의 귀환은 인간은 어째서 이리도 상처 확인의 매혹에 휩쓸리고 마는가, 따위의 열린 물음으로 숨을 턱 막히게 한다. 1997년에서 2022년(혹은 그보다 더 넓은 시대)을 관통하는 세기병의 씁쓸한 역설을 그린 인간의 심연 해부학.
9. <탑WALK UP> 홍상수|2021
막연히 흐르는 시간을 붙잡고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벌어지게 하면서 철학, 미학, 건축학, 심지어 생물학적으로도 역동적인 물음을 생성한다. 몽중과 현존을 오가는 정물(still life)의 움직임과 시공간을 부조하는 틀로서 프레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데, 내외부의 구분을 다시금 무산하고 있어서, 하나의 세계에 집요하게 침잠할 수도, 또 다른 세계를 소환해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준다. 올해 단 하나의 초상을 뽑으라면 영화의 마지막, 권태와 정열이 뒤섞인 그 남자(들)의 얼굴.
10.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박찬욱 | 2021
박찬욱이 정통 로맨스를 한다기에 누군가는 우스개로 의심했지만, 모조리 유머로 남았다. 인물들의 관계는 부지런하게 뒤틀리고 비극적 구원은 낭만적일지라도 이보다 더 영리한 수법으로 기밀을 유지할 수는 없다. 영화의 문장들은 아득한 메아리를 닮으면서, 또한 정교하게 경련을 부추겨서 절로 곱씹지 않고서는 빠져나올 길을 안내받지 못한다. 추락과 상승을 격정적으로 오가는 영화는 많지만, 이토록 치밀하게 상실감에 빠트리고 회고를 진득하게 유발하는 영화는 드물다.
[글 변해빈, limbohb@ccoart.com]